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랜드 칼링컵 3라운드에서 박주영이 드디어 70여분을 뛰며 아스날 데뷔전을 치렀다. 4부리그 팀을 상대한 걸 감안하면 조금 아쉬운 활약이었을 수도 있지만, 경기 후 뭔가 큰일이라도 났다는 듯이 부정적인 전망을 잔뜩 쏟아내는 기사들을 보노라니 조금 우습기도 하다. 몇몇 기사들의 제목에 따르면, 주전경쟁은커녕 "조커도 위험"해지고 박주영과 교체해서 20여분을 뛴 일본의 신성 미야이치 료와 "희비가 엇갈리고" 기껏해야 "헛심"이나 쓰고 한마디로 "설설기었다"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이런 기사들만 보면 이것으로 박주영의 올시즌은 이미 끝난 모양새인 듯하다. 게다가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어느 기사에서는 "박주영 아스널 데뷔전으로 본 여섯 가지 과제들"(http://sports.media.daum.net/worldsoccer/news/breaking/view.html?cateid=100032&newsid=20110922064404789&p=sportalkr)을 친절하게 짚어주기까지 하는데, 내가 보기에 문제는 박주영의 플레이가 아니라 바로 이런 기사다.

해당 기사에 따르면 일단 박주영은 "지나치게 긴장했"단다. 그래서 "발바닥으로 긁으려다 볼이 걸리지 않아 역습타이밍을 놓쳤"다는데,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일단 박주영이 지나치게 긴장했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다. 두세 번의 볼 컨트롤 실수가 곧 긴장했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경기에서 뛰는 모든 선수는 지나치게 긴장했다는 말과 같다. 경기 중 누구나 볼 컨트롤 실수는 몇 번씩 하게 마련이니까. 게다가 그런 실수로 박주영이 역습타이밍을 놓쳤다는 것은 지나치게 '과장된 해석'이다. 실제로 전반전에 있었던 아스널의 가장 좋은 찬스는 박주영의 '사소한' 실수 이후에 만들어졌다. 박주영이 발바닥으로 긁으려다 공이 걸리지 않아 결과적으로 템포를 죽인 후(어차피 대단한 역습 상황도 아니었다) 때맞춰 왼쪽으로 돌아나가는 키어런 깁스에게 패스를 내주고 깁스가 지체 없이 샤마크에게 크로스를 올린 것. 비록 골키퍼의 선방에 막히긴 했지만 '과장되게 해석'하자면 활동반경을 넓힌 박주영이 좋은 장면에 기여했다고도 볼 수 있다. 

또한 기사에 따르면 박주영은 동료들과 동선이 겹쳤는데, 이는 "지난 3년간 자신을 중심으로 뛰어주는 환경에 익숙해진 탓"이란다. 즉, "AS모나코에서는 자기가 볼을 잡고 있으면 동료들이 움직여줬고, 공간으로 뛰어 들어가면 여지없이 패스가 들어왔다"고 하는데, 이건 실로 터무니없는 소리다. AS모나코의 문제는 동료들의 움직임이 부족하고 누군가 공간으로 뛰어 들어가도 적절한 패스가 들어오지 않는 데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로 AS모나코는 지난 시즌 강등을 당했다. 적어도 내가 알기로 동료들이 유기적으로 움직여주고 누군가 공간으로 들어갈 때 여지없이 패스가 들어오는 팀은 많지 않다. 게다가 박주영의 데뷔전 경기를 보면 특히 베냐윤과 겹치는 장면이 꽤 있었는데, 알다시피 베냐윤도 이적생이다. 아니, 실상 그날 경기를 뛴 많은 선수들이 아스널에 익숙한 선수들은 아니다. 당연히 선수들 모두 동료에 익숙해져서 팀워크를 이루는 게 자연스럽지, 기사에서 말하는 대로 오직 박주영만이 "동료의 동선에 자신을 맞춰야" 하는 건 아니다.

박주영이 경기 후 인터뷰 요청을 거절한 것을 두고 "국제적 지명도를 가진 클럽 아스널 소속 선수라면 가끔 고집을 버릴 필요가 있다"며 "일반인들도 회사 다니다 보면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할 때가 있는 법" 운운하는 것은 도저히 보아주기 힘들 지경이다. 일반인들이 회사를 다니며 하기 싫은 일을 하는 것은 대개 회사에서 직접적으로든 혹은 암묵적으로든 시키는 일을 할 때다. 하지만 아스널이 박주영에게 인터뷰에 응하도록 종용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리고 기사 말미에는 에미레이트 스타디움을 현장취재 했을 때 한 번도 취재진 인터뷰를 거부하지 않았던 선수로 티에리 앙리를 소개하며 노골적으로 박주영과 비교하는 데는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앙리와의 인터뷰가 그렇게 마음에 들었다면 '친절한 앙리씨'를 찾아 미국으로 날아가면 될 뿐 박주영에게 툴툴거릴 일은 아니다. 박주영의 말 한마디를 어떻게든 '기사화'하기 위해 영국에 날아간 기자로서는 '박주영의 취재요청 거절'이 못마땅할 수 있겠지만, "본래 일반인들도 회사 다니다 보면 못마땅한 일을 그저 속으로 감내해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더군다나 당시 앙리는 아스널의 주장직을 맡고 있었다. 아무래도 주장이라면 책임감이 남다를 수밖에 없고, 그런 이유로 박주영도 언론과의 인터뷰를 기피하는 자신의 성향에도 불구하고 대표팀 주장으로서 대표팀의 공식 인터뷰에 응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국제적 지명도를 가진 클럽" 맨유의 퍼거슨 감독이 영국 BBC가 자신의 셋째 아들인 에이전트 제이슨이 맨유로부터 부당이득을 취했다는 내용의 보도를 한 것에 대한 항의의 뜻으로, 오랫동안 영국 BBC와의 인터뷰를 거절했던 것은 유명하다. 만약 박주영이 언론을 기피한다면 거기에도 이유가 있을 것이고, 위에 소개한 기사가 하나의 이유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정확한 사실에 입각하여 공정하기보다는 자신의 감정을 기사에 투사하여 입맛대로 해석하는 기사들, "사람들은 이런 기사를 '찌라시'라 부르"고, 이런 기사를 좋아할 만한 선수는 드문 법이다.

