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지 않는 늑대
팔리 모왓 지음, 이한중 옮김 / 돌베개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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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북부 키웨이틴 불모지역에는 한 가족이 살고 있다. 한 쌍의 부부와 꼬마 넷, 그리고 친척뻘 쯤 되는 아저씨 한 명이 가족의 구성원이다. 그들이 대대로 살아온 곳은 불모지역이라는 말이 의미하듯 그리 풍요로운 환경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남편 조지와 아내 앤젤린 그리고 앨버트 아저씨는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남들과 다를 바 없는 삶을 그곳에서 영위해 나간다. 그들의 집에는 이따금 가까운 친척이 방문을 하기도 하고, 순록이 이동하는 때가 되면 지역 동족들이 사냥 정보를 공유하기도 하며, 혼자인 앨버트 아저씨에게 갑작스러운 사랑이 찾아오기도 하는 등, 그들의 삶은 여유롭고 따뜻하기만 하다. 그리고 이러한 그들의 삶은, 그리 좋지 못한 목적으로 불모지역을 찾은 한 남자에 의해 낱낱이 관찰되기 시작한다.

자, 여기까지만 이야기하면 이 책 <울지 않는 늑대>는 한 스토커 같은 낯선 침입자에 의한 범죄 스릴러물 냄새를 물씬 풍길지도 모르나, 나는 위에서 고의로 중대한 사실 하나를 빠뜨렸다. 아니, 달리 생각하면 그것은 별로 대수롭지 않은 사실이다. 세상에 사는 생명이 인간이 전부가 아닌 한, 단란한 가족이 실은 늑대 가족이라는 사실 정도야 딱히 대단할 것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한 가지 사실로 인해 위에 언급한 가족의 삶에서 어떤 위화감이 느껴진다면, 그것은 오직 늑대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인간의 '허구화된' 이미지 때문일 뿐이다. 이를테면, 일찍이 어떤 가수가 "진짜로 늑대들은 모두 다 자기네 여자 밖에 모른다"고 노래를 불렀음에도, 여전히 늑대를 반듯한 남자의 이미지로는 매치시킬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캐나다의 최고 작가로 알려진(나는 몰랐던 일이기는 하지만) 팔리 모왓은 이 책에서 그러한 늑대에 대한 편견을 깨부수고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애를 쓴다. 그는 늑대가 지닌ㅡ차라리 애교로 봐줄 법한ㅡ음흉한 남자들의 상징이라는 이미지 외에, '잔혹한 킬러'라거나 혹은 '무자비한 약탈자'와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들이 얼마나 와전되고 과장된 것이며, 특히 늑대를 사냥의 경쟁자로 인식하는 인간에 의해 어떻게 악의적으로 조작되었는지를 여실히 밝혀준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인간이 늑대에게 덧씌운 이미지란 실상 인간이 지닌 어두운 그림자를 고스란히 늑대에게 전가시킨 것일 뿐임을, 풍자와 조소를 섞어 시종일관 유머러스하게 고발한다. 그리하여 종래에 이 책은, 역자의 말대로 인간과 늑대의 위치를 완전히 뒤바꿔 버리고 만다. 

물론, 저자의 경험을 토대로 한 이 책은 '과학적'으로 완벽하게 검증된 내용만을 다루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한계로 지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책을 읽다보면 쉽게 믿기 어려운 부분도 있는 것이 사실이고, 실제로 그런 이유로 이 책의 사실성 여부가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고도 한다. 하지만, 사실의 검증 따위는 그저 과학자들이나 연구자들에게 맡겨두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저자가 서문에서 말하듯이, 이 책은 "사실이 진실을 방해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내 업이며, 삶을 이해하는 데 유머가 차지하는 역할이 지극히 중대하다는 내 소신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책이며, 따라서 이 책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다만 진실과 유머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이 책에서 '사실'이란 그저 부차적인 가치일 뿐인 셈이다.

인간이 "남자는 다 똑같은 늑대" 운운하는 노래를 신나게 부르는 것과는 달리, 늑대의 세계에서는 "바람을 피우며 가족을 돌보지 않고, 그저 재미로 사냥을 하며 탐욕을 부리는 늑대는 완전히 인간과 똑같네" 어쩌고저쩌고 하는 노래를 사뭇 비장한 어조로 부른다고 한다. 당연하게도, 이건 내가 지금 막 멋대로 지어낸 터무니없는 '사실'에 불과하다. 그러나 순록의 대량 살상이 늑대 짓이라는 증거를 찾기 위해 키웨이틴을 찾은 한 남자가 발견한 것이, 그 모든 일이 실상 인간의 짓이었다는 진실일 뿐이었듯, 사라진 늑대의 노랫소리에는 자연 파괴자인 인간에 대한 조소와 증오 그리고 공포만이 가득하다는 것이 오직 진실일 뿐이다. 그리고 이 선연한 '진실'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세계에 대한 이야기'라고 저자는 말한다. 결국 '울지 않는 늑대'란, '진실을 잃어버린 인간'의 슬픈 표상에 다름 아닌 것이다. 

