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비야의 중국견문록
한비야 지음 / 푸른숲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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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중국으로 여행을 떠났을 때, 나는 <한비야의 중국견문록>을 짐 한구석에 밀어 넣었다. 비록 여행은 3박4일간의 짧은 패키지 상품에 불과했지만, 여전히 나는 중국에 가보고 싶은 열망을 내게 불어넣었던, 이 책의 존재를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 이상으로 여행 일정은 제법 빡빡해서 가져갔던 책은 거의 읽지 못했다. 그러나 내게는 정녕 다행스럽게도, 나는 여행에서 돌아와서도 굳이 이 책을 팽개쳐버리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사실은 내 중국여행에 대한 감흥을 되새기기 위해 이 책을 마저 읽은 것이지만, 더 이상 <한비야의 중국견문록>에 '중국'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 말은, 한비야가 본 중국의 편협함을 꼬집기 위해서가 아니고, 이 책이 이제 중국의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도 아니며, 내가 본 중국과 한비야가 본 중국이 다르다는 의미는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나는, 중국인들과의 접촉을 적극적으로 하며 그들의 생활에 깊숙이 들어가려고 노력했던 한비야의 중국생활이야말로 중국의 실상을 좀 더 명확히 밝혀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이는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값진 통찰력을 지니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럼에도 내가 이 책에 '중국'이 없다고 말하는 까닭은, 내가 중국으로 떠나면서 이 책을 집어든 단 한가지 이유, 즉 중국행에 대한 갈망을 불어넣은 책이라는 단편적 기억이 얼마나 자기기만적인 조작이었는지를 자각했기 때문이다. 실상, 내가 중국에 매력을 느꼈던 것은 값싼 과일을 실컷 먹기 위해서가 아니었고, 그 人의 물결을 직접 체험해보기 위해서도 아니었으며, 중국의 생활이 유달리 궁금했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한비야처럼 중국어와 사랑에 빠져 중국어를 사용하는 중국을 직접 겪어보고 싶어서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나는 대체 왜 그토록 중국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말하자면, '중국'은 아무래도 좋았던 것이다. 한비야가 스페인어를 배우러 스페인으로 갔든, 혹은 일본어를 배우러 일본으로 갔든, 심지어 아랍어를 배우기 위해 중동으로 갔더라도, 나는 그녀가 갔던 나라를 그리며 가보고 싶어했을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니까 나는, 한비야가 40대라는 늦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보여주는, 그 진취적이고 아름다운 열정에 매료되었을 뿐인 것이다. 어려서부터 꿈꿨던 세계여행을 마치자마자 우리나라 국토 종단을 시작하고, 이어서 중국으로 어학연수를 떠나고, 그 와중에 긴급구호가로서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그 엄청난 生의 열정에 한껏 고무되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어떻게 나는 이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오직 '중국'만 기억했더란 말인가.

가을에 피는 국화는 첫 봄의 상징으로 사랑받는 개나리를 시샘하지 않는다. 역시 봄에 피는 복숭아꽃이나 벚꽃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한여름 붉은 장미가 필 때, 나는 왜 이렇게 다른 꽃보다 늦게 피나 한탄하지도 않는다. 그저 묵묵히 준비하여 내공을 쌓고 있을 뿐이다. 그러다가 매미소리 그치고 하늘이 높아지는 가을, 드디어 자기 차례가 돌아온 지금, 국화는 오랫동안 준비해온 그 은은한 향기와 자태를 마음껏 뽐내는 것이다. (p194)

최근 몇 년간, 나는 이보다 더 따스한 위로를 받아본 기억이 없다. 그러나, 이 따스한 위로를 더 이상 기만하고 싶지는 않다. 중국을 매력적으로 만든 것이 한비야의 열정이었던 것처럼, 국화가 자신의 시기에 맞추어 꽃을 피운 것은 명백하게 자신의 준비와 내공이 있었던 덕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막연히 '내 차례'를 기다리는 것은, 내가 한비야의 열정을 지워버리고, 오직 '중국'만 기억했던 자기기만을 다시 저지르는 일임에 분명하다. 말할 필요도 없이, 씨도 뿌리지 않고 물도 주지 않는 상황에서는, 어떤 꽃도 활짝 피지 못하는 법이다.

