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는 어떻게 세계를 지배했는가
프랭클린 포어 지음, 안명희 옮김 / 말글빛냄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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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2008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는 최종전까지 이어진 맨유와 첼시의 치열한 우승 레이스 끝에, 결국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이로써 최근 4시즌 동안 맨유와 첼시는 두 번씩의 우승을 나눠 가지게 되었고, 이것은 다소 비약하자면 '세계화'와 '자본주의'의 승리라고도 말할 수 있을 듯하다. 공교롭게도, 맨유는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팬 층을 보유한 팀이고, 첼시는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갑부인 로만 아브라모비치가 구단주로 있는 팀이기 때문이다. 오는 22일에 모스크바에서 벌어지는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는 사상 최초로 잉글랜드 팀끼리 맞붙게 되었고, 그 두 팀이 바로 맨유와 첼시라는 사실은 그러한 비약을 좀 더 그럴듯하게 만드는 상징적인 사건이 아닐까.

어쨌거나, 바야흐로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전성시대라는 것에 이견을 제기하기 어렵다. 굳이 올 시즌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의 매치 업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최근 몇 년간 유럽대회에서 잉글랜드 클럽이 이룩한 성과와 유명선수들의 잇따른 프리미어리그행 소식은 현재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하는 바로미터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성과를 만든 두 축은 역시, '세계화'와 '자본주의'로 귀결된다고 하겠다. 최근의 위축된 축구 이적시장의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자금으로 이적시장을 주도하는 것이 바로 잉글랜드 클럽들이고,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이 전세계로 방영되는 프리미어리그의 인기에서 비롯된 해외자본의 대대적인 투자인 까닭이다.

사실 이 책에서도 일부 지적하듯이, 1980년대 말까지만 하더라도 영국 축구는 총체적인 난국에 빠져 있었다. 마거릿 대처 수상이 영국의 훌리건을 '문명의 수치'라고 부를 정도로 영국 축구는 훌리건들의 폭력과 광기에 몸살을 앓아야 했고, 심지어 수십 명이 목숨을 잃은 '헤이젤 참사'와 '힐스브로 참사'로 인해 몇년간 잉글랜드 클럽들의 유럽대회 참가가 제한되기까지 했다. 그러나, 오히려 그러한 위기를 기화로 하여 영국 축구는 거대 자본을 끌어와 축구장의 분위기를 일신하기 위해 노력했고, 결국 '테일러 리포트'로 대변되는 영국 축구의 개혁 프로그램을 통해 1992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를 출범시키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프리미어리그의 세계적 확대와 자본의 결합이 더욱 공고하게 맞물리면서 오늘날 프리미어리그는 유례없는 성공시대를 활짝 열어젖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프리미어리그의 성공이 '세계화'와 '자본주의'의 밝은 면이라면, 그 반대쪽에 자리한 어두운 면이 없을 수 없고, 이 책이 주목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어두운 면 쪽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프리미어리그가 세계로 퍼지면서 함께 흘러 들어간 영국 훌리건 문화가 세르비아의 민족주의를 부활시키는 데에 영향을 끼쳤다든가, 자유와 관용의 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민주적 행태를 주창하는 세계화 이론에도 불구하고 셀틱과 레인저스의 뿌리 깊은 종교적 갈등이 근절되지 못하는 현상이라든가, 혹은 우크라이나의 카르파티 구단이 유럽세계와 유럽의 축구구단이 보여주는 '하나의 세계' 모델에 집착하여 나이지리아의 흑인 선수를 영입했음에도 상이한 문화적 차이로 말미암아 긍정적인 효과를 보지 못한 것 등의 사실은 '세계화'의 어두운 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카르파티의 주장인 유리는, "역사상 카르파티 최고의 순간들은 구단이 모두 지역선수들로만 이루어진 통일된 구단이었을 때 일어났죠."라고 말하는데, 이는 축구의 '세계화'에 대한 반대 명제로 새겨들을 만하다.