박주영의 데뷔전에 대한 평가는 보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를 수 있고, 또 그 경기를 통해 그의 미래를 예측하는 것도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요컨대 누구도 박주영의 아스널 데뷔전이 그의 미래에 어떤 지대한 영향을 끼칠지에 대해서는 함부로 예측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게 있다면, 그건 언론에서 말하는 것만큼 박주영의 현실과 미래가 그렇게 절망적이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 완벽한 예시는 박지성이다. 만약 언론에서 했던 우려와 비판과 부정적 전망의 단 백분의 일만큼이라도 사실에 부합했다면, 아마도 박지성은 이미 맨유에서 수십 번쯤 짐을 싸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박지성은 이제 맨유에서 7시즌 째를 맞고 있다. 물론 박지성의 예가 박주영의 경우에도 정확히 들어맞으리란 법은 없다. 중요한 것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고, 박주영은 이제 겨우 한 경기를 치렀을 뿐이다. 지금 박주영의 데뷔전 이후 쏟아지는 평가들을 과장되게 비유하자면, 돌잡이 때 아기가 돈을 집다 찢어버리자 그 아이가 나중에 전 재산을 모조리 날리게 될 거라고 호들갑스럽게 걱정하는 것과 같다. 설령 아이가 돈을 찢었을지라도 그 아이에게 '과제'를 주고 아이의 미래에 대해 '전망'을 하기에는 일러도 지나치게 이르다.

덧. 박주영의 '기도 세레모니'를 못마땅해 하는 많은 사람들처럼 나도 그의 세레모니는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데, 그 이유는 종교적인 문제와는 하등의 상관이 없다. 뭐랄까, 박주영의 기도 세레모니는 축구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너무 일찍 잘라버려서, 고양된 흥분의 지속을 허락하지 않는 듯한 느낌이다. 물론 개인의 골 세레모니에 대해 다른 사람이 감놔라 배놔라 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에 대한 감사를 아주 조금만 더 뒤로 돌려서 안티팬의 상당수가 돌아설 수 있다면, 박주영으로서도 꽤나 괜찮은 일이 아닐까. 내가 하나님을 잘은 몰라도 그분은 당신의 이름을 조금 더 늦게 부른다고 화를 내실만한 분은 아닌 반면, 나를 포함한 축구팬은 좀 더 성급하고 좀 더 화를 잘 내는 편에 속하니까 말이다. 뭐, 물론 내가 몰라서 그렇지, 실은 하나님이 당신의 이름을 조금만 늦게 불러도 화를 내는 분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만에 하나 그렇다면, 솔직히 그런 분에게 왜 '기도' 씩이나 해야 하는지는 나로서는 죽을 때까지 모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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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 6월 동안 읽은 책의 권수를 셈해보니 가뿐하게 100권이 넘는다. 100권은 실로 대단한 수치가 아닐 수 없어서 일일이 셈하는 일조차 어려웠을 것 같지만, 사실 이게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공은 거의 대부분 만화책 <메이저>에게 돌려야 할 것이다. 과연 완결이 나올 수 있는 것인지 마냥 의심스러웠는데, 드디어 <메이저>가 78권을 끝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 것이다. 내가 대략 50여 권을 읽다가 말았고, 그 이후에도 30여 권쯤 더 나왔으니 내 기억력으로 대관절 이야기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지사. 그래서 나는 내가 경험한 바 가장 많은 권수를 자랑하는 이 희대의 대작을 다시 처음부터 읽었다. 이야기는 실로 방대했고 꽤나 역동적이었으며 때로 감동적이었는데, 한편 진부했다. 왠지 도돌이표를 반복하는 듯한 느낌이 작품 스스로를 '진부함'으로 구겨넣는 듯했다.

일명 '천재 열혈 야구소년'인 고로가 리틀 야구단에서 활약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하나의 드라마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고작 초등학생 꼬마에 불과할지 몰라도 고로가 동료를 얻고, 미숙하기 짝이 없는 동료들이 거듭된 훈련과 실전으로 조금씩 나아지고, 그리하여 최강의 상대와 맞서 싸우는 과정 속에는 우정과 경쟁과 열정이 넘쳐난다. 객관적인 실력 차이가 엄연하기에 투지와 의외성이 그 차이를 메우기 위해 동원되고, 하여 매 승부는 치열하기 짝이 없다. <메이저>가 아니라 <열혈 리틀 야구>라는 제목의 만화가 그냥 그렇게 끝난다고 해도 좋다.

그런데 그러한 치열한 승부의 세계에서 투수로서 오른쪽 팔을 못 쓰게 된 고로는 이제 왼손 투수로서 고교야구에서의 2막을 열어젖힌다. 야구부조차 없는 학교에서 새로 야구부를 만들어 다시 동료를 얻고, 미숙하기 짝이 없는 동료들이 거듭된 훈련과 실전으로 조금씩 나아지고, 그리하여 최강의 상대와 맞서 싸우는 과정 속에는 우정과 경쟁과 열정이 넘쳐난다. 객관적인 실력 차이가 엄연하기에 투지와 의외성이 그 차이를 메우기 위해 동원되고, 하여 매 승부는 치열하기 짝이 없다. <메이저>가 아니라 <열혈 고교 야구>라는 제목의 만화가 그냥 그렇게 끝난다고 해도 좋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열혈 리틀 야구>의 재탕이 진행된다는 것이다.

물론 재탕이라는 평가는 다소 과장된 것이고 실제로 영웅의 성장기라고 할 만한 앞의 두 이야기는 사뭇 흥미진진하게 읽히는 편이다. 게다가 순간순간 발휘되는 개그 센스나 꽤 섬세한 그림체도 괜찮고, 무엇보다도 무려 17년 간 78권을 연재한 작가의 집념은 실로 존경스러울 정도다. 하지만 집념이 지나쳐서 작품에도 '집념'이 범람한다는 게 문제다.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고 차례로 마이너리거, 일본 국가대표, 메이저리거를 거치는 고로의 행보 내내 치열한 승부와 시련이 반복되다 보니 외려 읽는 내가 물릴 지경이다. 특히 언제나 혼돈 상황으로 몰아가는 경기 장면은 투지와 의외성을 강조하다 보니 결국 비슷한 승부가 반복된다.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정신력으로 버티는 고로와 그런 고로에게서 힘을 얻는 동료들, 마지막 순간 반드시 나오는 상대의 실책과 우리 편의 행운의 안타, 누구도 예상 못한ㅡ하지만 <메이저>를 계속 읽다 보면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ㅡ의외의 홈런포 등, 이쯤 되면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경기가 없는 게 꼭 내 기억력 탓만은 아니다.