아무래도 당분간은, 이 책을 눈에 잘 띄는 곳에 두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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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헬렌 니어링 지음, 이석태 옮김 / 보리 / 199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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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 이전에 <스콧 니어링 자서전>과 <조화로운 삶>을 읽었었지만, 매우 큰 감명을 받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스코트 니어링이 보이는 정직함, 자기 신념에 대한 확신과 의지, 그리고 고결한 정신과 지적 탐구심은 확실히 존경스러웠지만, 그것이 내게 오로지 매력적인 것은 아니었다. 지나치게 금욕적이고, 절대로 타협과 느슨함을 용납하지 않는 그의 성정은, 솔직히 많이 답답하고 불편하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니어링 부부가 함께 살며 보여주는 '조화로운 삶'도 본받을 만한 삶임에 분명하지만, 최소한 내게는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보여 조금 부담스러웠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그저, 그들은 나와 다른 부류의 사람이겠거니, 하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 책,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에서 드러나는 스코트 니어링의 생애와 생활방식, 그리고 니어링 부부의 '아름다운 삶'은 진실로 감동적이다. 스코트 니어링이 삶을 살아가는 방식과 태도는 이미 조금이나마 알고 있던 바이지만, 헬렌 니어링의 눈으로 바라본 스코트의 삶은, 그에 대한 내 첫인상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이었다. 헬렌이 소개하는 스코트의 편지와, 헬렌 자신의 스코트에 대한 서술에는 스코트의 애정과 섬세함, 그리고 유쾌함이 곳곳에 드러나 있었고, 헬렌은 그런 그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전혀 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버몬트와 메인에서 직접 농장을 경영하며, 손수 돌집을 짓고, 채식주의와 비폭력주의를 추구하는 니어링 부부의 '조화로운 삶'도, 마찬가지로 뜻밖에 아름답기만 하다. 그들의 농장생활에 대한 것은 오히려 이 책보다는 <조화로운 삶>이나 <조화로운 삶의 지속>에 더 자세히 설명되어 있겠지만, 이 책에서 보여주는 니어링 부부의 삶에는 '조화로운 삶' 이상으로 중요할 '사랑'이 절절이 스며들어 있는 까닭이다. 즉, 상류층의 편안한 지위와 안락한 생활을 버리고, 스코트의 신념과 생활방식에 기꺼이 동조한 헬렌의 결단과 사랑이 그들의 삶을 아름다운 것으로 만드는 필수조건이었던 셈이다.

누구나 그저 마다하고만 싶은 죽음도 니어링 부부의 '아름다운 삶' 속에서는 반드시 필요한 일부일 뿐이다. 왜냐하면 죽음이란 수명이 다한 육체의 껍질을 벗고, 무한히 계속되는 우주의 섭리 속에서 새로운 영혼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그저 상투적이고 관념적으로만 들리는 죽음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100세에 이르러 자의로 곡기를 끊고, 의식적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스코트의 모습과 더불어 장엄한 감동을 준다. 물론 이 장엄한 스코트의 '마무리'가 한결같은 사랑으로 그의 곁을 지킨 헬렌이 있었던 덕택임은 두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그리고 이러한 헬렌의 사랑에 대해, 스코트는 동시대인 가운데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에 "헬렌입니다." 하는 대답으로 화답한다.

명백하게 지속 불가능한 현대 물질문명의 위기 속에서 니어링 부부의 '조화로운 삶'이 훌륭한 하나의 대안을 제시한다는 것은 새삼 언급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이 대안은, 현재 대다수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거의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이고, 그래서 이는 여전히 다소의 부담스러움을 동반한다고 생각한다. 스코트 니어링의 엄격한 생애도 같은 맥락에서, 존경스럽되 불편함을 수반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이 책에서 보여주는 니어링 부부의 '아름다운 삶'은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삶의 지침을 담고 있고, 바로 그 점이 이 책의 가장 중요한 의의가 아닐까 한다. 그리고 그러한 '아름다운 삶'의 대전제는, 의심할 바 없이 '사랑'일 것이다.

