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산 무협 단편집 - 더 이상 칼은 날지 않는다
진산 지음 / 파란미디어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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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키운 8할이 축구였다면, 나머지 2할 중 1할은 필히 무협지의 몫으로 남겨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무료하고 지루한 수많은 시간들, 특히 고등학교 시절의 답답하고 억압된 시간 속에서 무협지는 구원이자 해방이었고, 무엇보다도 즐거움이었다. 더욱이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주옥같은 가르침은 언제나 남의 나라 언어나 복잡한 공식 속이 아니라, 오직 무협지 속에 있었으니 더 말해 무엇 하랴. 가령 "언제나 3푼은 감추어 두어라."라거나 "안심하는 그 순간이 가장 위험한 순간이다."라거나, 혹은 "칼에는 흑도 백도 없다."라는 가르침은 실로 얼마나 소중한 것들인가. 당시에 배웠던 그 가르침을 그대로 따랐었더라면, 아마도 내가 지금쯤 조그만 방파의 수장이 되는 일쯤은 우습지도 않았으리라.

어쨌거나 그렇듯 당시에 무협지의 세계를 신봉했던, 나를 포함한 몇몇 아이들이 서로 이곳저곳의 책방에서 무협지를 빌려와서 돌려 읽는, 일종의 '무협 계'를 형성한 건 지극히 자연스런 일이었다. 우리는 우리가 빌려온 무협지를 대체로 작가의 이름으로 통칭했고, 그것으로 그날 하루의 운이 결정되곤 했다. 이를테면, 거의 빨간책을 방불케 하는 '와룡강'을 누군가 빌려오면 잠깐의 자극이야 있겠지만 대체로 식상한 하루를 보내야 했고, '금강'이라면 한편 웅장하지만 또 한편으로 전형적인 하루를 보내야 함을 의미했다. 그런가 하면 '설봉'이나 '용대운'을 누군가 빌려올 참이면 그날은 무협의 멋을 제대로 느낄 하루가 될 가능성이 농후했고, 실험성이 두드러진 '좌백'은 꽤나 독특한 하루를 선사했다. 그리고 이제부터 말하려는 '진산'이라면, 그날의 운은 사뭇 유려하면서도 잔잔하게 흐르는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무협작가 '진산'을 이야기하는 데 있어서는 먼저 진산이 무협작가로서는 굉장히 드물게도 여성 작가라는 점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런 이유에서인지 진산의 글은 무엇보다도 '유려'하고 '서정'적이다. 진산의 무협 속에는 여타의 무협에서 한결같이 되풀이되곤 했던 '협(俠)'의 이미지가 옅은 대신 '정(情)'의 이미지가 도드라지고, 그 무대는 '도산검림(刀山劍林)'이라기보다는 오히려ㅡ수록된 단편의 제목이기도 한ㅡ'청산녹수(靑山綠水)'에 가깝다고도 할 수 있을 듯하다. 요컨대 진산의 무협은, 칼과 검이 난무하는 호쾌한 영웅의 대서사시가 아니라 산처럼 혹은 물처럼, 그렇듯 변함없거나 혹은 변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삶이 부드럽게 어우러지는 서정시인 셈이다.

아마도 유일한 무협 단편집일 거라는 이 책에서 '서정시'와 같은 진산의 스타일은 꽤나 맞춤한 듯 어울린다. 물론 단편의 태생적 숙명상, 기인이사들과 뭇 군웅들은 차치하고라도 주인공의 신세내력만 읊는 데에도 상당한 분량이 필요한, 장편이 지닌 광활한 강호의 호쾌한 매력은 기대하기 어렵지만, 대신 개인과 가족 그리고 동료 혹은 연인 사이의 내용으로 범위를 좁히고 있는 각 단편은 소박하지만 응축된 테두리 안에서 정갈하고 단정한 이야기들의 매력을 뽐낸다. 그러면서도 가족애와 사랑 그리고 복수와 무인의 자기완성 등, 결코 단순하지만은 않은 주제들을 십분 녹여내는 솜씨는, 조금 과장하자면 가히 '천의무봉(天衣無縫)'의 경지라고 할 만하다. 

더욱이 각 단편들은 다양한 형식으로 각각의 소재를 변주하며 단조로움을 피하고 있다. 가령, 역사적 소재를 가져와 노랫말과 이야기를 병치시킨다거나('청산녹수'), 한 단체 속 동료를 각기 주인공으로 삼는 연작을 쓴다거나('고기만두' 외 3편), 또는 2인칭 시점을 도입하는('잠자는 꽃') 등, 진산은 소재의 소소함과 형식의 다양함으로 이 단편집을 풍성한 매력으로 채워 넣고 있다. 뿐만 아니라, 책 뒤에 수록된 '작품해설'에서 진산이 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작품과 이 단편집의 의의에 대해 해설한 것을 읽는 재미도 쏠쏠하거니와, 무엇보다도 한 문장을 떠올린 후 그 문장의 마침표에서 다음 문장을 이어나가는 식으로 글을 쓴다는 진산의 글은 실로 유려하기 이를 데 없어서, 그저 문장을 읽어나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만족감을 선사한다.

