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근대문학의 기원 가라타니 고진 컬렉션 11
가라타니 고진 지음, 박유하 옮김 / 민음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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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4.02]


 고진의 <일본근대문학의 기원> 중 "아동의 발견"과 히구치 이치요의 <해질무렵 무라사키> 중 "키재기"를 읽었다. 히구치 이치요의 소설을 함께 읽기로 한 이유는 "아동의 발견" 말미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주변에서 아이를 위해 씌어진 것은 아니지만 아이가 표현된 훌륭한 작품을 찾아볼 수가 있다. 히구치 이치요의 작품이다. 그녀가 쓴 것은 이른바 청년기가 아니라 아이가 그 상태대로 작은 어른인 것 같은 세계에 침투하는 하나의 균열, 즉 얼마 안 가 과도기로 현재화(顯在化)할 청년기의 징후였다. 히구치 이치요야 말로 아이 시대에 대해 쓰면서도 <유년기>나 <동심>이라는 전도를 벗어난 유일한 작가였다."(177)

 "아동의 발견"에서 말하고자 하는 골자는 아동이라는 존재가 개념으로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고진은 그런 발견(혹은 왜곡)에 대한 자신의 입장이 어떤지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고 있다. 그저 발견 그 자체에 주목하고 있을 뿐이다.

 "아동 문학사가들은 일본에서 <진정한 근대 아동 문학>이 탄생한 것은 오가와 미메이 무렵이라는 데 거의 일치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151)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글은, 그러나 곧 오가와 미메이의 아동이 "<현실의 어린이> 쪽에서 보면 전도된 관념일 뿐"이라는 주장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결국 그런 주장들이 아동의 전도성을 비판하기만 할 뿐 그 전도의 성질을 밝혀주지 않는다며, 역설적이지만 그런 주장들이 오히려 아동의 전도성을 은폐시킨다고 말하고 있다. 이미 <현실의 어린이> 또는 <진정한 어린이>라는 개념이 실제 아이들과는 무관하게 만들어져버린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아이는 어른으로부터 (개념상) 분리되게 된다. 그리고 그런 분리가 가능하게 된 이유는 청춘기라는 개념과 함께 성숙이라는 관념이 자리하기 때문이다. "아이와 어른은 그냥 단순히 한 쪽만을 따로 떼어놓고 생각하기 어렵게 구조적으로 연관되어"(168)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숙이라는 문제는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하지만 어른으로부터 격리된 유년기가 성숙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성숙을 지향하기 때문에 미성숙한 것"(171)이라고 고진은 말하고 있다. 너무나 당연하게들 가지고 있는 성숙이라는 관념은, 그러나 실은 판타지에 가까운 것이다.

 성장소설로 분류되는 소설들도, 실제로 그 소설들이 만들어지기 이전에 성장(혹은 성숙)이라는 개념이 만들어졌기에 존재가 가능한 것이다. 성장소설 속 아이들은 어떤 사건 사고들을 거치면서 문득 성장하게 된다. 하지만 그런것들을 정말 성장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성장을 위해서 미성장한 (것처럼 보이는) 아이들을 만들어낸 건 아닐까. (이런 관점에서, 박민규의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은 성장이라는 개념 없이 성장해버린 (성장)소설처럼 보여 흥미롭다.)

 우리는 아동을 알기 위해, 이해하기 위해 아동 심리학이나 아동 문학을 공부하지만 그런 것들이 <진정한 아이>에 대해 밝혀주지는 않는다. 그런 것과는 무관하게 "분리된 것으로서의 <아이>야말로 아동 심리학이나 아동 문학의 비밀을 쥐고 있는 것이다."(171) 그건 비교하자면 푸코가 말하는 광인과 심리학의 관계와 유사한 것이다. "17세기 후반 광인이 <광인>으로 격리된 이후에 비로소 심리학(정신 병리학)이 존재했으니 심리학이 <광기>를 해명하는 열쇠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광인이야말로 그러한 존재 방식을 통해 심리학의 비밀을 쥐고 있다"(170)는 얘기가 된다. 사실 아동 문학으로 읽히는 동화나 옛날 이야기가 실제로 아이를 위해서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다시 씌여진다고 한들 그런 것들 속에서는 여전히 잔혹함이나 부조리가 남아 있는 것이다.