개인적으로 글을 재미있게 쓰면서, 여기에 더해 은근한 비판과 풍자를 섞을 줄 아는 작가를 좋아하는데, 팔리 모왓은 이런 내 기호에 딱 들어맞는 작가다. 뒤늦게 그의 이름을 알게 되었지만, 아마도 그의 다른 책들도 언젠가 집어들게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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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순간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마누엘라 브란다오 지음, 박영민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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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지 '대인배'라고 할 만한 성품을 지니지 못한 탓에, 23살 짜리가 자서전을 썼다고 하면 일단 '10년은 이르다, 이 애송아!'와 같은 냉소어린 반응을 보여주는 게 상례겠으나, 그 '애송이'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라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그가 지난 시즌 보여준 '압도적'인 활약을 다시 언급하는 것은 입만 아픈 일이니, 여기서는 그냥 그가 대략 3억원의 '주급'을 받고 있으며 곧 4억원에 재계약할 가능성이 높다고만 말해두는 것이 낫겠다. 물론 돈만 많이 벌면 장땡인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한, 세상은 '애송이'에게 수억씩을 그냥 집어줄 만큼 호락호락하지는 않다. 그러니까 속이 쓰리긴 해도,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는 아직 어린 녀석이지만 세계최고의 축구선수 중 한명이고, 이것은 곧 그의 자서전이 '최고'의 자리에 오른 축구선수의 자서전이라는 말과도 같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쯤에서 분명히 밝혀두자면, 호날두의 화려한 이력을 최대한 부각시키려는 듯한, 책 표지를 덮어버린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발롱도르 수상ㅡ세계 최고의 자리에 서다!"라는 내용의 띠지는 염두에 두지 않는 편이 낫다. 이건 끝내 '엄친아'스러운 어린 녀석에 대한 시기를 포기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호날두의 자서전에 대해 갖기 쉬운 편견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다. 즉, 이른 나이에 거둔 성공과 잘생긴 외모, 여기에 자못 오만해보이기까지 하는 호날두의 태도가 합쳐져서 형성하는 어떤 화려한 이미지는, 호날두의 자서전을 그저 젊은 축구선수의 성급하고도 화려한 성공담으로 치부할 우려가 있지만, 정작 호날두가 그의 자서전에서 풀어내는 글 속에는 그가 경험한 '순간'들에 대한 '의외의' 진지함이 가득하다는 것이다. 곧, 책의 방점이 '최고'가 아닌 '순간'에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실상 원제는 그저 <MOMENT>이기도 하거니와, 책이 해외에서 발간된 건 그가 발롱도르를 수상하기 전의 일이다). 

호날두의 자서전이 '의외로' 진지할 수 있는 건 기본적으로 호날두에 대한 편견이 적지 않기 때문이지만, 궁극적으로는 그가 그의 삶에 대해 숨김없이 털어놓는 데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호날두는 이 책을 통해 그의 인생에서 기억할 만한 '순간'들ㅡ이를테면 어린 시절부터 축구선수가 되기 위한 목표를 위해 가족과 떨어져서 지내야 했던 외로움이랄지, 포르투갈 국가대표선수로 경기에 나설 때 느꼈던 자부심과 책임감이랄지, 혹은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을 견뎌내야만 했던 괴로움과 절망이랄지, 또는 공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에 대한 고민과 소신 같은, 감정의 파고를 넘어야 했던 '순간'들에 대해 사뭇 열정적이고 솔직한 태도로 이야기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호날두는 다만 그러한 '순간'에 '최선'을 다했고, 앞으로도 그러하리라는 꽤나 진부한 주제를, 그의 지나온 삶으로 여실히 증명하며 찬찬히 풀어낸다.

물론, 여전히 호날두의 자서전은 호날두가 직접 썼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부족한 부분이 눈에 띄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수많은 화려한 사진들을 배경으로 인쇄된 글들은, 아쉽게도 사진들처럼 아름답지는 않고, 아주 논리적인 문장도 아니며(그렇다고 글이 엉망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무엇보다도 어쩔 수 없이 물리적인 경험의 한계를 드러내기도 한다(다시 말하지만, 그는 고작 23살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충분히 '최고'의 자리에 올랐으면서도 '최고의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고 말하고, 항상 배우고 더 나아지려는 마음가짐을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를 어린 아이로 생각하고 싶다는 호날두의 삶에 대한 진취적이고 열정적인 태도는 '의외로' 적지 않은 감흥을 전해주기에 충분하다. 호날두의 말마따나 미래에 무슨 일이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고, '최고'의 순간이 과연 올지도 불확실하기만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다만 '순간'에 충실한 것만이 '최선'일 뿐인 것이다.

