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사전 1
허영만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얼마 전, 강부자 내각이 여론의 도마 위에 올랐을 때 혹자는 이렇게 항변했다. "단지 부자라는 한 가지 이유로 그 사람을 매도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확실히, 딴은 그럴 듯한 말이다. 비록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고는 하지만, 최소한 현실에서는 '무전유죄, 유전무죄'의 원칙이 좀 더 들어맞게 마련이니, 일단 부자라면 있는 죄도 오히려 없다고 해야 할 판이니까 말이다. 뭐, 죽은 뒤에야 바늘구멍에 들어가든 쥐구멍에 들어가든, 내가 아는 한 그걸 알 수 있는 방법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니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부자에 대한 이러한 냉소적이고 부정적인 인식 한편에는 부러움과 시기심 또한 자리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오로지 정당하고 깨끗한 방법으로 한 평생 자족하며 살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것도 없겠지만, 돈에 대한, 부에 관한, 부자를 향한 욕망은 언제나 가슴 속 깊은 곳에서 꿈틀대며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다. 하여 욕망이라는 놈은 틈만 나면 이렇게 유혹한다. '폼 나게 살아보자', '돈 걱정 없이 살아보자', '죄 안 짓고(있는 죄도 없는 죄로 만들며) 살아보자' 이건 정말, 꽤나 혹하는 말이 아닌가. 그리고 적어도 내가 보기에,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분명 부자가 되는 편이 좀 더 유리하다.

<한국의 부자들>이라는 책을 바탕으로 하되, 허영만 화백의 경험을 보탠 이 책 <부자사전>은 사람들이 부자에 대해 가지는 두 가지 감정을 정확히 꿰뚫으며 시작한다. 즉, "부자들에게 흠잡을 데만 있는 것은 아니다."라며 부자에 대해 품기 쉬운 일방적인 증오와 편견에 관한 주의를 환기시키는 한편, "누구나 부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누구나 부자가 되지 않는다."라며 부자를 향한 욕망을 슬그머니 부채질 한다. 그러니까 이 책은, 부자에 대해 가지는 사람들의 이중적 잣대 위에서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며 사람들의 심리를 자극하는 멋진 시도를 보여주는 셈이다.

그러나, 그러한 멋진 시도가 끝내 성공적이었냐고 묻는다면, 유감스럽게도 내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우선, 100인의 부자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와 취재를 통해 드러나는 부자들의 방식은 전혀 매력적이지 않다. 물론, 애초에 부자들이 매력적인 방식으로 부를 쌓았으리라고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부자들의 인간적 고뇌나 어려움을 이해하게 되기는커녕 오히려 부자에 대한 불신과 증오만 깊어질 뿐이다. 가령,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불만 없이 적은 보수를 받고도 일하는 사람을 고용한다든지, '초(秒) 관리 운동'이랍시고 담배 피고, 커피 마시고, 전화 한 통화하는 모든 시간을 금액으로 환산한다든지, 심지어 '무자비함을 배우라'든지 하는 것들은 지나치게 비인간적으로 보인다. 이렇게 해야만 부자가 될 수 있다면? 글쎄, 어쩐지 박지원의 <양반전> 한 대목을 들려주고 싶어진다. "그만 두시오, 그만 두오. 맹랑하구먼. 나를 장차 도둑놈으로 만들 작정인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내뱉고 돌아설 수 없는 게 바로 욕망의 무서운 점이다. 부자가 되면 도둑놈도 도둑놈이 아니게 되고, 더욱이 일단 부자가 된 뒤에 착하게 살면 그만이라는 자기기만적 유혹은 결코 간단히 물리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욕망에 두손 두발 다 들고 항복하더라도, 실상 이 책에서 무슨 대단한 비법을 얻고자 한다면 또한 실망하기 딱 알맞다. 한 예로, '부자가 되는 최선의 방법은 돈을 쓰지 않는 것이다.'라는데, 그야 물론 맞는 말이지만 조금 허탈해진다. 또 다른 예로, 100명의 부자들 중 다수가 A라는 방법으로 돈을 벌었다고 치자. 그럼 A라는 방법이 돈을 버는 최고의 수단인가? 결코 아니다. A라는 방법으로 돈을 날린 수많은 사람들도 있다. 그렇다면 성공과 실패의 잣대는 무엇일까? 바로 부자들에게는 '안목'이란 게 있기 때문이란다. 결국 부자는 부자로서의 안목이 있기 때문에 A가 유용한 방법이고, 안부자는 부자로서의 안목이 없기 때문에 A가 유용한 방법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그러면 '당신은 부자인가, 안부자인가?'라는 원초적 질문 외에 무엇이 더 남는단 말인가.

