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흘쯤 전에 벌어진 맨유와 더비의 프리미어리그 경기에서 박지성은 선발로 출장했었다. 그러나 답답한 0대0의 스코어가 계속되자, 퍼거슨 감독은 박지성을 후반에 교체시키고 말았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그 경기에서 박지성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호날두의 다소 이기적인 플레이가 팀의 엇박자를 야기하는 주원인이었고, 긱스는 특히나 좋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퍼거슨은 긱스의 경험과 호날두의 능력을 믿었고, 기어코 호날두는 골을 성공시켰다.

어제 있었던 북한과의 경기에서 박지성은 정반대의 상황에 놓였다. 북한 수비진의 밀착마크와 평소보다 확연히 떨어져 보이는 볼터치로 인해 이렇다할 장면을 만들어내지 못했지만, 허정무 감독은 프리미어리거로서의 경험과 실력을 끝까지 믿고, 선발 출장한 박지성을 교체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박지성은 끝내 골을 이끌어내는 데는 실패했고, 이는 다른 프리미어리거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물론, 퍼거슨 감독이 호날두와 긱스를 믿은 것과 허정무 감독이 박지성과 다른 프리미어리거들을 믿었던 것을 동일한 잣대로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긱스는 퍼거슨 감독과 십수 년을 함께 해온 백전노장이고, 호날두는 프리미어리그 득점 1위를 달릴 만큼 환상적인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비록 그게 조금은 이기적인 플레이로 인한 결과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문제는 바로 그 점에 있다. 동일한 잣대로 비교할 수 없는 두 상황이 결과적으로 동일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단지 프리미어리거라는 이유 하나로 그들을 믿는 것은 부당한 일임에도, 프리미어리거들은 끝까지 기용되었다는 것이다.

어제의 박지성이 제 컨디션이 아니었다는 것은 누가 봐도 확연해 보였다. 예의 그 활동량 만큼은 크게 줄지 않았다지만, 어제 경기에서 절실했던 것은 활동량이 아니었다. 나름대로는 활발하게 움직이며 애를 쓰는 모습을 보였지만, 번번이 수비에 막히며 볼을 제대로 간수하지 못했다. 게다가 박지성의 장점이라 할 만한 이타적인 플레이도 크게 눈에 띄지 않고, 오히려 무리하게 볼을 끄는 모습도 많이 보였다. 그리고 이런 모습은 이영표나 설기현이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좋지 않은 컨디션을 보여준 그들을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현대축구에서 작심하고 수비 지향적으로 나오는 팀의 골문을 뚫기란 상당히 어려운 일이고, 축구는 혼자하는 경기가 아니며, 결정적으로 북한은 생각만큼 약하지 않은 상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나쁜 컨디션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대표팀의 붙박이 주전이 될 수 있을 만큼 대한민국이 약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허정무 감독은 경기가 끝난 후, "박지성의 컨디션이 좋지 않은 상태였다."라며 박지성에 대한 변호인지, 자신에 대한 변호인지 모를 말을 했지만, 이는 명백하게 허정무 감독의 실책으로 귀결될 뿐이다.

박지성을 비롯한 프리미어리거들의 경험과 능력은, 의심할 바 없이 우리나라 대표팀의 가장 큰 자산이다. 그리고 멀리서 날아온 그들이 국가대표팀에서 뛰는 모습은 더할 나위없이 반가운, 모든 팬들의 바람이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최소한 국가대표팀의 감독이라면 좀 더 냉정함을 유지해야 하지 않을까. 선수들의 컨디션을 체크하고, 선발선수를 결정하는 것은 감독의 고유한 권한이자 의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단지 소속팀으로 선발선수를 정한다면, 굳이 감독이 필요하기나 할까.

현재 소속팀에서 출장기회를 잡지 못해 필연적으로 떨어졌을 경기력, 장거리 이동에 따른 시차와 피로, 그리고 함께 손발을 맞출 기회가 적었던 프리미어리거들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들이 대표팀 내에서 가장 좋은 능력을 가진 것으로 감독이 판단했다면 달리 할 말은 없다. 그렇다면, 나는 기꺼이 감독의 경험과 판단을 존중할 것이다. 하지만, 만의 하나라도 허정무 감독이 막연한 믿음과 기대에 근거해 그들을 선택한 것이라면, 나는 감독으로서의 위치를 다시 한 번 자각해 주십사, 하고 감히 부탁드리고 싶다. 막연한 기대와 반가움은, 그저 팬들의 몫으로 남겨두는 것으로도 충분히 족할 테니까.

* ps. 어제 경기의 무승부와 박지성의 플레이는 많이 아쉬웠지만, 어제 박지성이 흘렸던, 눈물인지 땀인지 모를 한 방울은 진정으로 소중한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것이 그 날 경기에서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던 자신의 플레이에 대한 아쉬움이든, 멀리서 찾아와 응원해준 팬들에 대한 미안함이든, 혹은 다만 그날 경기에서 열심히 뛴 조그마한 흔적일 뿐이든, 그 무엇이라도 그가 대한민국을 대표해서 경기에 뛰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다음 경기에서는 부디 웃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의 웃음은 곧, 팬들의 기쁨이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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