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추어 축구 클럽팀인 '에마1995' 소속 선수의 결혼식에서, 역시 '에마1995'의 일원인 어느 목사의 주례사가 결혼식장을 대신한 '에마1995'의 전용 연습장 위에 조용히 퍼져나간다. "부부는 환상의 팀웍을 발휘하여 가정의 골문을 굳게 지키고, 한 발 더 나아가 '행복'이라는 멋진 골을 터뜨리기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이어서 '에마1995' 팀원들이 마련한 선물인 월드컵 결승전 티켓이 신랑의 손에 전해지자, 신랑은 환희에 가득 차서 하늘을 향해 외친다. "오늘은 생애 최고의 날이야." 그러니까, 대체 결혼과 결승전 티켓 중 무엇 때문에? 

영화 <내 남자 길들이기>는 축구에 미친 남자들과 그런 남자들을 축구로부터 떼어내려는 여자들의 한판 승부를 다루고 있다. 사실, 대부분이 축구와는 완전히 담 쌓은 여자들이 'FC비너스'라는 축구팀을 결성해 '남자들의 축구 생활'의 존속 여부를 두고 '에마1995'와 축구경기를 벌인다고 할 때부터 영화의 리얼리티는 심각하게 훼손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남자와 여자의 대결구도는 적어도 축구팬이 아닌 여자를 만날 확률이 높은 남자 축구팬에게는 꽤 현실적이고 흥미로운 주제라고 할 만하다. 그리고 영화는 그러한 주제를 시종일관 가볍고 코믹하게 펼쳐 나간다.

애초부터 말도 안되는 승부를 설정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FC비너스'의 의지만큼은 범상치 않다. 사실은 전 청소년 국가대표였던 여자 주인공(안나)이 대표팀 동료였던 현 여자 프로축구팀 골키퍼를 팀에 합류시키기 위해 그녀로 하여금 '에마1995' 팀원을 유혹해 관계를 가지게 하고(이것은 'FC비너스'의 선수는 1년 이내에 '에마1995'의 선수와 섹스를 한 적이 있는 사람에 한하다는 사전 계약에 기인한다), '에마1995' 선수의 동성 연인이 등장해 힘을 보태며, 팀의 연습장을 만들기 위해 풀들로 무성한 넓은 초지에 다소 엉성한 연습장을 만들기도 하는 등 'FC비너스'는 조금씩 축구팀으로서의 면모를 갖춰나간다. 그리고 그러한 우여곡절을 겪으며 'FC비너스'는 마침내 '에마1995'와 서로 물러설 수 없는 운명의 대결을 펼친다. 

물론, 결과는 이미 누구나 짐작할 만하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에마1995'와 'FC비너스' 선수들이 함께 축구를 즐기는 모습은 '축구'와 '사랑'이 반드시 대립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다분히 이상적이고 행복한 결말을 제시하는 것처럼도 보이지만, 그렇더라도 사실상 '축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얼마든지 있고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사랑'이라는 것이 영화가 남기는 가장 중요하고도 확실한 메시지다. 과연 아무리 생각해도 '축구 없는 사랑'은 문제가 없지만 '사랑 없는 축구'란 삭막하기 그지없으니 결론은 뻔할 수밖에. 다만, 문득 드는 의문 하나. '축구냐 사랑이냐?'라고 물으면 대답은 '사랑'이겠지만, '축구'를 '사랑'하면 이거야 원, 대체 어쩌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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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단 - 21세기의 초상>은 2005년 4월 23일 벌어진, 레알 마드리드와 비야레알의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축구경기를 가감없이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이 영화를 위해 레알의 홈구장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는 슈퍼 카메라를 포함, 무려 17대의 카메라가 동원되었지만, 정작 그 많은 카메라가 찍는 것이라고는 오직 지단 하나에 불과하다. 그래서 영화는 '골'이 터지는 순간, 그물의 출렁임조차 간단히 외면하고, 지단을 제외한 다른 슈퍼스타의 존재ㅡ호나우두, 베컴, 라울, 카를로스 등ㅡ마저 한낱 엑스트라로 전락시켜버리고 만다.