한편, '자본주의'의 어두운 면도 심상치 않기는 마찬가지다. 지난 시즌 이탈리아의 명문 클럽 유벤투스는 승부조작과 연루된 파문으로 세리에B로 강등되는 일이 있었다. 유벤투스는 아넬리가와 관련되어 있으므로 유벤투스의 부정은 곧 아넬리가의 권력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리고 이 책에 따르면, 잔니 아넬리의 조부는 언젠가, "기업가란 원래 정치인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를 종합하면, 재력과 권력과 축구는 공고하게 얽혀 있다는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저자는 현 AC밀란의 구단주 실비오 베를르수코니의 재력과 권력이 어떤 식으로 AC밀란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는지, 또 반대로 AC밀란에 대한 팬들의 애정이 어떻게 베를르수코니의 정치권력으로 연계되는지를 통해서 자본과 얽매인 축구의 폐해를 드러내 준다. 또한, 브라질에 만연한 축구계에서의 부정부패를 자본주의가 몰아낼 것이라는 낙관적 전망이 있었음에도, 그것이 결국 실패하고 오히려 브라질 축구를 더욱 위축시킨 사례를 제시하면서 '자본주의'의 어두운 면을 조명한다.

이러한 다양한 사례들은 '세계화'와 '자본주의'가 축구에 가져다 준 달콤한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 이면에는 음울한 실패와 충돌 또한 자리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그리고 이는, 저자가 세계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시도한, 다양한 사람들과의 인터뷰를 통해서 대단히 흥미롭고 현장감 있게 펼쳐진다. 그런데, 그렇다면 이러한 현상을 바탕으로 저자는 축구계에서 광범위하게 이루어지는 '세계화'와 '자본주의'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일까? 대단히 혼란스러운 일이지만, 불행히도 결코 그렇지 않다. 서문에서 밝히듯이, 저자는 암울한 현상들이 존재함에도 '세계화'에 대해 적개심을 갖는 것은 무리라고 하는데, 이것은 이 냉철한 저널리스트가 다분히 감상적으로 변하는 모습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저자가 감상적으로 변하는 부분, 다시 말해서 저자가 '세계화(혹은 '자본주의')'의 어두운 면을 애써 잊게 되는 부분은 이 책에서 두 가지 정도로 지적할 수 있다. 하나는 '부르주아 민족주의의 매력'에서 바르샤의 민족주의를 다루는 부분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의 문화 전쟁'에서 세계화에 따른 미국의 문화 분열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저자는 바르샤가 세계적 상업주의에 빠지지 않고, 축구를 폭력과 광기로부터 구해낸다고 하며 적극적으로 바르샤의 가치를 옹호하는데, 그와 관련된 사례들은 대단히 낭만적인 것들로만 가득 채워져 있어서 설득력이 약하다. 그리고 미국의 문화 분열 내용은 흥미롭기는 하지만, '세계화'의 적이 미국이라는 항간의 인식에 대해 반박하려는 의도가 다분해 보이고, 더욱이 별다른 진지한 접근도 없이 미국의 다국적 기업을 옹호하는 것은 아무래도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그래서 유감스럽게도, 저자가 이러한 주장을 하는 데에는 그가 바르샤의 팬이라는 것과 그의 조국이 미국이라는 사실과 결부지어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저자의 이러한 감상적인 면모는 저자가 관찰한 많은 현상들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지 못하고 움츠러드는 모습을 보이는 주요원인으로 지적할 만하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책이 일관된 하나의 주제로 엮이지 못하고 독자에게 다소의 혼란스러움을 야기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와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놀랍고 흥미로운 고찰이 충분히 의미 있는 작업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유대인의 축구에서부터 이란의 축구까지 파고드는 저자의 광범위한 접근은 그 자체만으로도 꽉 찬 지적 포만감을 주며, 궁극적으로 저자의 고찰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는 것은, 바로 독자의 몫이기도 할 테니까 말이다. 무엇보다도, 잉글랜드의 프리미어리그가 우리네 안방까지도 깊숙이 침투한 오늘날, 그 화려한 이면을 잠시 돌아보게 하는 것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는 넘치도록 충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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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는 한국이다 - 한국 축구 124년사, 1882-2006 인사 갈마들 총서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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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밝혀두자면, 사실 이 책을 읽은 것은 결코 호의가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나는 월드컵에 즈음하여 출간되는 축구서적에 대해서는 다소의 경계심을 가지고 있는 편이고, 더군다나 '축구는 한국이다'라는 이 책의 제목에 도무지 공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은 것은, 저자가 강준만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된 약간의 호기심과, 과연 저자가 무슨 논리로 이러한 발칙한(?) 명제를 이끌어내는지를 비판적으로 읽어보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임을 부인하지 않겠다. 그러니까, 이 책을 읽은 것은 일종의 반감이었던 셈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우선, '축구는 한국이다'라는 명제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축구'의 속성과 '한국'의 속성을 정의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그리 매끄럽지 않아 보인다. 저자는 축구를 종교요 전쟁이라고 하면서 축구의 본질을 국제,국내적 갈등의 대리전쟁이라고 말하고, 이러한 대리성의 원칙에 가장 충실한 나라가 바로 한국이라고 한다. 또한, 축구는 독특한 집단주의적 가치와 더불어 눈코 뜰 새 없이 몰아치는 격렬한 경쟁이라는 두 가지 요소를 동시에 갖고 있고, 이는 바로 한국 사회의 특징이기도 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한국인은 늘 국가,민족을 생각하는 마음 때문에 대단히 평화적이라고 하며, 2002월드컵 때 15개국 대표팀의 응원을 위해 헌신한 10만 '코리언 서포터즈' 활동을 지극히 한국적인 현상으로 지적하기도 한다.

