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박준 지음 / 난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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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참이나 긴 제목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나는 각종 잡동사니와 함께 어울리지도 않게 꽂혀있던 하드커버의 양장본의 산문집을 타인의 방에서 접했다. 원하지 않든 낯선 상황으로 인한 선택권은 작가의 글과 맞닿아 있어 마치 이미 읽어봄직한 하지만 전혀 그 깊이는 가늠하지 못할 스쳐지나간 타인의 흔적 같았다. 이런 우연치 않은 작가의 글과의 만남은 떠도는 잡념마냥 다시는 기억나지 않을 꿈처럼 스스럼없이 다가왔다. 나는 시인이라는 이유로 그들이 간결한 몇 문장속 정제된 단어 조합을 통해 겉멋으로 스스로를 드높인다는 오해와 선입견으로 문학을 멀리한 자신의 오만함에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나는 타인의 인생의 무게를 측량하려 들었으며, 이미 자신의 기준에 따른 정의로 판단한 추정치는 어떠한 의미도 결론도 없이 증발해버린 실온속의 알코올 같이 가볍기 짝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조금도 자신의 부끄러움을 화려한 장식으로 덮으며 현실에 드러내기를 마다하지 않았으며, 마치 호통치는 어떠한 큰소리도 없이 내 마음을 위엄있게 하지만 단호하게 나무랬다. 작가가 써내려간 글은 늘상 누군가의 머릿속을 부유하고 있지만, 그 찰나를 잡아 끌어 문자로 환원하는 작가의 독특한 재능이 없었다면 이해되지 않았을 철학이었다. 다만 어떤이에게는 작가의 행위가 너무나 당연하고 쉬운 연습으로 치부되었을 뿐이었다. 나 또한 누군가의 사상을 답습하며 으레 내 생각이 대중이 생각하는 그것과 일치하며, 하지만 동시에 나는 그들보다 우월하다는 일순간의 반짝임만을 소원했다. 아스라이 스며들어 아무렇지도 않게 소멸하는 삶이 시간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작가는 그렇게 스스럼없이 다그치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없어졌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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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죽음이 만나자고 했다 - 죽기로 결심한 의사가 간절히 살리고 싶었던 순간들
정상훈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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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을 마지막으로 책을 덮은 나는 직감했다. 나는 아마도 작가, 그가 결국 전달하고자 했던 감정의 아주 사소한 어느 한 조각도 확실하게 파악하지 못했을 것임을. 프롤로그를 통해 이야기의 화두를 던지는 작가는 아들에게 보내는 서신이라는 형식을 빗대어, 개인적인 감정을 통해 죽음을 다루고자 했던 이 책의 무게가 결코 쉽게 다뤄질 것이 아님을 서두에 앞서 경고하는 듯했다. 나는 증상 소견서 혹은 처방의약품이나 나열하며 객관적인 상태만을 적어 내려갈 것 같던 의사가 과연 책 한 권으로 무얼 말하려고 드는지 호기심이 일었다. 나에게는 단순히 케이블 채널을 돌려보던 중 프로그램과 프로그램 사이를 정숙하게 장식하던 광고가 인상적인 단체이었을 뿐인데, 작가는 그 대상인 ‘국경 없는 의사회’에 지원하고 세 곳의 파견지에서 겪었던 일들을 이렇게 덤덤하게 글로 풀어내었다. 