하지만, 그렇게 집요하게 지단만을 좇는다고 해서 이 영화가 일반적으로 팬들이 지단에게 바라는, 어떤 영웅의 환상적인 모습을 보여주리라 기대한다면 그것은 크나큰 오산이다. 각종 개인상을 비롯, 월드컵과 챔피언스리그마저 제패한 이 절대적인 영웅은, 그러나 필드 위에서 꽤나 초라한 모습을 보여주는 탓이다. 물론, 공이 왔을 때의 지단이 우아하고 화려한 몸놀림을 선보이리란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도대체가 오만불손하기 짝이 없는 축구공이란 녀석은 축구영웅에게도 결코 많은 친견을 허락하지 않고, 하여 영웅은 하릴 없이 뛰거나 걷고, 계속해서 입에 고이는 침을 내뱉고, 빛나는 머리에 흐르는 땀을 수시로 닦아낼 뿐이다. 

이를 통해 과연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란 결코 간단하지 않다.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그저 실제로 진행되는 경기 그 자체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하프타임 때 잠깐 보여주는 화면에서 일단의 단서를 얻을 수는 있을 듯하다. 마치 테러의 현장인 듯한 곳. 그 화면 속에서 어울리지 않게 지단 유니폼을 입은 소년의 모습은, 냉혹한 현실에서는 어떠한 영웅도 구원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증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과연 그러한 모습 그대로, 세기의 축구영웅도 그의 주무대인 축구장 위에서 게임을 홀로 지배하지는 못한다. 그것은 말하자면, '날지 못하는 슈퍼맨'의 모습과 닮아 있다.

범인과 다를 바 없는 지단의 모습은 한편으로 실망스럽기 그지없지만, 지단의 모습이 의미하는 바는 결국 우리와 똑같은 모습을 지니는 영웅의 실체이다. 90분 내내 공을 가지고 있을 수도 없고, 더욱이 경기의 무조건적 승리를 담보하지도 못하더라도 지단은 아주 잠깐의 기회를 통해 결정적인 차이를 만들어내려는, 평범하지만 끈질긴 노력을 계속해서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이 의외로 잔잔한 감동을 전해줄 수 있는 것은 하늘을 나는 슈퍼맨의 초인적인 능력이 전해주지 못하는, 날지도 못하면서 악당을 무찌르려는 망토 없는 슈퍼맨의 지극히 인간적인 의지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닐까.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고 감동적인 장면은 경기종료 직전, 상대선수와 충돌한 지단이 퇴장당할 때 보여주는 팬들의 반응이다. 사전에 모의한 바도 없이, 주장 라울의 박수에 따라 지단에게 일제히 기립박수를 보내는 팬들의 모습은, 꽤 지루하다면 지루한 이 영화를 지단의 팬들이 꼭 봐야만 하는 이유이자, 하늘을 날지 못하는 슈퍼맨을 위한 더할 수 없는 찬사이다. 지단의 유니폼이 망토가 될 수 없고, 하여 영웅조차도 퇴장을 피할 수 없지만, 다만 그라운드에서 땀을 흘리는 영웅의 모습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위안이 될 수 있음을, 영화는 그저 담담하게 보여준다.