축구의 속성에 대한 이러한 저자의 의미부여는 유달리 특이한 것은 아니지만, 과연 그것이 어떻게 그대로 한국의 속성으로 연결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저자는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특히나 갈등과 경쟁이라는 축구의 속성이 한국인의 평화적 속성에 이르면, 축구와 한국의 연결고리는 금세 위태로워 보인다. 게다가 축구가 한국이기 위해서는 축구를 너무 잘해도 열기가 시들해져서 곤란하고, 반대로 너무 못해도 범국민적으로 열광하기 어려울 것이므로 적당히 잘해야 한다는 식의 설명은 매우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가치의 패러독스'라는 개념으로 접근하는 한국인의 지극한 축구사랑도 쉬이 수긍하기 어렵고, 축구의 집단주의 문화를 설명하기 위한 중국과 한국의 비교는 너무나 도식적이다.

물론, 저자가 '축구는 한국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한국이 축구를 매개로 한 정치사회적 의미 부여에 있어서 가장 뛰어난 나라"라는 의미이고, 이것은 일견 그럴듯해 보이기도 한다. 저자는 이를 증명하는 방법으로 한국축구의 124년 역사를 더듬는데, 그 과정은 한국에서의 축구가 정치사회와 얼마나 큰 관련을 맺고 있는지를 드러내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가령, 일제강점기에 한국축구가 민족의 '존재증명'으로서 기능했다거나, 북한과의 축구대결에서 어김없이 투영되는 '체제경쟁' 의식은 축구가 지니는 경쟁의 속성이 한국의 역사적 맥락(식민지 지배와 남북 분단)과 공고하게 엮였기 때문이라는 분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5공화국 시절의 스포츠 정책에 의한 한국축구를 거쳐 2002년 월드컵의 엄청난 열광에 이르면, '축구는 한국이다'라는 명제가 더 이상 낯설게 여겨지지만은 않는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축구'와 '한국'의 속성이 지니는 위태로운 연결고리는 차치하고서라도, '축구는 한국이다'라는 명제는 두 가지 점에서 의문을 제기할 만하다. 하나는, '축구' 대신에 다른 단어를 끼워 넣어서는 안 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5공화국이 스포츠 공화국으로 불리며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을 유치했던 것은 스포츠가 정치사회적으로 갖는 파급효과를 잘 인식했기 때문일 터이고, 그 중에서 '축구'는 다만 하나의 하위수단일 따름이었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황우석 신화'의 파탄을 보도한 뉴스에서 뒤이어 박지성의 첫골 도전 소식을 전한 것을 박지성에게서 황우석의 대체가치를 찾는 것으로 의심하는데, 이는 바로 '축구'가 수단이라는 점을 저자도 인식한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럼에도 여전히 '축구는 한국이다'라고 말할 수는 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야구나 농구, 심지어 황우석도 한국이라고 말하는 것이 가능하다. 요컨대, '축구는 한국이다'라는 명제에서 '축구'는 무의미해지는 것이다.