더군다나 경기 외적인 측면에서도 '무리수'라고 할 만한 설정도 적지 않다. 대개의 경우 이런 무리수는 극한의 상황을 부러 강조하는 와중에 튀어나오는 경향이 있는데, 심지어 모든 파고를 넘은 듯하던 마지막에 또 다시 극한의 상황을 조성하는 작가의 '집념'에는 정말 두손 두발 다 들 지경이다. 만약 78권이 완결인 걸 진즉 몰랐다면 아마도 78권이 완결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을 게 분명하다. 다만 자연스럽기는커녕 지나치게 극적인 상황으로, 사뭇 작위적으로 끌어나가는 것이 분명한 것 같은데도 의외로 그런 상황에서조차 일말의 감동을 안겨주는 저자의 능력은 차라리 감탄스럽긴 하다. 하지만 마침내 대작을 완성시킨 저자의 또 다른 '야구만화'를 기대한다는 말은 예의상으로라도 차마 못하는 건, 솔직히 나는 이 작가가 설령 다른 야구만화를 내어 놓는다고 해도 그게 결국 <메이저-다시보기>가 될 거라고 거의 확신하기 때문이다. 미안하지만, 이제 <열혈 야구소년 대 분투기>는 그쯤하면 되었으니까.

<메이저> 다음으로 공을 세운 것은 장영훈의 무협소설인 <절대군림>이다. 언제가부터 무협소설의 권수가 늘어나는 게 흔하게 되었다고는 해도 14권은 상당한 분량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데, <절대군림>을 집어 들었던 초반만 해도 나는 이 작품의 넉넉한 분량을 꽤나 흐뭇하게 여겼었다. 한 마디로 그리 선호하지는 않는 '먼치킨'이라고 해도 좋은 작품임에도, 초반의 재미가 기대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책장을 서너 장씩 휙휙 넘길 만큼 재미가 확연히 떨어졌다. '상식 이상'의 능력을 지니고 있는 주인공의 등장은 개성 넘치는 캐릭터와 그들의 범상치 않은 행보 덕에 그럭저럭 납득했지만, 더욱 강한 적이 나타나고 그에 맞추어 주인공의 능력도 계속 급속도로 높이다 보니 <절대군림>이 가지고 있는 장점은 사라져 버렸고 결국 그냥 그렇고 그런, 먹지도 못하는 '먼치킨'만 남는 느낌이다.

그러고 보면 장영훈의 또 다른 작품인 <보표무적>도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던 것 같다. <보표무적>의 경우에도 엄청나게 강한 주인공을 내세운 독특한 전개가 초반에 상당한 재미를 주었지만 뒤로 갈수록 심각하게 강한 적과 역시나 터무니없이 강한 주인공이 부딪치면서 재미가 급격히 떨어졌었다. 물론 재미를 느끼는 부분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 장영훈의 무협소설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개성 넘치는 캐릭터들이 보여주는 익살스럽고 소소한 이야기들인데, 이런 부분들이 엄청나게 강한 적과의 싸움에서는 유독 사라지는 것 같아서 아쉬웠다. 특히 <절대군림>의 경우에는 중반쯤부터 갑자기 분량을 늘리기 위해 억지로 이야기를 비틀어 대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는데, 초반이 무척 흥미로웠던 까닭에 아쉬움이 더욱 컸다.

마지막으로 100권을 독파하는 데 그다지 도움이 되지는 못했지만 현실적으로 가장 도움이 되었던 책은 <심야식당>이었다. 얼핏 보면 어설퍼 보이는 듯한 그림체와 약간은 작위적인 느낌이 드는 이야기들은 내 높은 기대를 충족하기에는 약간 무리가 있었지만 그런 것이야 어쨌든 이 책에는 요리, 좀 더 정확하게 말해서 '비엔나소시지'가 있었다는 게 중요하다. 이 '비엔나소시지'로 말할 것 같으면, 엄마의 주 레퍼토리 중 하나였다가 언제부턴가 슬며시 우리집 식탁 위에서 사라진 메뉴였는바, 나는 <심야식당>을 보고서 필연적으로 '비엔나소시지'를 떠올렸고 이내 엄마에게 '비엔나소시지'를 주문했다(<심야식당>의 '비엔나소시지'처럼 문어 모양으로 칼집을 내어달라고 했다가 엄마에게 혼났다는 얘기 따위는 굳이 덧붙이지 않기로 하자). 그리하여 오랜만에 먹은 '비엔나소시지'의 맛은 기대만큼 훌륭했으니, 나는 실로 지난 몇 년간 이보다 더 충실한 '독후활동'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없다. 내가 계속해서 <심야식당>의 다음권을 보려는 유일한 이유는 '비엔나소시지'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확실히 '비엔나소시지'에게는 그만한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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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브라이슨은 살아가면서 결코 할 수 없는 세 가지 일 중 하나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꼽았지만 내 경우에는 완전히 그와 반대다. 나라면 살아가면서 결코 할 수 없는 세 가지 일 중 하나로 "고향을 떠나는 것"을 들 테고, 물론 이때 말하는 '고향'이란 빌 브라이슨이 의미한 것과 마찬가지로 '조국'을 뜻한다. 어쩌다보니 나는 '대한민국'이라고 자칭하는 나라에서 태어났고 그게 싫든 좋든, 나로서는 도저히 이 나라를 떠나는 것을 상상하기 어렵다(덧붙이자면, 내가 살아가면서 결코 할 수 없는 나머지 두 가지는, 책장에 안 읽은 책이 없게 하는 것, 그리고 할 수 없는 일을 단 세 가지로만 꼽는 것이다ㅡ슬프게도 할 수 없는 일은 너무도 많다).

그러나 세상에는 어떤 이유로든 자신이 태어난 나라를 떠나서 살아가는(혹은 살았었던)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고, 그렇기에 그러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접하게 된다고 해도 별로 놀랍지는 않다. 아니, 그렇기는커녕 외려 '고향'을 떠나는 일이 내게는 불가능한 일로 여겨지는 만큼 '고향'을 떠난 사람들의 삶은 어쩐지 조금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데가 있고, 이번에 읽은 세 권의 책이 모두 고향을 떠난(혹은 떠났었던) 이들의 이야기인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그리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선택은 꽤나 괜찮았다.