다만, 꽤나 오랜만에 강호로 돌아와 '진산'의 무협을 읽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유감스럽게도 여기저기에 발표했던 단편무협을 모은 이 책이 적어도 당분간은 진산의 마지막 무협이 될 것이라고 한다. 진산은 작품해설에서 수록된 단편 '날아가는 칼'의 마지막 문장, "그 후, 어떤 칼도 날지 않는다."가 작별 인사가 되었다고 전하며, 이러한 진산의 결심은 이 책의 제목 '더 이상 칼은 날지 않는다'에서도 확인된다. 하지만 이에 대해 진산 무협의 팬들은, 역시 책 속 단편 '고기만두'의 마지막 문단을 인용해 이렇게 화답할 수 있을 것 같다. "단 한 번, 단 한 번만이라도 그에게 내가 등을 보이면서 떠날 수 있다면.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소원인 모양이다. 그 불가능이 이렇게 기쁠 수가." 단편 '청산녹수'의 '희'처럼, 그렇게 물처럼 흘러가려는 '진산'이 그 불가능한 소원의 기쁨을 깨달아 언젠가 돌아오기를, 그리하여 어느날 문득 강호를 추억하고 찾아오는 이들을 산처럼 굳건하게 맞아주기를, 그저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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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수컷은 필요 없어 지식여행자 5
요네하라 마리 지음, 김윤수 옮김 / 마음산책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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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누나가 나를 붙잡고 뭔가에 대해 하소연을 할 때, 이성과 객관을 유지한 채 자못 냉철한 모습을 보여주는 건 결코 현명한 대처법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지난 경험에서 터득한 다분히 훈련된 깨달음으로, 무심코 지극히 이성적인 판단에 따른 대꾸를 했다가 원망과 탄식이 뒤섞인 한소리를 듣기가 일쑤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성을 집어던진 채 마냥 넋놓고만 있어도 곤란하긴 마찬가지여서, 가령 "뭐 그런 어이없는 경우가 다 있대!"랄지 혹은 "그거 정말 웃기는 짬뽕이군!"과 같은, 상대의 말에 감정적으로 완벽히 동조하는 모습을 입으로나마 적극적으로 웅변하지 않는 한, 역시 한소리를 들을 각오를 단단히 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한소리'란 이 책의 제목과 사뭇 유사해서, 약간의 변주가 가능하긴 해도 핵심은 언제나 같다. "인간수컷은 필요없어!" 아, 필요 없어서 슬픈 짐승, 그 이름은 인간수컷이어라!

그런데 '인간수컷'이라는 생태계 내의 한 종으로서 내가 그 무용함을 불식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얄밉게도 종종 그 존재 자체만으로 매력을 인정받는 종이 있다. 이견의 여지가 없지는 않겠으나 바로 고양이가 그렇다. 온몸으로 주인에 대해 충성과 애정을 표현하는 개와는 달리, 그 도도한 몸짓과 시크한 표정에도 불구하고 사랑받는 고양이는 실로 얼마나 축복받은 종인지. 하느님이 있다면 찾아가 한바탕 항의라도 하고 싶은 심정인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 책의 저자인 요네하라 마리의 신빙성 있는 가설에 따르면 고양이는 하느님의 창조물이 아니다. 그녀의 명쾌하고 유쾌한 분석에 따르면, 고양이는 페리네 혹성인들이 지구를 정복할 목적으로 지구인들이 매료될 만한 종으로 변신한 것. 과연 인간이 고양이의 매력에 굴복한 데에는 이런 속사정이 있었던 것이다(이 대목에서 반론을 제기할 사람들이 있겠지만, 그들에게는 그저 고마운 마음을 표하고 넘어가도록 하자. 어쨌거나, 덕분에 아직 지구가 정복되지 않은 것 같으니까).

인간과 개와 고양이가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 책에서 고양이가 주연인 건, 그러므로 지극히 당연한 결과다. 버려진 새끼 고양이 무리와 도리의 조그마한 행동 하나 하나에도 전전긍긍하는 인간, 요네하라 마리는 말할 것도 없고, 고양이들을 만나자마자 대책 없이 꼬리를 흔들며 반가움을 표시하고, 그러다가 낯선 존재를 경계하는 고양이에게 얻어맞아 피를 보고도 여전히 정신 못 차리는 개, 겐도 역시나 주연이라 하기엔 약하다. 사랑과 질투와 반항과 우정에서부터 심지어 가출과 공주병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감정상태와 행동양태를 표출하며 요네하라 마리의 집에 이런 저런 에피소드들을 선사하는 고양이야말로 이 책의 주연으로 손색이 없고, 그렇듯 손쉽게 집 하나를 점령한 자타공인 서열 1위 고양이 도리는 아마도 자신을 파견한 페리네 혹성에 이렇게 교신을 보냈을 게 틀림없다. "고양이 제176524839호, 임무완료!" 그리고, 어쩌면 이렇게 덧붙였을지도. "추신. 멍청한 개 하나 포함"