또 하나의 의문은 '한국' 대신에 다른 단어를 넣는 것은 어떤가의 문제이다. 해외에서 축구가 각 나라의 정치,사회,경제,문화적 측면과 어떤 관련을 맺는지에 대한 논의는 이미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예컨대, AC밀란의 구단주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AC밀란의 서포터를 기반으로 이탈리아의 정권을 장악한 것이나, FC바르셀로나가 프랑코 독재에 대항한 카탈루냐 지역을 대변하는 팀이 된 것, 그리고 셀틱과 레인저스가 축구를 매개로 종교대립을 벌이는 등의 일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고, 이는 명백하게 각국의 다양한 환경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나라에서든 축구가 그 자체로만 존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대전제 하에서 축구를 매개로 하는 한국의 정치,사회적 맥락의 고찰은 충분한 의의가 있지만, 그러한 의미 부여에 있어서 한국이 가장 뛰어나다는 것은 결코 동의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이 책에서 가장 실망스러운 것은 '맺음말' 부분에서 드러나는 저자의 결론이다. 본문에서 저자는 월드컵에 열광하는 국민들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된 시선을 대조해서 보여주며, 明과 暗을 모두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그러나, 정작 결론에서는 축구에 대한 광기를 지나치게 이성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하는데, 이는 사실상 국민적 열광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입장에 대해 반대의 의사표시를 한 것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러면서도 각기 다른 개성과 취향대로 자신만의 '놀이'를 즐기고, 또 비판도 하며 서로 원없이 놀아보자고 끝맺는 것은 너무나 무책임해 보인다. 더군다나, 국민적 열광에 대한 비판적 견해의 핵심이 '민족주의'나 '국가주의'에 대한 과잉으로 인해 '다른 것'과 '비판'을 허용하지 않고, 오로지 '획일성'과 '과잉동조'로 흐를 가능성에 대한 우려에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저자의 결론은 어느 쪽에도 적용되기 어려운 허무맹랑한 견해로까지 보인다.

한국축구가 한국의 역사적 맥락과 어떤 관련을 맺으며 이어져 왔는지에 대한 이 책의 고찰이 매우 의미있고 흥미로운 주제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것은 한국이 그러한 연관성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한국사회 내에서 축구의 역할과 위치에 대한 유용한 시사점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말을 빌리자면, "축구의 역사는 즐거움에서 의무로 변해가는 서글픈 여행의 역사이다"에서 '의무'를 규명해내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즉, 축구가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각각의 환경과 공고하게 얽히면서 '의무'가 되는 지점을 직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측면에서만 보자면, 이 책의 내용은 분명 만족할 만하다. 엄밀히 말해서, 이 책은 저자가 직접 저술하기보다는 대부분 당시의 신문이나 관련된 저서, 혹은 TV자료를 인용하는 방식을 취하는데, 그럼에도 난잡하기보다는 오히려 생동감이 넘쳐흐르고, 동시에 상당히 압축적이면서도 다양한 스펙트럼을 펼쳐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의 결과는 필연적으로 '의무'에 대한 경계로 이어져야 한다는 게 내 개인적인 견해이다. 그 '의무'가 정치적 이용이든, 과도한 민족주의의 표출이든, 혹은 자본주의의 잠식이든, 그것이 이제 축구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인 것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이성을 제외하고 그저 감성적으로 바라보자는 것은 너무나 무책임한 말이 아닐까. 더 이상 축구가 '즐거움'으로만 존재하지 못하게 된 것은 엄연한 사실이지만, 최소한 축구가 '의무' 그 자체가 되는 것은 막아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야말로, '축구'를 사랑하는ㅡ혹은 경계하는ㅡ사람들의 진정한 '의무'가 되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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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둔 - 세상에서 가장 먼 만행
조연현 글.사진 / 오래된미래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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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나는 WWF 레슬링에 온통 마음을 빼앗겼던 적이 있었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우연히 빌려 본 레슬링 비디오에 홀딱 반했고, 당연한 귀결로 헐크 호건을 비롯한 레슬러들의 이름을 줄줄 외고 다녔다. 그 중에서도 특히 워리어를 가장 좋아했는데, 수세에 몰려 있던 워리어가 돌연 각성(?)하는 순간을 나는 정말로 사랑했다. 로프를 흔들면서 각성한 워리어는 아무리 맞아도 아픔을 느끼지 않았고, 결국은 상대를 넘어뜨리곤 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듯 열광했던 레슬링이 각본에 의한 것임을 알고서, 나는 더 이상 레슬링을 좋아하지 않았다. 워리어가 아무리 각성을 한들, 그도 사실은 아픔을 느끼는 범인이라는 사실은 얼마나 충격적인 일이었던가!

