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선정한 OOO을 위한 추천도서!

"우리의 한 해는 우리의 시간 단위로 8월에서 이듬해 5월까지다."라는 닉 혼비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면, 이제 축구팬에게 올해는 고작 두 달여가 남았을 뿐인 셈이다(물론 K리그의 팬이라면 한 해는 3월에 시작해서 11월 즈음에 끝날 것이다). 특히나 올해는 월드컵도, 유로대회도 없는 악명 높은 홀수년. 무의미한 6, 7월을 버텨낼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심각한 우울증에 빠지는 축구팬도 없지는 않으리라. 그러나 축구팬이라고 꼭 죽으라는 법은 없다. 여전히 축구경기를 완벽히 대체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그래도 마치 '공기'가 없는 듯한 6, 7월을 그나마 숨쉬고 살 수 있게 할 11권의 책을 소개한다. 근데 왜 하필 11권이냐고? 왜 이래, 아마추어같이.

 

1. 포포투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축구팬이 되기 위해서 시험을 봐야 한다면 시험을 대비한 '기본서'로는 <포포투>가 딱 알맞다. 매월 20일 즈음에 발간되는 <포포투>는 본래 영국의 잡지가 한국에서 로컬화 과정을 거치는 것이기에 영국 프리미어리그에 관한 기사가 주가 되는 느낌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달을 거듭할수록 '한국판'에 걸맞게 K리그에 관한 참신한 기사를 기획하며 나름대로 무게중심을 잘 잡아 나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포포투>의 장점이라면ㅡ축구잡지로서 당연히 갖추어야 할 정보 전달 측면을 배제하고ㅡ꽤나 풍자적이고 냉소적인, 이른바 '영국식 유머'를 꼽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런 방식은 처음에는 다소 자극적인 느낌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읽는 맛을 느끼게 해주는 흥미로운 요소다. 더욱이 2009년부터는 1000원이 인상한 대신, 짝수 달에는 UEFA 공식 매거진인 <챔피언스>를 부록으로 주니 즐거움도 두배로 늘었다. 단, 짝수 달에 <포포투>와 <챔피언스>를 모두 보려면 속독법을 익혀야 할지도. 

ps. 아주 드물게는, 만원 상당의 면도기를 부록으로 줄 때도 있다. 그럴 때는 축구팬이든 아니든 간에, 수염이 나거나 혹은 수염이 나는 사람과 관계가 있는 사람이라면 일단 지를 만하다. 그러다 갑자기 축구에 빠지게 된다면, 그건 물론 좋은 일이다. 

2. 유럽축구기행 

 '유럽'과 '축구'와 '여행' 따로 떨어져 있어도 충분히 홀로 빛나는 단어들이 한 데 뭉쳐진 격이니, 그러고도 책이 별로라면 저자의 자질을 심각하게 의심해야 할 것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현재 MBC 축구해설위원이자 <포포투>의 수석에디터로 활약하고 있는 서형욱의 깔끔한 글솜씨는 충분히 만족스러운 수준이다. 뭐, 솔직히 말하자면 유럽을, 그것도 오직 축구를 위해, 그야말로 멋진 여행을 시도하는 저자의 경험에 슬며시 동행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글솜씨 따위야 어떻든 아무래도 싫어하기 어려운 게 바로 이 책이긴 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책의 제목 그대로 서형욱은 영국, 스페인, 이탈리아, 네덜란드, 프랑스, 독일 등의 여러 축구 경기장을 돌아다니며, 당시 유럽에서 활약하던 한국선수들의 동정을 전하기도 하고, 유럽축구에 대한 단상을 전해주기도 한다. 한 마디로, 유럽축구에 대한 순수한 동경과 한국축구에 대한 애정이 담뿍 담긴 멋진 책이다. 

ps. '유럽'을 미워하고 '축구'를 싫어하며 '여행'에 관심 없는 사람에게는, 단언컨대 최악의 책이다.