하지만 비록 이 책에서 고양이에게 주연 자리를 기꺼이 내어 주었을지라도, 인간과 동물이 함께 살아가는 모습의 '행복함'은 무엇보다도 그 모습을 항시 애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인간' 요네하라 마리의 '따뜻함'에서 비롯된다. 그녀는 콘크리트 바닥 위의 개집에 언제나 개를 묶어두기만 하는 사람들에 대해 분노하고, 유기견을 손쉽게 살 처분하는 일본의 유기견 관리 시스템에 날 선 비판을 하기도 하며, 버려진 동물들의 처지에 진심으로 슬퍼하기도 하며, 그러다가는 또 재미있는 발상을 떠올리는 등의 재기 넘치는 유머를 보여주기도 하는데, 이 모든 모습들의 기저에는 언제나 따뜻함이 넘치도록 느껴진다. 특히 냉소와는 거리가 먼 요네하라 마리 특유의 유머 감각이 매우 인상적이었는데, 나는 일찍이 이처럼 따뜻한 유머가 있을 수 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이런 요네하라 마리를 두고 시인 황인숙은 "의롭고 명민하고 온화하고, 무엇보다도 그 싱싱한 유머감각!"이라고 평하는데, 나는 시인의 언어가 표현하는 그 적확함을 이 책을 읽고서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아마도 따뜻함은 전염되는 까닭인지, 아니면 요네하라 마리의 시선이 따뜻함만을 바라보는 까닭인지는 모르지만, 이 책에서 요네하라 마리가 만나는 사람들도 한결같이 따뜻하다. '잡종'이라는 말에 정색하며 '비순종'이라는 말로 정정해주는 수의사가 있고(그는 밥먹듯이 동물병원의 상호를 바꾸는데, 장담할 수는 없지만 그게 사기나 의료사고와 같은 어두운 사건과 연루되어서는 아니다), 요네하라 마리의 고양이들에게서 죽은 자신의 고양이들을 떠올리고는 펑펑 우는 중년의 사내가 있고(다만, 그의 며느리는 의심의 여지없이 악독한데, 이건 비단 지구 정복을 꿈꾸는 고양이들의 시선에서만이 아니라 같은 인간의 시선에서도 그러하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에 아픈 고양이들을 위해서 함께 문을 연 동물병원을 찾아나서주는 이웃이 있으며, 불쑥 찾아 온 개에게 기꺼이 먹을 것을 챙겨주며 그 개의 안위를 염려해 주는 친구가 있다. 그리고 동물에 대한, 나아가 생명에 대한 이들의 따뜻함은, 미국인과 우크라이나인과 러시아인이 고양이의 잠든 모습을 보며 "행복해 보여"라고 일제히 말한 것을 굳이 통역해 줄 필요가 없었다고 요네하라 마리가 적고 있듯, 독자에게도 오롯이 전달되는 듯하다.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는 아무 어려움 없이 '따뜻함'과 '행복함'이라는 단어가 맴돌았던 게 그 확실한 증거가 아닐까.

요네하라 마리가 처음에 그러했던 것처럼, 반려동물과의 필연적인 이별을 겪은 후에 새로운 동물을 입양하는 일은 이제 의식적으로 피해야만 하는 일이 되었었는데, 책을 읽으면서 그런 두려움이 많이 희석된 것 같다. 동물들과 함께 하는 삶에서 겪는 슬픔과 고달픔과 어떤 소동들의 난처함은 이 책에도 분명히 드러나지만, 그조차도 결국 요네하라 마리의 따뜻한 시선 속에서 행복한 일상으로 귀결될 수 있다고 느끼는 덕분일 테다. 특히, 개인적으로는 예전에 개와는 함께 살아봤으니 이제는 고양이와 함께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커졌는데, 물론 실제로 그렇게 된다면 인간수컷의 위치는 더욱 위험해지겠지만 그 이유가 고양이 때문이라면 기꺼이 감수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생각해 보면 고양이에게 정복되어 모두가 고양이와 함께 사는 지구란, 적어도 지금보다는 더 따뜻하고 행복한 행성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를 테니까. 마치 고양이와 함께 사는 이 책 속의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아무튼 뭐 그런 이유로, 나는 고양이의 지구정복 계획을 반대하지 않는다. 아무쪼록, 빠른 페리네 혹성인들의 방문을 열렬히 환영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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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축구에 길을 묻다 - 장원재의 한국 축구 산업화 제안 SERI 연구에세이 73
장원재 지음 / 삼성경제연구소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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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K리그' 2002년 월드컵에서 한국 대표팀의 최종전을 장식했던 이 카드섹션의 문구는, 그러나 월드컵이 끝나고서 공허한 메아리로만 남았다. 경기장을 가득 메우고도 모자라 거리 곳곳을 채웠던 수많은 팬들은 월드컵이 끝남과 함께 일상으로 복귀했고, 그 일상에 K리그의 자리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후 또 다시 맞이한 남아공 월드컵. 태생적인 속성상 충성스런 팬들을 보유하지 못해 텅비기 일쑤인 광주 월드컵 경기장에는 스크린에 펼쳐진 대표팀의 경기를 응원하기 위해 모처럼 수만의 관중이 몰렸고, 전국의 거리 곳곳에도 다시 붉은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로 가득찼다. 축구를 향한 조촐하고 썰렁하던 응원은 순식간에 다시 장엄하고도 열정적인 응원으로 바뀌어 버렸다.