먼저 집어든 책은 요네하라 마리의 <프라하의 소녀시대>. 이 책은 제목 그대로 프라하에서 소녀시대를 보낸 요네하라 마리와 함께 우정을 나누던 소녀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그러한 과거에 대한 회상과 더불어 수십 년 후 요네하라 마리가 그때 그 소녀들을 찾아나서는 과정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리차, 아냐, 야스나와 관련된 일화를 풀어내는 요네하라 마리의 기억력과 묘사력은 탁월하며, 소녀들의 우정을 소중히 여기며 그들과의 재회를 위해 홀연 동유럽으로 날아가는 요네하라 마리의 의지는 탄복할 만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인상적인 건, 이른바 '소녀시대'로 대변되는 '과거'를 대하는 요네하라 마리의 태도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러시아어를 배웠던 어린 시절의 경험이 결국 러시아어 동시통역사의 삶으로 이어졌다거나 혹은 남들은 흔히 경험하기 어려운 이국에서의 특별한 우정이 있었기에 수십 년 만에 동유럽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고 하는 단선적 결론은 틀린 것은 아니지만 충분하지는 않다. 사회주의 체제에서 배웠던 가치, 이국에서 나누었던 우정, 역사적인 교훈, 태어난 뿌리에 대한 자각 등, 행간 곳곳에는 '과거'로부터의 경험을 소중히 여기는 요네하라 마리의 사고가 여실히 드러나고, 하기에 요네하라 마리가 보여주는 지금의 모습이 오히려 그의 '소녀시대'를 빛나게 만든다고 말해야 옳을 듯하다. 요컨대, '과거'란 단지 지나가 버린 고정된 무엇이 아니라 지금 과거를 어떻게 마주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달리 채색될 수 있는 무엇이며, 이 책은 그점을 증명하는 빛나는 예시인 셈이다.

한편, 그에 비해 영국인인 저자가 프랑스의 프로방스로 옮겨와 산 열두 달의 경험을 풀어낸 <나의 프로방스>에는 무엇보다도 '현재'를 충실하게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두드러진다. 집을 사는 데 필요한 엄청난 양의 문서, 휴가철이면 우르르 몰려드는 관광객들, 무지막지한 추위, 도무지 끝나지 않는 공사 등, 영국에서의 삶과 비교하면 이상해 보이고 심지어 납득하기 어려운 일들이 프로방스에는 가득하지만 저자는 그 모든 것들을 긍정적이고 유쾌한 시각으로 바라볼 줄 안다. 그리고 동시에 멋진 날씨, 맛있는 식사, 여유로운 나날 등, 프로방스에서 주어지는 축복을 마음껏 즐긴다. 어느 곳에서 태어났든 혹은 어느 곳에서 왔든지 상관없이, 다만 지금 살아가는 프로방스의 방식을 존중하고 기꺼이 여기며 프로방스에 동화되는 저자의 모습은 싱싱하면서도 매력적이고 또 즐거워 보인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삶의 방식의 요체는 다음과 같은 대목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어느새 우리는 며칠이나 몇 주가 아니라 계절 단위로 생각하는 법을 배워가고 있었다. 프로방스가 우리 때문에 본연의 속도를 바꾸지는 않을 테니까.(p352)

그런데 이쯤에서 솔직히 말하자면, 새로운 '고향'에서의 삶에 대한 낙관적인 태도는 매우 훌륭하긴 해도 아주 재미있지는 않다. 내가 유독 베베 꼬인 사람이라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새로운 고향에서 맞닥뜨리는 '본연의 속도'란 건 이쪽에서 봤을 때 종종 납득하기 어렵고, 하여 그럴 때 초래되는 엇박자의 이유를 그 '제멋대로의 속도' 탓으로 돌려버리는 건 충분히 있을 만한 일이 아닌가. 쉽게 말해서 새로운 고향에 대해 한바탕 불평을 쏟아내는 일은 꽤나 자연스럽고 특히 흥미로울 수 있다는 얘기고, 내가 아는 한 그런 일을 세상에서 가장 잘 해낼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빌 브라이슨이다. "당신은 그 칼럼에서 늘 불평만 늘어놓잖아요."라는 아내의 말에 빌 브라이슨은 이렇게 대꾸한다. "불평하는 게 내 일인걸."

<빌 브라이슨 발칙한 유럽산책>의 선전 이후 빌 브라이슨의 책들을 이른바 '빌 브라이슨 발칙한 시리즈'로 통일해버리는 출판사의 작명센스는 그리 호감이 가는 건 아니고 그 중에서도 '빌 브라이슨 발칙한 미국학'이라는 제목은 납득하기도 어렵지만(그런데 이런 제목이 꽤나 부러웠던지 <빌 브라이슨의 재밌는 세상>을 출간했던 또 다른 출판사는 이번에 개정판을 내면서 제목을 '빌 브라이슨 발칙한 미국산책'으로 바꿨다), 나는 내가 이런 제목 따위는 무시하고 이 책을 읽게 된 일을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한다. <빌 브라이슨 발칙한 미국학>은 일단 '미국학'이라는 단어에서 멈칫하게 되고, 혹 진심으로 '미국학' 따위를 읽을 마음이 있더라도 '발칙한'에서 턱 걸리게 될 것 같지만, 빌 브라이슨은 적어도 이 책에서 '빌 브라이슨'이라는 이름에 대한 독자의 기대를 결코 저버리지 않는다.

일전에 어느 책에서 빌 브라이슨이 농담처럼 언급한 바 있던, "살아가면서 결코 할 수 없는 세 가지 일 중 하나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라는 말을 철회하면서 시작하는 이 책에서 빌 브라이슨은 흔히 '귀향'이라는 이미지가 품기 쉬운 애틋함과 그리움 그리고 익숙함이라는 감정 대신 불평과 불평 그리고 불평으로 채워 넣어 독자를 즐겁게 한다. 우편 서비스, 컴퓨터 모델 넘버, 영화, 크리스마스 장식, 철자법 검사 프로그램, 관료주의, 가게 계산대, 커피 판매대 등, 그가 불평을 쏟아낼 대상은 '고향' 어디에나 넘쳐나고, 물론 실은 꼭 '고향'이어야 할 필요도 없다. 그러니까 빌 브라이슨은 그저 어쨌거나 '고향'으로 돌아가서는 여전히 그 자신의 '일'을 하고 있는 셈이라고 할 수 있는데, 언제나 느끼는 바지만 확실히 그는 자신의 '일'에 대단한 재능이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빌 브라이슨의 대꾸에 "불평하는 게 당신이 하는 전부죠."라고 맞받아친 아내의 말처럼 이 책이 오직 불평만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나로서도 오직 불평만을 쏟아내며, 이런 불평쟁이의 책을 읽는 일 따위는 진즉 관두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거지 같은 불평 뒤에 자리한 날카로운 비판의식과 탁월한 유머 감각 그리고 의외의 따뜻함이 진정 그의 불평을 돋보이게 만든다. 익숙하기보다는 종종 낯설고, 그립고 애틋하기보다는 때때로 당혹스러운, 하여 도처에 불평해야 할 것이 넘쳐나는 그의 '조국' 미국이 그래도 괜찮은 나라 같고 또한 사람이 함께 어울려 살 만한 곳이라고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마도 불평 뒤에 자리한 빌 브라이슨의 그와 같은 진면목이 충분히 독자의 마음으로 전해지기 때문이 아닐까.