 고진은 아동의 기원, 즉 아동이 발견되면서(혹은 발견되기 위해) 은폐된 것들에 대해 따져보다가 결국 두 가지 지점에 이르게 된다. 그러니까 "학제 반포"와 "징병령 반포"가 그것이다. "공장은 <학교>이고, 군대도 <학교>이며, 거꾸로 말하면 근대적 학교제도 그 자체가 그러한 <공장>이다. (...) 근대 국가는 그 자체가 <인간을 다시 만들어내는 하나의 교육 장치>인 것이다. (...) 양심적이고 휴머니스틱한 교육자, 아동 문학인들은 메이지 이래의 교육 내용을 비판하고 <진정한 아이>, <진정한 인간>을 지향하고 있지만 그것들은 근대 국가 제도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 것"(175,176)이라고 말하고 있다.

 근대문학이 일본에서 정착되기 이전에 씌어진 소설이기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히구치 이치요의 <키재기>에는 "아동의 발견"에서 말하는 그런 "발견된 아동"은 존재하지 않는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그저 "작은 어른"들만이 등장할 뿐이다. 아동과 어른이라는 개념의 분리가 자명한 사실처럼 우리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에, 심지어 이 소설의 해설에는 "천진한 아이의 경계를 넘는 것조차 모른 채 어른이 되간다"(195)는 식으로 아이와 어른을 굳이 경계지어 표현하고 있기는 하지만, "경계를 넘는 것조차 모른"다는 말은 사실 그 경계가 만들어졌다는 것을 증명하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더불어 <키재기>에서는 고진이 밝히고 있는 '발견'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풍경이라든지, 내면 또는 고백과 같은 그런 것들. 심지어 <일본근대문학의 기원> 중 "구성력에 대해서"에서 언급하고 있는 "이상"이나 "이야기" 같은 것들도 나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게 때문에, 아니 그러거나 말거나, 이 소설은 참 좋다. 대단히 추상적인 표현이기는 하지만, 뭔가 흐르는 물 같으면서도 단단한 돌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 참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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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근대문학의 기원 가라타니 고진 컬렉션 11
가라타니 고진 지음, 박유하 옮김 / 민음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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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1/08)

하루 종일 가라타니 고진의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을 읽었다. 제목에는 물론 '일본'이라는 말이 들어가지만, 그리고 책 속에 나오는 작가들은 전부 일본 작가이지만, 결국 이 책은 '근대문학의 기원'을 살펴보는 책에 다름 아니었다. 그리고 근대문학의 기원을 살피는 일은 곧 근대문학의 종언을 증명하는 일이었으니 저자가 이 책에서 많이 표현한 단어를 빌려와 쓰자면, 이 책은 결국 전도(顚倒)된 작업이나 마찬가지였다.

미셸 푸코에 따르면 문학은 19세기에 확립된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유럽에서는 그런 관념이 오랜 시간에 거쳐 정립되었다. 반면에 일본에서는 메이지 20년을 전후로 하여 급속도로 정착되었다. 가라타니 고진은 그 압축된 시간을 살펴봄으로써 근대(일본)문학의 기원을 찾아내고자 했던 것이다.

"나쓰메 소세키가 자신의 강의 노트를 <문학론>으로 간행한 것은 런던에서 귀국한 지 3년밖에 안 되었을 때의 일이다."(17) 서론을 제외한, 이 책의 첫 문장이다. 나쓰메 소세키는 영문학을 공부하러 건너간 영국에서, 유럽에서 말하는 문학이라는 관념에 모종의 거부감(혹은 이질감)을 느꼈다. 소세키가 자라면서 내면화된 문학은 일본 내의 문학, 즉 한문학에서 발생된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일본으로 들어와 그런 거부감/이질감을 유지한 채 소설을 쓴다. 이 책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그 후, 풍경(회화)에 대한 설명, 내면(언문일치)에 대한 설명, 고백(기독교)에 대한 설명, 병(메타포)에 대한 설명, 아동에 대한 설명, 구성에 대한 설명이 이어지고 그것들이 어떤 식으로 발견되어 제도화되었는지 밝히고 있다. 그것이 곧 근대일본문학의 기원을 밝히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작업의 과정을 읽는 일은 개인적으론 대단히 힘든 일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개념이나 분야들을 수시로 끌어들여 그 과정을 밝히고 있었으니까. 이 책을 끝까지 봐야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고민도 숱하게 했다.