부자에 대한 증오와 편견을 전혀 불식시키지 못하고, 부자를 향한 욕망도 전혀 채워주지 못했다면 도대체 이 책이 무슨 소용인가 싶지만, 사실 이 책이 그렇게까지 나쁘지는 않다. 앞에서 조금 극단적인 예를 들기는 했지만, 본래 부자가 되는 방법이란 것은 대개 아주 사소하고 당연해 보이는 원칙들을 실천하는 데에서 비롯되는 법이고,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도 바로 그런 것일 게다. 그러나, "허영만 선생님께서 비로소 부자들에게 '인간의 얼굴'을 그려주셨다."는, <한국의 부자들>의 저자인 한상복의 말 자체에는 동의하더라도, 그 말이 품고 있는 그 이상의 의미까지는 아무래도 공감하기 어렵다. 다시 말해, 만화를 통해서 좀 더 쉽고 재미있게 부자들의 세계를 접할 수는 있었지만, 거기에 '인간의 삶'까지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는 말이다. 마치 '사전'에는 '이야기'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사전'의 속성이 본래 그러하듯, <부자사전>도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활용하느냐에 따라서 누군가에게는 매우 유용할 수도 있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실제로 나 역시 종종 자극이 될 수 있는 원칙들을 여럿 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허영만 화백의 '그림'이 '글'에 비해 많이 아까워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 100명의 부자들을 분석한 것은 나름 괜찮은 시도로도 보이지만, 한 개인으로서의 부자가 지닌 인간적 고뇌와 삶의 무게를 좀 더 가깝게 느끼는 데에는 오히려 100이라는 숫자가 걸림돌이 된 것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아무래도 나는, 별 '사연(이야기)' 없는 100명의 부자들의 '얼굴'은 어쩐지 '가면'처럼 무감각해 보이기 때문이다. 이왕에 '그림'이라는 '얼굴'을 달기로 했다면, 그 '얼굴'에 얽힌 사연에 좀 더 집중하는 것도 괜찮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도 바로 그래서이다. 그야 물론, 그랬다면 이미 '사전'은 아니겠지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말리와 나 - 세계 최악의 말썽꾸러기 개와 함께한 삶 그리고 사랑
존 그로건 지음, 이창희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6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1#
'녀석'이 죽었다는 소식을, 나는 군대에서 누나의 전화로 알게 되었다. 녀석이 죽기 며칠 전에, 녀석이 아파서 수술을 받았다는 것, 그런데 그 결과가 그리 좋지 않다는 것 등의 사실을 이미 전해 듣기는 했었지만, 여전히 나는 녀석이 죽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기에 녀석의 죽음은 어쩐지 현실감이 없었다. 그 믿지 못할 소식에 과연 내가 뭐라고 말을 했었는지는 이제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누나가 녀석의 죽음을 알려주면서 결국 울음을 참지 못했고, 내게는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말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내가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는 것도.

2#
사실, 이 책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라면 별로 말할 게 없다. 흔히 하는 분류로, 세상에는 개(혹은 다른 동물)를 가족의 일원으로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고, 이 책 <말리와 나>는 전자의 사람들인 '나'와 가족들 그리고 래브라도 리트리버 수컷 개인 '말리'가 함께 엮어내는 일상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개의 역사에 새로운 장을 열려고 하는 말썽꾸러기 개' 말리가 보여주는 좌충우돌 견생기(犬生記)가 꽤나 시끌벅적하여 일상이 범상한 것은 결코 아니기는 해도, 그렇다고 말리가 고양이처럼 우는 것은 아니고(아, 고양이 똥은 먹는다), 상근이처럼 TV에 나오지도 않으며(그러나 개봉되지 못한 영화에는 출연한다), 애견학교를 수석 졸업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니(하지만 애견학교에서 퇴학은 당한다) 일단은 이 이야기를 특별하게 볼 이유가 전혀 없는 셈이다.