호날두의 동료이자 박지성의 '베프'이기도 한 파트리스 에브라는 예전에 <포포투>와의 인터뷰에서, 현재 가장 뛰어난 축구선수가 누구냐는 질문에 서슴없이 호날두를 꼽으며 이렇게 덧붙였었다. "재능을 갖고 있는 선수는 많지만, 그들이 전부 호날두처럼 노력하는 것은 아니다." 언제나 말은 쉽고 행동은 어려운 법이다. '순간'이 중요하다는 말 따위야 어떤 '애송이'라도 떠들어 댈 수 있지만, 호날두는 연습장에서, 경기장에서, 그리고 그의 삶 속에서 언제나 자신의 노력과 열정을 행동으로 증명했음을 이 책은 보여준다. 그러니까 여전히 갈 길이 먼 젊은 나이인 것은 분명하지만 어쨌거나 호날두는, 적어도 말만 앞세우는 '애송이'는 확실히 아닌 셈이다. 뭐, 이 정도면 23살 짜리의 자서전을 읽는 이유로는 충분하지 않을까(정확히 말하자면 호날두는 85년 2월생인데, 그의 자서전이 유럽에 나온 것은 2007년의 일이다).

누구에게나 목표지점이 있지만, 때로는 그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때가 있다. 삶은 그런 것이다. 언젠가는 끝이 날 이 여정의 가장 큰 의미는 어쩌면 우리가 이 여행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p192-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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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6월 18일, 대전 월드컵경기장에 펼쳐진 카드섹션은 자못 감동적인 데가 있었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적잖이 낯설었다. 당시 카드섹션의 내용은 'AGAIN 1966'.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북한이 이탈리아를 1대0으로 물리치고 8강에 올랐던 순간을 재현하자는 의미임을 알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실상 1966년 북한의 8강진출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리 기억에 남는 순간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한반도의 남쪽 사람들에게, 북한의 8강진출은 단순한 역사적인 사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오직 이탈리아전에서 한 골을 넣었던 박두익의 이름만이 그저 전설처럼 함께 회자되어 왔을 뿐이었다. 

오히려 북한의 8강진출은 잉글랜드, 특히 북한의 예선경기가 벌어졌던 미들스브로에 살았던 사람들에게 역사적인 사실 그 이상의 순간으로 기억되고 있다. 평균신장이 162cm에 불과한 북한선수들이 자신들보다 훨씬 큰 거구들에 맞서 열정적이고 민첩하게 움직이며 보여주는, 속도감 있는 공격축구는 당시 잉글랜드 사람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고, 그들은 이내 북한대표팀의 열렬한 팬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로인해 지금도 미들스브로에서 북한대표팀을 기억하는 사람들을 만나기란 어렵지 않고, 이는 곧 그러한 기억이 허무맹랑한 전설을 넘어 구체적인 신화의 언저리에서 잉글랜드 사람들에게 공유되어 왔음을 의미한다. 또한 이것은, 파란 눈의 젊은이인 다니엘 고든이 '천리마 축구단'을 찾아 북한에 가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남한 사람들에게 북한의 8강진출이 낯선 사실인 이상으로, 멀리 서방세계에서 날아온 다니엘 고든에게 '북한'이라는 세계가 낯설었을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고, 하기에 영화 속에는 낯선 세계에 대한 이질감이 묻어난다. 하지만 낯섦 이상으로 또한 친숙함과 그리움이 영화 속에서 '북한'을 둘러싸고 있음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다. 가령, '위대한 수령' 김일성을 생각하며 눈물을 비치던, 이제는 '노인'이 되어버린 신화의 주인공들이 다시 한창 축구를 즐기던 시절로 되돌아간 듯 머리를 이용해 공을 주고받으며 웃음을 터뜨린다거나, '정치적 색채'가 완연히 묻어나는 노래 가사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함께 손을 맞잡으며 부르는 옛 노래가 뜻밖에도 흥겹게 여겨질 때 이 영화에 두 가지 시선이 묘하게 얽혀져 있음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정치적인 시선으로 인한 낯설음과 인간적인 시선으로 인한 친숙함이 영화 속에 공존하고 있다는 의미다. 