엄격하고 꼬장꼬장해 보이기만 하던 스코트 니어링을 매력적인 사람으로 변모시키고, 때로는 그저 불편해보이기만 하는 '조화로운 삶'을 '아름다운 삶'으로 만들고, 필연적으로 마주칠 두려운 죽음을 건강하고 의식적인 '마무리'로 승화시킨 매개체인 '사랑'. 서로 마주보기보다는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보고, 서로를 위해 희생하기보다는 오히려 서로를 매개로 함께 성장하는 것을 의미하는 니어링 부부의 '사랑'. 나도 그런 '사랑'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니, 바라건대 그 전에 그런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융은 이렇게 썼다. "두 개성의 만남은 두 화학물질의 결합과 같다. 반응이 이루어지면, 둘은 변화한다." 우리도 그와 같았다.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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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 혼비 지음, 김선형 옮김 / 문학사상사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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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백한 의무인 초,중학교를 마치고, 아무래도 의무 같은 고등학교를 졸업해서는, 여전히 약간의 의무감으로 대학교를 나왔고, 그 와중에 말 그대로 의무인 군대까지 무사히 다녀와서, 나는 어른이 되었다. 아니, 어른이 돼 있어야만 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내가 스스로를 어른답다고 느끼는 단 한 가지는, 바로 나 자신이 아직도 어른이 되지 못했다는 자각일 뿐이니, 나는 이런 자괴감에 종종 우울해지곤 한다. 그러니까 이 책을 집어 든 것은, 저자인 닉 혼비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어른이 되지 못한 어른들을 위한 소중한 이야기'라는 부제에 이끌렸기 때문임을 부인하지 않겠다.

그런데, 내가 전혀 쿨하지 않기 때문일까? 그야말로 쿨한 윌 프리먼이 세상과 조금씩 관계를 맺으며 진정한 어른으로 성장한다는 이야기는 나와 그리 공명하지는 않는 듯하다. 아이답지 않은 마커스가 변화하는 모습도 나와의 접점은 드물다. 아마도 그래서겠지만, 나는 솔직히 그들의 '성장'이 무엇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는 마커스는 윌과의 관계를 통해 조금씩 아이다운 모습으로 변모해가는 듯하고, 사람들과의 깊은 관계를 결코 원하지 않던 윌은 역시 마커스를 매개로 하여 사회 속에서 관계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결국, 마커스는 윌의 그 쿨함을 배워 사람들 간의 관계를 인간 피라미드에 비유하기에 이르고, 윌은 마커스가 혼자 남겨진다는 사실에 대해 느끼던 그 초조함을 확연히 인식하기에 이른다. 요컨대, 윌이 벗은 '껍데기'를 마커스가 둘러쓰며 그들은 서로를 자양분 삼아 '성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성장'의 의미는 대단히 한정적이고, 또한 모순된다. 아이답지 않은 아이는 아이로, 어른답지 못한 어른은 어른이 된다지만, 이는 어른이 되기 위해 윌이 거쳐야했던 통과의례(껍데기)를 이번에는 이미 어른이었던 마커스에게 다시금 강요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마커스와 윌을 각각 따로 보면 분명 '성장'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둘을 함께 놓고 보면 그저 '탈바꿈'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어른'이 그저 나이가 많은 사람을 지칭하지 않듯이, '성장'도 그저 어른다움과 아이다움을 갖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에서 말하는 핵심은, 오히려 '변화'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그 '변화'는 좋은 점과 나쁜 점을 모두 포함하고 있고, 따라서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게 마련인 것"이다. 더 이상 마커스는 조니 미첼의 노래를 좋아하지 않고 여느 아이들과 비슷해졌지만,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자기다움'을 잃어버렸다. 마찬가지로 윌 역시 그의 쿨함을 잃고 무방비로 거리에 노출되었다고 느끼지만, 대신 레이첼과 함께 할 명분을 얻은 것이다. 그러니까 저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마커스와 윌을 통해 드러나는 '변화'이고, 이를 통해ㅡ이 책에 나오는 노래 제목, '이젠 양면을 볼 수 있어요' 처럼ㅡ'변화의 양면을 모두 보자'고 역설하는 것은 아닐까?

돌이켜보면 내가 의무적으로, 혹은 다소의 의무감을 느끼며 했던 많은 일들은 대부분 세상에서 정한 바대로 따른 것이며, 어른이 된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나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그저 세상이 규정짓는 것일 뿐이었다. 거기에는 '나'가 아니라, 그저 무언의 강요와 획일성만이 있을 뿐이며, 이는 전적으로 좋은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오로지 '어른'과 '성장'에만 집착하면서 그 이면을 보지 못하고, 그러다가 결국은 '어른'만큼 소중한 '소년'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아마도 이런 이유로, 나는 마커스의 변화에 흐뭇하기보다는 차라리 서글펐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과연 어른이 된다는 것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꽤나 혼란스럽지만, 중요한 것은 '어른' 자체에 대한 집착보다도 '변화'의 양면을 직시하며, '나'를 잃지 않는 것이라고 믿는다. 이런 믿음에 더해, '책은 그것을 읽는 사람에 따라 다양하게 읽히는 법'이라는 금언을 핑계 삼아, 나는 이 책을 '어른이 되지 못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힘겹게 어른이 되려는 사람들'에게도 감히 추천하고 싶다.