그러나 실은, (이미 슬쩍 말했다시피) 이 책은 아주 특별한 이야기이다. 그것은 말리가 보여주는 수많은 말썽들이 웃음을 자아내고, 간혹 드러나는 말리의 충성심과 우정이 감동적이며, 사람과 개가 이루어내는 따스한 교감이 뭉클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아이러니하게도 이 모든 감정들의 한편에 '슬픔'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아, 어쩌면 이 책의 '슬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결국 이 행복한 이야기의 결말을 모두 말해버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차피 "'나'와 '말리'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결말이 현실에서 존재하지 못하는 한, 그것은 당연한 결말이기도 하다. 뭐, 그렇다. 현실에서 말리의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이고, 하여 '말리'는 죽었다! 그것뿐이다. 단지, 말리가 인간 수명의 7분의 1을 사는 개인 까닭에, '말리'에게 '나'보다 조금 더 일찍 '죽음'이 찾아왔을 뿐인 것이다.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서 죽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고, '슬픔'이 없다면 '행복'도 없다는 것도 명백하지만, 살다보면 사람은 누구나 그 당연한 이치를 자주 잊어버린다. 그래서 사람은 '슬픔'과 '죽음'을 외면하고 두려워하는 것만큼이나, '행복'과 '삶'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말리가 보여주는 순수한 生의 기쁨과 한없는 애정은, 그것이야말로 '행복'과 '삶'의 본래 모습이라는 것을 여실히 가르쳐주는 듯하다. 13년간 지속된 '말리'의 말썽도, 강인한 신체도, 한결같은 우정과 충성심도 결코 영원할 수는 없지만, 영원할 수 없는 만큼 그러한 일상이 주는 사랑과 즐거움과 기쁨은 더욱 소중한 것이라고, 말리는 온몸으로 웅변하는 것이다. 그래서 말리의 죽음은, 그토록 슬프지만 행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삶과 죽음이 서로 무관하지 않듯이, 행복하기에 슬플 수 있고 슬퍼서 행복할 수 있다. 아마도 그것이 '골칫덩어리 개'로 살던 '말리'가 '훌륭한 개'로 죽으면서 남기는 가장 값진 선물이었으리라.

"...골칫덩어리라고? 전혀 아니야. 한 순간이라도 그렇게 생각하지마, 말리."
말리는 이것을 알아야 했다. 그리고 알아야 할 것이 더 있었다. 이제까지 말리에게 한 번도 해주지 않은 이야기, 그 누구도 해주지 않은 이야기 말이다. 나는 말리가 죽기 전에 그 말을 해주고 싶었다.
"말리, 넌 훌륭한 개야." (p365)

3#
내가 '녀석'의 죽음을 실감했던 것은, 휴가를 나가서 집에 막 도착했을 때였다. 여느 때처럼 엘리베이터를 타고 문 앞에 도착했지만, 여느 때와 달리 개가 짓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언제나처럼 맹렬한 환대와 반가움을 보이던 녀석도 없었고, 녀석의 밥그릇도, 전용 화장실도, 녀석의 집도 모두 치워버린 후였다. 이제 더 이상 청소기를 돌릴 때 녀석이 시끄럽게 짖어 댈까봐 신경 쓸 필요가 없었고, 책상 의자에 앉아 있다가 의자를 움직일 때면 밑에 웅크리고 있던 녀석이 의자에 끼일까봐 조심할 필요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외출할 때면 혼자 남는 녀석이 안쓰러워 걱정할 필요도 전혀 없었다. 하지만 그래서, 나는 드디어 녀석의 '죽음'과 '슬픔'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더불어 녀석과 함께 했던 모든 일상이 얼마나 행복했던 것이었는지를, 나는 절감할 수 있었다.

짧은 휴가가 끝나고, 군대에 복귀하던 날 아침. 나는 누나의 말대로 잠시 절에 들러 녀석의 평안을 빌어 주었다. 그리고 그때에야 비로소, 내 눈가에도 언뜻 무언가가, 아주 잠시 맺혔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행복하지만 슬픈 눈물 한 방울이...

"안녕, 민경! 넌 훌륭한 개였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빌 브라이슨 발칙한 유럽산책 - 발칙한 글쟁이의 의외로 훈훈한 여행기 빌 브라이슨 시리즈
빌 브라이슨 지음, 권상미 옮김 / 21세기북스 / 200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웃는 얼굴에 침 뱉으랴'고 하지만 내가 아는 한, 군대에 갓 들어간 이등병의 웃음은 그리 환영받지 못한다. 그야 물론, 이등병이 군대에서 웃을 일이란 본래 드문 일이기도 하지만, 설령 아주 가끔일지라도 인간으로서 드러내는 쪽이 자연스러운 웃음을 종종 억지로까지 참아야 한다는 건 꽤나 가혹한 일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가뜩이나 웃지 못해 슬픈 이등병들에게 한 가지 더 가혹한 이야기를 하자면, 이 책 <빌 브라이슨 발칙한 유럽산책>은 절대로 이등병들이 읽어서는 안 되는 책이라는 것이다. 글쎄, 그것이 왜 가혹한 일인지는 아마도, 최소한 빌 브라이슨의 책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능히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의 글이 지니는 치명적인 매력과 관계된 그 이유에 대해서 말이다.