물론, 한국 대표팀을 응원하는 사람들이 모두가 축구팬은 아니고, 또한 그들이 모두 축구에 관심을 가지는 것도 아님은 자명하다. 국가 대항전이라는 월드컵의 특성상 한국 대표팀을 응원하는 이들은 그저 '대한민국'이라는 이유만으로 대표팀을 응원하기도 하고, 더욱이 그것이 지구촌 축제라는 점에서 기꺼이 동참하여 즐기기를 원한다. 또한, 무엇보다도 함께 같은 장소에서 같은 화면을 보며 자유롭고 열정적으로 응원한 신명났던 경험이 사람들을 더욱 불러 모으는 원동력으로 기능한다. 사람들이 바라고 응원하는 건 축구 그 이상의 것이고, 이것은 K리그에서는 얻을 수 없는, 단지 월드컵에서나 가능한 것들이라고 종종 사람들은 단정하곤 한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K리그와 월드컵이 같은 '축구'를 전제로 하는 것이 명백한 이상, 그러한 섣부른 단정에는 재고의 여지가 있다. 꽉 찬 관중석과 열정적인 응원, 팀이 이기고 짐에 따라 극단적으로 갈리는 환희와 슬픔, 상대에 대한 적대적 반응과 경기에 대한 순수한 찬탄, 기실 이 모든 것들이야말로 바로 축구를 묘사하는 '모든 것'임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적어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와 같은 유럽의 일부 축구리그에서는 그러한 일들이 '일상적'으로 일어난다. 요컨대, 축구를 향한 열정적인 응원과 열광은 결코 월드컵만의 전유물은 아니라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K리그의 과제는 분명해지고, 아울러 유럽리그 중에서도 특히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를 모델로 하여 K리그 발전의 길을 모색하는 이 책의 작업도 의의를 지닌다. 많은 사람들을 울고 웃게 만들 수 있는 콘텐츠인 축구. 산업화에 따라 하나의 상품으로 기능하는 축구. 이러한 축구를 좀 더 예쁘고 매력적으로 포장하고 거기에 '드라마'라는 소스를 더하여 축구팬들을 만족시키고, 나아가 축구 그 이상의 것을 원하는 잠재적인 '구매자'에게도 어필해야 한다는 건, 월드컵에서 펼쳐졌던 축구 그 이상의 아름다움이 여전히 선연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한 당연한 수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4년에 고작 한 달뿐인 그 특별한 환희를 일상으로 끌어오려는 노력이 한국축구의 당면과제이자 의무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것들을 모두가 잘 '알고만' 있다는 데에 있는지도 모른다. 이른바 '선순환'의 구조를 마련하여 열정을 '일상화'하는 것이 중요한 일임을 알지만, 막상 그 토대를 마련하고자 하면 여기저기서 난관과 맞닥뜨리게 마련이다. 마냥 유럽의 열정적인 리그를 모델로 하고자 하여도 많은 해법들이 근본적인 전환을 의미하기에 섣불리 시도하기가 만만치 않다. 가령, 대기업에 기생하는 형태인 현 '기업' 프로팀은 시민을 기반으로 자생하는 '지역' 프로팀으로 가는 것이 백 번 옳겠지만, 매년 적지 않은 적자를 감수하는 각 팀들이 기업의 품에서 벗어나는 순간 재정적으로 심각한 어려움에 직면하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또한 몇년 전 거의 모든 내셔널리그 팀들이 K리그로의 승격이 불가하다고 밝힌 데서 보듯, 승강제는 강등하는 팀과 승격하는 팀 모두에게 현실적으로 '부담'이기만 할 뿐이다.

이러한 상황을 감안하면 이 책의 제안도 특별히 새삼스러울 것은 없고, 더욱이 '현실적'이라고 하기에도 사실 무리가 있다. 동남아의 선수를 영입해 K리그의 시장을 아시아로 확대하자거나, 대학팀들을 리그로 끌어들여서 K리그와 N리그를 각각 16-16 혹은 그 이상의 숫자로 편제하자는 제안들은 일견 그럴 듯하게 들리지만, 과연 현실적으로 동남아의 선수들이 K리그에서 선호되는 남미와 동유럽 선수들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을지란 회의적이고, 또 16-16 이란 편제는 단지 숫자에 불과할 뿐 그것이 곧 K리그의 경쟁력을 제고시키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우리와는 제반환경이 사뭇 이질적인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를 거의 유일한 모델로 삼은 것도 '현실적인 취사선택'의 범위를 좁히는 요인 중 하나로 지적할 수 있을 듯하다.