어쨌거나 빌 브라이슨이 '불평'을 '일'로 삼는 괴짜인 건 분명하고, 다시 찾은 '고향'에서 불평을 한껏 쏟아내는 게 그리 훌륭한 태도라고 할 수 없는 것도 분명할지 모른다. 그러나 심지어 고등학교 졸업식 축사의 연설마저도 즐겁게 읽을 수 있게 만드는, 더군다나 의외로 가슴에 와 닿는 내용을 담을 줄 아는 빌 브라이슨의 불평 가득한 글이 대단히 매력적인 것도 분명할 것이며, 모르긴 몰라도 이런 불평쟁이라면 그의 고향도 그의 불평을 즐거이 반겨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과히 틀리지는 않으리라. 그러니 아무쪼록 "만약 당신이 빌 브라이슨만큼 언어 구사에 능하고, 위트 있고, 역사와 통계에 관심이 많고, 웃음이 터져 나올 시점을 정확히 아는 작가를 알고 계시다면 내게도 알려주시기 바란다."라는, 책 뒤표지에 언급된 <시카고 트리뷴>의 짤막한 리뷰 내용처럼, 그런 작가를 아는 사람이 있다면 내게도 꼭 알려주기를 진심으로 바랄 뿐이다.

1. 가끔은 여러분이 살아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이런 당연한 이야기를 왜 하는지 의아해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사실 우리가 이런 고마운 사실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이 어찌나 적은지 놀라울 정도입니다. 엄청난 행운에 의해 이 우주의 모든 물질들 중 아주 적은 일부가 모여서 여러분이 생겨났고, 여러분이 존재하는 특권을 누리는 기간은 영겁의 세월 중 극히 짧은 한순간에 불과합니다.
여러분은 오랜 세월 동안 존재하지 않았고, 그 사실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다시 무(無)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여러분은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이 놀라운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살아가는 동안 무엇을 하든 여러분을 태어나게 한 이 놀라운 성취에 조금이나마 비견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축하합니다. 잘 태어나주었습니다. 여러분은 정말 특별합니다.
2. 그러나 그렇게 특별하지는 않습니다. 지구상에는 50억 명의 다른 사람들이 있으며, 그들 모두가 여러분만큼이나 중요하고 여러분만큼이나 신의 위대한 계획 속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끔찍한 실수를 저지르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앞으로 살아가면서 만나게 될 거의 모든 사람들이 여러분의 배려를 고마워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러분을 도울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피자를 배달하고, 여러분이 구입한 식료품을 봉투에 담아주고, 여러분이 어지럽힌 모텔 방을 청소할 것입니다 이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지 않다면 지금부터라도 그런 습관을 들이십시오. (p297-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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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독자에게 간접경험을 선사한다."라는 명제를 순진하게 받아들이자면, 2011년 초를 나는 꽤나 근사하게 보낸 셈이 된다. 새해가 시작되자마자 나는 잉글랜드로 날아가 프리미어리그에 속한 20개 팀이 있는 지역을 차례로 둘러보았고(<곡괭이 싸커홀릭>), 다음으로 일본으로 날아가서는 일본의 아름다운 이곳저곳을 여유롭게 누비고 다녔으며(<일본의 걷고 싶은 길>), 그걸로도 모자라 종래에는 제주도에서 아름답고 평화롭기 그지없는 제주올레를 맛보기까지 했으니 말이다(<꼬닥꼬닥 걸어가는 이 길처럼>). 확실히 이 정도라면 누구한테도 꿀리지 않을 만한 환상적인 새해의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하지만 슬픈 사실을 말하자면, 직접경험이 언제나 좋지는 않은 것처럼 간접경험도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며 이건 그 이름만으로도 근사해 보이는, 이를테면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 축구여행'이랄지 혹은 '일본걷기여행'이랄지 또는 '제주올레' 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좋은 간접경험을 얻기 위해서는 직접경험을 솜씨 있게 전해주는 저자를 만나야 하고, 아울러 독자의 경험치나 성향도 간과할 수 없다. 더군다나 내가 생각하기에, 독자로서 '간접경험'에 대한 기대와 실망의 교차를 가장 크게 느끼기 쉬운 분야가 '여행서'가 아닐까 싶은데, 유감스럽게도 새해 들어 처음으로 집어든 <곡괭이 싸거홀릭>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기본적으로 2009~2010시즌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에 참가중인 20개팀을 모조리 방문할 꿈을 가지고서 마침내 이를 실현한 한 축구팬의 여행기인 <곡괭이 싸커홀릭>에는 기대가 컸었다. 흔히 보던 축구 '전문' 기자의 식상한 형식이 아닌, 그저 한 명의 축구팬이 영국으로 날아가 좌충우돌하며 건져낼 자유롭고 생생한 프리미어리그 이야기를 드디어 만날 수 있게 되나 싶었다. 시작은 괜찮았다. 첫 번째 방문지는 런던의 남서쪽에 위치해 있는 풀럼. 비록 풀럼의 경기를 보았다거나 풀럼의 경기장 내부를 둘러본 것은 아니지만 풀럼 구장 주변의 사진들은 흥미로웠고, 특히 풀럼 공식 상점에 진열된 다양한 상품들을 찍은 사진은 디자이너인 저자의 관심과 색감이 그대로 느껴지는 듯해서 즐거웠다. 두 번째로 풀럼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첼시를 방문할 때도 괜찮았다. 첼시의 홈구장과 그 주변의 모습에 대한 짤막한 단상과 사진들. 그리고 첼시의 푸른 유니폼을 닮아 푸르기 그지없는 다채로운 첼시의 상품들과 그것을 느낌 있게 담아낸 사진들. 다 괜찮았다. 하지만 이런 레퍼토리가 계속, 그러니까 정확히 20번이 반복되면 별로 괜찮지가 않다.

<곡괭이 싸커홀릭>은 이미 말했듯 프리미어리그 20개 팀을 모조리 둘러본다. 그런데 문제는 이와 같은 만만치 않은 여정이 단 20일 만에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물론 여행의 절대적인 시간이 여행기의 질을 절대적으로 좌우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20일은 20개 팀을 모두 둘러본다고 말하기에 절대적으로 부족한 시간임에는 틀림없다. 결국 이 책에서 계속해서 주연 역할을 하는 건 '축구'나 '여행'이 아닌, 각 구단들의 다양한 엠블럼과 유니폼 색상만큼이나 다채롭고 화려한, 각 구단의 '상품'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상품'이 빠지지 않고 나오고, 그런 와중에 처음에는 흥미롭고 색다르게 느껴지던 장점들이 동일한 패턴 속에서 단점으로 탈바꿈하는 듯하다. '프리미어리그의 모든 팀을 둘러보겠다.'는 것이 저자의 꿈이었으니 만큼 그것을 현실화시킨 것은 대단하다고 할 만하지만, '20'이라는 숫자에 방점을 찍어 '모든 팀'을 비슷한 비중으로 소개하다 보니 여행의 특별함과 생생함은 상당 부분 사라지고 만 것이 아닐까. 무엇보다도 한정된 시간 안에 숙제를 해치우는 듯한 느낌이 드는 이 여행에는, 필연적으로 만나서 함께 시간을 보내다가 다시 헤어지는, '사람'과의 접점이 드물 수밖에 없다는 게 가장 아쉽다.