<빌 브라이슨 발칙한 유럽산책>은 저자인 빌 브라이슨이 20년 전에 유럽을 여행했던 발자취를 다시 따라가는 유럽 여행기이다. 그러나 이 책이 여느 여행기와 가장 극명하게 대조되는 부분은, 바로 저자가 여느 여행객들이 그러하듯 그저 낭만적이라거나 감상적인 사람만은 아니라는 점에서 기인한다. 하여 유럽대륙의 최북단인 함메르페스트에서 시작되는, 현실적이고 발칙하기까지 한 그의 여행은 처음부터 끝까지 불평과 불만이 끊이지 않는다. 이를테면, 이건 이래서 문제고, 저건 저래서 싫고, 그건 그거대로 밥맛이고, 요건 또 뭐냐는 식인데, 이건 관광을 하기 위해 떠난 게 아니라 차라리 시비를 걸기 위해 떠났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해 보일 정도다. 특히나 파리에 대해서는, '파리가 자신을 싫어할 뿐더러 죽이려고까지 한다.'고 너스레를 떠는데, 모르긴 몰라도 파리 입장에서는 질 나쁜 보험사기단에라도 걸린 기분일 게 분명하다.

그러나 이런 모든 불평과 불만, 심지어 다소 지나쳐 보이는 일방적 편견조차도 불편하다기보다는 자못 통쾌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 책에는 한국인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데(일본인에 대해선 종종 나온다), 저자가 만약 한국을 방문하여 한국인들이 찌개 하나를 함께 떠먹는 것을 두고 입을 뗀다면(그게 불평이나 불만, 혹은 그 비슷한 것이라는 데는 내 포르쉐 모형 자동차를 걸 수 있다) 나는 기꺼이, "그럼요, 나도 가끔 내가 떠먹는 게 찌개인지 침인지 헷갈릴 때가 있어요."라며 반가워할 법도 하다는 생각이 들 만큼 그의 불평은 유쾌하기조차 하다. 그것은 그가 마치 투덜이 스머프처럼 떠들어대는 온갖 불평에도 불구하고, 실상 그는 한국인들의 음식 문화 속에서도 한국인 특유의 情을 이내 찾아낼 수 있는 의외로 솔직하고 따뜻한 마음을 더불어 지녔기 때문이다.

전 유럽을 돌아다니는 빌 브라이슨의 여행에서 그에게 씹히지 않는 나라란 아예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그가 그 모든 나라에 대해 그 이상의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가령, 모든 것이 낙후되었다고 투덜대면서도 함메르페스트의 어느 마을 사람들이 보여주는 순수한 애향심에 존경을 표한다든지, 이탈리아인들의 무질서와 뻔뻔함에 대해 핏대를 올리다가도 그들이 인생을 즐기는 태도에 감명을 받는다든지, 혹은 심지어 그토록 증오심(?)을 보이는 파리에서조차 자본주의의 파고 앞에서도 흔들림 없는 고서점을 접하고 그는 파리에 대한 사심 없는 찬탄을 아끼지 않는 것이다. 아, 물론 그렇게 칭찬해놓고 다시 뒤통수를 쳐대는 게 그의 7번째쯤 되는 특기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뭐니뭐니 해도 이 책이 지닌 최고의 가치는, 이른바 빌 브라이슨 표 유머가 가져다주는 참을 수 없는 '재미'에 있다. 그저 아름다움과 찬양의 대상이 되기 십상인 유명한 도시와 건축물, 문화재 등에 대한 조롱이 재미있고, 그가 만난 사람들에 대한 풍자가 또 재미있고, 이 모든 것들에 대한 거침없는 독설과 해학이 역시 재미있는 것이다. 더욱이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웃음을 보이지 않는 것이 미덕인 이등병 생활에 별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을 만큼 웃음에 대한 내성이 상당히 강한 편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다보면 어느 순간 '풋-'하고 터지는 웃음을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 만큼 이 책은 기발하고 특별하게 재미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이유로, 이 책은 모든 이등병들의 금서가 되어야 마땅한 것이다.