하지만 언급한 몇몇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논의들은 그 시도 자체로 반가운 내용임에는 틀림이 없다. 비록 이 책이 한국축구가 나아갈 '길'을 명확히 제시한다고 말하기는 어렵고 내용 자체도 소략한 편이지만, 적어도 월드컵의 열광만을 기대하며 가능성이 희박한 월드컵 단독 개최를 위해 눈먼 돈을 쓰려는 한국축구협회나 혹은 단발성 이벤트에 대한 환호만을 기대하며 K리그의 일정까지도 바꿔주며 유럽의 유명팀과의 친선경기를 환영하는 프로축구연맹에 비하면, 이 책의 제안은 차라리 현실을 바꾸려는 노력이라는 점에서 '현실적'이라고 할 법도 하다. 무엇보다도 4년마다 온탕과 냉탕을 왕복하는 한국축구의 미래를 위한 진지한 고민이라는 점에서, 저자의 노력만큼은 박수를 받아 마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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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네티즌은 차두리가 골을 넣으면 세레머니로 비행능력을 공개할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결국 우루과이와의 경기에서 차두리는 비행능력을 끝내 공개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대신에 차두리는 눈물을 보였는데, 그것은 비행능력보다도 좀 더 멋있었고 훨씬 아름다웠으며 무엇보다도 감동적이었다. 그 눈물로써 차두리의 심장은 엔진이 아님이 밝혀졌고, '로봇'이 아닌 '인간'이었던 차두리의 어떤 진실한 감정의 분출은 확실히 사람의 마음을 촉촉하게 만드는 데가 있었다.

경기가 끝난 이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패배의 원인을 쏟아내는 글들은 이러한 눈물을 서둘러서 훔치는 듯해서 안타까웠다. 여전히 특정 선수의 특정 플레이가 패배의 원흉이고, 허정무 감독의 전술이 글러 먹었고, 조직력이 문제였다는 등, 일부 사람들의 글 속에는 감정이 아닌 그저 이성을 가장한 무정만이 넘쳐나는 듯했고, 나는 그들이야말로 정녕 로봇이 아닐까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물론 종종 그게 일인 사람들도 있고 그런 분석도 필요한 일이니 그걸 마냥 나무랄 수는 없다. 단지 그때의 내 감정은 그랬다). 감정의 여운을 느끼게 하기보다는 서둘러 감정과의 결별을 강제하는 SBS의 인터뷰도 그래서 못마땅했다.

개인적으로 패배 자체는 별로 아쉽지 않다. 4강 신화를 다시 재현할 수 없게된 것도 그다지 아쉽지 않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있다면, 그건 이번 월드컵에서 더 이상 한국 대표팀의 경기를 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것뿐이다. 이러면 결국 말 장난 같기도 하지만, 나는 이게 조금 다르다고 생각한다. 정말로 나는 승패보다도, 4강보다도, 무엇보다도 90분간 감정의 파노라마를 겪게 되는 일이 즐거웠었다. 어디가서 그러한 90분을 경험할 수 있단 말인가. 또 경기를 앞두고 느끼는 유쾌한 긴장감과 기대를 어디가서 쉬 경험할 수 있단 말인가. 그저 이제는 그런 일들이 당분간 끝났다는 게 정녕 아쉽다.

비록 패배하기는 했지만 정말로 멋진 경기였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근래에 본 최고의 경기였고,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경기였다. 더불어 다른 선수들도 그랬지만 눈물 흘리는 '인간', 차두리가 있어서 경기 후의 여운도 오래도록 기억될 것 같다. 아쉬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지만, 이제 이것으로 '우리의' 월드컵은 끝났음을 인정해야만 할 것 같다. '혼신의 힘'이라는 이 진부한 표현을 생생하고 감동적으로 체현해낸 선수들이 대견하고, 특히 재미와 감동을 더한 차두리가 있어 즐거웠다. 차두리, 로봇이 아니라서 고마워!



덧 하나. 감동을 좀 더 지속시켜줄 말들.

두리한테서 자꾸 문자가 오네. 정말정말 아쉽네요. 난 이기는 줄 알았어요... 이러면서. 설마 아직 울고 있는 건 아니겠지. 한 시가 다 되가는데...  ㅡ차범근 트위터 中ㅡ 

"이번 월드컵에 오기 전, 안전 문제에 대해 워낙 많은 이야기를 들어서 걱정을 하고 왔었다. 그런데 이곳에 막상 와보니 우리가 경기장, 훈련장, 숙소를 오갈 때마다 우리를 보는 많은 남아공 사람들, 어린아이들이 모두 환호하고 좋아해줬다." "어린 아이들이 우리를 보고 기뻐하고 즐거워해주는 것을 보니 축구선수로서 우리의 큰 임무를 완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ㅡ차두리ㅡ 

어느날 팀 마사지사가 "경기도 안 하는데 뭐하러 그렇게 열심히 하냐?"고 물은 모양이다.
그러나 두리는 의아해 한 마사지사에게 "나는 입으로 나의 위기를 벗어나고 싶지는 않다.
더 열심히 해서 실력으로 보여주고 싶을 뿐이다!"고 설명했단다.
그 자리에서 마사지사, 난 너에게 무릎 꿇어 존경을 보낸다며 무릎을 꿇는 시늉을 해보이더란다.
나는 그 얘기를 들으면서 너무나 기특하고
또 어려움을 아빠가 원하는 방식대로 이겨내려고 애쓰는 그 마음이
고마워서 그만 눈물이 핑 돌았다. 