그러나 영화에서 보여주는 북한의 8강신화 속에서 북한 선수들이 골을 넣을 때나, 혹은 관중들이 그런 북한 선수들에게 환호할 때 괜스레 기쁜 마음이 드는 것은, 결국 정치적 낯설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적 친숙함이 영화가 추구하는 본질적 메시지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온갖 훈장을 장식처럼 달고 나오는 늙어버린 당시의 선수들과, 현란한ㅡ그러나 다분히 기계적인 강박으로도 보이는ㅡ연주 솜씨를 보여주는 북한의 어린 아이들과, 장대하기 짝이 없는 규모의 매스게임에서 한결같이 느껴지는 '공산주의체제'에 대한 불편함이 어느덧 인간적인 매력과 순수한 감탄으로 치환될 수 있는 것도 아마도 그래서가 아닐까. 더욱이 영화의 말미에 박두익은 그러한 영화의 메시지를 보다 직접적으로 전달해주기도 한다. "축구가 단지 실무적인, 그저 승패나 겨루는 그런 경기가 아니라는 것. 우리가 어디 가서 경기해도 친선을 도모하고, 이런 데 근본 목적이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다니엘 고든은 <포포투>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AGAIN 1966'이라는 문구를 보고, 나는 너무나 감동을 받아 눈시울이 뜨거워졌죠. 우리집에는 그 카드섹션을 담은 사진이 아직도 벽에 걸려 있어요." 물론, 중립적인 입장에서 바라보는 '1966년의 신화'와 '2002년의 재현'을 당사자인 우리가 똑같이 받아들이기에는 어려움이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1966년의 신화를 펼쳐 보이는 이 영화를 보고나면, 1966년의 신화란 먼 북쪽 땅의 사람들만이 가진 전설이 아니라, 그것은 다만 '한반도'에 살던 자그마한 사람들이 먼 이국땅에서 이루어낸 업적으로서, 후세에도 전해주어야 마땅한 '우리의 신화'임을 조금은 마음으로부터 깨닫게 된다. 결국 'AGAIN 1966'이라는 문구는 좀 더 마음껏 기뻐해도 좋았던 '우리의 신화', 즉 '천리마 축구단'에 대한 그리움이었던 것이다.

나는 한 북한 축구계의 인사에게 연락을 해서 "아시아 최고의 기록이던 북한의 월드컵 8강진출을 남한이 깼다. 어떻게 생각하나?"라고 물었다. 그는 "환상적이다. 남한, 북한이 아닌 '코리아'가 이뤄낸 업적이기 때문이다."라고 답했다.   ㅡ 다니엘 고든, <포포투> 인터뷰 中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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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선정한 OOO을 위한 추천도서!

"우리의 한 해는 우리의 시간 단위로 8월에서 이듬해 5월까지다."라는 닉 혼비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면, 이제 축구팬에게 올해는 고작 두 달여가 남았을 뿐인 셈이다(물론 K리그의 팬이라면 한 해는 3월에 시작해서 11월 즈음에 끝날 것이다). 특히나 올해는 월드컵도, 유로대회도 없는 악명 높은 홀수년. 무의미한 6, 7월을 버텨낼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심각한 우울증에 빠지는 축구팬도 없지는 않으리라. 그러나 축구팬이라고 꼭 죽으라는 법은 없다. 여전히 축구경기를 완벽히 대체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그래도 마치 '공기'가 없는 듯한 6, 7월을 그나마 숨쉬고 살 수 있게 할 11권의 책을 소개한다. 근데 왜 하필 11권이냐고? 왜 이래, 아마추어같이.

 

1. 포포투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축구팬이 되기 위해서 시험을 봐야 한다면 시험을 대비한 '기본서'로는 <포포투>가 딱 알맞다. 매월 20일 즈음에 발간되는 <포포투>는 본래 영국의 잡지가 한국에서 로컬화 과정을 거치는 것이기에 영국 프리미어리그에 관한 기사가 주가 되는 느낌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달을 거듭할수록 '한국판'에 걸맞게 K리그에 관한 참신한 기사를 기획하며 나름대로 무게중심을 잘 잡아 나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포포투>의 장점이라면ㅡ축구잡지로서 당연히 갖추어야 할 정보 전달 측면을 배제하고ㅡ꽤나 풍자적이고 냉소적인, 이른바 '영국식 유머'를 꼽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런 방식은 처음에는 다소 자극적인 느낌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읽는 맛을 느끼게 해주는 흥미로운 요소다. 더욱이 2009년부터는 1000원이 인상한 대신, 짝수 달에는 UEFA 공식 매거진인 <챔피언스>를 부록으로 주니 즐거움도 두배로 늘었다. 단, 짝수 달에 <포포투>와 <챔피언스>를 모두 보려면 속독법을 익혀야 할지도. 

ps. 아주 드물게는, 만원 상당의 면도기를 부록으로 줄 때도 있다. 그럴 때는 축구팬이든 아니든 간에, 수염이 나거나 혹은 수염이 나는 사람과 관계가 있는 사람이라면 일단 지를 만하다. 그러다 갑자기 축구에 빠지게 된다면, 그건 물론 좋은 일이다. 