자꾸 애꿎은 이등병들을 들먹여서 미안하지만, 어차피 '영원한 해병'은 들어봤어도 '영원한 이등병'은 들어보지 못했으니 이등병이라고 딱히 억울해할 것도 없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이등병의 슬픔은 곧 다른 이의 즐거움이다. 그렇다! 이 책은 군대에 갓 들어간 이등병만 아니라면 누구든지 읽고 즐거워할 만한 책이고, 사실은 그게 내가 이 책에 대해 말하고 싶은 모든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여행기의 목적이 궁극적으로 여행을 떠나게 만드는 것이라면, 어쩌면 사진 한 장 없이 1990년대 초의 유럽을 묘사한 이 책은 그런 점에서는 조금 부족한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나서 저자의 다른 책이 못내 보고 싶어진다면, 이거야말로 저자 입장에서는 오히려 '대만족'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저자의 '대만족'이 독자의 '대만족'인 것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희망의 밥상
제인 구달 외 지음, 김은영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6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최근 우리 사회는, 이른바 '미친 소' 때문에 들썩이고 있다. '미친 소'를 사람이 먹고 죽을 확률은 로또에 걸린 사람이 돈을 찾으려다 번개를 맞을 확률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고, 또 한편으로는 '미친 소'를 걸러낼 만한 확실한 안전장치가 없는 상황에서 '미친 소'의 전면적 수입은 대단히 위험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대립은 어느 쪽이든 '인간'의 관점에서만 비롯된 것일 뿐, 정작 미쳐버린 '소'에게는 관심이 없다. '소'가 '미쳤다'는 게 가장 핵심적인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그렇다면, '소'는 대체 왜 '미친' 것일까? 이것은 아마도 당사자인 '미친 소'에게 묻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유감스럽게도 '미친 소'는 말이 없다. 아니, '소'는 본래부터 말을 하지 못한다. 아니 아니, '소'는 사실 온몸으로 말을 하지만, '인간'에게는 '소'의 말을 들어줄 사랑과 연민이 없다는 게 더 정확한 말이 아닐까.

<희망의 밥상>이라는 책 제목이 무색하게도, 이 책에서 언급되는 '소'의 실상은 정말로 끔찍하다. 공장식 농장에서 사육되는 소들에게 푸른 풀밭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일이고, 소들은 제 한 몸 편히 누일 공간도 차지하지 못한 채 온갖 항생제와 성장호르몬이 뒤섞인 사료를 먹고 비대해질 것만을 강요받는다. 그리고 그렇게 오직 '무게'로만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되는 소들은 몸만 거대할 뿐 제대로 서는 것조차 하지 못해서, 도축장으로 이동하는 중에 다른 소들과 엉켜서 쉽게 다리가 부러지는 일도 예사라고 한다. 심지어 사료에는 동물의(소를 포함한) 몸 일부도 갈아져서 들어가 있기에, 초식성 동물인 소들은 본의 아니게 육식을 하게 되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소'가 미치지 않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물론, 인간이 '소'만 유달리 좋아하거나 혹은 미워할 특별한 까닭은 없다. 다시 말해, 인간의 밥상에 올려지는 소고기만큼이나 인간은 돼지고기, 닭고기, 물고기 등을 두루 좋아하고, 소의 처우에 잔인하고 무정한 것만큼이나 돼지나 닭, 그리고 새우나 연어와 같은 어류의 처우에도 새삼스런 관심과 애정을 쏟을 리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당연히(?), 공장식 농장에서는 임신한 돼지에게 조차도 몸을 누일 수 있을 만큼의 공간이 허용되지 않고, 닭들은 종종 살아있는 상태에서 그대로 펄펄 끓는 물에 담가지기도 한다. 또한, 필연적으로 스트레스가 쌓였을 돼지와 닭들이 각각 서로의 꼬리를 물어뜯고 서로의 볏을 쪼는 것을 막기 위해, 그들에게 스트레스를 발산하도록 맘껏 뛰어다닐 자유가 허용되는 대신 돼지들은 꼬리가 잘리고 닭들은 부리를 잘린다고 한다.

불행하게도(어쩌면 다행스럽게도), 동물들의 수난은 결코 남의 일만은 아니다. 동물들이 하나의 '생명'으로서 대접받지 못하고 그저 '먹거리'로서만 가치를 지니는 궁극적인 이유는 그것이 '경제적 이득'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고, 이 지상명제로부터 '인간'도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항생제와 성장호르몬이 범벅된 사료를 먹고 우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는 동물들은 죽음조차 편안하게 맞지 못하여 극도의 공포에 질린 채 기계적으로 '처리되고', 바로 그 '처리된' 고기가 '인간'의 먹거리로 제공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식물이라고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아서 농약에 노출되는 것은 기본이고, 유전자 변형으로 인해 그저 크고 빠르게(혹은 수송상의 이유로 느리게) 자라도록 '처리되고', 이것이 또한 '인간'의 밥상에 올려지는 것이다. 그것의 치명적 위험성은 가리어진 채.