글을 업으로 삼지 않는 사람의 글이기에 어떤 꾸밈이나 과대한 수식이 제외된 탓일까. 타인들의 화려한 문장과 기교 넘치는 재능의 활자에 너무 익숙해온 탓인지 나는 다소 건조하게 풀어나간 작가의 이야기에 다소 당혹감이 일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글이 흥미 없다거나, 기술적으로 부족하다는 말은 아니다; 내가 감히 그럴 평가를 내릴 수도 없다) 이는 으레 짐작했던 ‘해외구호활동가’가 ‘개발도상국’이라는 서로 상호교환 가능할 법한 적절한 두 명제가 서로 만나 결합되어 발생할 무언가의 뿌듯함을 전혀 파악할 수 없었다는 이유에 그 원인이 있다. 분명 그들은 서로 조화롭게 얽혀 모두가 기대할 콘텐츠의 그림을 그려내야 했다. 하지만 고통이라는 환경에 빠진 인물들은 희망이 보이는 찰나도 보이지 않고 이내 생을 마감하거나 사라진다. 활동가들은 가능성이 보이는 듯한 해결책으로 문제를 개선해 나가려 하지만 결국 환자의 일방적인 행동으로 무시될 뿐이고 어찌 된 영문인지 긍정적인 결과는 손꼽을 만큼 에피소드가 없다. 작가가 의사로서 어떤 영향력도 주지 못하고 단순히 무기력하게 그려진 모습은 대중이 원하는 바로 그 대상이 아니었다. 이렇게 예상을 벗어나는 전개 탓에 일어난 나의 반응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다. 자선사업과 의사, 그리고 심지어 고통받는 질병이 모인 정의들은 늘 미디어에서 아름답고 거칠지만 희망의 아이콘으로 신성시 되어 온 부분이 있으며, 그들의 분류방식에 나는 조금의 의심도 가지지 않았다. 어찌 보면 해외구호활동은 나와는 철저하게 다른 먼 나라의 약간의 슬픈 동화처럼 들렸고, 그들이 위치한 나라와 한국의 거리만큼이나 정말인지 형언할 수 없는 거리감으로 철저하게 미화되고 분할되어야 했다. 덕분에 안전망 속에서의 나는 객관적으로 그들을 평가할 수 있으며, 이성적인 상황파악이라는 자만의 착각 안에서 누군가가 기획한 방향대로 익숙한 경험과 결론으로 스스로를 다독일 수 있을 뿐이었다. 작가는 스스로의 구호활동을 슈바이처가 되고 싶었던가 (아이러니하게도 도서 마케팅은 이 부제로 작가를 수식하였다), 어릴 때 꿈이었다던가 하는 이유로 뻔하지만 누구나 선망했을법한 원인으로 자신의 활동을 평가하지 않았다. 오히려 우울증으로 인한 가족사를 드러내며 딱히 누구도 듣고 싶어 하지도 않은 터부를 대중에게 내보이며 자신을 바라볼 뿐이었다. 작가가 의사의 입을 빌려 대중들이 익숙하게 여겨온 사상화된 사고를 꺼내지 않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시에라리온의 에볼라가 그러했듯 질병과 소외된 사람들은 그 자체로 정말인지 현실로 존재함을. 

‘2014년 에볼라가 창궐했을 때, 사람들은 서아프리카인들의 매장 풍습을 비난했다. 이곳에서는 매장 전에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망자를 물로 씻기고 입을 맞추었다. 하지만 이 풍습은 수천 년 동안 평화롭게 내려왔고, 에볼라 유행도 그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문제는 돌연변이였다. 에볼라 바이러스가 침팬지와 같은 중간숙주를 만나 치명적인 돌연변이를 일으킨 것이다. 그런데 국가와 다국적기업은 초원과 정글을 무차별 개발했고, 배고픈 아프리카인과 동물은 정글 깊숙이 쫓겨 들어갔다. 인간이 생태계를 교란하자 에볼라 바이러스는 유인원의 몸 안에서 돌연변이를 일으켰다. 독성이 강해진 바이러스는 이제 인간을 공격했다. 

죽음을 직면하면서 삶을 깨달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나약함과 어리석음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살아가야 하는 이들은 모두 죽음을 앞두고 남은 여생을 기약하는 오늘 하루도 보내고 있는데, 우리는 과연 무엇에 의의를 두며 매일의 시간을 보내는가에 대한 의문. 여기까지 도달했다면 이건 단순히 해외구조활동을 엮은 산문이라고 볼 수가 없었다. 결국 누구나 껴안고 있지만 직면하기를 거부하고 나중에 해결할 일로 우선순위 속에 밀려나 잊힌 각자 자신의 삶에 대해 고민을 할 수밖에 없는 탓이다. 