뭐, 당연한 말이지만, 선(禪)이라는 화두를 붙잡고 평생을 정진한, 선사들의 행적을 드러낸 이 책은 레슬링과는 몇억 광년쯤 떨어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뜬금없이 레슬링 이야기를 꺼낸 것은, 이 책을 보면서 나는 마치 더 이상 환호하지 않는 레슬링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뭐랄까, 워리어가 계속해서 로프를 흔들며 상대선수의 공격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각성의 순간을 보여주지만, 나는 '뻥치지마! 이제 당신이 아픈 거 억지로 참는 걸 다 알거든. 아니, 사실 그리 아프게 맞은 것도 아니잖아.'라며 심드렁해 하는 기분이 되었달까. 어쨌거나 레슬링은 여전히 열정적이지만, 그럼에도 전혀 거기에 몰입하지 못하는 그런 기분.

물론, 이 책에서 소개하는 선사들이 레슬링을 할 리 만무하고, 뭔가를 짜고서 보여주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선사들은 레슬링 기술보다 백만 배쯤 더 대단한 기술을 선보인다. 예컨대, 몸에서 불길과 같은 빛이 솟구치게 한다거나, 잠을 자지 않고 몇 개월을 지낸다거나, 혹은 호랑이 같은 짐승을 부리는 일 따위가 그것이다. 어디 그 뿐이랴, 외마디 고함으로 족제비를 기절시킨다거나 생리를 멈추는 일도 가능하고, 심지어는 나병환자를 낫게 할 수도 있다. 물론 엄밀히 말해, 그것은 기술이 아니라 道다. 하지만 나로서는 믿기 어렵다는 점에서, 그것은 레슬링 기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러한 믿기 어려운 도력(道力)과 더불어, 비슷한 일화가 각기 다른 선사들에게서 더러 드러나는 점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소문에 의존한 한계라고 짐작할 만하다. 잘 알다시피, 이름만 바뀐 채 비슷한 이야기가 전해진다거나, 주인공의 능력이 지나치게 신비하게 포장되는 것은 대개의 구비문학이 지니는 공통적 속성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는 선사들의 행적에 대해 저자는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면서, 마치 모든 것이 사실인 것처럼 말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엄격하게 계율을 지킨 선사는 청정해서 좋고, 계율에 얽매이지 않은 선사는 탈속해서 좋다는 식의 설명은, 나로서는 다소 당혹스럽기만 하다.

설령 레슬링이 각본에 의한 것이라 하더라도, 여전히 레슬링 경기는 열정으로 가득차 있고, 레슬러들의 땀방울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道를 추구했던, 드러나지 않은 선사들의 내밀한 이야기는 자못 감동스러운 데가 있고, 그들의 자취도 결코 거짓만은 아니다. 게다가, 그러한 선사들을 세상에 알리고자, 그들의 티끌만한 자취라도 좇으려 했던 저자의 노력은 실로 간단한 작업이 아니었음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은둔'의 선사들을 드러내려는 분명한 목적과 자료수집의 한계로 인해, 이 책은 지나치게 어린이 위인전 식으로 흐른 감이 없지 않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어린 시절 열광했던 레슬링을 이제 좋아하지 않듯이, 나는 더 이상 어린 시절 읽었던 어린이 위인전을 오직 진실이라고는 믿지 않게 되었다.

워리어가 로프를 미친 듯이 흔들 때면, 그가 신비한 힘을 받아서 상대의 공격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된다는 믿음이 관객들의 암묵적 동의에 의해 이미 전제가 되어 있어야만 한다. 만일 그때, '쇼하고 있네!'라며 조소하는 사람은 결코 레슬링 경기장에 발을 들여서는 안 된다. 같은 맥락에서, 그다지 道를 믿지도 않을뿐더러 관심도 없는 나는 이 책의 독자가 되기에 충분하지 않았다는 점을 밝혀두고 싶다. 자신을 드러내기 보다는 정진에 정진을 거듭하고, 때로는 승가라는 안온한 울타리마저도 서슴없이 버렸던 선사들의 자취는 그 자체로 흥미와 가르침을 주지만, 道에 대한 믿음이 전제되지 않은 내게는 다소 심드렁했다는 게 내 솔직한 감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당신은 道를 믿으십니까?"라는 질문에, 최소한 단번에 고개를 가로 젓지는 않을 사람이 읽었으면 하는 책이다. 터무니없는 결론이지만, 나는 진심으로 아마도 그것이 이 책과 독자 모두에게 득이 되는 일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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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라 금빛 날개를 타고
고혜정 지음 / 소명출판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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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의 뉴스: 미군도 수많은 전사자를 냈지만, 베트콩측도 115명이 전사했습니다.