2. 유럽축구기행 

 '유럽'과 '축구'와 '여행' 따로 떨어져 있어도 충분히 홀로 빛나는 단어들이 한 데 뭉쳐진 격이니, 그러고도 책이 별로라면 저자의 자질을 심각하게 의심해야 할 것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현재 MBC 축구해설위원이자 <포포투>의 수석에디터로 활약하고 있는 서형욱의 깔끔한 글솜씨는 충분히 만족스러운 수준이다. 뭐, 솔직히 말하자면 유럽을, 그것도 오직 축구를 위해, 그야말로 멋진 여행을 시도하는 저자의 경험에 슬며시 동행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글솜씨 따위야 어떻든 아무래도 싫어하기 어려운 게 바로 이 책이긴 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책의 제목 그대로 서형욱은 영국, 스페인, 이탈리아, 네덜란드, 프랑스, 독일 등의 여러 축구 경기장을 돌아다니며, 당시 유럽에서 활약하던 한국선수들의 동정을 전하기도 하고, 유럽축구에 대한 단상을 전해주기도 한다. 한 마디로, 유럽축구에 대한 순수한 동경과 한국축구에 대한 애정이 담뿍 담긴 멋진 책이다. 

ps. '유럽'을 미워하고 '축구'를 싫어하며 '여행'에 관심 없는 사람에게는, 단언컨대 최악의 책이다.

3. 프리미어리그와 사랑에 빠지다 

 박지성 선수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입단을 필두로 몇몇 한국 선수들이 영국 프리미어리그에 진출한 이래, 프리미어리그는 한국 축구팬들에게도 무척 친숙한 리그가 되었다. 더욱이 각종 매체가 앞다투어 프리미어리거들의 활약상을 전해주고, MBC ESPN이 프리미어리그를 생중계 해주면서 프리미어리그에 대한 관심과 열광은 고조되어만 갔다. 이 책은 그러한 일련의 흐름에서 자유롭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나름대로는 그런 흐름으로부터 '차별화'에 성공했다고 평가하고 싶다.
<프리미어리그와 사랑에 빠지다>가 가지는 최대의 장점은 '감성적'인 측면에 있다. 그저 단순하게 정보를 나열하고 경기를 분석하기보다는, 여성 특유의 섬세함과 감수성으로 프리미어리그, 특히 그 속에서 활약하는 선수들의 인간적 매력을 좇는 게 이 책의 차별화 전략이다. 게다가 화려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사진들이 책의 매력을 한층 높여준다.

4. 피버 피치  

 만약 당신에게 어떤 스포츠든 간에 특별히 응원하는 팀이 있다면, 이 책을 읽는 것은 제법 흥미로운 일이 될지도 모른다. 이 책은 마치 느닷없이 찾아오는 사랑처럼, 아니 명백하게 "결혼보다도 더 융통스럽지 못한 관계"임에 틀림없는, 저자와 팀과의 '운명적인' 만남에 관한 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혹시, 당신이 응원하는 팀이 특히 축구팀이라면, 이 책을 읽는 것은 대단히 즐거운 일이 될 것임에 분명하다. 이 책은 하고 많은 스포츠 팀 중에서도, 특히 축구팀에 빠져버린 저자의 축구 사랑에 대한 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응원하는 팀이 하필 프리미어리그의 아스날이라면, 나는 진심으로 이런 책을 읽을 수 있는 당신의 행운에 축하를 보내고 싶다. 왜냐하면 이 책은, 저자인 닉 혼비가 아스날과 함께 성장하며 느끼는 기쁨과 슬픔과 절망과 환희를 생생하게 기록한 책으로, 부제는 '아스날, 너는 내 운명'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아스날의 팬들에게는 더 없는 선물인 셈이다.

ps. 만약 당신이 아스날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클럽의 팬이라거나, 혹은 아스날은 커녕 특별히 좋아하는 팀이 없더라도 전혀 상관없다. 재기 넘치는 소설가이기도 한 닉 혼비의 글은 기본적으로 재미있기 때문이다. 