3. 프리미어리그와 사랑에 빠지다 

 박지성 선수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입단을 필두로 몇몇 한국 선수들이 영국 프리미어리그에 진출한 이래, 프리미어리그는 한국 축구팬들에게도 무척 친숙한 리그가 되었다. 더욱이 각종 매체가 앞다투어 프리미어리거들의 활약상을 전해주고, MBC ESPN이 프리미어리그를 생중계 해주면서 프리미어리그에 대한 관심과 열광은 고조되어만 갔다. 이 책은 그러한 일련의 흐름에서 자유롭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나름대로는 그런 흐름으로부터 '차별화'에 성공했다고 평가하고 싶다.
<프리미어리그와 사랑에 빠지다>가 가지는 최대의 장점은 '감성적'인 측면에 있다. 그저 단순하게 정보를 나열하고 경기를 분석하기보다는, 여성 특유의 섬세함과 감수성으로 프리미어리그, 특히 그 속에서 활약하는 선수들의 인간적 매력을 좇는 게 이 책의 차별화 전략이다. 게다가 화려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사진들이 책의 매력을 한층 높여준다.

4. 피버 피치  

 만약 당신에게 어떤 스포츠든 간에 특별히 응원하는 팀이 있다면, 이 책을 읽는 것은 제법 흥미로운 일이 될지도 모른다. 이 책은 마치 느닷없이 찾아오는 사랑처럼, 아니 명백하게 "결혼보다도 더 융통스럽지 못한 관계"임에 틀림없는, 저자와 팀과의 '운명적인' 만남에 관한 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혹시, 당신이 응원하는 팀이 특히 축구팀이라면, 이 책을 읽는 것은 대단히 즐거운 일이 될 것임에 분명하다. 이 책은 하고 많은 스포츠 팀 중에서도, 특히 축구팀에 빠져버린 저자의 축구 사랑에 대한 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응원하는 팀이 하필 프리미어리그의 아스날이라면, 나는 진심으로 이런 책을 읽을 수 있는 당신의 행운에 축하를 보내고 싶다. 왜냐하면 이 책은, 저자인 닉 혼비가 아스날과 함께 성장하며 느끼는 기쁨과 슬픔과 절망과 환희를 생생하게 기록한 책으로, 부제는 '아스날, 너는 내 운명'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아스날의 팬들에게는 더 없는 선물인 셈이다.

ps. 만약 당신이 아스날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클럽의 팬이라거나, 혹은 아스날은 커녕 특별히 좋아하는 팀이 없더라도 전혀 상관없다. 재기 넘치는 소설가이기도 한 닉 혼비의 글은 기본적으로 재미있기 때문이다. 

5. 축구 전쟁의 역사 

 사이먼 쿠퍼가 지은 이 책은 개인적으로 대단히 선구적인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이 책에서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는 엄청난 열정과 노력, 그리고 날카롭고 명석한 분석과 통찰을 통해 축구가 세계 각국에서 가지는 의미를 정치, 사회, 문화적 측면과 결부시켜 설명한다. 그렇기에 1994년에 이 책이 처음 발간되었을 때, "독창성, 광범위함, 그리고 순수한 용기가 담긴 이 책의 전 지구적 조사보고에 필적할 만한 책은 없다."라는 어느 유럽 매체의 극찬도 납득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대개의 의미 있고 훌륭한 책이 그렇듯, 이 책도 읽어내기가 그리 수월하지는 않다. 나름대로 흥미로운 측면이 많지만, 세계 각국의 정치, 사회, 문화적 배경을 따라가기가 꽤나 버거운 탓이다. 더욱이 잘 모르는 내가 봐도 번역이 매끄럽지 못해서, 이 책이 2002년 5월 월드컵 즈음에야 새삼스레 발간된 것은 역자의 노력의 산물이 아닌, 월드컵 특수를 기대한 '기획'임을 의심하게 만든다.
그러나 설령 그렇더라도, 역시 그냥 지나치기에는 아쉬움이 큰 책임에 틀림이 없다. 

ps. 이 책이 품절이라 구하기가 쉽지 않다면, 이와 유사한 부분이 있는 프랭클린 포어의 <축구는 어떻게 세계를 지배했는가>를 추천한다. 포어는 그 책에서 자신에게 영감을 불러 넣어준 책이 바로 <축구 전쟁의 역사>임을 분명히 밝혀두고 있다. 