여자: "무명(無名)이란 참 무섭지요." / 남자: "뭐라고?" / 여자: "게릴라가 115명이 전사했다는 것만 갖고는 아무것도 알 수 없지 않아? 한 사람 한 사람에 관한 일은 무엇 하나 아는 게 없는 상태지. 아내나 아이들이 있었는지? 연극보다 영화를 더 좋아했었는지? 전혀 알 길이 없다. 그저 115명 전사라는 것 말고는ㅡ."  

장 뤽 고달, <미치광이 피에로>에서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 中)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당시, 일본군에 의해 종군위안부로서의 삶을 강요당한 여인들의 수는 20만, 혹은 그 이상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불확실한 이 엄청난 숫자가 주는 무서움 이상으로, 그 수많은 여인들은 무명(無名)으로 인한 무서움에 더욱 절망해야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종종 일본군의 위안부 문제가 한,일 양국 간의 정치적 문제로 비화되기도 하고, 국제사회에서의 문제제기로 인해 쟁점이 되기도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당시 종군위안부로서의 비극적 삶을 감내한, 여인들에 대한 관심은 찾아보기 힘들다는 데서, 이러한 논의는 마찬가지로 절망적이기만 하다. 거기에는 다만, '국가'와 '민족'이라는 냉혹한 이데올로기만이 존재할 뿐이기 때문이다.

이 책 <날아라 금빛날개를 타고>는 망각을 강요당한, 종군위안부들의 이름을 전면에 드러내기 위한 최초의 소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과거 청산이라거나 국민국가의 담론이라고 하는 거대한 틀 속에서 단지 '국가'나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해야 했던, 수많은 여인들의 그 무명성(無名性)을 깨뜨리기 위한 의미 있는 노력인 셈이다. 작가는 이 책에서 남태평양의 어느 '섬'에서 이루어진 종군위안부의 그 엄청난 비극과 희생을 오마당순이라는 한 어린 소녀를 통해 드러내 주고, 이는 막연한 숫자가 주는 비극 이상의 놀랍고 슬픈, 수많은 진실을 담고 있다.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섬'은 남태평양의 어느 곳에 있는 작품의 공간적 배경인 동시에, 우리 인식의 시간 속에 부유하는 섬이다. 열대우림의 이 아름다운 섬은, 그러나 전쟁으로 인해 비극적인 공간으로 변하고 만다. 그리고 그때부터 오마당순을 비롯한 여인들의 고통과 수난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 익히 알려진 일본군의 기만과 성적 유린은 어린 소녀의 경험을 통해 좀 더 잔혹하고 참혹한 형태로 드러나지만, 그보다 더욱 놀라운 것은ㅡ일본군을 포함한ㅡ섬에 있는 모든 사람이 섬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어떤 존재에 의해 좌우되는 기막힌 현실이다. 요컨대, 제국주의라는 초월적 존재의 주관 아래 生은 그에 의해 만들어진 연극일 뿐이며, 따라서 그 속에는 단지 역할의 차이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후, '섬'은 미군에게 점령되어 또 다른 전환기를 맞이한다. 이제 섬은 더 이상 고통과 비극의 장소가 아니라 망각의 장소로 변한 것이다. 여인들이 '공중변소'로 전락하여 얻은 대가는 '불쏘시개'로 사그라지고, 제국주의에 전도되었든 그렇지 않든 간에, 오직 희생양만이 넘쳐날 뿐이다. 미군에 의해 구출된 여인들은 고향으로의 귀환 소식에 기뻐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들은 이전과 달라진 자신들의 모습에 이내, 또 한 번 절망한다. 전쟁은 여인들에게 차마 말하기 힘든 고통을 강요했고, 종전은 또 다시 여인들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것이다. 결국, 생존자들이 귀향선을 타고 그 섬을 떠나면서, 섬은 점점 멀어지며 수장된다. 그리고 그 곳에 남겨진 사람과 희생자들과 그들의 고통,진실 등도 우리의 인식 속에서 점차 망각되고 만다.