결론적으로, 끝까지 참고 읽은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각종 후기를 제외한, 실질적으로 마지막 챕터인 "장르의 소멸"에서 저자는 나쓰메 소세키를 다시 소환한다. 일본 문학 내에서, 혹은 우리나라 일문학과에서 배우는 나쓰메 소세키가 문학적으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결국 이 장에서 말하는 소세키는 근대문학과 거리가 있는 작가였다. "소세키는 사생문을 <소설>로 향하는 싹으로서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소설>에 반하는 것으로 자각하고 있었"(234)고, 그에게 "사생문이란 <문>의 해방, 장르의 해방을 의미하"(231)는 것이었다. 결국 이 장의 제목인 "장르의 소멸"은 나쓰메 소세키를 빌려 가라타니 고진이 말하는 소설의 소멸이라는 의미였고, 이후에 고진 스스로도 밝혔듯이, 근대문학의 종언을 전도적으로 예언하는 글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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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읽기를 권함 - 2004년 2월 이 달의 책 선정 (간행물윤리위원회)
야마무라 오사무 지음, 송태욱 옮김 / 샨티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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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3/31]

 히라노 게이치로의 <책을 읽는 방법>에 나와 알게 된 책이다. 아니, 실은 히라노 게이치로가 이 책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여섯 개의 에세이가 담겨 있다. 따로 쓴 글들을 모아서 묶은 책이라 생각했는데, 책을 내기 위해서 쓴 글이었다. 짐짓 공손한 체하며 다치바나 다카시를 까는 듯한 구절이 제법 보인다. 이를테면 "세상에는 천히 읽을 수 없는, 천천히 하는 독서를 견딜 수 없는 책이 있다는 것인가. 물론 그런 책이 있다. 그러나 그런 책은 바로, 결코 읽어서는 안 되는 책이다(24p)"라고 쓰고는 다치바나 다카시의 의견과는 반대된다는 식으로. 

  이 책을 쓴 저자의 목적은 뚜렷하다. 바로 천천히 읽자는 것. 그렇다고 그것이 "한가로이 느긋하게 읽는 것은 아니다. 저속으로 비행한다고 해서 조종사가 한가하게 조종할 수 있는 것은 아닐 터이다. 어쩌면 고속의 비행보다 오히려 집중력이 더 필요할지도 모른다. 느릿느릿 읽지만 사실은 자신의 의지를 다잡고 있다. 정신을 고조시키고 있는 것(170p)"이라고 한다. 물론 사람마도 읽는 속도가 다를 것이다. 상대적으로 조금 느릴 수도, 혹은 빠를 수도 있지만 "기분 좋게 읽는 리듬을 타고 있을 때, 그 읽기는 읽는 사람 심신의 리듬이나 행복감과 호응한다. 독서란 책과 심신의 조화(38p)"라고 말하고 있다. 

 저자가 천천히 읽기를 권하는 이유는 결국 독서의 소중함, 책읽기의 행복함을 일깨워주기 위해서이다. 자고 일어나면 수만 개의 정보가 쏟아져나오는, 그야말로 정보의 쓰나미 시대에, 역자의 말처럼 "요즘에는 책을 읽는 시간 자체가 소중하다는 생각을 한다. 책에서 전혀 정보를 얻지 못해도 상관없다. 그냥 가만히 앉아 있는 시간, 혼자 있는 시간 자체가 소중(182p)"하다는 걸 저자는 말하고 싶은 것이다.

 "나한테는 그것이 기쁘다. 바로 지금도 책을 들고 있다. 그 책을 읽고 있다. 그런 생각이 솟아난다. 기쁠 때는 웬일인지 시간도 아득하게 피어오르는 것 같다. 현실에서는 아주 짧은 한순간이어도 시간은 한없이 피어오르고 펼쳐지며 충만해지는, 그런 기분에 휩싸인다. 그것이 정말 기쁘다. // 젊었을 적에는 독서를 하면서 그러한 감각을 가진 적이 없었다. 더 성급했었다. 시간은 항상 부족했다. 어떤 책에 감동한 적은 있었어도 독서 자체에 감동하는 일은 없었다. 시간은 피어오르고 펼쳐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저 흘러가 사라지는 것이었다. 지금은 확실히 독서의 감각이 달라졌다. 체감으로 알 수 있다. 언제쯤부터 알았을까, 그것도 알고 있다. // 바로 천천히 읽게 되고 나서의 일이다.(17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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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인을 기다리며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들녘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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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2/03]

다음은 <야만을 기다리며>의 말미(273-274)에 있는 "옮긴이의 말"의 일부다.