더 이상 하늘을 나는 슈퍼맨은 존재하지 않고, 어떤 영웅도 치열한 현실의 세계에서 구원이 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영웅을 기대하는 까닭은, 결국은 똑같이 괴롭고 고독한 상황에서도 그저 최선을 다하는, 평범한 영웅의 진부하지만 끈질긴 행보의 힘을 우리는 끝내 믿고 싶기 때문은 아닐까. 기실 그러한 '날지 못하는 슈퍼맨'의 모습이야말로, 살벌한 경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망토 하나 없이 누군가의ㅡ부모의, 연인의, 자식의 영웅이기를 강요당하는, 21세기를 살아가는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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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서 제공하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의하면, '훌리건'은 "축구팬 중에서도 특히 열광적이며 집단 폭력행위까지 서슴지 않는 사람들"로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대개의 영한사전에서는 'hooligan'이라는 단어를 "무뢰한, 깡패"로 등록해 놓고 있기도 하다. 이처럼 부정적 인식 일색인 '훌리건'의 의미를 바탕으로 영화 <훌리건스(GREEN STREET)>에 대해 유추해보자면, 영화는 다분히 폭력과 광기의 세계를 묘사하고 있으리라 짐작되고, 아닌 게 아니라 <훌리건스>는 바로 축구에 대한 열정이 폭발적으로 분출하여 마침내는 붉은 피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훌리건'의 삶을 잔인하리만치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영화다. 

영화는 미국에서 하버드대를 다니던 맷이 룸메이트의 마약소지 죄를 대신 덮어쓰고 영국으로 돌아오면서 시작한다. 죄를 덮어 쓰고도 달리 대항할 방법을 찾지 못하는, 다소 내성적이고 소심한 맷은 매형의 동생인 피트와 만나면서 피트를 둘러싸고 있는, 웨스트햄 유나이티드를 매개로 하여 엮여진 훌리건들의 세계를 처음으로 접한다. 그리고 GSE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웨스트햄 유나이티드의 열혈 지지자들이 팀을 사랑하는 방식, 즉 다른 서포터와 충돌함으로써 그들 스스로를 증명하는, 다분히 폭력적이고 거칠기 그지없는 방식에 순식간에 빠져들게 된다. 맷 역시 어느덧 GSE의 일원이자 '훌리건'이 된 셈이다.

영화가 묘사하는 GSE의 활동은 상상 이상으로 잔인하다. 하지만 거기에는 또한, 오직 폭력과 광기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하고 있기도 하다. 자신이 응원하는 팀에 대한 열정과 애정, 그것을 흔들림 없이 지켜나가는 용기와 의지, 그리고 그러한 와중에 동료들 사이에 흐르는 끈끈한 의리와 신뢰는 화면 가득 펼쳐지는 핏빛 가득한 살풍경의 모습들을, 한편으로는 꽤 낭만적으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맷이 GSE에서 구원(救援)을 찾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러한, 자신에게 부족했던 어떤 남자다운 성향ㅡ다분히 마초적이지만ㅡ임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거니와, 그러한 경험을 통해 결국 맷은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자신을 곤욕에 빠뜨렸던 룸메이트 앞에 완전히 달라진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맷의 변화에만 주목하자면, 영화 <훌리건스>는 폭력과 광기를 다분히 미화시키는 것처럼도 보인다. GSE의 세계를 경험한 후의 맷의 변화는 그의 '성장'에 있어서 폭력과 광기ㅡ비록 이것만이 전부는 아니지만ㅡ가 자양분으로 작용했음을 부인할 수 없도록 만드는 탓이다. 그러나, 가장 극적인 순간에 이루어지는 '어느 훌리건의 죽음'은, 영화가 폭력과 광기의 극단으로 치달리려는 데 대한 서슬 퍼런 경고로 받아들여진다. 전 GSE의 리더였던, 피트의 형이 말하듯이 세상에는 축구보다 중요한 것들이 여전히 많고, 무엇보다도 죽음이 남기는 것은 폭력과 광기의 낭만적 결말이 아니라, 자신은 물론 타인의 삶까지도 피폐하게 만드는 파멸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뜨거운 열정과 순수한 용기가 극단적인 폭력과 끝 모를 광기로 변화하는 지점에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팀의 승리를 갈망하며, 팀의 승리에 기뻐하며 부르던 웨스트햄 유나이티드의 응원가가 그들만의 전쟁에서 진군가로 변하는 순간, 경기가 끝났지만 여전히 그들만의 잔혹한 전쟁을 기어코 끝내지 않으려는 순간, 그리하여 마침내 필연적으로 어느 훌리건의 죽음으로 귀결되는 순간, 영화는 폭력과 광기에 잠시나마 매혹되었던 사람들에게 그 매혹이 초래하는 치명적인 결말을 가감없이 드러내준다. 그들의, 그들의 동료의, 혹은 그들의 적대자의 죽음이 이루어지는 순간, 폭력과 광기는 더 이상 열정도 용기도 신념도 아니라는 명징한 현실을.