인생은 길다.
선수 생활이 끝나면 모든 걸 결산해야 하는 게 인생은 아니다
오늘도 경기를 마친 두리에게 물었다.
"경기 재미있게 했어?"
나는 잘 했느냐고 묻지는 않는다.
그게 중요하지는 않으니까.
단지 좋은 경기를 하고 나면
주변의 잡음이 줄어들고 본인이 마음 편해 하니까
나는 감사한 것일 뿐이다.
 

ㅡ차두리 어머니 오은미 씨의 글 中ㅡ (출처 : http://blog.naver.com/haena37/140025725820)

"한국 선수들은 고개를 들기 바랍니다. 당신들은 고개를 떨굴 이유가 없는 멋진 축구를 했고, 고개 들어 당당하게 어깨펴고 고국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고개를 드세요." ㅡ독일의 한 캐스터ㅡ (출처 : http://v.daum.net/link/7769310) 

덧 둘. 차두리에 관한 재밌는 일화.

이젠 우리 두리 녀석도 제법 컸다. 분데리스가 선수들에 관한 폭넓은 지식과 정보를 가진 전형적인 꼬마 팬이다. 아빠인 내가 얻어다 주지 않으니까 레버쿠젠 팀의 리벡 감독에게 직접 전화를 걸고서는 "내가 두리인데 우리 아빠가 자꾸 까먹어서 그러니까 사인 두 장만 보내달라."고 해서 기어이 사인지를 손에 넣을 만큼 열성이다. 한 번은 장차 독일 국가대표가 될 것인가 아니면 한국 국가대표가 될 것인가 하는 주제 넘은 고민을 하기도 했다. 또 1986년 겨울엔 내가 깁스를 해서 한쪽 밖에 양말을 신을 수가 없었는데 그것도 아빠가 하는 것이라 좋아 보였는지 녀석도 겨우내 한쪽 양말만 신고 다녔다.

또 1986년 9월의 일이다. 반바지에 운동화를 신고 두리 녀석과 마당에서 공을 차고 있었다. 이날도 두리 녀석은 11번이 새겨진 유니폼에 팬츠, 그리고 무릎 위로 올라오는 기다란 스타킹에 뽐이 제법 뾰족뾰족한 축구화를 신고 있었다. 내가 볼을 갖고는 뺏으라고 했더니 갑자기 내 정강이를 향해 두 발로 덮치는 것이었다. 어찌나 아픈지 '악' 소리만 하고 두 손으로 정강이 뼈를 붙들고 주저않고 말았는데 두리 녀석은 옆으로 쓱 오더니 내 어깨를 툭툭 치면서 아무 일 없다는 듯 냉큼 돌아서는 것이었다. 화가 나기도 하고 기가 막히기도 해서 "야! 볼을 보고 태클을 해야지 다리를 차는 게 어딨어? 그리고 아빠가 아파 죽겠다는데 미안하다는 말도 없어?"하고는 소리를 냅다 질렀다. 그런데 녀석의 하는 말이 더 걸작이었다. "월드컵 선수들은 다 그렇게 하는 거야." 

ㅡ차범근 에세이 中ㅡ (출처 : http://blog.naver.com/jordyinny/110005679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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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은 그 자체로 '순수한 축구대회'를 표방하지만 지구상 최대의 국제적 이벤트라는 점에서 '순수성'의 포장지를 가볍게 벗어던진다. 독재정권의 추악한 얼굴을 가리기 위해(1978년 아르헨티나) 열린 적도 있고 독재에서 벗어나 그 억압적 이미지를 벗기 위해(1982년 스페인) 열린 적도 있다. 역대 개최국들은 악착같이 월드컵을 국운 상승의 호기로 삼았다. 미국(1994년)과 프랑스(1998년)는 경제적 효과와 '일시적' 인종화합의 장으로 삼기도 했다. ㅡ<축구장을 보호하라> 中ㅡ 