ㅡ 그렇다면 왜, 치안판사(*소설 주인공)나 쿳시(*작가)는 그들에게 득이 될 것이 없는 질문을 하고 거기에 대한 답을 찾으려 하는 것일까? 이 질문을 쿳시 자신의 말로 옮겨보면 이렇다. "사람은 왜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의 물질적 이익에 부합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정의의 편에 서려고 하는가?" "나는 왜 진실이 내 이익에 부합되지 않는데 내 자신에 대한 진실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전자는 죨 대령(*치안판사와 대립하는 인물)의 편에 서서 자신이 늘 해온 직무를 수행하면 여생을 편히 살 텐데, 그걸 마다하고 온갖 고초를 자진해서 겪은 후 자기고백적인, 아니 자기고백적이어서 자신에게 더욱 득이 될 것이 없는 얘기를 하는 치안판사를 향해 쿳시가 던지는 질문이고, 후자는 톨스토이, 루소, 도스또엡스키에 관한 에세이에서, 자신에게 득이 될 것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고백에 관한 문제를 반추하고 또 반추하는 자신을 향해 쿳시가 던지는 질문이다. 그에 따르면, 전자에 대한 답은 "우리가 정의에 대한 개념을 갖고 태어나기 때문"이고, 후자에 대한 답은 "우리가 진실에 대한 개념을 갖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두 질문에 대한 쿳시의 '플라토닉한' 답변은 왜, 쿳시의 소설의 주인공들이 끊임없이 자신의 내면을 파고들면서 때로는 자멸에 가까운 고백을 하는지, 그리고 왜, 쿳시가 그러한 내러티브에 매달리면서 자신의 고뇌를 투영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정의나 진실에 대한 개념을 갖고 태어났기 때문에 자신의 이익에 부합되지 않는 행위를 할 수 있다는 쿳시의 말은 궁극적으로 글쓰기가 윤리적인 것일 수밖에 없음을 잘 말해준다.

부커상 수상작인 <추락>을 심사했던 보이드 톤킨(Boyd Tonkin)은 <추락>에 대해 "아이스 피켈(ice-axe)로 얻어맞은 느낌을 받았었다"라고 표현했다. 과연, 나는 아이스 피켈이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도 몰랐으나 <추락>을 읽고나서 그 느낌이 어떤 건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이 느낌만 가지고 비교해 봤을 때,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조금 그 세기가 약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초반부만 해도 대단히 유사한 느낌이었으나 중반으로 갈수록 그 느낌은 확실히 줄어들었다. 하지만 그 틈을 타고 대단히 오묘한 느낌이 발생했으니 그것은 유머였다. 하지만 단순히 유머라고 표현해버리면 내 느낌이 왜곡되어버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풍자나 아이러니나 조소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를테면 정색과 광기가 공존하는 유머랄까. 다음은 그것이 절정을 발하는 부분이다.

ㅡ 이번에는 다음 것에 무슨 말이 쓰여 있는지 봅시다. 아, 단어 하나만이 달랑 쓰여 있구먼, 야만인들의 말로 전쟁이라는 말이오. 그런데 이 단어에는 다른 의미들도 있소. 그건 복수를 의미하기도 하고, 이렇게 위아래를 뒤집어 읽으면 정의라는 말이 되기도 하오. 어느 것을 의미했는지 알 길은 없소. 그게 야만인들이 교활한 이유요. 그건 다른 나뭇조각들에게도 똑같이 해당되는 말이오. (190)

소설 맥락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사실 이런 발췌 구절은 아무런 힘이 없다. 이 부분이 어떻게 절정이 될 수 있는지는 소설을 읽어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듯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많지 않은 분량의 소설임에도 읽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이 글의 초반에 발췌한, 소설에서 보여지는 '윤리(혹은 진실이나 정의)'가 어둠 속에 갇혀 있는 우리네 심연을 밝혀주기 (밝혀보려 애쓰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평론가 신형철은 <몰락의 에티카>에서 자신만의 에티카(윤리학)를 말하며 문학이 종언하지 않았음을(종언할 수 없음을) 말하고자 하지만, 실은 윤리라는 것은 몰락했건 아니건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지니고 있는 바로 그것이다. 어떤 소설이 문학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잠시 망각했거나 자연스럽게 모른 척했던 어떤 '윤리(윤리 시간에 배우는 윤리 말고)'를, 고스라니 드러내보여주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스스로에게 한 번쯤 해봄직한 질문.