언제나 그렇듯 그는 또 다른 아이콘이 되며 대중을 위한 무언가로 변모할지도 모른다. 대중이 혹은 누군가가 원하는 그림의 한 조각으로 알맞게 재단되며 소비되지 않기를. 이번 책을 통해 나는 어떤 인상은 분명 받았고 때문에 그가 원하고자 했던 가치가 바래지 않기를 바라며 뒤에서나마 소박하게 응원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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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닐봉지는 안 주셔도 돼요 - 소설가의 제로 웨이스트 실천기
최정화 지음 / 열린책들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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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머릿속으로는 알고 있는데, 실천에 이르는 행동까지 옮기기가 쉽지 않다. 작가의 말처럼 편안함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세계에 너무 익숙한 나머지 불편한 삶을 일부러 선택하는 게 말처럼 쉽지 않은 것이다. 아니 오히려 이상하다고 해야 할까? 쉽게 쓰고 버리는 간편함이 있는데 왜? 구태여 돌아가는 어려운 길을 누가 선택해 마다하지 않을까? 이에 더하여 저자는 주장한다. 행복과 풍요는 당연하게 공존하는 사상인줄 알았는데, 실상 풍족함과 선택의 다양성은 현재상태의 부족함을 일깨워 주는 트리거가 되어 행복을 가장한 연극처럼 상연될 뿐이라고. 이게 단순히 “비닐봉지만 안 받겠다”는 이 책의 타이틀과 제로 웨이스트 활동과 무슨 관계일까 하겠지만, 흥미롭게도 이 책은 작은 사소한 출발점이 삶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큰 전환점으로 전환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분명하게 일회용과 플라스틱으로 대변되는 사회는 무언가 잘못된 방향으로 작동되고 있음을 우리는 간접적으로나마 짐작했다. 쉽고 빠르며 값싼 대가가 결코 가볍지 않음을 환경의 급작스런 변화와 자연재해를 통해 각종 문제점을 청구받고 있는 지금에 이르서야 추측이 현실이 됨을 조금씩이나마 깨닫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작가처럼 행동의 연장선을 채식을 추구하거나, 작가라는 이점을 활용해 글을 쓰며 타인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파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대단한 무언가를 하지 않더라도 각자의 삶 안에서 변화는 시작될 수 있고 영향력은 큰 결과를 일으킬 수 있다고 신뢰했을 때, 우리는 그제야 무언가를 변화시킬 자세를 갖춘 것은 아닐까. 
다만, 본 책에 서술된 작가의 행동이 오직 바른 것이며 옳다고 타인을 재단하는 불편한 잣대는 금물이다. 중간중간 실패의 과정을 통해 작가가 환경을 생각한다고 행동으로 취했던 것들이 오히려 사회의 규칙을 침범하며, 단순 흑백논리로 단정 지어 판단했던 오류들이 그 증거이다. 결코 타인을 평가하는 우리만의 영향력 있는 행동범주로 한정해 그들과 나를 구분 짓는 특별한 지위처럼 비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작가의 글에서 나는 동의하는 부분도, 마냥 긍정만 할 수 없는 의견도 있어 사려 깊게 다시금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된다. 타인이 나와 같지 않음은 너무나도 저명하며 나의 철학이 내게 올바르듯 타인의 행동거지를 나로 반추하여 고치려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작가가 일례로 소개한 업사이클은 다소 적절해 보이지는 않는 공상처럼 보였다. 단순히 남은 페트병이나 빨대를 조합해 인테리어 삼는 것은 애초의 무엇이 목적이었는지 오히려 반문하게 된다. 심미적인 감성은 그렇게 강요한다고 만족될 영역은 아니다. 오히려 비워진 공간에 쓰레기로 장식된 불편함만 일으킬 뿐이다. 원론으로 돌아가면 불필요한 자원소비를 줄여 그대로의 추구에 있지 나의 환경을 복잡하게 장식하려 함은 아니기 때문이다. 