이러한 일이 가능한 이유로 이 책은 다국적 기업의 비윤리적이고 극단적인 '이윤 추구'에 가장 큰 책임을 묻는다. 동물은 물론이고 인간마저도 하나의 '생명'이라기보다는, 그저 '돈 벌이 수단'으로만 여기는 그들의 행태는 전 세계적으로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고, 그들의 '재력'에 회유된 정치가들의 동의 혹은 묵인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무분별한 이윤추구는 지구의 환경과 생태계를 전혀 고려하지 않아서, 향후에는 그야말로 '절망'적인 상황이 올 것이라는 데에 사태의 심각성이 있다. 몇 가지 예로, 상품가치로서 인정받은 특정 종(種)의 작물들만이 재배되면서 종의 다양성이 사라진다거나, 모든 생명에게 반드시 필요한 물이 오염되고 낭비되면서 치명적인 위협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 지구적으로 벌어지는 이러한 절망적 상황 하에서 우리에게 더 이상 희망은 없는 것인가? 침팬지들의 어머니로 알려진, 이 책의 저자인 제인 구달 박사는 여전히 희망은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녀는 희망의 근거로 세계적인 다국적 기업에 맞서서 종의 다양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과 동물들의 비윤리적인 생활환경을 개선시키고자 노력하는 사람들 등이 있음을 소개하고, 그들이 이룬 가시적인 성과를 제시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개개인의 선택의 영향력을 옹호한다. 즉, 자신의 지역에서 난 유기농 식품을 먹고, 보다 존중 받으며 길러진 동물들을 먹고(물론 저자는 채식주의자가 되거나 혹은 육식을 가급적 적게 섭취할 것을 권한다), 공정한 거래가 이루어진 먹거리를 먹고자 하는 등의, 사람들의 윤리적 선택이 모여져서 종래에는 다국적 기업의 방향을 바꾸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이다. 요컨대, 지구의 희망은 개인의 '희망의 밥상'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인간의 뇌라는 기관(우리의 두개골 속에 든 끈적끈적한 세포로 이루어진 해면 조직)은 가장 놀라운 기술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정신과 마음이 유리되어 버리면 그 기술은 악마적인 목적에 악용될 수가 있다(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 사람의 지성은 사랑과 연민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사람이 똑똑할 수는 있으나 지혜로울 수는 없다. (p423)

정확하지는 않지만, 예전에 읽었던 어떤 책에서는 이런 구절을 접했던 기억이 있다. "극도의 불안과 절망 속에서 재배되거나 길러진 식물과 동물을 사람이 먹게 되면 그들이 죽으면서 해소되지 못한 '화'의 독소가 그대로 사람의 몸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셈이다."라는. 물론, 이것은 영성적인 측면을 강조한 것으로 과학적 사실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추구해야 할 '희망의 밥상'에 요구되는 것도 결코 과학적 사고는 아니다. 이 책에서도 지적하듯이, 인류의 발전된 영농기술(농약과 비료, 유전자 변형 등)은 세계의 모든 인류에게 풍족한 먹거리를 제공할 수 있다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여전히 지구상에는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 죽는 수천만의 사람들이 있는 게 현실이고, 그것은 과학적 수치로 계산되는 먹거리가 넉넉하지 못해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의심할 바 없이 가난한 이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수치 따위로 감히 표현할 수 없는 사랑과 연민일 뿐이고, 마찬가지로 '희망의 밥상'에 필요한 것도 생명 자체와 지구의 환경에 대한 사랑과 연민에 다름 아닌 것이다.

최근에 벌어지는 '미친 소'에 대한 논쟁도 이런 측면에서 한 번쯤 더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미친 소'의 위험성에 대한 비판은 물론 중요하지만, 그것이 오직 특정 사람에 대한 비난으로만 국한된다면 '미친 소' 사태는 언제라도 되풀이 될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미친 소' 문제가 우리 사회에 위험을 초래한 것은 뇌 용량이 2MB에 불과한 사람이(설마하니 그런 사람이 있을까마는) 있어서일 뿐이라고 치부해 버린다면, '동물의 공포'가 실상 '인간의 횡포'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요원한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설사 인간의 뇌 용량이 2GB를 넘어 2TB에 이르더라도 인간이 경제적, 과학적 수치에만 집착한다면 그것은 그저 양적인 차이에만 불과하고, 따라서 거기에 사랑과 연민이 자리할 공간은 없는 것이다. 그러니 동물들을 위해서도, 최소한 마음속에나마 조그마한 촛불 하나쯤은 켜두어야 하지 않을까.

사랑과 연민이 없는, 그저 똑똑하기만 한 뇌의 악마적 사용이 초래한 광우병이 결국 뇌에 대한 심각한 손상으로 이어진다는 것은 어쩐지 의미심장하다. '미친 소'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은, 그래서 '소'를 위해서 뿐만이 아니라 '인간'을 위해 더욱 절실한 일이 아닐까.

문제는 '그들도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가?'나 '그들도 말할 수 있는가?'가 아니다. '그들도 고통을 느낄 수 있는가?'이다.   ㅡ제러미 벤담 (p123)

ps. 그러고 보니 뇌 용량이 2MB인 사람은(그러니까, 행여나 그런 사람이 있을까마는) 사랑과 연민이 있어서 지혜로울 것은 고사하고 어차피 똑똑하지도 못한데, 이건 차라리 다행일까, 아니면 설상가상일까?