미국으로 돌아간 맷이 흥얼거리는 웨스트햄 유나이티드의 응원가는 결단코 폭력과 광기에 대한 향수가 아니다. 그것이 <훌리건스>가 보여주는, 의외로 낭만적이라서 당황스러운 '훌리건'의 폭력과 광기의 매력을 용납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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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인열전 1 (반양장) - 내 비록 환쟁이라 불릴지라도
유홍준 지음 / 역사비평사 / 2001년 3월
평점 :
절판


어렸을 때 아주 잠깐 서예학원을 다녔던 적이 있다. 당시에 다녔던 대부분의 학원이 그랬던 것처럼 서예학원도 딱히 내가 원해서 간 것은 아니었는데, 그래도 그런 것치고는 부드러운 붓으로 새하얀 종이에 글씨를 쓰는 일은 아주 나쁘지만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다만 곤욕이었던 것은 하루에 한자 5자를 외우는 일이었다. 一이 '하나'고 二가 '둘'이고 三이 '셋'이라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납득할 수 있었지만, 左가 '왼'이고 右가 '오른'이라는 데에 이르면 결코 납득하기 쉽지 않았고, 외우기는 더욱 어려웠다. 선생님은 5자를 외우지 못하면 집에 보내주지 않으셨는데, 어려서부터 외박을 즐기지 않았던 나는 곧 깔끔하게 학원을 그만두는 쪽을 택했다. 아무래도 집에 못가는 것보다야 학원을 안가는 게 나았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서예'와의 짧은 인연은 금세 끝나버렸지만, 학원에 다니던 당시에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림'이었다. 가기 싫은 학원을 버티다버티다 마지못해 늦게 갔었는지, 혹은 도대체가 납득하기 어려운 한자를 외우는 게 만만치 않아서 늦게까지 붙잡혀 있었던 건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학원에 사람이 많지 않았던 어느 늦은 저녁시간에 있었던 일이다. 선생님이 커다란 종이를 책상에 널찍하게 펼쳐놓으시고는 거기에다 그림을 그리고 계셨다. 부드러운 붓을 아무렇게나 일그러지도록 거칠게 다루자 바위가 생겨났고, 다시 붓을 부드럽게 가다듬고 바위에서부터 우아하게 올려치자 난이 생겨났다. 또 한쪽 여백에 알 수 없는 한자를 몇자 적으셨고, 마지막으로 붉은색 낙관을 힘주어 찍으셨다. 그리고 이 모든 작업은, 어린 내 눈에도 정말로 근사해 보였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다지 독자에게 친절하지는 않은 이 책 <화인열전>의 매력 역시, 단연 '그림'에 있지 않나 싶다. 물론 굳이 그림이 아니더라도 당시의 연구 성과와 자료를 최대한 활용한 듯한, 8명의 화인들의 삶과 예술세계에 대한 내용은 상당한 지적 만족감을 주고, 더욱이 이러한 내용이 좀 더 그림을 '잘' 감상하는 데에 유용한 지식을 전해주기도 하겠지만, 어쨌거나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림'을 보고 '느끼는' 감정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가령, "절파(浙派)풍의 전통과 남종문인화풍과 진경산수적 요소가 뒤섞인 최득의작"이라는 설명을 채 절반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저 겸재 정선의 <득의산수>라는 그림을 보며 그 몽환적이면서도 신비한 분위기에 가볍게 감탄하는 정도야 전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요컨대, 아는 만큼 보기 이전에, 본 대로 느껴도 좋다는 의미다.