친환경소비든 재활용소비든 소비는 소비이고, 어떤 관점에 서있든 간에 소비로 무언가를 파괴함은 기업들의 수익개선을 위한 투자증대의 논리 가운데 간과되기 일쑤이다. 그들의 계획은 매우 논리적이며 ‘그린워싱’을 교묘하게 꾸며 초록색으로 뒤덮은 매력적인 새로운 마케팅 영역으로 친환경을 가장한 시장영역만 늘렸을 뿐이다. 이러하듯 논의의 대상은 너무 많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단순히 책 한 권으로 끝낼 잠깐의 주위환기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관심을 두며, 끊임없이 경계하며 다시 볼 자세가 요구됨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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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플하게 산다 심플하게 산다 1
도미니크 로로 지음, 김성희 옮김 / 바다출판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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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명료하게 ‘심플하게 살아가는 방법이 무엇’인지에 관해 다룬 책이다. 우선 작가의 이력을 살펴보면 그 경험이 참 독특한데, 프랑스인으로 1970년대 말부터는 동양의 철학에 큰 관심을 두고 일본에서 지내오고 있다고 한다. 햇수를 대략적으로나마 계산하더라도 이미 내 나이를 훌쩍 넘어서는 기간 동안 먼 타국에서 살아왔다는 건 그냥 작가가 일본인이라는 얘기인 듯했다. 저자는 타국에서 지내온 자신의 경험을 통해 물건, 몸, 마음의 세 가지의 큰 가지로 삶을 어떻게 정리하고, 자아를 돌보는지에 대해 얘기해 보고자 한다. 토막토막 챕터로 끊어 놓아 어떤 면을 펼쳐 읽든 사실 앞뒤 내용과 무관하게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선사한다는 게 이 책의 특징이라면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관심을 두고 실천을 하기 위해 노력하던 ‘미니멀리즘’의 연장선에서 자연스레 이 책을 읽게 되었다. 그것은 단순히 물건을 비우고 버리는 물리적인 형태에서 벗어나, 그 기저에는 어떤 마음가짐을 바탕을 두고 ‘미니멀’을 향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책은 각자의 독자들이 껴안고 있는 질문에 답을 제시하려고 작성된 글도 아니다) 결국 모든 것은 자신 안으로 향해 있고, 외부를 대하는 스스로의 태도와 생각에 모든 것이 달려있다는 아주 단순하고 어디선가 들어 봤음직한 뻔하고 투박한 내용이 전부이다. 근데, 작가의 얘기는 그렇게도 실천하기 어렵도 뜬구름 없는 허황된 사상처럼 치부될 뿐이지만, 원칙은 그대로 남아 이렇게 한 권으로 집약된다. 따르고 행동할지는 정말인지 독자 개개인에 달려있다. 이 글을 읽고 감명을 받아 잠시나마 생각에 잠기게 될 수도,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잊어버리고 나의 원래 탄성대로 돌아갈 수도 있겠지만 어떤 것도 긍정, 부정의 기준 아래 놓여 재단될 수도 없다. 좋은 게 좋은 거고 일어난 게 일어난 거라는 단순하고도 명료한 그 상태. 그러면 다시 돌아가 질문을 던지게 된다 “사람은 왜 살아가는가?” 작가는 왜 사는지 보다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대해 본질을 변경하라 한다. ‘어떻게’에 초점을 변경하며 ‘나’라는 주체가 행동하고 실천할 지금의 찰나에 관심을 돌리기를 바라는 것이다. 