* ps. 개인적으로 이 책에 종종 나오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존재가 조금 의문이었는데(닉 혼비는 공식적인 아스날 광팬이 아닌가), 레이첼을 기다리던 윌이 희망에 차 문을 쳐다볼 때, 난데없이 맨체스터 유나이티 원정팬이 들어오는 대목에서 의문이 풀렸다. 이 책이 발간된 1998년을 전후로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전성기가 한창이었고, 이에 대한 허망함을 닉 혼비는 이런 식으로 달랜 것이 아니었을까? 닉 혼비 특유의 유머와 기발함도 좋지만, 실은 그가 이렇듯 보이는 어쩔 수 없는 축구팬의 행태는, 역시 어쩔 수 없이 더욱 더 내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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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저널리스트 서형욱의 유럽축구기행
서형욱 지음 / 살림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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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월드컵을 군대에서 보게 된 것은, 생각만큼 나쁘지 않은 경험이었다. 오히려 26개월이라는 길고도 지루한 군 생활 중, 한 달 동안이나마 월드컵 덕분에 생기 있게 보내게 된 것을, 나는 꽤 감사하고 있다. 비록 미국전 때는 외곽 근무를 나가야 했고, 독일전 때는 피로가 몰려와 깜빡 잠이 들기도 했지만, 어쨌든 2002년 월드컵은 대한민국 사람 누구에게나 넘치는 기쁨을 선물해 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쉬움이 없을 리 없다. 전국에서 울려 퍼진 "대~한민국!"의 환호성은 군대라고 해서 슬며시 비껴가지는 않았지만, 밤늦게까지 밖에서는 계속되었을 흥분의 여운을, 불행히도 군인들은 꿈에서나 지속시켜야 했다. 잘 알다시피 군인은, 새나라의 어린이와 마찬가지로,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만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하필, 평생 다시없을, 우리나라에서 열린 월드컵 때 군대에 있었던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유럽에서라도 열렸다면 생방송은 꿈도 못 꿨을 테니. 

기필코, 전국의 월드컵 경기장을 돌아보리라고 마음먹은 것은 그 즈음의 일이었다. 실상 2002년에 우리나라에서 월드컵이 치러지게 된 것은 이미 몇 년 전부터 정해진 것이었고, 그걸 뻔히 알고서도 군대에 가지 않을 수 없었던 내 멋진 운명을, 나는 내 나름의 방식으로 위로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난 5년여 동안 내가 살았던 서울과 울산의 축구장을 제외하면, 나는 수원과 인천의 월드컵 경기장만을 겨우 방문했을 뿐이다. 새삼 이 책을 다시 꺼내어 읽은 것은, 그러니까 이제는 먼지가 제법 쌓인 내 작은 '꿈'을 문득 다시 꺼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책이 나온 지는 어느새 3년이 다되어가고, 그간 있었던 놀라운 변화ㅡ4명의 프리미어리거 탄생ㅡ를 감안하면, 이 책은 과거의 일이라는 치명적 한계를 지닌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최근 맨유를 비롯한 각 팀과 프리미어리그에 관한 온갖 기사들이 넘쳐나는 상황은 그런 의심을 더욱 가중시킨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오히려 이런 급격한 변화로부터 한 걸음 떨어져 있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무분별하게 쏟아지는 '소비성 기사'들과, 이런 것들을 재생산 해내는 요즘의 축구 관련 서적들과 달리, 이 책에는 유럽축구에 대한 저자의 순수한 동경과 솔직한 시선, 그리고 한국축구에 대한 반성과 애정이 담뿍 담겨있기 때문이다.

유럽의 축구 경기장을 찾아 돌아다니고, 해외에서 뛰는 한국선수들의 궤적을 좇는 저자의 이야기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롭지만, 이 책은 의외의 감동까지도 책 구석구석에 저며 놓았다. 75년간 선더랜드의 팬이었다는 제이슨 할아버지가 말하는 '과거의 축구', 피렌체의 시민들과 바티스투타가 엮어낸 '낭만의 축구', 그리고 마르세유의 시민들과 축구 영웅 지단이 보여준 '존경의 축구'는 저자가 발로 뛴 경험과 깔끔한 글 솜씨가 어우러져 더욱 가슴 뭉클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여행을 하며 벌어진 갖가지 에피소드들과 그가 느낀 감상은 여느 단순한 여행기 이상으로 재미있다. 무엇보다도, 그러면서도 한국축구의 안타까운 현실을 잊지 않고 지적하고, 더 나은 미래를 꿈꾸는 저자의 진지한 축구사랑은, 한 사람의 축구팬인 내 가슴을 뜨겁게 만든다.

