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아나키즘, 그 반역의 역사>라는, 제목만 봐도 잠 깨나 올 것 같은 책을 감히 집어든 건 내가 그 무렵 잠을 잘 못 자고 있었기 때문...은 물론 아니다. 그보다는 일단 이 책이 집에 굴러다니고 있었던 데다(물론 내가 사 놓은 건 아니다) 책도 퍽 가벼웠던 점을(물론 단지 물질적인 관점에서만) 이유로 들 수 있겠는데, 이런 없어 보이는 이유가 별로라면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 <올림픽의 몸값>이 이 책을 집어든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말해도 좋겠다. 과연 일본의 도쿄 올림픽 개최를 다이너마이트 폭발로 위협하며 '올림픽의 몸값'을 요구하는, 소설 속 주인공 시마자키 구니오를 단지 '아나키스트'라는 하나의 단어로 대치할 수 있을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쩐지 악당과 정의의 사도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듯한 주인공의 행보를 보자니 '위험'과 '매력'을 동시에 풍기는 듯한 '아나키스트'에게도 약간이나마 관심이 갔던 것이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리하여 슬며시 집어든 <동아시아 아나키즘, 그 반역의 역사>는 솔직히 내 기대와는 조금 달랐다. 얄팍한 책임에도 진도는 잘 나가지 않았고, 특히 동아시아 아나키스트의 어떤 '위험한 매력'을 드러내는 데에도 충분치 않았다. 본래 잠 못 들어 고민하는 일도 드물었으니 수면제로 유용하지 않았음도 물론이다.

노파심에서 말하자면, 이건 책이 나빴다거나 혹은 형편없었다든가 하는 따위의 이야기는 당연히 아니다(자랑은 아니지만 나는 아나키즘에 관한한 문외한에 가깝다). 다만 소설 속 주인공에게서 아나키스트의 면모를 보고, 아니 아마도 아나키스트의 면모가 아닐까 하는 생각 따위를 하다가 책장 한쪽에 꼽혀있는 '아나키스트' 어쩌고저쩌고 하는 제목의 책을 발견하고는, 더욱이 그 책이 비교적 얄팍하기에 내심 반가워하며 그보다 더 얄팍한 마음으로 책을 펼쳐든, 그러니까 이건 애당초 접근방향이 사뭇 달랐던 한 독자의 가벼운 불평일 뿐인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가벼운 접근에 따른 가벼운 실망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 몇 가지 인상적인 부분이 없지 않은데, 아나키즘을 단순히 무정부주의로 번역하는 건 아나키즘에 대한 오해를 조장할 위험이 있다는 사실과 그 자체로 묵직한 무게감을 지니는 몇몇 아나키스트들이 남긴 말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올림픽의 몸값>의 시마자키 구니오의 위험한 행보를 독자가 은연중 응원할 수밖에 없는 분명한 이유를 이 책에서 찾았다는 것 등을 들 수 있겠다.

"민중은 권력에 쉽게 굴복하지만 그렇다고 권력을 숭배하지는 않는다."(p7) ㅡ바쿠닌ㅡ
"군비와 전쟁은 오늘날의 국가가 자본주의 제도를 옹호하기 위해 만든 철의 장벽이며, 대다수의 인류는 이로 말미암아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있다."(p29) ㅡ고토쿠 슈스이ㅡ
"천황이란 무엇인가? 국가란 인간의 신체, 생명, 재산, 자유를 끊임없이 침해하고, 유린하고, 겁탈하고, 위협하는 조직적 대강도단이다. 대규모 약탈주식회사이다. 법률은 국가라는 대강도단과 약탈회사 주주들의 대표자회이다. 천황과 국가란 이들 강도단과 약탈회사의 우상이며 신단이다."(p125) ㅡ박열ㅡ
"천황은 일본에서 태어난 인간에게 최대의 모욕이며, 천황의 존엄성을 입증하는 것은 국민이 노예임을 의미하는 것"(p125) ㅡ가네코 아야코ㅡ