이미 여러 권의 여행기를 펴낸 김남희의 <일본의 걷고 싶은 길>도 '사람'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꽤나 실망할 뻔했다. 마치 국어 교과서에 예문으로 실리겠다는 듯, 어디에 가서 무엇을 보고 듣고 경험했는지를 기행문에 어울리는 간결한 현재진행형 시제로 써내려간 문장들은, 역시나 국어 교과서를 읽을 때면 대개 그러했듯 조금 따분했다. 약간 과장하면 저자가 일본여행에 대해 보고를 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받았는데, 나는 여행관련 업무에 종사하는 사람이 아니니 내가 관심 가질 만한 보고도 물론 아니었다. 외려 나는 2권에서 다룰 '규슈와 시코쿠'에 대해서는 단호히 보고를 받지 않겠다는 생각이었는데, 다행히도 책을 읽으며 이 보고에 익숙해질수록, 그리고 특히 '사람'이 하나 둘씩 나타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할수록 책을 읽는 일이 좀 더 흥미로워졌다. 저자는 일본에 사는 지인들을 여행 속에서 적극적으로 만나고 그러한 만남 속에서 드러나는, 그들의 따뜻함과 우의 그리고 한일 관계에 얽힌 그들의 생각 등을 접하게 되는 일은 꽤나 마음이 따뜻해지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한편으로 저자가 너무 빈번히 지인들과의 만남을 가지는 덕분에 이 여행기는 종종 '일본의 걷고 싶은 길'에서 '일본에서 만나고 싶은 사람'으로 둔갑하곤 한다. 그리고 그럴 때면 내가 저자의 인맥에 대해서도 구구절절 알아야 되나 싶기도 하고, 또 일본에 지인이 없는 사람은 대체 어떻게 일본을 여행하란 말인가, 하는 심술궂은 반감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저자가 프롤로그에서 "언제나 다정한 오사카의 일본인 부모님, 평생토록 가까이 모시고 싶은 스승 신이치 선생님 가족, 나보다 한국을 더 사랑하는 요코 언니 부부, 내 오랜 친구 마미코와 켄, 새벽의 계단 콘서트를 열어준 가케이 군, 열흘이나 나를 먹이고 재워준 테리와 마유미의 따뜻한 마음이 없었다면 여행은 무척 쓸쓸했으리라."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게, 나로서도 이들의 등장이 반갑다고 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 같다. 의심의 여지없이 나는 이들의 이름을 일일이 기억할 수 없고, 더욱이 딱히 내게 따뜻하게 대해준 것도 아니지만, 이들이 없었다면 이 여행기는 무척 무미건조했을 것 같으니까 말이다. 물론 덧붙이자면, 이건 이 책에 대한 찬사의 의미만은 아니지만.

여러모로 이번에 읽은 세 권의 여행기 중에서 가장 좋았던 건 제주올레 이사장을 역임하고 있는 서명숙의 두 번째 책, <꼬닥꼬닥 걸어가는 이 길처럼>이었다(이 책을 단순히 여행서로 분류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서명숙의 첫 번째 책 <제주걷기여행>에 비하면 이번 책은 좀 더 '사람'에 초점을 맞춘 짤막짤막한 에피소드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읽는 내내 자그마한 감동들이 마치 잔잔한 파도처럼 되풀이하여 밀려들어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어려운 와중에도 초심을 지켜 '제주올레'의 순수성을 유지하려는 사람들, 그 사람들의 곁을 찾아들어 도움의 손길을 아끼지 않는 사람들, 각자의 재능을 발휘해 '길'을 좀 더 풍요롭고 아름답게 가꾸는 사람들, 그리하여 계속해서 이어지는 '길'을 걸으며 변화하고 행복해하는 사람들이 책 속에서 끊임없이 나타나면서 독자의 마음을 살며시 흔들었고, 나도 물론 예외는 아니었다. 덕분에 나는 가끔씩 흐뭇한 미소를 짓기도 하고 때로는 울컥해 하기도 하면서 내가 생각만큼 감정이 메마른 사람은 아닌지도 모르겠다고 공연히 다시 생각해보기도 했는데, 물론 만약 여전히 내가 내 생각만큼은 감정이 메마른 사람이라면 그건 그냥 책이 메마른 이의 감정마저 적실 정도로 좋았다는 뜻이니, 나로서는 어느 쪽이 맞든 별로 불만은 없겠다. 어쨌거나 책을 읽는 동안 행복함과 그리움에 감싸여 머지않아 직접 다시 제주도를 찾을 꿈을 꾼다는 게 적잖이 위안이 되었고, 생각해 보면 결국 아마도 이런 이유로 잦은 실패를 맛보면서도 끝내 여행 관련 서적을 외면하지 못하는 것일 테다.

끝으로 여행기와는 무관한 한상운의 무협소설 <무림사계>를 우연히 읽게 되었는데 이 작가, 정말로 대단한 이야기꾼이다. <무림사계>가 대단한 핵심적인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이 무협소설이 내가 끔찍이도 싫어하는 설정을 지니고 있다는 데 있다고 말해도 좋을 듯하다. 그러한 치명적인 약점에도 불구하고 읽는 이를 끝내 감탄하게 한다면 이거야말로 정말 대단한 솜씨라 하지 않을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참고로 내가 싫어하는 설정이란 무협소설에 강시나 기괴한 술사들이 지나치게 활보하면서 강호를 도산검림이 '무색한' 세계로 만드는 것인데, <무림사계>의 경우에는 배경을 서양인들이 중국에 출몰하던 19세기 무렵(아마도?)으로 설정하면서 무림인과 '총'과의 조우를 초래한다. 물론 총에 맞으면 무림인이라도 당연히 죽고, 이건 강시만큼이나 도산검림의 강호를 위협할 수 있는 치명적인 요소다. 게다가 <무림사계>의 결말 방식도 내가 별로 선호하는 방식은 아니다.