6. 피파의 은밀한 거래 

 단일 종목으로 세계 최대의 스포츠 제전인 월드컵. 그 절대적으로 장엄하고 화려한 축제의 추악한 이면을 낱낱이 폭로하는 책이다. "독자들이 이런 것까지 알아야만 할까?"라고 고민했다는 역자의 우려는 결코 엄살이 아니어서, 이 책을 읽고나면 월드컵이 표방하는 아름다운 환상들, 화합이랄지 스포츠맨 정신이랄지 행복함이랄지 하는 감정들이 덧없이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드컵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는 게 축구팬의 한계이겠지만, 월드컵과 대회를 주관하는 FIFA에 대한 비판의 눈길을 거두지 않는 것은 또한 축구팬의 의무이기도 할 터다.
솔직히 이런 놀라운 이면의 추악함을 어디까지 믿어야 좋을지 난감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절대적인 권력을 지닌 FIFA의 협박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은, 앤드류 제닝스의 기자정신에는 경의를...

ps. IOC의 추문을 폭로한, 앤드류 제닝스의 또 다른 저서인 <반지의 제왕들(The Lords of the Rings)>은 'Sports Illustrated'가 선정한 최고의 스포츠 도서 100권에 선정되었다고 한다.

7. 축구는 한국이다 

 꽤나 의뭉스러운 제목과 다소 맥빠지는 결론만 아니라면, 이 책은 의외로 상당히 흥미로운 책이다. <축구는 한국이다>는 '한국축구 124년사'라는 부제에 걸맞게 한국축구의 역사를 더듬는데, 당시의 신문과 저서 혹은 방송매체 등 다양한 자료를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역사'를 흥미롭게 재구성해놓고 있다. 물론 워낙 방대한 자료를 활용하다 보니 수백 개에 달하는 각주가 좀 부담스러울 수도 있지만, 그 각주들은 한편으로는 또 다른 흥미로운 자료로의 통로 역할을 하기도 한다. 

ps. 제목이 의뭉스럽기는 마찬가지인데, <한국은 축구다>라는 책도 있다. 정윤수에 따르면, "'기술과 스피드'라는 한국 축구의 아킬레스건을 테마로 삼아 국내외의 다양한 정보를 일관된 관점으로 재해석하고 그 모색의 길을 타진하고 있는 책"이라고 한다. 


8. 축구장을 보호하라 

 고백하자면, 이 책은 나도 최근에 구입해서 이제 막 서문을 읽었을 뿐인데, 개인적으로 오랫동안 읽고 싶어했던 책이기에 추천 목록에 넣었다. 서문의 내용 중에 흥미로운 대목은 저자가 책을 저술한 주요한 이유에 대한 것이다. 그는 이 책을 쓴 이유가 '빈곤의 수사학' 때문이었다고 고백하며 이렇게 말한다. "'자로 잰 듯한 패스', '현란한 드리블', '전광석화 같은 슛'......이 빈곤의 수사학은, 모든 수사들이 그러하듯이, 축구에 대한 한국적 인식의 낮은 수준을 말해주는 것이다." 어쩐지 흥미롭지 않은가?
공교롭게도 <포포투> 3월호에는 이 책의 저자인 정윤수와의 짤막한 인터뷰가 실려 있었다. 거기서 정윤수를 '한국의 에두아르도 갈레아노'라고 평한 것은 조금쯤 과장인지도 모르지만, 그를 "게으른 글쓰기를 비판하며, 인문학적 글쓰기를 무기로 축구를 새로운 시각으로 '그려'가는 이"로 평한 것은 상당히 적확한 평가가 아닐까 싶다. 이래도 흥미롭지 않은가? 

ps. 정윤수는 머지않아 <전후반 90분>이라는 책을 출간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 책의 이름 또한 기억할 만하다. 맹세하지만, 별로 광고하려는 것은 아니다.