사실 <올림픽의 몸값>에서 시마자키 구니오의 행보는 결코 절대적으로 옳다고 말하기 어렵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올림픽 개막식이 열리는 주경기장에서 다이너마이트를 폭발시키겠다는 건 미친 짓이며, 특히나 소설 속에서 시마자키 구니오와는 다른 행보를 보이는 인간 군상들의 모습을 보면 더욱더 그러하다. 예컨대, 경시청 소속의 형사 오치아이 마사오는 시민의 안전과 경찰로서의 자부심 그리고 국가의 위신을 위해 시마자키 구니오를 잡으려 노력한다. 그는 올림픽 개막식이 둘째 아이의 출산예정일인 한 아내의 남편이자 이제 막 건설된 아파트에 새로 입주한 가장으로서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자 하며, 따라서 시마자키 구니오의 테러 성공은 곧 오치아이 마사오의 임무 실패를 의미한다. 또한 올림픽 경비 책임자의 둘째 아들이자 시마자키 구니오의 대학 동문이기도 한 스가 다다시라든지, 시마자키 구니오에게 호감을 지니고 있는 헌책방 집 딸 고바야시 요시코의 입장에서도 시마자키 구니오의 테러 시도는 이해와 응원의 대상은 아니다. 각각 올림픽 이후 새로운 일본의 세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한 이들과 시마자키 구니오 사이에는 서로 넘을 수 없는 큰 강이 존재하는 셈이다.

더군다나 이들 주요 등장인물들뿐만이 아니라 책 속에 나오는 다양한 인물들이 한결같이 올림픽 개최 성공을 기대하는 모습을 보면 시마자키 구니오의 입지는 더욱 좁아진다. 전후의 힘겨운 시기를 지나 세계가 지켜보는 올림픽 개최를 맞이하여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일 올림픽을 들뜬 마음으로 보러 나가는 고바야시 요시코의 할머니랄지, 혹은 입으로는 올림픽 개최의 국가 총동원 체제를 비판하면서도 은근히 올림픽에 대한 기대를 감추지 못하는 과격 학생운동 단체랄지, 혹은 심지어 올림픽 기간 동안 자발적으로 조직원들을 산으로 피하게 하는 도쿄의 야쿠자 두목까지, 올림픽 성공개최를 희망하는 절대 다수 일본 국민들의 모습까지 감안하면 이제 시마자키 구니오의 편에는 오직 그의 동료인, 소매치기 무라타 도메키치밖에 없는 것이다. 아니, 심지어 무라타조차도 올림픽의 성공을 방해하는 일은 꺼려하니, 과연 이런 상황에서 시마자키 구니오의 행동이 티끌만큼이나마 '정의'로 인정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과격하고 고독한 시마자키 구니오의 행보를 긍정하게 만드는 것은 공안요원 야노로 대표되는 '국가'의 존재다. 공공의 이익 혹은 국가를 우선한다는 명목으로 개인에게 거리낌 없이 행해지는 국가의 폭압적인 수단들, 사소한 소수의 희생 따위는 더 큰 대의를 위해 불가피하다는 국가의 인식이 시마자키 구니오의 행보를 일정부분 정당하게 만든다. 시마자키 구니오는 올림픽 경기장을 빨리 건설하기 위한 '속도전' 속에서 희생되는 노동자들을 목격하고, 그런 희생을 무심히 보아 넘기는 세상을 경험한다. 그가 최대한 인명 피해가 없게 하며 벌인 일련의 폭탄 테러는 완벽한 국가의 통제 아래 언론에 보도되지 않고, 그 사건은 단지 폭발을 직접 목격한 일부의 환상으로만 남는다.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라는 오직 유일무이한 목표를 위해서는 어떠한 반대 의견이나 비판 그리고 흠집이나 우려도 용납되지 않고, 이런 상황 속에서 시마자키 구니오가 좀 더 과격한 테러를 시도하게 되는 것은 어느 정도 필연인 것이다. <동아시아 아나키즘, 그 반역의 역사>에서 말하듯, 시마자키 구니오에게 있어 "테러 행위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행동을 통한 선전' 수단의 하나"였고, 결국 "테러가 최선의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나, 자신의 도덕성과 희생을 담보로 테러를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이를 알기에 독자는 시마자키 구니오의 행보를 은연중 응원하게 되는 것이리라.