사실, 이 책에서 아쉽다고 여기는 부분은 오히려 '아는 것이 병이다.'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을 듯하다. 단적인 예를 하나 들자면, 저자는 단원 김홍도의 <송하맹호도>에서 소나무는 단원의 스승인 표암 강세황이 그린 것으로 확신하며 그 작품을 사제 간의 합작품으로 흐뭇하게 여긴다.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소나무 그림이 강세황이 노년에 그린 것이라며, 과연 60대 노필의 선비화가다운 품격이 살아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와 관련해 오주석은 <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에서 그림 우측 상단의 '표암화송(豹菴畵松)'이라는 글씨가 훼손되어 있는 점에 주목하면서, '표암'이라는 글씨가 그림의 값을 올리기 위해 조작된 것으로 지적하고 있다. 물론, 어느 쪽이 현재 학계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화인열전>에서 빈번히 드러나는 저자의 성급한 추측과, 아는 대로 혹은 믿고 싶어하는 대로 보려는 듯한 태도에는 상당한 실망감을 감출 수 없다.

지금 그대가 보배로 여기는 것이 반드시 사람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아닐지라도, 그 즐기는 바로써 보건대, 비록 삼공(三公)의 벼슬 자리를 주어도 바꾸지 않으리라는 것이 오히려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2권 p288) 

<병암진장첩>을 두고 김이도가 쓴 화첩의 발문은 내가 이 책을 읽으며 느꼈던 바를 가장 적확하게 표현해주는 글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 발문을 인용하며 <병암진장첩>이 또 다른 <삼공불환도>(단원의 대표작 중 하나)라고 예단하는데, 개인적으로는 김이도가 쓴 글의 진의는 "삼공의 벼슬 자리를 주어도 바꾸지 않으리라"는 것이 아니라 "지금 그대가 보배로 여기는 것이 반드시 사람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아닐지라도" 쪽에 있지 않나 생각한다. 즉, 내 마음대로 풀이하자면, "다른 사람이 어떻게 평가하든 간에 스스로 흡족해하고 즐길 수 있다면, 그 그림은 삼공의 벼슬과도 바꾸지 않을 만한 좋은 그림이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말 꼬리 잡는 듯하기는 하지만, 책 속에서 단원의 그림에 대한 찬사 후 "이래야 단원이지."라는 저자의 감탄이 "이것이 단원이구나." 라는 쪽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그와 비슷한 맥락에서다.

다소 비판적 입장에서 이 리뷰를 썼지만, 여전히 나는 <화인열전>이 흥미롭고 의미 있는 좋은 책이라는 데에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책을 읽는 내내 '아는 만큼 보는 것' 만큼이나 '보는 대로 느끼는 것' 역시 중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능호관 이인상' 편의 부제, '오직 아는 자만은 알리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처럼, 오로지 '아는 자'만이 감상할 수 있는 그림만이 과연 훌륭한 그림인 것일까? 극단적으로 말해서 비록 左가 '왼'이라는 것조차 모를지라도, 그저 '근사하다.'는 유치한 감상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것일까? 분명, 아는 만큼 좀 더 볼 수 있는 여지가 커지리란 것을 부인할 수 없지만, 그렇더라도 가장 중요한 것은 '무지(無知)'와 '과신(過信)'의 사이에서 솔직한 '자신의 느낌'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라고 믿는다면, 이건 다만 '모르는 자'의 변명일 뿐일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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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골>을 보면서 파울로 코엘류의 소설 <연금술사>를 떠올리게 된 것은, 공교롭게도 양쪽 모두 주인공의 이름이 '산티아고'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영화 <골>에서 힘겨운 일상을 탈피해 축구선수가 되기 위한 '골(목표)'을 향해 영국으로 떠나는 산티아고의 행보는, 소설 <연금술사>에서 양치기로서의 삶을 벗어나 '자아'를 찾아 사막으로 떠나는 산티아고의 여정과 그대로 오버랩된다. 소설에서 멜기세댁이 나타나 산티아고에게 우림과 툼밈을 주었다면, 영화에서는 전 스카우터였던 글렌 포이가 등장해 산티아고를 영국 프리미어리그로 이끈다. 그리고 두 산티아고는 다소의 시련 끝에 자신의 이상을 실현시킨다.