9. GO GO! FC오렌지

 <슬램덩크>를 보유한 농구팬과 <터치>나 <H2>를 보유한 야구팬이 못내 부러워서 그에 필적할 만한 '축구만화'를 찾는 축구팬이 있다면, 미안한 말이지만 포기하시길. 그런 건 없다. 유럽 쪽을 뒤져보면 어쩌면 '대단한' 축구만화를 혹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게까지 해서 '대단한' 만화를 보유하기를 원한다면 그냥 농구팬이나 야구팬으로 전향하라고 진지하게 권하고 싶다(나는 가끔 전향하기도 한다). 하지만, 오직 축구에만 있는 매력을 작품에 녹여낸 '괜찮은' 축구만화로 만족할 수 있다면 바로 이 만화, 그 이름도 유치찬란한 <GO GO! FC오렌지>를 추천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GO GO! FC오렌지>는 '클럽의 꿈'을 주제로 하는 흔치않은 축구만화다. 16세의 나이로 일본 2부리그인 '난요 오렌지'의 구세주로 떠오르는 와카마츠 무사시를 주인공으로 하는 이 만화는 '난요 오렌지'라는 축구팀이 한 시즌을 치러내는 동안의 희로애락에 주목한다. 그리하여 독자들이 자연스레 '난요 오렌지'와 함께 호흡하며, 끝내 '오레 오레 오렌지!'라는, 역시 유치해보이는 응원구호에도 작은 감동을 받도록 하는 것, 그것이 이 만화가 지니는 힘이다. 

ps. 이 '괜찮은' 축구만화로 만족하려는 축구팬에게는 또 미안한 말이지만, 이 만화는 '품절'이다. 아마도 도서관은 물론이고 동네 책방에서도 구하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잘 뒤져보면 유럽에서 '대단한' 만화를 찾는 것보다야 수월할 것은 분명하다.

10. 최고의 순간 

 현재 세계 최고의 선수 반열에 오른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자서전은, 자서전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사진을 곁들인 에세이라고 하는 게 더 적합해보인다. 마치 그가 경기장에서 보여주는 화려한 기술처럼, 책은 수많은 화려한 사진들로 가득해 일단 눈이 즐겁다. 하지만 정작 그의 솔직한 글은 의외로 매우 진지하기만 하다. 그는 이 책을 통해 그저 성공 스토리가 아닌, 그가 열정을 불태웠던 '순간'들을 숨김 없이 풀어놓는다.
호날두의 팬이라면 말할 것도 없고, 호날두의 다소 오만한 듯한 태도를 싫어하는 사람에게도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니다.

 

11. 축구, 그 빛과 그림자 

 이 책은 우루과이 출신의 세계적인 좌파 지식인 중 한 사람인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축구 에세이집이다. 사실 나는 저자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그냥 책을 먼저 읽은 경우인데, 정윤수는 "그가 축구에 대한 책을 썼다는 것만으로도 돈으로 지불할 수 없는 대단한 것이라는 평을 받았다"고 전한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개정 증보판이 나오면서, 돈만 지불하면 구하기는 전혀 어렵지 않다.
책 속에서 가장 인상적인 구절은 "축구는 '즐거움'에서 '의무'로 변해가는 서글픈 여행의 역사"라고 단언하는 부분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나는 이 문장이야말로 축구에 관한 무수한 수사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고 낭만적이며, 동시에 날카롭고 통찰력 있는 수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그 한 문장이 결국 이 책을 대변할 수 있다는 것도.
다만 아쉬운 점이라면, 주로 20세기를 추억하는 그의 글을 온전히 받아들이기에는 내가 20세기를 산 기간이 너무 짧다는 것 정도인데, 뭐 이게 저자의 잘못은 아니니까.

 


밀란 쿤데라는 이렇게 말했다. "매일 있는, 평범하고 저속한 희열이 있다. 증오의 희열, 스피드의 희열, 귀를 찢는 듯한 소음의 희열, 바로 축구 경기장의 희열이다." 의심의 여지 없이, '축구 경기장의 희열'이야말로 축구팬이 바라는 궁극적인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것은 '매일 있는' 것은 분명 아니다. 시즌이 끝남과 동시에 축구 경기장의 희열은 잠시 중단될 수밖에 없는 탓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축구는 계속되어야만 한다.'고 고집스레 주장하고 싶은 못 말리는 축구팬들에게, 축구 관련 서적을 읽는 일은 나름 괜찮은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부디 이러한 책들로, 다가오는 6, 7월을 안녕하게 보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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