월드컵의 역사가 증명하듯 본래 월드컵은 '순수한 축구대회'와는 거리가 있었다지만, 이번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유독 상업주의와 관련하여 '순수성'이 발가벗겨지는 모습이 많이 보이는 것 같다. 특히 이와 관련해서는 SBS의 공로를 특별히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 SBS는 월드컵 단독중계를 강행하면서 독점한 '상품'을 통해 최대한 많은 돈을 뽑아내기 위해 가히 천박할 정도로 혈안이 되어 있는 듯하다. 덕분에 월드컵 경기를 전후로 보이는 광고들은 오직 소수의 대기업의 것으로만 채워져 있고, 시민들을 위해 전광판에 광고 대신 축구를 보여주고자 하는 전광판 업체들의 호의는 그에 대해 돈을 요구하는 SBS에 의해 무산되기도 했다. 게다가 열정적이고 자발적인 거리 응원은 발 빠르게 장소를 선점한 기업들에 의해 그 순수성의 상당부분을 위협받고, 많은 돈을 지불한 월드컵 '공식' 스폰서들을 위한 FIFA의 특혜는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이처럼 순수성이 훼손된 월드컵에 냉소가 자리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다. 한국 대표팀이 지난 2002년 월드컵의 영광을 재현하기를 바라는 마음이야 누군들 없겠는가마는, 이미 순수성이 적나라하게 발가벗겨진 상황에서 한국 대표팀의 승리는 천박한 자본주의와, 혹은 때로는 정권을 쥐고 있는 이들의 승리를 아울러 의미하고, 그것은 결코 달갑지 않은 일이다. 한국 대표팀의 조별 경기만으로도 이미 손익분기점을 넘을 것으로 예상되는 SBS의 수익은 한국 대표팀이 토너먼트에 진출할 때부터 급격히 늘어나는데, 이는 2014년 브라질 월드컵의 중계권마저 독점으로 보유한 SBS의 향후행보에 타당성을 안겨주고, 또한 한국 대표팀의 경기가 있을 때 몇몇 국민적 합의가 필요한 일들을 서둘러 처리하려는 '독재적' 정권은 대표팀의 승리가 있을 때마다 벙커에서 승리의 휘파람을 부는 것이다. 그 꼴을 볼 바에야 차라리 대표팀이 일찌감치 집으로 돌아오는 게 낫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축구가 그렇게 희생만 치른 것은 아니다. 프랑코 독재시대를 끝낸 스페인에게 축구는 희망의 예광탄이었으며 남미와 아시아에서도 축구는 거역할 수 없는 저항적 에너지가 되기도 했다. 구체적인 스트라이크의 계기는 물론 아니다. 그러나 축구가 없는 독재를 상상해 보자. 무슨 낙으로 그 혹독하고 지루한 세월을 견딜 것인가. 물론 그 참담한 상황에서 벌어지는 대규모 경기가 독재자의 안녕에 이바지하는 수도 있다. 그러나 권력자가 애용하는 축구라고 해서, 이를테면 약 20년 동안 집권했던 한국의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자신의 이름을 딴 아시아 지역 축구대회를 열어 독재의 달콤한 맛을 즐겼다고 해서 그 자리에 모인 수만 명의 관중들이 오로지 독재자에게 충성을 다짐했다고는 볼 수 없는 것이다. ㅡ<축구장을 보호하라> 中ㅡ 

하지만 월드컵이 개막한 이후 들려오는 이야기들은, 단지 냉소만으로 받아들이기에 어려운 어떤 가치들을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예컨대, 우려스러웠던 팔 부상에도 불구하고 끝내 조별리그 첫 경기에 잠시 모습을 드러낸 드록바가 2006년 월드컵 당시 자국의 내전 중단을 눈물로 호소했던 이야기라거나, 혹은 북한 대표팀 선수로서 월드컵 무대를 밟아 세계최강 브라질을 상대하게 된 정대세가 만감이 교차한 듯 눈물을 쏟았다는 이야기라거나, 혹은 1966년 월드컵에서 8강에 진출했던 북한이 준결승 티켓을 양도해야만 했던 상대인 포르투갈과 44년 만에 월드컵 무대에 나서 다시 맞붙게 되었다는 이야기라거나, 또는 시한부 인생 선고에도 불구하고 월드컵 출전 의지를 불태운 호주의 해리 큐얼에 대한 이야기 등, 월드컵이 엮어내는 문화적,역사적 '드라마'에는 문자 그대로 '월드컵'이기에 접할 수 있는 전세계의 다양한 이야깃거리들이 존재하고 있고, 이에 대한 반응은 결코 냉소일 수 없는 것이다.

더욱이 경기장으로 시선을 돌리면 이제 '냉소'는 눈을 씻고 봐도 흔적을 찾기 어렵다. 거슬리는 부부젤라의 소음과 지나치게 다루기 힘든 자블라니의 탄성에도 불구하고 선수들은 열의를 다해 경기장에서 땀을 흘리고, 그 선수들을 보며 관중들은 때로 환호하고 때로 슬픔의 눈물을 흘린다. 한국 대표팀 선수들 역시 그 어느 대표팀 선수들 못지않게 열심히 그라운드를 누비고, 와중에 훌륭한 경기력으로 승리를 기록하기도 하고 아쉬운 경기력으로 패배를 기록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경기장에서는 의심의 여지없이 오직 '축구경기'가 펼쳐지고, 그것은 세계의 많은 나라 그리고 각국의 많은 선수들이 바라마지 않던 순수하고 역사적인 현장인 셈이다. 그렇기에 한국 대표팀을 응원하며 거리로 나선 붉은 악마들의 순수성은 여전히 유효한 것이고, 이는 또한 여전히 유효한 축구의 가치를 확고히 웅변하는 것이다.

