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비야의 중국견문록
한비야 지음 / 푸른숲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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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중국으로 여행을 떠났을 때, 나는 <한비야의 중국견문록>을 짐 한구석에 밀어 넣었다. 비록 여행은 3박4일간의 짧은 패키지 상품에 불과했지만, 여전히 나는 중국에 가보고 싶은 열망을 내게 불어넣었던, 이 책의 존재를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 이상으로 여행 일정은 제법 빡빡해서 가져갔던 책은 거의 읽지 못했다. 그러나 내게는 정녕 다행스럽게도, 나는 여행에서 돌아와서도 굳이 이 책을 팽개쳐버리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사실은 내 중국여행에 대한 감흥을 되새기기 위해 이 책을 마저 읽은 것이지만, 더 이상 <한비야의 중국견문록>에 '중국'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 말은, 한비야가 본 중국의 편협함을 꼬집기 위해서가 아니고, 이 책이 이제 중국의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도 아니며, 내가 본 중국과 한비야가 본 중국이 다르다는 의미는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나는, 중국인들과의 접촉을 적극적으로 하며 그들의 생활에 깊숙이 들어가려고 노력했던 한비야의 중국생활이야말로 중국의 실상을 좀 더 명확히 밝혀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이는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값진 통찰력을 지니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럼에도 내가 이 책에 '중국'이 없다고 말하는 까닭은, 내가 중국으로 떠나면서 이 책을 집어든 단 한가지 이유, 즉 중국행에 대한 갈망을 불어넣은 책이라는 단편적 기억이 얼마나 자기기만적인 조작이었는지를 자각했기 때문이다. 실상, 내가 중국에 매력을 느꼈던 것은 값싼 과일을 실컷 먹기 위해서가 아니었고, 그 人의 물결을 직접 체험해보기 위해서도 아니었으며, 중국의 생활이 유달리 궁금했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한비야처럼 중국어와 사랑에 빠져 중국어를 사용하는 중국을 직접 겪어보고 싶어서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나는 대체 왜 그토록 중국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말하자면, '중국'은 아무래도 좋았던 것이다. 한비야가 스페인어를 배우러 스페인으로 갔든, 혹은 일본어를 배우러 일본으로 갔든, 심지어 아랍어를 배우기 위해 중동으로 갔더라도, 나는 그녀가 갔던 나라를 그리며 가보고 싶어했을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니까 나는, 한비야가 40대라는 늦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보여주는, 그 진취적이고 아름다운 열정에 매료되었을 뿐인 것이다. 어려서부터 꿈꿨던 세계여행을 마치자마자 우리나라 국토 종단을 시작하고, 이어서 중국으로 어학연수를 떠나고, 그 와중에 긴급구호가로서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그 엄청난 生의 열정에 한껏 고무되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어떻게 나는 이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오직 '중국'만 기억했더란 말인가.

가을에 피는 국화는 첫 봄의 상징으로 사랑받는 개나리를 시샘하지 않는다. 역시 봄에 피는 복숭아꽃이나 벚꽃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한여름 붉은 장미가 필 때, 나는 왜 이렇게 다른 꽃보다 늦게 피나 한탄하지도 않는다. 그저 묵묵히 준비하여 내공을 쌓고 있을 뿐이다. 그러다가 매미소리 그치고 하늘이 높아지는 가을, 드디어 자기 차례가 돌아온 지금, 국화는 오랫동안 준비해온 그 은은한 향기와 자태를 마음껏 뽐내는 것이다. (p194)

최근 몇 년간, 나는 이보다 더 따스한 위로를 받아본 기억이 없다. 그러나, 이 따스한 위로를 더 이상 기만하고 싶지는 않다. 중국을 매력적으로 만든 것이 한비야의 열정이었던 것처럼, 국화가 자신의 시기에 맞추어 꽃을 피운 것은 명백하게 자신의 준비와 내공이 있었던 덕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막연히 '내 차례'를 기다리는 것은, 내가 한비야의 열정을 지워버리고, 오직 '중국'만 기억했던 자기기만을 다시 저지르는 일임에 분명하다. 말할 필요도 없이, 씨도 뿌리지 않고 물도 주지 않는 상황에서는, 어떤 꽃도 활짝 피지 못하는 법이다.

아무래도 당분간은, 이 책을 눈에 잘 띄는 곳에 두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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