댓글(2) 먼댓글(1)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희망의 밥상-제인구달
    from [로처의 사랑방] 2008-05-28 20:32 
    희망의 밥상-제인구달 불과 얼마 전부터 ‘웰빙’ 이나 ‘참살이’라는 말이 유행 이었습니다. 건강에 대한 관심도 어느 때보다 높아진 듯 하구요. 환경이나 먹거리에 유기농 바람도 불고 있습니다. 최근의 경향에 따라, ‘슈퍼사이즈 미’라는 영화도 있었구요, ‘슬로우 푸드(Slow food)’를 다룬 다큐멘터리도 방송 되었습니다. 그리고 ‘생로병사의 비밀’이란 다큐에서도 먹거리에 대해서 다룬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책도 그렇습니다. 유기농과 자연을 얘기..
 
 
로처 2008-05-28 2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로그코리아에서 보고 방문했습니다.
제가 불과 반 년전에 이 책을 읽을 때만 해도 미친소는 남의 나라 얘기였는데,
변화는 참 빠르게 찾아옵니다.

중간에 쓰신 어떤 책은 틱 낫한 스님의 <화> 맞지요?
오래전에 읽은 책이지만 이 책 맞는 듯 합니다.
정답이라면 저는 경품을 기다리고 있으면 되나요? ^^;

제 글 오래전 글이지만 먼댓글 걸고 갑니다.
좋은 글 감사하고요, 건강하세요

Fenomeno 2008-05-28 2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님이 쓰신 글도 잘 읽어보았습니다.
도표로 대단히 알기 쉽게 정리해 놓으셨네요.
게다가 한국 내의 관련 사이트들까지 정리해 두셨구요. ^^

중간에 언급한 책은 틱 낫한 스님의 <화>가 맞네요.
경품은..미처 준비를 못해서..^^;

님도 건강하시고, 즐거운 독서하세요.
 

오늘 새벽 벌어진 2007-2008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은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 끝에 맨유의 우승으로 막을 내렸다. 나는 새벽에 있었던 생방송을 놓친 관계로 경기 전체를 다 보지는 못했지만, 오후에 있었던 재방송을 보고 몇 마디 말을 보탠다.

망할 퍼거슨? 망할 언론!

불과 얼마 전, 바르셀로나와의 준결승전에서 박지성은 2경기 모두 당당히 선발로 출전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사실 박지성의 선발출전은 상당히 의외의 일이었지만, 박지성은 퍼거슨이 택한 '의외의 선택'을 '탁월한 용병술'로 바꿔줄 만큼 열심히 뛰었고, 그 결과 맨유는 결승전에 진출하게 되었다. 그때 준결승전을 시청한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느꼈겠지만, 우리나라 선수가 그야말로 '꿈의 무대'에서, 더욱이 바르셀로나와 같은 세계적인 팀과의 대결에서 당당히 한 몫을 차지하는 것을 보는 일은 꽤나 감격스러운 것이었다. 게다가 박지성이 그 경기를 통해 상당한 활약을 한 것은 모두가 지켜본 바와 같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가장 중요한 최후의 결전에, 정작 박지성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아마도 새벽까지 잠을 못자고 박지성의 선발출전을 손꼽아 기다린 사람이라면, "망할 놈의 퍼거슨 영감탱이!"라는 욕설이 절로 내뱉어졌을지도 모르겠다. 대체로 박지성의 선발출전을 예상하는 분위기였고, 최소한 무려 7명이나 되는 후보 명단에는 당연히 이름을 올리리라 생각했지만, 퍼거슨은 단호하게 그 모든 예상에 뒤통수를 후려 갈겼다. 바로 "팀을 위한 선택이었다."는 한 마디로 말이다.