하지만 <무림사계>는 자칫 한순간에 무너지기 쉬운 세계를 정말로 매끄럽게 끌고 나간다. 제목처럼 봄, 여름, 가을, 겨울로 이어지는 시간 속에서 변화하는 개성 넘치는 등장인물들은 단순한 재미 이상의 메시지를 전해주고, 스토리는 기발하며 구성은 탄탄하기 이를 데 없다. 게다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긴장감 속에서도 깨알 같이 터지는 유머까지. 그간 보아오던 무협소설과는 그 궤를 달리하기에 단순한 비교는 어렵겠지만, 이 정도면 정말 최고의 무협소설이라고 해도 그리 모자라지 않을 것 같다. 다만 한 가지, 1권에서 잠깐 등장할 때만 해도 그리 예쁘지는 않은 여자로 묘사된 앵앵이, 이후 6권에서 주인공과 재회했을 때에는 상당한 미색의 여인이라고 나와서 약간 의아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이건 당연한 일인 것 같기도 하다. 여자의 변신이 무죄인 건 무협소설 속이라고 해서 딱히 예외는 아닐 테니까. 물론, 설령 그게 아니라 작가가 잠깐 딴 데 정신을 팔았기 때문이라고 해도 별로 상관은 없다. 지금 심정만 같아서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작가라면 앵앵이 나중에 남자로 둔갑하다고 해도 너그럽게 넘어갈 수 있을 것 같다. 뭐, 이건 어디까지나 남자의 '변심' 또한 무죄라는 단서 하에서 하는 말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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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아나키즘, 그 반역의 역사>라는, 제목만 봐도 잠 깨나 올 것 같은 책을 감히 집어든 건 내가 그 무렵 잠을 잘 못 자고 있었기 때문...은 물론 아니다. 그보다는 일단 이 책이 집에 굴러다니고 있었던 데다(물론 내가 사 놓은 건 아니다) 책도 퍽 가벼웠던 점을(물론 단지 물질적인 관점에서만) 이유로 들 수 있겠는데, 이런 없어 보이는 이유가 별로라면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 <올림픽의 몸값>이 이 책을 집어든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말해도 좋겠다. 과연 일본의 도쿄 올림픽 개최를 다이너마이트 폭발로 위협하며 '올림픽의 몸값'을 요구하는, 소설 속 주인공 시마자키 구니오를 단지 '아나키스트'라는 하나의 단어로 대치할 수 있을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쩐지 악당과 정의의 사도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듯한 주인공의 행보를 보자니 '위험'과 '매력'을 동시에 풍기는 듯한 '아나키스트'에게도 약간이나마 관심이 갔던 것이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리하여 슬며시 집어든 <동아시아 아나키즘, 그 반역의 역사>는 솔직히 내 기대와는 조금 달랐다. 얄팍한 책임에도 진도는 잘 나가지 않았고, 특히 동아시아 아나키스트의 어떤 '위험한 매력'을 드러내는 데에도 충분치 않았다. 본래 잠 못 들어 고민하는 일도 드물었으니 수면제로 유용하지 않았음도 물론이다.

노파심에서 말하자면, 이건 책이 나빴다거나 혹은 형편없었다든가 하는 따위의 이야기는 당연히 아니다(자랑은 아니지만 나는 아나키즘에 관한한 문외한에 가깝다). 다만 소설 속 주인공에게서 아나키스트의 면모를 보고, 아니 아마도 아나키스트의 면모가 아닐까 하는 생각 따위를 하다가 책장 한쪽에 꼽혀있는 '아나키스트' 어쩌고저쩌고 하는 제목의 책을 발견하고는, 더욱이 그 책이 비교적 얄팍하기에 내심 반가워하며 그보다 더 얄팍한 마음으로 책을 펼쳐든, 그러니까 이건 애당초 접근방향이 사뭇 달랐던 한 독자의 가벼운 불평일 뿐인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가벼운 접근에 따른 가벼운 실망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 몇 가지 인상적인 부분이 없지 않은데, 아나키즘을 단순히 무정부주의로 번역하는 건 아나키즘에 대한 오해를 조장할 위험이 있다는 사실과 그 자체로 묵직한 무게감을 지니는 몇몇 아나키스트들이 남긴 말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올림픽의 몸값>의 시마자키 구니오의 위험한 행보를 독자가 은연중 응원할 수밖에 없는 분명한 이유를 이 책에서 찾았다는 것 등을 들 수 있겠다.

"민중은 권력에 쉽게 굴복하지만 그렇다고 권력을 숭배하지는 않는다."(p7) ㅡ바쿠닌ㅡ
"군비와 전쟁은 오늘날의 국가가 자본주의 제도를 옹호하기 위해 만든 철의 장벽이며, 대다수의 인류는 이로 말미암아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있다."(p29) ㅡ고토쿠 슈스이ㅡ
"천황이란 무엇인가? 국가란 인간의 신체, 생명, 재산, 자유를 끊임없이 침해하고, 유린하고, 겁탈하고, 위협하는 조직적 대강도단이다. 대규모 약탈주식회사이다. 법률은 국가라는 대강도단과 약탈회사 주주들의 대표자회이다. 천황과 국가란 이들 강도단과 약탈회사의 우상이며 신단이다."(p125) ㅡ박열ㅡ
"천황은 일본에서 태어난 인간에게 최대의 모욕이며, 천황의 존엄성을 입증하는 것은 국민이 노예임을 의미하는 것"(p125) ㅡ가네코 아야코ㅡ

사실 <올림픽의 몸값>에서 시마자키 구니오의 행보는 결코 절대적으로 옳다고 말하기 어렵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올림픽 개막식이 열리는 주경기장에서 다이너마이트를 폭발시키겠다는 건 미친 짓이며, 특히나 소설 속에서 시마자키 구니오와는 다른 행보를 보이는 인간 군상들의 모습을 보면 더욱더 그러하다. 예컨대, 경시청 소속의 형사 오치아이 마사오는 시민의 안전과 경찰로서의 자부심 그리고 국가의 위신을 위해 시마자키 구니오를 잡으려 노력한다. 그는 올림픽 개막식이 둘째 아이의 출산예정일인 한 아내의 남편이자 이제 막 건설된 아파트에 새로 입주한 가장으로서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자 하며, 따라서 시마자키 구니오의 테러 성공은 곧 오치아이 마사오의 임무 실패를 의미한다. 또한 올림픽 경비 책임자의 둘째 아들이자 시마자키 구니오의 대학 동문이기도 한 스가 다다시라든지, 시마자키 구니오에게 호감을 지니고 있는 헌책방 집 딸 고바야시 요시코의 입장에서도 시마자키 구니오의 테러 시도는 이해와 응원의 대상은 아니다. 각각 올림픽 이후 새로운 일본의 세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한 이들과 시마자키 구니오 사이에는 서로 넘을 수 없는 큰 강이 존재하는 셈이다.

