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골>을 보면서 파울로 코엘류의 소설 <연금술사>를 떠올리게 된 것은, 공교롭게도 양쪽 모두 주인공의 이름이 '산티아고'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영화 <골>에서 힘겨운 일상을 탈피해 축구선수가 되기 위한 '골(목표)'을 향해 영국으로 떠나는 산티아고의 행보는, 소설 <연금술사>에서 양치기로서의 삶을 벗어나 '자아'를 찾아 사막으로 떠나는 산티아고의 여정과 그대로 오버랩된다. 소설에서 멜기세댁이 나타나 산티아고에게 우림과 툼밈을 주었다면, 영화에서는 전 스카우터였던 글렌 포이가 등장해 산티아고를 영국 프리미어리그로 이끈다. 그리고 두 산티아고는 다소의 시련 끝에 자신의 이상을 실현시킨다.

솔직히 말하자면,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이야기가 실은 이런 식이다. 주인공이 있고, 그의 목표가 있고, 도움을 주는 사람과 방해하는 사람이 있고, 약간의 로맨스가 있고, 시련과 고통이 있고, 끝내는 성공과 환희가 있다. 그러니까 영화 <골>의 스토리는, 이 기본적인 스토리 라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골>의 스토리가 엉망이라는 말은 전혀 아니다. 다만, <연금술사>가 결국 뻔한 이야기를 동화적 감성과 넘치는 은유로 이끌어 가는 것처럼, <골>에도 나름의 장점이 필요하다는 의미일 뿐이다. 그리고 잘 알다시피 <골>이 지니는 최고의 장점은, 오직 '축구'에 다름 아니다. 

총 3부작으로 계획된 영화 <골>의 1부는 멕시코 국경을 넘어 미국으로 밀입국한 뒤 그곳에서 가족과 함께 평범한 삶을 살던 산티아고가, 미국에 와있던 글렌 포이의 도움으로 영국 뉴캐슬 유나이티드에서 축구선수로서의 꿈을 펼쳐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이미 말했듯 꽤 진부하다면 진부한 내용이지만, FIFA가 관여한 이 영화의 스케일은 그 진부함을 상당부분 특별함으로 바꾸어 놓았다. 산티아고가 뉴캐슬 유나이티드에 입단하고 훈련하는 과정에 나오는 선수들은 실제 뉴캐슬 유나이티드 선수들이고, 경기장면은 실제 프리미어리그 경기가 그대로 영화에 차용되어 경기장의 모습이 좀 더 박력 넘치는 화면으로 재구성되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산티아고의 모습이ㅡ비록 다소의 어색함을 피할 수 없다하더라도ㅡ녹아들어 있는 것이다.

한편, 영화 <골>의 특별함과 장점을 '축구'라고 정의할 때, 2부는 1부보다 한층 더 매력적이라는 것은 적어도 뉴캐슬 유나이티드의 팬들이 아니라면 대체로 동의할 수 있는 일이다. 뉴캐슬에서 성공신화를 이룬 산티아고가 '세계 최고의 구단'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하며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향한 진격을 다룬 2부는, 역시 실제 레알 마드리드 선수들의 등장과 챔피언스리그 경기의 재구성으로 훨씬 화려한 장면을 연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 화려한 축구장면과는 대조적으로, 정작 '영화'는 도무지 그 방향성을 잃어버리고 만다. 