퍼거슨의 선택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고 싶지는 않다. 결과적으로, 그러니까 그 망할 놈의 결과는 퍼거슨의 선택을 최소한 틀리지 않았다고 대변해주고 있고, 어쨌거나 결정권은 그에게 있으니까. 하지만 개인적으로 좀 더 유감스러운 것은, 박지성의 선발출전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언론의 태도다.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영국의 모든 매체가 박지성의 선발출전을 예상한다느니, 이로써 챔스 결승전 사상 최초로 아시아인이 출전한다느니, 일본 언론에서도 아시아인의 자랑이라고 한다는 둥 설레발을 잔뜩 치더니, 결국 헛물만 잔뜩 들이킨 꼴이 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경기 후 언론의 태도는 더욱 가관이다. 지금 뜨는 대부분의 뉴스는 퍼거슨의 선택에 대한 것인데, '냉혹한 결단'이라거나, '퍼거슨의 의중은 나니'라거나, '플레처는 갸우뚱'이라는 둥, 퍼거슨의 선택에 대한 의심과 반감만을 확대시키고 있다. 심지어는 일본 네티즌 마저 화났다며, 이를 아시아인에 대한 차별로 몰고 가기도 한다. 물론,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최소한, 어제까지만 해도 러시아까지 날아가서 러시아인들이 맨유 2군에 있는 중국선수 동팡저우는 모르고, 한국선수 박지성은 안다고 자랑스레 이야기하던 언론(물론, 모든 언론이 그렇지는 않겠지만)이 할 말은 결코 아니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밉다.'는 말이 이 경우에 적절한지도 모르겠다.

재방송의 아쉬움

처음 밝혔듯이, 나는 이 경기를 MBC ESPN의 낮 재방송으로 시청했다. 재방송을 보기 전까지 나는 어떠한 정보도 접하지 않은 채 이 경기를 보았는데, 그것은 비록 생방송을 놓치기는 했지만 최소한 이 경기를 마치 생방송처럼 두근대며 볼 수 있기를 기대한 까닭이다. 그런데, 경기가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스콜스가 뜬금없이 피를 흘리기에 시간을 보니, 어느새 경기는 10여분 이상이 지나 있었다. 하여 불행히도, 나는 이 경기가 필연코 연장전까지 가리라는 걸 이미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경기를 이렇게 단축시켜서 보여주는 것은 2시간 여 안에 모든 걸 보여주기에는 경기시간이 너무 길어졌다(즉, 연장전 승부)는 것 외에는 달리 그 이유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생방송을 안 본 건 전적으로 내 탓이다. 그러니까 생방송을 봐야한다고 말한다면 달리 할 말도 없다. 하지만, 재방송 또한 시청자들에게 내보내는 일종의 '상품'인 이상, 방송사가 좀 더 세심하게 신경을 써야 하지 않았나 싶다. 아무리 방송시간이 정해져 있어서 부득이 편집이 불가피하더라도 오늘과 같아서는 곤란하다. 이를테면, 뜬금없이 스콜스가 피를 흘리는 장면이 나온다든지, 어느 순간 갑자기 양 팀 선수들이 충돌하고 있다든지, 그 직전의 상황은 전혀 없이 그저 아무렇게나 잘라서 불쑥 이런 장면들이 나오면 시청자로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그렇게 열심히(되는대로) 편집하여 경기시간을 팍 줄여놓고서는, 경기 후의 장면(시상 등)은 무려 30여분이나 보내주는 것은 이해가 안 된다. 마지막 우승의 감격을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무래도 축구는 경기 자체가 우선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어차피 우승 후의 장면이 이미 예정된 것이었다면, 거기에 적절한 시간을 진작부터 방송시간을 조정해 할당해야 하지 않았을까? 이건 차라리 하이라이트만도 못했다. 진작 '재방송'이 아니라 '단축방송'이라고 예고했으면, 누가 그 방송을 보겠는가. 그러니 '재방송'은 차라리 기만에 가깝다.

박지성에게는 박수를...

이러니저러니 해도 가장 아쉬운 것은, 바로 박지성 본인일 것이다. 스스로도 이번 챔스 결승전을 앞두고, "가장 중요한 경기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는 그 중요한 경기를 벤치에서조차 지켜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 아쉬움이 퍼거슨에 대한 배신감이나 원망으로 이어질 것인지 또한, 오직 박지성 혼자만의 몫이다. 나 역시 심정적으로는, "망할 놈의 퍼거슨!"이라고 말하고 싶고, "차라리 맨유를 떠나라!"고도 말하고 싶지만, 그건 결코 박지성의 심정과는 같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겠지만, 최소한 박지성의 팬이라면, 그리고 그가 그라운드에서 보이는 열정에 감명을 받은 사람이라면, 박지성이 잘 되기를 바란다는 동일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으리라고 믿는다. 아쉬운 마음에, 그러니까 퍼거슨의 그 망할 놈의 '선택'에 분개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누구의 선택도 아닌, 박지성 본인의 '선택'이다. 그래서 나는, 그가 향후에 어떤 '선택'을 할지 조용히 지켜보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가 취할 '선택'에 나는 미리부터 '존중'을 표하고 싶다.

올 시즌의 마지막 경기가 이렇게 끝나버려서 정말로 아쉽지만, 이번 시즌 그가 흘린 땀방울에는 진정어린 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한 마디 하자면, "다음 시즌에도 잘 부탁한다, 지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