더군다나 이들 주요 등장인물들뿐만이 아니라 책 속에 나오는 다양한 인물들이 한결같이 올림픽 개최 성공을 기대하는 모습을 보면 시마자키 구니오의 입지는 더욱 좁아진다. 전후의 힘겨운 시기를 지나 세계가 지켜보는 올림픽 개최를 맞이하여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일 올림픽을 들뜬 마음으로 보러 나가는 고바야시 요시코의 할머니랄지, 혹은 입으로는 올림픽 개최의 국가 총동원 체제를 비판하면서도 은근히 올림픽에 대한 기대를 감추지 못하는 과격 학생운동 단체랄지, 혹은 심지어 올림픽 기간 동안 자발적으로 조직원들을 산으로 피하게 하는 도쿄의 야쿠자 두목까지, 올림픽 성공개최를 희망하는 절대 다수 일본 국민들의 모습까지 감안하면 이제 시마자키 구니오의 편에는 오직 그의 동료인, 소매치기 무라타 도메키치밖에 없는 것이다. 아니, 심지어 무라타조차도 올림픽의 성공을 방해하는 일은 꺼려하니, 과연 이런 상황에서 시마자키 구니오의 행동이 티끌만큼이나마 '정의'로 인정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과격하고 고독한 시마자키 구니오의 행보를 긍정하게 만드는 것은 공안요원 야노로 대표되는 '국가'의 존재다. 공공의 이익 혹은 국가를 우선한다는 명목으로 개인에게 거리낌 없이 행해지는 국가의 폭압적인 수단들, 사소한 소수의 희생 따위는 더 큰 대의를 위해 불가피하다는 국가의 인식이 시마자키 구니오의 행보를 일정부분 정당하게 만든다. 시마자키 구니오는 올림픽 경기장을 빨리 건설하기 위한 '속도전' 속에서 희생되는 노동자들을 목격하고, 그런 희생을 무심히 보아 넘기는 세상을 경험한다. 그가 최대한 인명 피해가 없게 하며 벌인 일련의 폭탄 테러는 완벽한 국가의 통제 아래 언론에 보도되지 않고, 그 사건은 단지 폭발을 직접 목격한 일부의 환상으로만 남는다.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라는 오직 유일무이한 목표를 위해서는 어떠한 반대 의견이나 비판 그리고 흠집이나 우려도 용납되지 않고, 이런 상황 속에서 시마자키 구니오가 좀 더 과격한 테러를 시도하게 되는 것은 어느 정도 필연인 것이다. <동아시아 아나키즘, 그 반역의 역사>에서 말하듯, 시마자키 구니오에게 있어 "테러 행위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행동을 통한 선전' 수단의 하나"였고, 결국 "테러가 최선의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나, 자신의 도덕성과 희생을 담보로 테러를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이를 알기에 독자는 시마자키 구니오의 행보를 은연중 응원하게 되는 것이리라.

하지만 <남쪽으로 튀어>에서 그랬던 것처럼, 오쿠다 히데오는 <올림픽의 몸값>에서도 일방적으로 어느 하나가 옳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시마자키 구니오 외의 다른 주요 등장인물은 그들이 서있는 지점에서, 전후 올림픽 개최에 성공하며 바야흐로 새로운 시기를 향해 나아가는 일본을 나름대로 충실히 살아내고 있고, 이들에 대한 오쿠다 히데오의 시선은 시마자키 구니오를 향한 시선과 비교해 더 따뜻하지도 혹은 더 차갑지도 않다. 다만 오쿠다 히데오는 '역자후기'에서 역자가 말하듯, "국가 권력이 철저히 은폐해버린 단 한 명의 이질분자를 훌륭하게 발굴"해 내었고, 그리하여 진정한 '올림픽의 몸값'의 베일을 벗겨내는 데 주력하는 것처럼 보인다. 올림픽으로 대표되는, '국익'이라는 미명하에 이루어지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는 바는 모두가 다를 수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올림픽의 몸값'이 무엇인지에 대해 분명히 말할 수 있을 때에만 비로소 의미가 있는 법일 테니까 말이다. 물론, 이때 '올림픽의 몸값'이란 시마자키 구니오가 국가에 제시한 8천만 엔이 아니라,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이면에서 힘든 노동을 강요당하는 민중의 희생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고, 덧붙여 이를 은폐하는 '국가'가 별로 좋은 놈만은 아닌 것도 크게 의심할 일은 아닌 것 같다. 뭐, 2011년의 '대한민국'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을 테고. 어쨌거나 소설적 재미와 현실의 무게를 적절히 배합할 줄 아는 오쿠다 히데오의 능력은 이 소설에서도 또 한 번 빛을 발하는 것 같다.

"노동자의 목숨이란 얼마나 값싼 것인가. 지배층이 민중을 바라보는 시선은, 19년 전에 본토 결전을 상정하고 '1억 국민이 모두 불꽃으로 타오르자' 라고 몰아치던 시절 그대로,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민중은 한낱 장기 말로만 취급되고, 국가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희생물에 지나지 않는다. 옛날에는 그게 전쟁이었고, 이제 그것은 경제발전이다. 도쿄올림픽은 그 헛된 구호를 위해 높이 쳐든 깃발이었다." (1권 p386)

"날마다 소금땀 흘리면서 일하는 사람들이 집 한 채 못 가진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잖아?" (2권 p96)

한편, 이번에 읽은 또 다른 책들로는 <축구의 문화사>와 <보통의 존재>가 있다. 먼저 <축구의 문화사>는 유럽의 몇몇 축구리그의 라이벌전들을, 그 유래와 역사 등과 관련해서 들여다보고 있는 책이다. 얇은 책인 만큼 '문화사'라는 제목에 걸맞을 만큼 깊은 주제를 다룬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 같지만, 축구팬들에게 비교적 익숙한 라이벌전들을 다루면서도 단순히 알려진 사실의 정리 수준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간 것 같다. 그리고 <보통의 존재>에 대해서는 이미 리뷰를 쓴 바 있으니 여기서는 '공감'과 관련해서 짧게 언급하는 게 낫겠다. 개인적으로 책을 읽고 느끼는 '공감'이라는 건 많은 경우 '이해'나 '납득'의 의미라고 생각하는데, <보통의 존재>는 정말 문자 그대로 '공감'하며 읽었다. 그렇게 마음 깊이 공감할 수 있는 책을 읽는 기쁨이 작지 않았음은 굳이 강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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