ㅡ 소설을 읽는 이유는 단순히 교양이나 오락을 위한 것만이 아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 겪을 수 있는 경험은 한정되어 있고, 더군다나 극한적인 상황을 경험하는 일은 더욱 드물 것이다. 소설은 그러한 우리의 인생에 예고 없이 침입하는 일종의 이물(異物)이다. 그것을 그냥 배제해버리고 말 것인지 아니면 잘 다듬어서 진짜와 같은 하나의 경험으로 만들 것인지는 독자의 태도 여하에 달려 있다. (히라노 게이치로, <책을 읽는 방법> 中)

내가 만약 치안판사와 같은 상황에 처해있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그처럼 말하고 행동할 수 있었을까. 내 성정에, 그저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심정으로 살아가지 않았을까. 어쨌거나 새삼, "한 나라가 위대한 작가를 갖는다는 것은 또 하나의 정부를 갖는 것과 같다"는 러시아 작가 솔제니찐의 말이 와 닿는다. 우리나라엔 언제쯤 위대한 작가가 탄생할까. (결론이 뭐 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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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17 09: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17 22: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철의 시대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들녘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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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 <엘리자베스 코스텔로>, <포>, <야만인을 기다리며>에 이어 <철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쿳시는 한 번도 내 기대를 배반한 적이 없다. 그가 소설을 통해 다루고자 하는 주제들은 큰 범주에서 보면 대동소이하다. 그러나 어떤 주제를 조금 더 부각시키고 조금 덜 부각시킬지를 선정하는 예민한 감각이나, 읽으면 읽을수록 몰입하게 만드는 구성(혹은 스타일), 매번 새롭고 실험적인 서사방식까지 실망할 틈이 없다. 


그렇다면 이 소설 <철의 시대>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까. "옮긴이의 글"에 나온 내용을 발췌하여 손쉽게 알아보면, "대학에서 고전문학을 가르치다가 퇴직한 교수인 엘리자베스 커런이 화자로" 나와, "정권에 저항하는 진보(자유)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정권에 의해서 운영되는 교육제도 하에서 학생들에게 서구의 고전문학을 가르치면서 좋든 싫든, 그 체제를 영속화시키는 데 자신도 공모하고 일조했다는 것을 깨달아가는 화자의 내면에 초점을 맞추"(263)고 있는 소설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소설은 어머니인 엘리자베스 커런이 "'삶 자체를 사랑하는 것만큼 사랑하는' 딸에게 보내는 서간문 형식으로 되어"(267) 있다. 소설을 읽기 전에 간단하게나마 알아둘 정보는 이 정도로 충분할까, 아니면 부족할까.


아주 거칠게 요약한 소설의 내용과 형식만 봐서는 이 소설의 제목이 쉽게 와 닿지 않을 것이다. 책 내부에서 군데군데 힌트를 주고 있지만 아마 다음의 발췌 구절이 제목의 의미를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말하는 이는 화자인 나, 엘리자베스다.


"이제 그 아이는 묻혔고, 우리는 그 애를 밟고 지나가요. 나는 이 땅 위를 걸을 때, 남아프리카의 땅 위를 걸을 때, 흑인들의 얼굴을 밟고 지나간다는 느낌을 점점 더 강하게 받아요. 그들은 죽었을지 모르지만 그들의 영혼은 그들의 몸을 떠나지 않았어요. 그들은 땅 속에 무겁고 완강하게 누워서 내 발이 통과하기를 기다리고, 내가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다시 들어올려지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선철銑鐵로 된 수백만의 사람들이 지표 아래에서 떠다니는 거죠. 철의 시대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거죠."(165) 화자가 흑인들을 '선철'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그 사람들은 잘 타지 않을 거예요. 무쇠나 납으로 된 사람을 태우려고 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윤곽과 생김새는 잃게 될지 모르지만, 그들은 불길이 사그라들어도 전보다 더 무거운 상태로 거기에 남아 있을 거예요. 그들을 거기에 놔두며 1밀리미터씩, 1밀리미터씩 가라앉다가 결국 흙에 덮여버릴 거예요."(163,164) 그러므로 제목인 "철의 시대"는 흑인들이 땅에 묻혀 죽어가는 시대라는 의미가 담긴, 대단히 은유적인 표현이라고 봐도 좋을 것 같다.