5. 축구 전쟁의 역사 

 사이먼 쿠퍼가 지은 이 책은 개인적으로 대단히 선구적인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이 책에서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는 엄청난 열정과 노력, 그리고 날카롭고 명석한 분석과 통찰을 통해 축구가 세계 각국에서 가지는 의미를 정치, 사회, 문화적 측면과 결부시켜 설명한다. 그렇기에 1994년에 이 책이 처음 발간되었을 때, "독창성, 광범위함, 그리고 순수한 용기가 담긴 이 책의 전 지구적 조사보고에 필적할 만한 책은 없다."라는 어느 유럽 매체의 극찬도 납득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대개의 의미 있고 훌륭한 책이 그렇듯, 이 책도 읽어내기가 그리 수월하지는 않다. 나름대로 흥미로운 측면이 많지만, 세계 각국의 정치, 사회, 문화적 배경을 따라가기가 꽤나 버거운 탓이다. 더욱이 잘 모르는 내가 봐도 번역이 매끄럽지 못해서, 이 책이 2002년 5월 월드컵 즈음에야 새삼스레 발간된 것은 역자의 노력의 산물이 아닌, 월드컵 특수를 기대한 '기획'임을 의심하게 만든다.
그러나 설령 그렇더라도, 역시 그냥 지나치기에는 아쉬움이 큰 책임에 틀림이 없다. 

ps. 이 책이 품절이라 구하기가 쉽지 않다면, 이와 유사한 부분이 있는 프랭클린 포어의 <축구는 어떻게 세계를 지배했는가>를 추천한다. 포어는 그 책에서 자신에게 영감을 불러 넣어준 책이 바로 <축구 전쟁의 역사>임을 분명히 밝혀두고 있다. 

6. 피파의 은밀한 거래 

 단일 종목으로 세계 최대의 스포츠 제전인 월드컵. 그 절대적으로 장엄하고 화려한 축제의 추악한 이면을 낱낱이 폭로하는 책이다. "독자들이 이런 것까지 알아야만 할까?"라고 고민했다는 역자의 우려는 결코 엄살이 아니어서, 이 책을 읽고나면 월드컵이 표방하는 아름다운 환상들, 화합이랄지 스포츠맨 정신이랄지 행복함이랄지 하는 감정들이 덧없이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드컵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는 게 축구팬의 한계이겠지만, 월드컵과 대회를 주관하는 FIFA에 대한 비판의 눈길을 거두지 않는 것은 또한 축구팬의 의무이기도 할 터다.
솔직히 이런 놀라운 이면의 추악함을 어디까지 믿어야 좋을지 난감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절대적인 권력을 지닌 FIFA의 협박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은, 앤드류 제닝스의 기자정신에는 경의를...

ps. IOC의 추문을 폭로한, 앤드류 제닝스의 또 다른 저서인 <반지의 제왕들(The Lords of the Rings)>은 'Sports Illustrated'가 선정한 최고의 스포츠 도서 100권에 선정되었다고 한다.

7. 축구는 한국이다 

 꽤나 의뭉스러운 제목과 다소 맥빠지는 결론만 아니라면, 이 책은 의외로 상당히 흥미로운 책이다. <축구는 한국이다>는 '한국축구 124년사'라는 부제에 걸맞게 한국축구의 역사를 더듬는데, 당시의 신문과 저서 혹은 방송매체 등 다양한 자료를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역사'를 흥미롭게 재구성해놓고 있다. 물론 워낙 방대한 자료를 활용하다 보니 수백 개에 달하는 각주가 좀 부담스러울 수도 있지만, 그 각주들은 한편으로는 또 다른 흥미로운 자료로의 통로 역할을 하기도 한다. 

ps. 제목이 의뭉스럽기는 마찬가지인데, <한국은 축구다>라는 책도 있다. 정윤수에 따르면, "'기술과 스피드'라는 한국 축구의 아킬레스건을 테마로 삼아 국내외의 다양한 정보를 일관된 관점으로 재해석하고 그 모색의 길을 타진하고 있는 책"이라고 한다. 


8. 축구장을 보호하라 

 고백하자면, 이 책은 나도 최근에 구입해서 이제 막 서문을 읽었을 뿐인데, 개인적으로 오랫동안 읽고 싶어했던 책이기에 추천 목록에 넣었다. 서문의 내용 중에 흥미로운 대목은 저자가 책을 저술한 주요한 이유에 대한 것이다. 그는 이 책을 쓴 이유가 '빈곤의 수사학' 때문이었다고 고백하며 이렇게 말한다. "'자로 잰 듯한 패스', '현란한 드리블', '전광석화 같은 슛'......이 빈곤의 수사학은, 모든 수사들이 그러하듯이, 축구에 대한 한국적 인식의 낮은 수준을 말해주는 것이다." 어쩐지 흥미롭지 않은가?
공교롭게도 <포포투> 3월호에는 이 책의 저자인 정윤수와의 짤막한 인터뷰가 실려 있었다. 거기서 정윤수를 '한국의 에두아르도 갈레아노'라고 평한 것은 조금쯤 과장인지도 모르지만, 그를 "게으른 글쓰기를 비판하며, 인문학적 글쓰기를 무기로 축구를 새로운 시각으로 '그려'가는 이"로 평한 것은 상당히 적확한 평가가 아닐까 싶다. 이래도 흥미롭지 않은가? 

ps. 정윤수는 머지않아 <전후반 90분>이라는 책을 출간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 책의 이름 또한 기억할 만하다. 맹세하지만, 별로 광고하려는 것은 아니다.

