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축구 저널리스트 서형욱의 유럽축구기행
서형욱 지음 / 살림 / 2005년 6월
평점 :
품절
2002년 월드컵을 군대에서 보게 된 것은, 생각만큼 나쁘지 않은 경험이었다. 오히려 26개월이라는 길고도 지루한 군 생활 중, 한 달 동안이나마 월드컵 덕분에 생기 있게 보내게 된 것을, 나는 꽤 감사하고 있다. 비록 미국전 때는 외곽 근무를 나가야 했고, 독일전 때는 피로가 몰려와 깜빡 잠이 들기도 했지만, 어쨌든 2002년 월드컵은 대한민국 사람 누구에게나 넘치는 기쁨을 선물해 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쉬움이 없을 리 없다. 전국에서 울려 퍼진 "대~한민국!"의 환호성은 군대라고 해서 슬며시 비껴가지는 않았지만, 밤늦게까지 밖에서는 계속되었을 흥분의 여운을, 불행히도 군인들은 꿈에서나 지속시켜야 했다. 잘 알다시피 군인은, 새나라의 어린이와 마찬가지로,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만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하필, 평생 다시없을, 우리나라에서 열린 월드컵 때 군대에 있었던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유럽에서라도 열렸다면 생방송은 꿈도 못 꿨을 테니.
기필코, 전국의 월드컵 경기장을 돌아보리라고 마음먹은 것은 그 즈음의 일이었다. 실상 2002년에 우리나라에서 월드컵이 치러지게 된 것은 이미 몇 년 전부터 정해진 것이었고, 그걸 뻔히 알고서도 군대에 가지 않을 수 없었던 내 멋진 운명을, 나는 내 나름의 방식으로 위로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난 5년여 동안 내가 살았던 서울과 울산의 축구장을 제외하면, 나는 수원과 인천의 월드컵 경기장만을 겨우 방문했을 뿐이다. 새삼 이 책을 다시 꺼내어 읽은 것은, 그러니까 이제는 먼지가 제법 쌓인 내 작은 '꿈'을 문득 다시 꺼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책이 나온 지는 어느새 3년이 다되어가고, 그간 있었던 놀라운 변화ㅡ4명의 프리미어리거 탄생ㅡ를 감안하면, 이 책은 과거의 일이라는 치명적 한계를 지닌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최근 맨유를 비롯한 각 팀과 프리미어리그에 관한 온갖 기사들이 넘쳐나는 상황은 그런 의심을 더욱 가중시킨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오히려 이런 급격한 변화로부터 한 걸음 떨어져 있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무분별하게 쏟아지는 '소비성 기사'들과, 이런 것들을 재생산 해내는 요즘의 축구 관련 서적들과 달리, 이 책에는 유럽축구에 대한 저자의 순수한 동경과 솔직한 시선, 그리고 한국축구에 대한 반성과 애정이 담뿍 담겨있기 때문이다.
유럽의 축구 경기장을 찾아 돌아다니고, 해외에서 뛰는 한국선수들의 궤적을 좇는 저자의 이야기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롭지만, 이 책은 의외의 감동까지도 책 구석구석에 저며 놓았다. 75년간 선더랜드의 팬이었다는 제이슨 할아버지가 말하는 '과거의 축구', 피렌체의 시민들과 바티스투타가 엮어낸 '낭만의 축구', 그리고 마르세유의 시민들과 축구 영웅 지단이 보여준 '존경의 축구'는 저자가 발로 뛴 경험과 깔끔한 글 솜씨가 어우러져 더욱 가슴 뭉클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여행을 하며 벌어진 갖가지 에피소드들과 그가 느낀 감상은 여느 단순한 여행기 이상으로 재미있다. 무엇보다도, 그러면서도 한국축구의 안타까운 현실을 잊지 않고 지적하고, 더 나은 미래를 꿈꾸는 저자의 진지한 축구사랑은, 한 사람의 축구팬인 내 가슴을 뜨겁게 만든다.
책을 읽는 내내, 나는 내 '꿈'을 생각했다. 축구에 대한 저자의 사랑과, 여행이 가져다주는 매혹은 한구석에 잠시 밀쳐두었던 내 '꿈'을 다시금 요동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저자가 런런의 웸블리 경기장에서부터, 마드리드와 프랑크프루트의 경기장을 거쳐, 마르세유와 모나코의 축구 경기장을 찾아 헤맬 때, 나는 우리나라의 월드컵 경기장을 차례로 둘러보는 나를 상상했다. 우선은, 가까운 부산과 대구, 그리고 포항의 경기장을 찾아가고, 이후에 광주와 대전의 경기장을 방문하는 게 나을 것이라고. 그리고 수원과 인천의 경기장도 다시 제대로 가봐야 하겠고, 아마도 제주도의 서귀포 경기장을 찾는 것은 좀 더 나중의 일이 될 것이라고......
물론 일반적인 관점에서 말한다면, 단지 서귀포 월드컵 경기장을 보기 위해 제주도를 찾는 것은 그다지 현명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럽축구를 둘러보며 유럽 대륙의 매력을 알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저자처럼, 그렇게 제주도를 알아가는 것도 분명 나쁘지 않으리라. 그리고 바르셀로나에서 바르샤FC를 외면하는 것은 그 도시의 절반만 보는 것이라고 단언하는 저자처럼, 그렇게 제주도에서 제주FC를 만난 것을, 나는 자랑스레 얘기하고 싶다. 그리고 그 때쯤이면 아마도, 내 '꿈'은 어느덧 '현실'이 되어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