이 책의 의의는 그 망각된 '섬'에 대한 인식의 노력, 즉 '과거의 복원'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20만이라는 숫자에 묻혀서 자신의 이름을 갖지 못했던, 수많은 여인들의 진실한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미군에게 죽는 순간까지 기관총을 난사하며 제국주의를 옹호했던 달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거부하고 섬에 남겨지는 쪽을 택한 막달과 영숙, 끝내 귀향선에서 바다로 몸을 던진 영분, 그리고 전쟁의 잔혹한 소용돌이 속에서 죽음을 맞은 수많은 여인들. 그들이 그러한 최후를 맞이해야 했던 것은 오직 전쟁의 광기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일본군의 추악했던 범죄와 마찬가지로, 조국도 그들에게 희생을 강요했다. 새로운 조국을 건설한다는 대의명분 아래, 그들의 삶은 또 한 번 음지로 내동댕이쳐진 것이다.

이러한 종군위안부가 주는 의미는 오로지 희생과 고통과 비극이다. 하지만, 대체 그들은 언제까지 그러한 절망 속에서 숨어 지내야만 하는 것일까. 일본에 의해, 그리고 조국에 의해 희생을 강요당했던 여인들은 지금도 우리가 요구하는 망각의 강요에 끊임없이 시달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웃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없고, 상상할 수조차 없는 것은 그들이 지닌 트라우마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그것을 아직 허락하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 정말로 무서운 것은, 20만이라는 숫자가 지니는 그 다양함 속에서도, 여인들은 오직 '일본에 대한 분노와 희생' 이라는, 단 한 가지 사실만으로 기억되어야 한다는 가혹한 현실이 아닐까.

그들을 다시 바라보았다. / 나만 도망치고 싶은 게 아니었다. / 그들도 그랬다. / 나만 흥이 나는 노래를 부르고 싶은 게 아니었다. / 그들도 어깨춤을 추며 삶을 누리고 싶어했다. (p333)

제국주의의 시대적 비극과 여성으로서의 숙명적 희생이라는, 이중의 고통에 시달렸던 여인들에 대한 동정과 연민은 일견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그들이 진심으로 바라고 갈망했던 것은 삶에 대한 희망과 행복이 아니었을까. 미군에 의해, 직업란에 prostitute(매춘부)로 기록되는 것을 완강히 거부한 오마당순처럼, 모든 기억과 진실이 사라진 채 오직 희생자로서, 무명으로서 기억되는 현실에 그들은 더욱 절망하고, 그래서 자신의 상처를 안으로만 감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 어쩌면 그들은, 오마당순이 나무인형을 깎아 죽은 여인들을 하나 하나 기억하며 그네들을 하늘로 올려 보냈듯이, 그들도 자신들의 '허물'을 벗고 하늘을 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므로 이 책은, 사실에 대한 것이 아니라 진실에 관한 것이고, 절망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라 희망을 말하려는 것이며, 과거를 끄집어내려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지향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이 책을 통해, 이 땅의 마당순이들이 그들 본연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커다란 금빛 날개를 달아주자고 제안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아주 뛰어난 소설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아름다운 문장과 넘치는 재미, 혹은 터질 듯한 감동이 소설의 미덕이라면, 어쩌면 이 책은 좋은 소설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무엇보다도 이 책은, "왜 쓰는가?"에 대한 작가의 진지한 고민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20만 혹은 그 이상의 마당순이들에게 바치는, 이 한 권의 책에 대한 작가의 노력에 진심으로 경의를 표한다.

이제, / 고통이 아니라 힘을 나누고 싶다. / 괴로움이 아니라 충만한 생기를 함께 느끼고 싶다. / 삶의 춤을 추기 위해 손을 내밀고 싶다.

그대에게 (p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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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흘쯤 전에 벌어진 맨유와 더비의 프리미어리그 경기에서 박지성은 선발로 출장했었다. 그러나 답답한 0대0의 스코어가 계속되자, 퍼거슨 감독은 박지성을 후반에 교체시키고 말았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그 경기에서 박지성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호날두의 다소 이기적인 플레이가 팀의 엇박자를 야기하는 주원인이었고, 긱스는 특히나 좋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퍼거슨은 긱스의 경험과 호날두의 능력을 믿었고, 기어코 호날두는 골을 성공시켰다.