책을 읽는 내내, 나는 내 '꿈'을 생각했다. 축구에 대한 저자의 사랑과, 여행이 가져다주는 매혹은 한구석에 잠시 밀쳐두었던 내 '꿈'을 다시금 요동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저자가 런런의 웸블리 경기장에서부터, 마드리드와 프랑크프루트의 경기장을 거쳐, 마르세유와 모나코의 축구 경기장을 찾아 헤맬 때, 나는 우리나라의 월드컵 경기장을 차례로 둘러보는 나를 상상했다. 우선은, 가까운 부산과 대구, 그리고 포항의 경기장을 찾아가고, 이후에 광주와 대전의 경기장을 방문하는 게 나을 것이라고. 그리고 수원과 인천의 경기장도 다시 제대로 가봐야 하겠고, 아마도 제주도의 서귀포 경기장을 찾는 것은 좀 더 나중의 일이 될 것이라고......

물론 일반적인 관점에서 말한다면, 단지 서귀포 월드컵 경기장을 보기 위해 제주도를 찾는 것은 그다지 현명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럽축구를 둘러보며 유럽 대륙의 매력을 알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저자처럼, 그렇게 제주도를 알아가는 것도 분명 나쁘지 않으리라. 그리고 바르셀로나에서 바르샤FC를 외면하는 것은 그 도시의 절반만 보는 것이라고 단언하는 저자처럼, 그렇게 제주도에서 제주FC를 만난 것을, 나는 자랑스레 얘기하고 싶다. 그리고 그 때쯤이면 아마도, 내 '꿈'은 어느덧 '현실'이 되어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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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 기행 - 추방당한 자의 시선
서경식 지음, 김혜신 옮김 / 돌베개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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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Diaspora). 가당찮게도, 나는 이 단어에서 희망을 찾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이산(離散)의 백성'을 의미한다는 이 단어는 아무래도 희망과는 거리가 멀지만, 국가와 민족이라는 개념이 개인에게 가하는 억압과 압력에 오직 무기력함과 절망감을 느낄 때면, 나는 종종 그런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하곤 하는 것이다. 국가만 아니라면, 나를 둘러싼 그 많은 관계만 없다면, 나는 한없이 자유로울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면서, 나는 기꺼이 디아스포라이고 싶다고.

하지만, 그런 때조차도 결국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워준 것은, 나를 둘러싼 관계가 지니는 한없는 부드러움과 애정이었음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것이 국가나 민족이라는 개념과 동의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죽음'을 향해 한 발자국, 몸을 내밀려 할 때 확 뒷머리를 잡아채 이편으로 끌어당기는", 디아스포라로서는 경험하기 힘든, 마치 '어머니의 품'과 같은 것이었다고는 말할 수 있다. 그러니까, 기실 내가 누리고 싶은 자유란 넉넉한 품속에서 부리는 어리광과 같은 것이며, 허공에서 자유로워 오히려 발 디딜 곳 없는 디아스포라가, 끊임없이 부유하며 갈구하는 것이란 바로 '어머니의 품', 즉 '정체성'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나와 디아스포라는 다른 곳에서 서로 다른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 책은 재일교포 2세로서 '정체성'에 대해 끊임없이 힘겨워하는, 한 사람의 디아스포라인 저자가 런던, 광주, 카셀, 브뤼셀, 잘츠부르크 등의 도시들을 여행하며, 자신과 같은 디아스포라들의 궤적을 디아스포라의 시선으로 바라본 것이다. 초라한 무덤만을 남긴 채 이국에서 죽은 카를 마르크스의 삶부터, '공중에 매달린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북조선행을 택한 조양규의 삶과, 오직 모어를 모국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파울 첼란의 안타까운 삶 등, 그리고 지문 찍을 손가락도 없이 조선어를 '혀'로 배워야만 했던 김하일의 비극적 삶까지. 저자는 '추방당한 자'로서, '소수'로서, '외부'에서 살아야만 했던 디아스포라들의 슬픔과 고통을 각각의 장소와 예술작품을 매개로 하여 들려준다. 그리고 인간의 이성에 대한 낙관적 전망이 한낱 허상으로 드러났던 근대의 역사적 사건과, 그 소산인 수많은 디아스포라들의 떨칠 수 없는 숙명을 자신의 삶과 병치시킨다. 

