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 기행 - 추방당한 자의 시선
서경식 지음, 김혜신 옮김 / 돌베개 / 2006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디아스포라(Diaspora). 가당찮게도, 나는 이 단어에서 희망을 찾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이산(離散)의 백성'을 의미한다는 이 단어는 아무래도 희망과는 거리가 멀지만, 국가와 민족이라는 개념이 개인에게 가하는 억압과 압력에 오직 무기력함과 절망감을 느낄 때면, 나는 종종 그런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하곤 하는 것이다. 국가만 아니라면, 나를 둘러싼 그 많은 관계만 없다면, 나는 한없이 자유로울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면서, 나는 기꺼이 디아스포라이고 싶다고.

하지만, 그런 때조차도 결국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워준 것은, 나를 둘러싼 관계가 지니는 한없는 부드러움과 애정이었음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것이 국가나 민족이라는 개념과 동의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죽음'을 향해 한 발자국, 몸을 내밀려 할 때 확 뒷머리를 잡아채 이편으로 끌어당기는", 디아스포라로서는 경험하기 힘든, 마치 '어머니의 품'과 같은 것이었다고는 말할 수 있다. 그러니까, 기실 내가 누리고 싶은 자유란 넉넉한 품속에서 부리는 어리광과 같은 것이며, 허공에서 자유로워 오히려 발 디딜 곳 없는 디아스포라가, 끊임없이 부유하며 갈구하는 것이란 바로 '어머니의 품', 즉 '정체성'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나와 디아스포라는 다른 곳에서 서로 다른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 책은 재일교포 2세로서 '정체성'에 대해 끊임없이 힘겨워하는, 한 사람의 디아스포라인 저자가 런던, 광주, 카셀, 브뤼셀, 잘츠부르크 등의 도시들을 여행하며, 자신과 같은 디아스포라들의 궤적을 디아스포라의 시선으로 바라본 것이다. 초라한 무덤만을 남긴 채 이국에서 죽은 카를 마르크스의 삶부터, '공중에 매달린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북조선행을 택한 조양규의 삶과, 오직 모어를 모국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파울 첼란의 안타까운 삶 등, 그리고 지문 찍을 손가락도 없이 조선어를 '혀'로 배워야만 했던 김하일의 비극적 삶까지. 저자는 '추방당한 자'로서, '소수'로서, '외부'에서 살아야만 했던 디아스포라들의 슬픔과 고통을 각각의 장소와 예술작품을 매개로 하여 들려준다. 그리고 인간의 이성에 대한 낙관적 전망이 한낱 허상으로 드러났던 근대의 역사적 사건과, 그 소산인 수많은 디아스포라들의 떨칠 수 없는 숙명을 자신의 삶과 병치시킨다. 

그 깊은 슬픔과 아픈 현실을 나는 이해하고 싶었다. "'내부'의 사람들은 이 책을 어떻게 읽을까? 잘 이해해줄까? 과연 대화는 가능할까......실은 낙관하지 않는다."는 저자의 말에 '내부'의 사람들도 역시 같은 감성과 이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그저 머리로만 이해한 것임을 알고 있다.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조금 불편했던 것이 사실이었으니. 디아스포라로서의 슬픔을 이야기하기에 당신의 현재 지위와 생활은 꽤나 고상한 것이 아니냐고 불쑥 묻고 싶어지고, 대체 왜 사랑하는 사람이 생길 때조차도 정체성 때문에 괴로워해야만 하는지도 답답했다. 그리고 지독하리만치 집요하게 디아스포라들의 비극에 주목하는 것에 오히려 소외감과 이질감마저 느꼈다. 나는 다만, 디아스포라가 아닐 뿐이었다.

그런 연민과 반감, 그리고 소외와 이질감이 뒤섞여 혼란스러울 때,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내 이런 반응을 충분히 예상하는 듯한 데이비드 강의 퍼포먼스가 있었다.

김하일의 아직 끝나지 않은 고난의 나날들. 나는 데이비드 강의 퍼포먼스를 보며 유랑하는 디아스포라들의 고난의 여정을 연상했다. 데이비드 강이 기어 앞으로 간 거리가 40~50미터쯤에 이르렀을 때 누구나 거기서 퍼포먼스가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보고 있는 쪽이 이제 긴장에서 풀려나기를 바란 것이다.

그런데 그는 방향을 바꾸어 긴 거리를 기어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어깨와 배가 고통으로 파도친다. 기어 지나간 자리에는 피로 그린듯한 흔적이 중간중간 끊길 듯 이어진다. 이를 지켜보던 한 여성이 눈물 어린 눈으로 작게 말했다. "아, 이제 그만해요......"  (p231)

어쩌면, 내게서도 '아, 디아스포라!'하는 탄성이 입 밖으로 나왔었는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이해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나는 처음으로, 바로 이게 디아스포라구나, 하고 느꼈다. 참기 힘든 고통과 이제 그만 되지 않았냐는 시선 속에서도 디아스포라가 끈질기게 자신의 정체성을 갈구하는 것은, 그것이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만 살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공중에 매달린 상태'에서 대지를 지향하듯, '수레바퀴 자국에 고인 물 속의 붕어'가 서로의 침으로 하루를 연명하듯, 그렇게 저자는 절실한 심정으로 다른 디아스포라의 삶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확실히, '대지를 디딘 상태'에서 하늘을 동경하듯, '넓은 호수의 붕어'가 바다를 꿈꾸듯, 디아스포라의 희망을 얘기하는 내가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불편함이 남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디아스포라의 슬픔을 못내 이해하고 싶으면서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단정 짓지 않을 수 없기에. 아마도 그러서일 게다. 내가 끝내 디아스포라의 희망을 지워낼 수 없음은. 하지만, 본래 팔레스타인 땅을 떠난 유대인들을 지칭하던 디아스포라가 일반적인 의미로 확대되었듯이, 디아스포라가 뿌리 없는 자가 아니라 그저 자유로운, 건강한 개인을 의미하는 단어로 변모될 수 있다고 믿고 싶은 것은, 나 자신의 소망만을 위함이 아니라, 디아스포라의 슬픔을 위로하고 싶기도 해서다. 그리고 국민국가로부터 내쳐진 '외부'의 디아스포라와, 국민국가의 폭력에 항거하고자 하는 자발적인 '내부'의 디아스포라는 서로 다른 태생적 배경을 지니나 결국, '진정한 조국'을 찾는 공통된 목표로 귀일되는 것은 아닐까, 하고 감히 생각하는 탓이다. 바로 거기에 디아스포라의 희망이 있는 것은 아닐까?

'내부'와 '외부'는 견고한 막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나는 이제 막 '외부'의 존재를 인식했을 뿐이다. 저자는 '외부'에서 '소통'이라는 노크를 했고, 거기에 대한 반응은 오롯이 '내부' 사람들의 몫이리라. 우선은, 그 노크소리를 듣고 '문'을 열었다는 것만으로, 나는 안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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