9. GO GO! FC오렌지

 <슬램덩크>를 보유한 농구팬과 <터치>나 <H2>를 보유한 야구팬이 못내 부러워서 그에 필적할 만한 '축구만화'를 찾는 축구팬이 있다면, 미안한 말이지만 포기하시길. 그런 건 없다. 유럽 쪽을 뒤져보면 어쩌면 '대단한' 축구만화를 혹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게까지 해서 '대단한' 만화를 보유하기를 원한다면 그냥 농구팬이나 야구팬으로 전향하라고 진지하게 권하고 싶다(나는 가끔 전향하기도 한다). 하지만, 오직 축구에만 있는 매력을 작품에 녹여낸 '괜찮은' 축구만화로 만족할 수 있다면 바로 이 만화, 그 이름도 유치찬란한 <GO GO! FC오렌지>를 추천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GO GO! FC오렌지>는 '클럽의 꿈'을 주제로 하는 흔치않은 축구만화다. 16세의 나이로 일본 2부리그인 '난요 오렌지'의 구세주로 떠오르는 와카마츠 무사시를 주인공으로 하는 이 만화는 '난요 오렌지'라는 축구팀이 한 시즌을 치러내는 동안의 희로애락에 주목한다. 그리하여 독자들이 자연스레 '난요 오렌지'와 함께 호흡하며, 끝내 '오레 오레 오렌지!'라는, 역시 유치해보이는 응원구호에도 작은 감동을 받도록 하는 것, 그것이 이 만화가 지니는 힘이다. 

ps. 이 '괜찮은' 축구만화로 만족하려는 축구팬에게는 또 미안한 말이지만, 이 만화는 '품절'이다. 아마도 도서관은 물론이고 동네 책방에서도 구하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잘 뒤져보면 유럽에서 '대단한' 만화를 찾는 것보다야 수월할 것은 분명하다.

10. 최고의 순간 

 현재 세계 최고의 선수 반열에 오른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자서전은, 자서전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사진을 곁들인 에세이라고 하는 게 더 적합해보인다. 마치 그가 경기장에서 보여주는 화려한 기술처럼, 책은 수많은 화려한 사진들로 가득해 일단 눈이 즐겁다. 하지만 정작 그의 솔직한 글은 의외로 매우 진지하기만 하다. 그는 이 책을 통해 그저 성공 스토리가 아닌, 그가 열정을 불태웠던 '순간'들을 숨김 없이 풀어놓는다.
호날두의 팬이라면 말할 것도 없고, 호날두의 다소 오만한 듯한 태도를 싫어하는 사람에게도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니다.

 

11. 축구, 그 빛과 그림자 

 이 책은 우루과이 출신의 세계적인 좌파 지식인 중 한 사람인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축구 에세이집이다. 사실 나는 저자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그냥 책을 먼저 읽은 경우인데, 정윤수는 "그가 축구에 대한 책을 썼다는 것만으로도 돈으로 지불할 수 없는 대단한 것이라는 평을 받았다"고 전한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개정 증보판이 나오면서, 돈만 지불하면 구하기는 전혀 어렵지 않다.
책 속에서 가장 인상적인 구절은 "축구는 '즐거움'에서 '의무'로 변해가는 서글픈 여행의 역사"라고 단언하는 부분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나는 이 문장이야말로 축구에 관한 무수한 수사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고 낭만적이며, 동시에 날카롭고 통찰력 있는 수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그 한 문장이 결국 이 책을 대변할 수 있다는 것도.
다만 아쉬운 점이라면, 주로 20세기를 추억하는 그의 글을 온전히 받아들이기에는 내가 20세기를 산 기간이 너무 짧다는 것 정도인데, 뭐 이게 저자의 잘못은 아니니까.