1부에서 이미 우정과 사랑과 가족과 성공을 쟁취한 산티아고는, 2부에서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하며 다시 우정과 사랑과 가족과 성공을 시험 받는다. 뉴캐슬에서 함께 성공신화를 썼던 개빈 해리스와 납득하기 어려운 주전 경쟁이 펼쳐지고, 잉글랜드와 스페인의 거리만큼 연인 로즈와의 사이에서도 급작스럽게 거리가 생기며, 산티아고가 어렸을 때 가족을 떠났던 엄마가 나름의 사연을 가지고 재혼한 남자와의 사이에 낳은 동생과 함께 난데없이 나타나며,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입성한 스페인 무대에서 그는 다시 자신의 능력을 증명할 것을 어이없게 강요받는다. 당연히 이 모든 이야기들은 한결같이 흥미롭지 못하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갑자기 나타난 동생이 산티아고의 람보르기니를 훔쳐 타고 미친 듯이 달리다가(그는 기껏해야 열 두어살 남짓 밖에 되지 않았다) 람보르기니를 거의 반파시키는 사고를 내고도 고작 팔 기부수를 하는 정도로 그치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엄마와 동생과의 재회와 화해는 별다른 계기 없이 밍숭맹숭하기 짝이 없이 이루어지고, 경기장에 지단, 라울, 베컴, 호나우두, 구티 등이 여전히 뛰고 있는 상황에서 개빈 해리스와 산티아고까지 뛰게 되는 것은 이해한다고 하더라도(그렇다면 그때 레알 마드리드의 선수들은 적어도 13명이 동시에 뛰게 되는 셈이다), 굳이 해리스와 산티아고를 경쟁자로서 몰고 가려는 시도는 어떤 긴장과 갈등 없이 막판에 둘의 콤비 플레이를 드러내면서 대단히 어설프게 끝나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최후의 순간 레알 마드리드의 승리를 결정짓는 것은 우습게도 산티아고가 아닌, 데이비드 베컴이다.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말해서, <골> 1부가 진부한 스토리에도 불구하고 '축구'라는 특별함이 영화를 돋보이게 만들었다면, 2부는 '축구'에 묻혀서 스토리는 완전히 넝마조각이 되어버리고 만 셈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이는 아무래도 갈락티코(은하계) 정책을 표방한 당시의 레알 마드리드에는 은하계에 걸맞게 원체 빛나는 별들뿐이었는지라, 영화도 그 빛에 가려진 건 어쩔 수 없는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카메라를 갖다 대기만 해도 빛이 나는 레알 마드리드의 선수들을 카메라는 결코 외면할 수 없었고, 하기에 <골> 2부에서는 유난히 산티아고가 동료들의 모습을 보며 웃는 장면이 많이 들어가 있다. 그리하여 결국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승부를 결정짓는 데이비드 베컴의 프리킥 한방은, 갈락티코의 정점에서 영화를 은하계 밖으로 내던져 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골>이 흥미로울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일찍이 닉 혼비는 명확하게 설명한 바 있다. 자타가 공인하는 아스날의 광팬인 닉 혼비는 <어제의 영웅>을 보고 쓴 리뷰에서, <어제의 영웅>이 "2차 세계대전 이래 최악의 영국 영화"라고 하면서도, "난 이 영화의 매 장면을 즐겼다. (축구팬으로서) 축구에 관한 영화를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라고 고백했다(<포포투> 11월호 참조). 말하자면, 바로 이런 마음이야말로 축구영화를 대하는 축구팬의 자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쩌면, 아니 분명히 <골>은 그리 고명하지 못한 연기를 선보이는 산티아고(그의 축구 실력은 더욱 형편없다)의 어설픈 성공기를 담고 있는 그저 그런 영화이지만, 그렇거나 말거나 <골>의 축구장면은 다른 어떤 축구영화도 따라올 수 없는 방대한 스케일과 화려함을 자랑하고 있다는 것이, 결코 간과할 수 없는 핵심인 셈이다. 물론, 덕분에 2부의 경우에는 갈락티코에 의해 은하계 밖으로 내던져짐을 당하기도 하지만, 여전히 영화에 등장하는 것은 바로 찬란하게 빛나는 갈락티코 그 자체인 것이다. 축구팬은 결코 그 '빛'을 외면할 수 없다.

그러므로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영화 <골>의 특별함은, 오직 '축구'에 다름 아니다. 이 엉성하면서도 매력적인 영화의 3부를, 나는 축구팬으로서 기대해 마지않는 바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Mephistopheles 2009-01-27 1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실베스타 스텔론 주연의 "승리의 탈출"을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Fenomeno 2009-01-27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급 영화 냄새가 물씬 풍기기는 해도 역대 최고의 걸작으로 꼽을 만한 축구영화다."

제가 즐겨보는 축구잡지에 그 영화에 대한 이런 짤막한 평이 있더군요. 펠레가 등장하기도 해서 무지 관심이 가지만, 아직 그 영화를 보지는 못했습니다(구하기도 쉽지 않은 것 같더군요).

메피스토 님께서는 그 영화를 보신 것 같은데...항상 느끼는 거지만 관심분야가 정말 다양하신 것 같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