솔직히 말하자면,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이야기가 실은 이런 식이다. 주인공이 있고, 그의 목표가 있고, 도움을 주는 사람과 방해하는 사람이 있고, 약간의 로맨스가 있고, 시련과 고통이 있고, 끝내는 성공과 환희가 있다. 그러니까 영화 <골>의 스토리는, 이 기본적인 스토리 라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골>의 스토리가 엉망이라는 말은 전혀 아니다. 다만, <연금술사>가 결국 뻔한 이야기를 동화적 감성과 넘치는 은유로 이끌어 가는 것처럼, <골>에도 나름의 장점이 필요하다는 의미일 뿐이다. 그리고 잘 알다시피 <골>이 지니는 최고의 장점은, 오직 '축구'에 다름 아니다. 

총 3부작으로 계획된 영화 <골>의 1부는 멕시코 국경을 넘어 미국으로 밀입국한 뒤 그곳에서 가족과 함께 평범한 삶을 살던 산티아고가, 미국에 와있던 글렌 포이의 도움으로 영국 뉴캐슬 유나이티드에서 축구선수로서의 꿈을 펼쳐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이미 말했듯 꽤 진부하다면 진부한 내용이지만, FIFA가 관여한 이 영화의 스케일은 그 진부함을 상당부분 특별함으로 바꾸어 놓았다. 산티아고가 뉴캐슬 유나이티드에 입단하고 훈련하는 과정에 나오는 선수들은 실제 뉴캐슬 유나이티드 선수들이고, 경기장면은 실제 프리미어리그 경기가 그대로 영화에 차용되어 경기장의 모습이 좀 더 박력 넘치는 화면으로 재구성되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산티아고의 모습이ㅡ비록 다소의 어색함을 피할 수 없다하더라도ㅡ녹아들어 있는 것이다.

한편, 영화 <골>의 특별함과 장점을 '축구'라고 정의할 때, 2부는 1부보다 한층 더 매력적이라는 것은 적어도 뉴캐슬 유나이티드의 팬들이 아니라면 대체로 동의할 수 있는 일이다. 뉴캐슬에서 성공신화를 이룬 산티아고가 '세계 최고의 구단'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하며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향한 진격을 다룬 2부는, 역시 실제 레알 마드리드 선수들의 등장과 챔피언스리그 경기의 재구성으로 훨씬 화려한 장면을 연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 화려한 축구장면과는 대조적으로, 정작 '영화'는 도무지 그 방향성을 잃어버리고 만다. 