그 깊은 슬픔과 아픈 현실을 나는 이해하고 싶었다. "'내부'의 사람들은 이 책을 어떻게 읽을까? 잘 이해해줄까? 과연 대화는 가능할까......실은 낙관하지 않는다."는 저자의 말에 '내부'의 사람들도 역시 같은 감성과 이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그저 머리로만 이해한 것임을 알고 있다.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조금 불편했던 것이 사실이었으니. 디아스포라로서의 슬픔을 이야기하기에 당신의 현재 지위와 생활은 꽤나 고상한 것이 아니냐고 불쑥 묻고 싶어지고, 대체 왜 사랑하는 사람이 생길 때조차도 정체성 때문에 괴로워해야만 하는지도 답답했다. 그리고 지독하리만치 집요하게 디아스포라들의 비극에 주목하는 것에 오히려 소외감과 이질감마저 느꼈다. 나는 다만, 디아스포라가 아닐 뿐이었다.

그런 연민과 반감, 그리고 소외와 이질감이 뒤섞여 혼란스러울 때,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내 이런 반응을 충분히 예상하는 듯한 데이비드 강의 퍼포먼스가 있었다.

김하일의 아직 끝나지 않은 고난의 나날들. 나는 데이비드 강의 퍼포먼스를 보며 유랑하는 디아스포라들의 고난의 여정을 연상했다. 데이비드 강이 기어 앞으로 간 거리가 40~50미터쯤에 이르렀을 때 누구나 거기서 퍼포먼스가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보고 있는 쪽이 이제 긴장에서 풀려나기를 바란 것이다.

그런데 그는 방향을 바꾸어 긴 거리를 기어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어깨와 배가 고통으로 파도친다. 기어 지나간 자리에는 피로 그린듯한 흔적이 중간중간 끊길 듯 이어진다. 이를 지켜보던 한 여성이 눈물 어린 눈으로 작게 말했다. "아, 이제 그만해요......"  (p231)

어쩌면, 내게서도 '아, 디아스포라!'하는 탄성이 입 밖으로 나왔었는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이해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나는 처음으로, 바로 이게 디아스포라구나, 하고 느꼈다. 참기 힘든 고통과 이제 그만 되지 않았냐는 시선 속에서도 디아스포라가 끈질기게 자신의 정체성을 갈구하는 것은, 그것이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만 살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공중에 매달린 상태'에서 대지를 지향하듯, '수레바퀴 자국에 고인 물 속의 붕어'가 서로의 침으로 하루를 연명하듯, 그렇게 저자는 절실한 심정으로 다른 디아스포라의 삶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확실히, '대지를 디딘 상태'에서 하늘을 동경하듯, '넓은 호수의 붕어'가 바다를 꿈꾸듯, 디아스포라의 희망을 얘기하는 내가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불편함이 남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디아스포라의 슬픔을 못내 이해하고 싶으면서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단정 짓지 않을 수 없기에. 아마도 그러서일 게다. 내가 끝내 디아스포라의 희망을 지워낼 수 없음은. 하지만, 본래 팔레스타인 땅을 떠난 유대인들을 지칭하던 디아스포라가 일반적인 의미로 확대되었듯이, 디아스포라가 뿌리 없는 자가 아니라 그저 자유로운, 건강한 개인을 의미하는 단어로 변모될 수 있다고 믿고 싶은 것은, 나 자신의 소망만을 위함이 아니라, 디아스포라의 슬픔을 위로하고 싶기도 해서다. 그리고 국민국가로부터 내쳐진 '외부'의 디아스포라와, 국민국가의 폭력에 항거하고자 하는 자발적인 '내부'의 디아스포라는 서로 다른 태생적 배경을 지니나 결국, '진정한 조국'을 찾는 공통된 목표로 귀일되는 것은 아닐까, 하고 감히 생각하는 탓이다. 바로 거기에 디아스포라의 희망이 있는 것은 아닐까?

'내부'와 '외부'는 견고한 막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나는 이제 막 '외부'의 존재를 인식했을 뿐이다. 저자는 '외부'에서 '소통'이라는 노크를 했고, 거기에 대한 반응은 오롯이 '내부' 사람들의 몫이리라. 우선은, 그 노크소리를 듣고 '문'을 열었다는 것만으로, 나는 안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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