 


밀란 쿤데라는 이렇게 말했다. "매일 있는, 평범하고 저속한 희열이 있다. 증오의 희열, 스피드의 희열, 귀를 찢는 듯한 소음의 희열, 바로 축구 경기장의 희열이다." 의심의 여지 없이, '축구 경기장의 희열'이야말로 축구팬이 바라는 궁극적인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것은 '매일 있는' 것은 분명 아니다. 시즌이 끝남과 동시에 축구 경기장의 희열은 잠시 중단될 수밖에 없는 탓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축구는 계속되어야만 한다.'고 고집스레 주장하고 싶은 못 말리는 축구팬들에게, 축구 관련 서적을 읽는 일은 나름 괜찮은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부디 이러한 책들로, 다가오는 6, 7월을 안녕하게 보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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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소년
아다치 미츠루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07년 8월
평점 :
품절


하루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 즈음이면, 가끔 이런 상상을 해보곤 한다. '오늘 하루를 되돌릴 수 있다면. 아니, 이왕이면 한 십수 년쯤 전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나의 삶은 어떻게 바뀔까? 장담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지금보다는 조금은 더 흥미진진해지지는 않을까?' 물론 이러한 상상이 실제로 가능하지 않은, 쓰잘 데 없는 일이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다. '후회'라는 감정을 알게 된 때부터 지금까지, 지난 십수 년 동안 시간을 되돌리는 일은 내 인생에서 결코 일어나지 않았고, 감히 단언하건대 그것은 앞으로도 불가능한 일이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언제나, '후회'를 안고 '지금'을 살아가는 게 고작이니까 말이다.

아디치 미츠루의 단편 모음집인 <모험소년>은 이미 제목에 쓰인 '모험'과 '소년' 그리고 '시간'이라는, 세 가지 단어로 압축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7개의 단편이 수록된 이 작품은 유독 시간을 되돌리는 일에 천착하는데, '시간'의 건너편에는 바로 '소년'과 '모험'으로 대변되는 '과거'가 한결같이 자리하고 있는 까닭이다. 아직 '현실'을 인식하지 못했던 '소년' 시절, 치기만 하면 무조건 홈런이라도 될 것 마냥 기대에 부풀어하고, 영웅을 좇아 그의 흉내를 내며, 치기어린 꿈에 사심 없이 행복해하던 모습들이 되돌아간 시간 속에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시간은, 변해버린 '지금'의 모습을 더욱 선명하게 자각하도록 만든다.

물론, '모험'으로 가득했던 '소년' 시절이 끝난 지금, '현실'의 무게를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설령 그렇더라도, 되돌아간 시간이 투영하는 과거와 현재의 차이는 또한 어쩔 수 없이 씁쓸하기만 하다. 뜬금없는 홈런을 기대하기보다는 확률 높은 안타를 노리고, 영웅을 동경하는 대신 한걸음 물러난 범인의 길에 만족하며, 꿈을 한구석에 밀어 넣고 지극히 현실적인 삶과 씨름하는 모습만이 '지금'의 시간을 삭막하게 채우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미로'에서 방황하지 않기 위해, '소년'에서 '어른'이 되기 위해 봉인해둔 타임캡슐 속 '소년의 꿈'은, 시간이 흐른 뒤에 지극히 생경한 '과거'로만 현현한다. 그것은 그저 아름답고 그리운 과거라기보다는, 차라리 단절된 과거처럼 보인다.

아다치 미츠루는 이러한 단절을 극복하기 위해 다분히 환상적인 매개체를 작품 곳곳에 등장시킨다. 이를테면 '도라에몽의 주머니'나 '시간의 계단'처럼,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기이한 힘에 의해 주인공은 '단절된 과거' 혹은 '멈추어진 시간'과 대면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환상과 상상이 아니라면 결코 되돌릴 수 없는 냉혹한 시간의 불가역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당연히 끊임없이 흐르는, 결코 단절될 수 없는 시간의 연속성을 문득 깨닫게 한다. 수록된 마지막 단편 '스케치북'에서 멈춰진 시간 속에 존재하는, 낡은 스케치북에 그려진 소박한 꿈이 현재와 만나는 것도 아마도 그런 시간의 연속성 덕분이 아닐까. 

어쨌거나, 적어도 현실에서라면 어떤 환상과 상상을 동원하든 간에 결국 시간을 되돌리는 일은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멈추어진 시간을 흐르게 하는 것은 가능하고, 또한 필요한 일이다. 그저 언제나 '지금'을 사는 게 고작이면서, 굳이 '소년의 모험'을 '과거'로만 치부하며 꽁꽁 싸매어 두기만 하는 것은 꽤나 애석한 일이거니와, 무엇보다도 '모험'이란, 반드시 '소년'의 전유물만은 아닐 테니까. '쓸데없는 것' 사이에 묻혀버린 '소년의 모험'은, 그래서 여전히 끝나지 않은 과거다. 그리고 그럴 때ㅡ과거와 지금의 시간이 이어질 때, 비로소 '지금'을 사는 일도 조금은 흥미진진해지지 않을까. 굳이 시간을 되돌리지 않더라도 말이다.

"우린 커져버린 몸과 함께, 쓸데없는 것까지 키워버린 모양이군."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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