1부에서 이미 우정과 사랑과 가족과 성공을 쟁취한 산티아고는, 2부에서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하며 다시 우정과 사랑과 가족과 성공을 시험 받는다. 뉴캐슬에서 함께 성공신화를 썼던 개빈 해리스와 납득하기 어려운 주전 경쟁이 펼쳐지고, 잉글랜드와 스페인의 거리만큼 연인 로즈와의 사이에서도 급작스럽게 거리가 생기며, 산티아고가 어렸을 때 가족을 떠났던 엄마가 나름의 사연을 가지고 재혼한 남자와의 사이에 낳은 동생과 함께 난데없이 나타나며,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입성한 스페인 무대에서 그는 다시 자신의 능력을 증명할 것을 어이없게 강요받는다. 당연히 이 모든 이야기들은 한결같이 흥미롭지 못하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갑자기 나타난 동생이 산티아고의 람보르기니를 훔쳐 타고 미친 듯이 달리다가(그는 기껏해야 열 두어살 남짓 밖에 되지 않았다) 람보르기니를 거의 반파시키는 사고를 내고도 고작 팔 기부수를 하는 정도로 그치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엄마와 동생과의 재회와 화해는 별다른 계기 없이 밍숭맹숭하기 짝이 없이 이루어지고, 경기장에 지단, 라울, 베컴, 호나우두, 구티 등이 여전히 뛰고 있는 상황에서 개빈 해리스와 산티아고까지 뛰게 되는 것은 이해한다고 하더라도(그렇다면 그때 레알 마드리드의 선수들은 적어도 13명이 동시에 뛰게 되는 셈이다), 굳이 해리스와 산티아고를 경쟁자로서 몰고 가려는 시도는 어떤 긴장과 갈등 없이 막판에 둘의 콤비 플레이를 드러내면서 대단히 어설프게 끝나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최후의 순간 레알 마드리드의 승리를 결정짓는 것은 우습게도 산티아고가 아닌, 데이비드 베컴이다.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말해서, <골> 1부가 진부한 스토리에도 불구하고 '축구'라는 특별함이 영화를 돋보이게 만들었다면, 2부는 '축구'에 묻혀서 스토리는 완전히 넝마조각이 되어버리고 만 셈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이는 아무래도 갈락티코(은하계) 정책을 표방한 당시의 레알 마드리드에는 은하계에 걸맞게 원체 빛나는 별들뿐이었는지라, 영화도 그 빛에 가려진 건 어쩔 수 없는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카메라를 갖다 대기만 해도 빛이 나는 레알 마드리드의 선수들을 카메라는 결코 외면할 수 없었고, 하기에 <골> 2부에서는 유난히 산티아고가 동료들의 모습을 보며 웃는 장면이 많이 들어가 있다. 그리하여 결국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승부를 결정짓는 데이비드 베컴의 프리킥 한방은, 갈락티코의 정점에서 영화를 은하계 밖으로 내던져 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골>이 흥미로울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일찍이 닉 혼비는 명확하게 설명한 바 있다. 자타가 공인하는 아스날의 광팬인 닉 혼비는 <어제의 영웅>을 보고 쓴 리뷰에서, <어제의 영웅>이 "2차 세계대전 이래 최악의 영국 영화"라고 하면서도, "난 이 영화의 매 장면을 즐겼다. (축구팬으로서) 축구에 관한 영화를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라고 고백했다(<포포투> 11월호 참조). 말하자면, 바로 이런 마음이야말로 축구영화를 대하는 축구팬의 자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쩌면, 아니 분명히 <골>은 그리 고명하지 못한 연기를 선보이는 산티아고(그의 축구 실력은 더욱 형편없다)의 어설픈 성공기를 담고 있는 그저 그런 영화이지만, 그렇거나 말거나 <골>의 축구장면은 다른 어떤 축구영화도 따라올 수 없는 방대한 스케일과 화려함을 자랑하고 있다는 것이, 결코 간과할 수 없는 핵심인 셈이다. 물론, 덕분에 2부의 경우에는 갈락티코에 의해 은하계 밖으로 내던져짐을 당하기도 하지만, 여전히 영화에 등장하는 것은 바로 찬란하게 빛나는 갈락티코 그 자체인 것이다. 축구팬은 결코 그 '빛'을 외면할 수 없다.

그러므로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영화 <골>의 특별함은, 오직 '축구'에 다름 아니다. 이 엉성하면서도 매력적인 영화의 3부를, 나는 축구팬으로서 기대해 마지않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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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9-01-27 1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실베스타 스텔론 주연의 "승리의 탈출"을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Fenomeno 2009-01-27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급 영화 냄새가 물씬 풍기기는 해도 역대 최고의 걸작으로 꼽을 만한 축구영화다."

제가 즐겨보는 축구잡지에 그 영화에 대한 이런 짤막한 평이 있더군요. 펠레가 등장하기도 해서 무지 관심이 가지만, 아직 그 영화를 보지는 못했습니다(구하기도 쉽지 않은 것 같더군요).

메피스토 님께서는 그 영화를 보신 것 같은데...항상 느끼는 거지만 관심분야가 정말 다양하신 것 같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