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6월 18일, 대전 월드컵경기장에 펼쳐진 카드섹션은 자못 감동적인 데가 있었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적잖이 낯설었다. 당시 카드섹션의 내용은 'AGAIN 1966'.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북한이 이탈리아를 1대0으로 물리치고 8강에 올랐던 순간을 재현하자는 의미임을 알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실상 1966년 북한의 8강진출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리 기억에 남는 순간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한반도의 남쪽 사람들에게, 북한의 8강진출은 단순한 역사적인 사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오직 이탈리아전에서 한 골을 넣었던 박두익의 이름만이 그저 전설처럼 함께 회자되어 왔을 뿐이었다. 

오히려 북한의 8강진출은 잉글랜드, 특히 북한의 예선경기가 벌어졌던 미들스브로에 살았던 사람들에게 역사적인 사실 그 이상의 순간으로 기억되고 있다. 평균신장이 162cm에 불과한 북한선수들이 자신들보다 훨씬 큰 거구들에 맞서 열정적이고 민첩하게 움직이며 보여주는, 속도감 있는 공격축구는 당시 잉글랜드 사람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고, 그들은 이내 북한대표팀의 열렬한 팬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로인해 지금도 미들스브로에서 북한대표팀을 기억하는 사람들을 만나기란 어렵지 않고, 이는 곧 그러한 기억이 허무맹랑한 전설을 넘어 구체적인 신화의 언저리에서 잉글랜드 사람들에게 공유되어 왔음을 의미한다. 또한 이것은, 파란 눈의 젊은이인 다니엘 고든이 '천리마 축구단'을 찾아 북한에 가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남한 사람들에게 북한의 8강진출이 낯선 사실인 이상으로, 멀리 서방세계에서 날아온 다니엘 고든에게 '북한'이라는 세계가 낯설었을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고, 하기에 영화 속에는 낯선 세계에 대한 이질감이 묻어난다. 하지만 낯섦 이상으로 또한 친숙함과 그리움이 영화 속에서 '북한'을 둘러싸고 있음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다. 가령, '위대한 수령' 김일성을 생각하며 눈물을 비치던, 이제는 '노인'이 되어버린 신화의 주인공들이 다시 한창 축구를 즐기던 시절로 되돌아간 듯 머리를 이용해 공을 주고받으며 웃음을 터뜨린다거나, '정치적 색채'가 완연히 묻어나는 노래 가사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함께 손을 맞잡으며 부르는 옛 노래가 뜻밖에도 흥겹게 여겨질 때 이 영화에 두 가지 시선이 묘하게 얽혀져 있음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정치적인 시선으로 인한 낯설음과 인간적인 시선으로 인한 친숙함이 영화 속에 공존하고 있다는 의미다. 

그러나 영화에서 보여주는 북한의 8강신화 속에서 북한 선수들이 골을 넣을 때나, 혹은 관중들이 그런 북한 선수들에게 환호할 때 괜스레 기쁜 마음이 드는 것은, 결국 정치적 낯설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적 친숙함이 영화가 추구하는 본질적 메시지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온갖 훈장을 장식처럼 달고 나오는 늙어버린 당시의 선수들과, 현란한ㅡ그러나 다분히 기계적인 강박으로도 보이는ㅡ연주 솜씨를 보여주는 북한의 어린 아이들과, 장대하기 짝이 없는 규모의 매스게임에서 한결같이 느껴지는 '공산주의체제'에 대한 불편함이 어느덧 인간적인 매력과 순수한 감탄으로 치환될 수 있는 것도 아마도 그래서가 아닐까. 더욱이 영화의 말미에 박두익은 그러한 영화의 메시지를 보다 직접적으로 전달해주기도 한다. "축구가 단지 실무적인, 그저 승패나 겨루는 그런 경기가 아니라는 것. 우리가 어디 가서 경기해도 친선을 도모하고, 이런 데 근본 목적이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다니엘 고든은 <포포투>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AGAIN 1966'이라는 문구를 보고, 나는 너무나 감동을 받아 눈시울이 뜨거워졌죠. 우리집에는 그 카드섹션을 담은 사진이 아직도 벽에 걸려 있어요." 물론, 중립적인 입장에서 바라보는 '1966년의 신화'와 '2002년의 재현'을 당사자인 우리가 똑같이 받아들이기에는 어려움이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1966년의 신화를 펼쳐 보이는 이 영화를 보고나면, 1966년의 신화란 먼 북쪽 땅의 사람들만이 가진 전설이 아니라, 그것은 다만 '한반도'에 살던 자그마한 사람들이 먼 이국땅에서 이루어낸 업적으로서, 후세에도 전해주어야 마땅한 '우리의 신화'임을 조금은 마음으로부터 깨닫게 된다. 결국 'AGAIN 1966'이라는 문구는 좀 더 마음껏 기뻐해도 좋았던 '우리의 신화', 즉 '천리마 축구단'에 대한 그리움이었던 것이다.

나는 한 북한 축구계의 인사에게 연락을 해서 "아시아 최고의 기록이던 북한의 월드컵 8강진출을 남한이 깼다. 어떻게 생각하나?"라고 물었다. 그는 "환상적이다. 남한, 북한이 아닌 '코리아'가 이뤄낸 업적이기 때문이다."라고 답했다.   ㅡ 다니엘 고든, <포포투> 인터뷰 中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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