어제 있었던 북한과의 경기에서 박지성은 정반대의 상황에 놓였다. 북한 수비진의 밀착마크와 평소보다 확연히 떨어져 보이는 볼터치로 인해 이렇다할 장면을 만들어내지 못했지만, 허정무 감독은 프리미어리거로서의 경험과 실력을 끝까지 믿고, 선발 출장한 박지성을 교체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박지성은 끝내 골을 이끌어내는 데는 실패했고, 이는 다른 프리미어리거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물론, 퍼거슨 감독이 호날두와 긱스를 믿은 것과 허정무 감독이 박지성과 다른 프리미어리거들을 믿었던 것을 동일한 잣대로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긱스는 퍼거슨 감독과 십수 년을 함께 해온 백전노장이고, 호날두는 프리미어리그 득점 1위를 달릴 만큼 환상적인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비록 그게 조금은 이기적인 플레이로 인한 결과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문제는 바로 그 점에 있다. 동일한 잣대로 비교할 수 없는 두 상황이 결과적으로 동일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단지 프리미어리거라는 이유 하나로 그들을 믿는 것은 부당한 일임에도, 프리미어리거들은 끝까지 기용되었다는 것이다.

어제의 박지성이 제 컨디션이 아니었다는 것은 누가 봐도 확연해 보였다. 예의 그 활동량 만큼은 크게 줄지 않았다지만, 어제 경기에서 절실했던 것은 활동량이 아니었다. 나름대로는 활발하게 움직이며 애를 쓰는 모습을 보였지만, 번번이 수비에 막히며 볼을 제대로 간수하지 못했다. 게다가 박지성의 장점이라 할 만한 이타적인 플레이도 크게 눈에 띄지 않고, 오히려 무리하게 볼을 끄는 모습도 많이 보였다. 그리고 이런 모습은 이영표나 설기현이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좋지 않은 컨디션을 보여준 그들을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현대축구에서 작심하고 수비 지향적으로 나오는 팀의 골문을 뚫기란 상당히 어려운 일이고, 축구는 혼자하는 경기가 아니며, 결정적으로 북한은 생각만큼 약하지 않은 상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나쁜 컨디션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대표팀의 붙박이 주전이 될 수 있을 만큼 대한민국이 약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허정무 감독은 경기가 끝난 후, "박지성의 컨디션이 좋지 않은 상태였다."라며 박지성에 대한 변호인지, 자신에 대한 변호인지 모를 말을 했지만, 이는 명백하게 허정무 감독의 실책으로 귀결될 뿐이다.

박지성을 비롯한 프리미어리거들의 경험과 능력은, 의심할 바 없이 우리나라 대표팀의 가장 큰 자산이다. 그리고 멀리서 날아온 그들이 국가대표팀에서 뛰는 모습은 더할 나위없이 반가운, 모든 팬들의 바람이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최소한 국가대표팀의 감독이라면 좀 더 냉정함을 유지해야 하지 않을까. 선수들의 컨디션을 체크하고, 선발선수를 결정하는 것은 감독의 고유한 권한이자 의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단지 소속팀으로 선발선수를 정한다면, 굳이 감독이 필요하기나 할까.

현재 소속팀에서 출장기회를 잡지 못해 필연적으로 떨어졌을 경기력, 장거리 이동에 따른 시차와 피로, 그리고 함께 손발을 맞출 기회가 적었던 프리미어리거들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들이 대표팀 내에서 가장 좋은 능력을 가진 것으로 감독이 판단했다면 달리 할 말은 없다. 그렇다면, 나는 기꺼이 감독의 경험과 판단을 존중할 것이다. 하지만, 만의 하나라도 허정무 감독이 막연한 믿음과 기대에 근거해 그들을 선택한 것이라면, 나는 감독으로서의 위치를 다시 한 번 자각해 주십사, 하고 감히 부탁드리고 싶다. 막연한 기대와 반가움은, 그저 팬들의 몫으로 남겨두는 것으로도 충분히 족할 테니까.

* ps. 어제 경기의 무승부와 박지성의 플레이는 많이 아쉬웠지만, 어제 박지성이 흘렸던, 눈물인지 땀인지 모를 한 방울은 진정으로 소중한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것이 그 날 경기에서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던 자신의 플레이에 대한 아쉬움이든, 멀리서 찾아와 응원해준 팬들에 대한 미안함이든, 혹은 다만 그날 경기에서 열심히 뛴 조그마한 흔적일 뿐이든, 그 무엇이라도 그가 대한민국을 대표해서 경기에 뛰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다음 경기에서는 부디 웃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의 웃음은 곧, 팬들의 기쁨이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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