소비를 조장하고 과시를 내세우고, 온라인상의 허망한 행복을 추구하는 세계는 주변에 가득하고 쉽사리 흘려들어가 누구든 동질화하게 만들 고행을 선사했다. 휩쓸리지 않는 자아를 갖는 게 결코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도 나는 결코 작가가 제시하는 단단한 나를 찾아 나서기를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 생각했다. 올바른 자세를 가지고 매일의 건강을 돌보며, 주변의 얘기에 귀 기울이고, 좋은 식생활과 매일을 감사히 살고, 인생의 순간이 오르내리막이 있음을 인지하는 것. 가장 쉽고 가장 어려운 당면과제가 분명하게 닥쳐있고, 결코 생이 끝나는 순간까지 멈추지 않음을 알고 있다. 걱정에 앞서 어떤 자세로 태도를 변화시킬지 큰 물음에 이제 답할 때를 인식하게 돕는 한 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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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좁아도 홀가분하게 산다 - 작은 공간, 넉넉한 삶
가토 교코 지음, 은영미 옮김 / 나라원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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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간다는 것은 말처럼 간단한 문장으로 정리될 수 없다. 하지만 생각하기에 따라 그것은 쉽고 어려움을 떠나 스스로가 관리하고 통제할 수 있는 무언가는 될 수 있다. 새하얀 벽과 바닥이 선명하게 드러난 공간. ‘미니멀리즘’ 하면 대중들이 쉽게 머릿속에 떠오르게 되는 이미지가 있다. 어떻게 저렇게 살지? 라기보다 이상적인 공간의 한 프레임이 되어 오히려 성스러운 경지에 이른 허황된 그런 이미지. 결론은 쉽다. 그득그득 기업들의 마케팅과 누군가의 소셜미디어에 의해 강요된 물건들을 한쪽으로 밀어내 버리면 누구든 빈 공간은 차지할 수 있다. 다만 그게 또 어떤 강요와 수동적인 사상 주입으로 인한 행동의 결과이면 결론이 간략해진다고 해서 유지하고 영위할 수 있는 무언가는 결코 될 수 없다. 
이 책은 ‘미니멀리즘’을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각각의 가정들이 그들 나름의 원칙을 통해 공간을 구성하고 살아가고 있는지 아주 작은 단면을 제시할 뿐이다. 이 책의 어느 부분에도 ‘미니멀리즘’을 강조하고 있지도 않다. (소개된 가정들이 아무리 깔끔하고 정돈된 모양을 보여 준다들 전혀 미니멀해 보이지도 않다) 가장 인상적인 공통된 화제는 넓은 공간을 목표로 삼지 않고 대중들이 선호하는 화려한 이미지를 우선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그들은 좋은 입지와 대중교통과 같은 지역적인 선택을 우선으로 부득이하게 좁은 공간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결론을 내렸다. 발상의 전환은 어찌 보면 그동안 대중들이 너무 안일한 생각에 갇혀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항상 식구가 늘고 아이가 생기면 으레 넓은 집과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물건이 자연스레 늘고 사람이 늘어난다는데 이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 자체가 엄청 불순한 생각인 것으로 치부되기 일쑤였으니까. 
언제부터 그렇게 물건을 소유하고 늘리며 편리를 추구한다는 이명하에 가득한 기물들을 껴안고 살아온 것일까. 물리적인 물건뿐만도 아니다 생각이나 행동도 모든 끌어안고 담아두는데 익숙해져 버렸다. 시대는 공유와 오픈된 온라인의 장에 모두 열려있고 누구나 소유하며 상호교환 가능하며, 각자의 소수에게 한정된 소유물 없이 개방된 세상을 마련하는 듯했으나 실상은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물건을 많이 구입하고 가지려 들며 물건을 저장할 더 넓은 공간과 면적을 우선시하였다. 하지만 이도 부족한지 별도의 저장공간까지 만들며 여분의 공간을 요구하며 점점 더 광기로 치솓는 것 같다. 물건에 복종하는 상업주의는 대중을 피곤하게 만들고 피폐하게 한다. 늘 부족함을 부추기며 초라한 면모만을 부각하는데, 이미 길들여진 우리는 이에 대응할 힘조차 없는 것 같이 보인다. 좁은 공간이 오히려 그 대안이라며 다수의 의견에 이의를 제기하는 여기의 가정들이 우스꽝스럽게 도드라지는 건 어쩌면 이 세상에 당연했다. 더 이상 공간의 좁고 작음이 단점으로 인식되지 않는 때가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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