축구는 철저히 산업화되었다. 수익성이 없는 것은 곧 무익한 것으로 변했다. 어린아이가 공을 가지고 놀거나 고양이가 면실 꾸러미를 가지고 노는 것과 같은 순수한 쾌락은 상실되었다. 프로 축구의 관료화는 단순한 주력과 체력적 강인함만을 요구한다. 즐거움을 박탈하고 환상을 쇠퇴시키고 대담성을 금지시켰다. 금지된 자유를 향해 모험적으로 돌진하는 육체의 순수한 쾌락이 사라졌다. ㅡ<축구, 그 빛과 그림자> 中ㅡ

<축구, 그 빛과 그림자>에서 축구의 역사를 "즐거움에서 의무로 변해가는 서글픈 여행의 역사"라고 단언한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말은, 그래서 그 대단한 통찰력에도 불구하고 유일한 정답은 아니다. 그가 지적하듯이 "수익성이 없는 것은 곧 무익한 것"이 되고, "어린아이가 공을 가지고 노는 것과 같은 순수한 쾌락"은 상실되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는 축구장에서 "환상"과 "대담성"과 "즐거움"을 만난다. 최고의 무대에서 승부를 가리려는 그 승부의 원초적 순수성은 월드컵 역사에서 있었던 몇몇 의심스러운 경기에도 불구하고 면면히 이어져왔고, 이제 월드컵은 수억의 인구가 지켜보는 축제의 장이 되면서 더 이상 적어도 경기장 안에서의 순수성을 훼손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용납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축구장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건, 그러므로 결코 천박한 상업주의와 과잉된 민족주의만이 아닌, 축구경기에 대한 혹은 나아가 축제에 대한 기대와 환희와 즐거움이기도 한 것이며, 이는 오늘날의 축구가 오로지 '의무'로만 가득 차 있는 것은 아님을 분명히 반증하는 것이다.

물론, 축구장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을 경계해야 할 이유는 분명하다. 축구와 월드컵에 환호하는 이들의 순수성을 이용하려는 시도는 이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극성을 부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월드컵을 마치 '악의 축'이라도 되는 것처럼 매도할 이유로까지 확대되기에는 불충분하다. 움베르토 에코는 "과연 월드컵이 벌어지는 일요일에 무장투쟁이 가능한가? 축구경기가 있는 일요일에 혁명이 가능한가?"라고 물었다지만, 지난 2006년 <한국일보>의 한 칼럼에서 강준만이 서남대 김욱 교수의 말을 인용한 바에 따르면, 이에 대해서는 이런 반론도 가능한 것이다. "축구경기가 없는 일요일에는 언제나 혁명이 가능한가?" 그리고 여기에 덧붙여, 강준만은 월드컵 열풍에 대한 비판이 '관심'의 기회비용을 걱정하는 것이라고 분석하면서, "월드컵 과잉은 4년에 한 달이지만 나머지 3년 11개월이 더 문제가 아닌가?"하는 재반론도 가능하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특히 <축구는 한국이다>에서 강준만이 소개한 딴지일보 김어준 총수의 비유는 월드컵에 대한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사람들에게 속 시원한 해답의 하나를 제시한다고 믿는다.

"때로 경기 하나가 인식의 일대 전환을 가져오고 그것이 실제의 물적 질적 변화를 선도한다. 그러니 이 대목에서 혹여나 촌스런 애국주의에 대한 민망함에 그를 질타하는 분석은 참아 달라. 지난 월드컵 애국주의와 파시즘에 대한 근엄한 분석을 접할 땐, 어렵게 만난 멋진 연인과 이제 겨우 연애 좀 시작해 보겠다는데 연애 너무 집착하면 자칫 살인나는 수도 있다는 훈계부터 듣는 기분이었다." ㅡ<축구는 한국이다> 中ㅡ 

1970년 월드컵에서 브라질이 우승하며 줄리메 컵을 영구히 소장함에 따라, 새로이 월드컵 트로피를 고안하게 된 이탈리아의 조각가 실비오 가자니가는 월드컵 트로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영광의 선수는 초인이 아니라 위대한 인간이어야 하며 더욱이 최선을 다해 고난을 이겨낸 영웅이어야 한다. 그 선수가 세계를 안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어쩌면 우리가 월드컵을 둘러싼 '순수성의 훼손'에 대해 과도한 비판을 하는 건, 월드컵에서 초인의 모습을 기대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인간의 비루하고 천박한 감정과 행태 따위는 결코 용납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월드컵은, 그리고 축구는 오직 '인간'의 놀이라는 점을 다시금 상기할 필요가 있다. 월드컵에는 종종 인간의 추악한 모습이 끼어들기도 하지만, 한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인간의 모습도 상존하는 것이다. 땀을 흘리며 공을 좇는 순수성이 있고, 거기에 기뻐하고 슬퍼하는 인간들의 '진실한' 감정이 넘실댄다. 물론, 그런 이유로 월드컵을 향한 비판이 의미를 잃는 것은 아니겠지만, 또한 그런 이유로 월드컵을 향한 열광도 이해될 수 있어야 마땅하다. 요컨대, 월드컵은 그 트로피의 형상이 그러하듯 단언컨대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고, 바로 그것이 우리가 끝내 그 '그림자'의 암울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축제인 월드컵을, 차마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유일한 이유일 것이다.


"월드컵에 가장 바라는 것은... 인간을 고무시키고 단합시키는 (축구의) 힘이다." ㅡ넬슨 만델라ㅡ

멀미나는 알제리 시절, 그 수난의 햇살 아래에서 축구선수로 활약하기도 했던 소설가이자 철학자인 알베르 카뮈는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된 직후 가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궁극적으로 알고 있는 인간으로서의 윤리와 의무는 축구선수로서 지녀야 할 윤리와 의무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ㅡ<축구장을 보호하라> 中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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