하지만 <남쪽으로 튀어>에서 그랬던 것처럼, 오쿠다 히데오는 <올림픽의 몸값>에서도 일방적으로 어느 하나가 옳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시마자키 구니오 외의 다른 주요 등장인물은 그들이 서있는 지점에서, 전후 올림픽 개최에 성공하며 바야흐로 새로운 시기를 향해 나아가는 일본을 나름대로 충실히 살아내고 있고, 이들에 대한 오쿠다 히데오의 시선은 시마자키 구니오를 향한 시선과 비교해 더 따뜻하지도 혹은 더 차갑지도 않다. 다만 오쿠다 히데오는 '역자후기'에서 역자가 말하듯, "국가 권력이 철저히 은폐해버린 단 한 명의 이질분자를 훌륭하게 발굴"해 내었고, 그리하여 진정한 '올림픽의 몸값'의 베일을 벗겨내는 데 주력하는 것처럼 보인다. 올림픽으로 대표되는, '국익'이라는 미명하에 이루어지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는 바는 모두가 다를 수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올림픽의 몸값'이 무엇인지에 대해 분명히 말할 수 있을 때에만 비로소 의미가 있는 법일 테니까 말이다. 물론, 이때 '올림픽의 몸값'이란 시마자키 구니오가 국가에 제시한 8천만 엔이 아니라,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이면에서 힘든 노동을 강요당하는 민중의 희생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고, 덧붙여 이를 은폐하는 '국가'가 별로 좋은 놈만은 아닌 것도 크게 의심할 일은 아닌 것 같다. 뭐, 2011년의 '대한민국'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을 테고. 어쨌거나 소설적 재미와 현실의 무게를 적절히 배합할 줄 아는 오쿠다 히데오의 능력은 이 소설에서도 또 한 번 빛을 발하는 것 같다.

"노동자의 목숨이란 얼마나 값싼 것인가. 지배층이 민중을 바라보는 시선은, 19년 전에 본토 결전을 상정하고 '1억 국민이 모두 불꽃으로 타오르자' 라고 몰아치던 시절 그대로,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민중은 한낱 장기 말로만 취급되고, 국가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희생물에 지나지 않는다. 옛날에는 그게 전쟁이었고, 이제 그것은 경제발전이다. 도쿄올림픽은 그 헛된 구호를 위해 높이 쳐든 깃발이었다." (1권 p386)

"날마다 소금땀 흘리면서 일하는 사람들이 집 한 채 못 가진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잖아?" (2권 p96)

한편, 이번에 읽은 또 다른 책들로는 <축구의 문화사>와 <보통의 존재>가 있다. 먼저 <축구의 문화사>는 유럽의 몇몇 축구리그의 라이벌전들을, 그 유래와 역사 등과 관련해서 들여다보고 있는 책이다. 얇은 책인 만큼 '문화사'라는 제목에 걸맞을 만큼 깊은 주제를 다룬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 같지만, 축구팬들에게 비교적 익숙한 라이벌전들을 다루면서도 단순히 알려진 사실의 정리 수준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간 것 같다. 그리고 <보통의 존재>에 대해서는 이미 리뷰를 쓴 바 있으니 여기서는 '공감'과 관련해서 짧게 언급하는 게 낫겠다. 개인적으로 책을 읽고 느끼는 '공감'이라는 건 많은 경우 '이해'나 '납득'의 의미라고 생각하는데, <보통의 존재>는 정말 문자 그대로 '공감'하며 읽었다. 그렇게 마음 깊이 공감할 수 있는 책을 읽는 기쁨이 작지 않았음은 굳이 강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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