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단 - 21세기의 초상>은 2005년 4월 23일 벌어진, 레알 마드리드와 비야레알의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축구경기를 가감없이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이 영화를 위해 레알의 홈구장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는 슈퍼 카메라를 포함, 무려 17대의 카메라가 동원되었지만, 정작 그 많은 카메라가 찍는 것이라고는 오직 지단 하나에 불과하다. 그래서 영화는 '골'이 터지는 순간, 그물의 출렁임조차 간단히 외면하고, 지단을 제외한 다른 슈퍼스타의 존재ㅡ호나우두, 베컴, 라울, 카를로스 등ㅡ마저 한낱 엑스트라로 전락시켜버리고 만다.

하지만, 그렇게 집요하게 지단만을 좇는다고 해서 이 영화가 일반적으로 팬들이 지단에게 바라는, 어떤 영웅의 환상적인 모습을 보여주리라 기대한다면 그것은 크나큰 오산이다. 각종 개인상을 비롯, 월드컵과 챔피언스리그마저 제패한 이 절대적인 영웅은, 그러나 필드 위에서 꽤나 초라한 모습을 보여주는 탓이다. 물론, 공이 왔을 때의 지단이 우아하고 화려한 몸놀림을 선보이리란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도대체가 오만불손하기 짝이 없는 축구공이란 녀석은 축구영웅에게도 결코 많은 친견을 허락하지 않고, 하여 영웅은 하릴 없이 뛰거나 걷고, 계속해서 입에 고이는 침을 내뱉고, 빛나는 머리에 흐르는 땀을 수시로 닦아낼 뿐이다. 

이를 통해 과연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란 결코 간단하지 않다.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그저 실제로 진행되는 경기 그 자체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하프타임 때 잠깐 보여주는 화면에서 일단의 단서를 얻을 수는 있을 듯하다. 마치 테러의 현장인 듯한 곳. 그 화면 속에서 어울리지 않게 지단 유니폼을 입은 소년의 모습은, 냉혹한 현실에서는 어떠한 영웅도 구원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증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과연 그러한 모습 그대로, 세기의 축구영웅도 그의 주무대인 축구장 위에서 게임을 홀로 지배하지는 못한다. 그것은 말하자면, '날지 못하는 슈퍼맨'의 모습과 닮아 있다.

범인과 다를 바 없는 지단의 모습은 한편으로 실망스럽기 그지없지만, 지단의 모습이 의미하는 바는 결국 우리와 똑같은 모습을 지니는 영웅의 실체이다. 90분 내내 공을 가지고 있을 수도 없고, 더욱이 경기의 무조건적 승리를 담보하지도 못하더라도 지단은 아주 잠깐의 기회를 통해 결정적인 차이를 만들어내려는, 평범하지만 끈질긴 노력을 계속해서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이 의외로 잔잔한 감동을 전해줄 수 있는 것은 하늘을 나는 슈퍼맨의 초인적인 능력이 전해주지 못하는, 날지도 못하면서 악당을 무찌르려는 망토 없는 슈퍼맨의 지극히 인간적인 의지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닐까.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고 감동적인 장면은 경기종료 직전, 상대선수와 충돌한 지단이 퇴장당할 때 보여주는 팬들의 반응이다. 사전에 모의한 바도 없이, 주장 라울의 박수에 따라 지단에게 일제히 기립박수를 보내는 팬들의 모습은, 꽤 지루하다면 지루한 이 영화를 지단의 팬들이 꼭 봐야만 하는 이유이자, 하늘을 날지 못하는 슈퍼맨을 위한 더할 수 없는 찬사이다. 지단의 유니폼이 망토가 될 수 없고, 하여 영웅조차도 퇴장을 피할 수 없지만, 다만 그라운드에서 땀을 흘리는 영웅의 모습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위안이 될 수 있음을, 영화는 그저 담담하게 보여준다.

더 이상 하늘을 나는 슈퍼맨은 존재하지 않고, 어떤 영웅도 치열한 현실의 세계에서 구원이 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영웅을 기대하는 까닭은, 결국은 똑같이 괴롭고 고독한 상황에서도 그저 최선을 다하는, 평범한 영웅의 진부하지만 끈질긴 행보의 힘을 우리는 끝내 믿고 싶기 때문은 아닐까. 기실 그러한 '날지 못하는 슈퍼맨'의 모습이야말로, 살벌한 경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망토 하나 없이 누군가의ㅡ부모의, 연인의, 자식의 영웅이기를 강요당하는, 21세기를 살아가는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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