"남아프리카의 백인 정부가 남아프리카 전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한 시기"(266)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소설은, "흑인들을 인권의 사각지대로 몰아넣는 아파르트헤이트 이데올로기와 그것에 대한 저항 이데올로기 혹은 투쟁"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는 이 소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지금, 그리고 이곳을 환기하게 해준다. 이 소설은 리얼리즘 계열의 소설도 아니고, 그렇다고 참여문학이라 불리는 작품도 아니다. 그럼에도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더불어 문학의 힘이란 과연 무엇인지, 다음의 조금 긴 발췌 구절을 통해 그 대강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 "이제, 충분히 보셨나요?"
타바니 씨의 목소리가 전보다 더 멀게 느껴졌다.
"그래요, 충분히 봤어요. 나는 구경을 하러 온 게 아니에요. 베키를 데리러 왔어요."
"그런데 이제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가요?"
"그래요, 난 집에 가고 싶어요. 나는 몸이 아픈 상태라오. 난 기진맥진해 있어요."
그는 몸을 돌리고 걸어갔다. 나는 절뚝거리며 뒤를 따랐다. 그때, 그가 다시 걸음을 멈췄다.
"당신은 집에 가고 싶어하죠. 하지만 여기에 사는 사람들은 어떻죠? 집에 가고 싶을 때, 그들이 가야 하는 곳은 이곳이에요. 그건 어떻게 생각하시죠?"
우리는 길 한가운데서,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빗속에 서 있었다. 지나가던 사람들도 걸음을 멈추고 나를 이상하게 바라봤다. 내 일이 자기들의 일이라는 듯, 모든 사람의 일이라는 듯.
"난 할 말 없어요. 끔찍하군요."
"그저 끔찍한 게 아닙니다. 이건 범죄행위입니다. 눈앞에서 범죄가 일어날 경우 당신은 무슨 말을 하죠? '충분히 봤다. 나는 구경을 하러 온 게 아니었다. 이젠 집에 가고 싶다.' 이렇게 말하나요?"
나는 고통스러워 고개를 저었다.
"물론 아니겠죠. 그렇게 하지는 않겠죠. 그건 맞아요. 그러면 뭐라고 얘기할 거죠? 당신이 본 건 어떤 범죄인가요? 그것의 이름은 무엇이죠?"
(...)
나는 빙 둘러서 있는 구경꾼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나한테 적의를 품고 있을까? 나는 아무런 적의도 감지할 수 없었다. 그들은 내가 무슨 말을 할지 기다리고 있었다.
"타바니 씨, 물론 나는 많은 것들을 얘기할 수 있어요. 그러나 그건 정말로 내 가슴 속에서 우러나와야 하는 거예요. 사람이 강제로 얘기를 할 때는, 당신도 그건 알겠지만, 진실을 말하는 법이 거의 없어요."
그가 대꾸하려고 했지만 나는 그를 제지했다.
"기다려요. 잠시만 나한테 시간을 줘요. 질문을 피하는 게 아니에요. 여기에선 끔찍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어요. 그러나 나는 그것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내 나름의 방식으로 말해야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봅시다! 우리는 듣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는 손을 들어 사람들을 조용히 시켰다. 사람들은 그게 맞는 말이라며 중얼거렸다.
나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이건 끔찍한 광경입니다. 비난받아야 마땅하지요. 그러나 나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빌어 그것들을 비난할 수는 없어요. 나는 내 자신에게서, 내 자신의 말을 찾아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그건 진실이 아니에요. 내가 지금 말할 수 있는 건 그게 전부예요."
"이 여자는 염병할 소리를 하고 있군." // (128, 129)


이 구절과 관계된 소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화자는, 백인 정부(공권력)에 저항하던 흑인들이 난사당하고 불에 타버린 참화의 현장에서 떠나고 싶어 한다. 더군다가 그렇게 죽은 흑인들 중에는 자기 집 가정부의 아들 또한 포함되어 있다. 그녀는 혼란스러워 한다. 그녀는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말하기 위해, 그렇지 않은 말은 진실일 수 없기에, 애써보지만 결국 무엇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니 결국 그녀는 "이 여자는 염병할 소리를 하고 있군"이라는 주위의 말을 듣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거기에 모여 있던 다른 흑인(구경꾼)들처럼 독자들마저 그녀에게 염병할 소리를 하고 있다며 매도할 수는 없다. 적어도 그녀는 자신의 눈에 보인 것들에 대해, 무엇이 진실인지에 대해 말하고자 애쓰기 때문이다. 염병할 소리를 하고 있다며 욕을 먹어야 하는 사람은 자신이 본 것에 대해 아무런 가치 판단을 내리지 않은 채, 그저 알 수 없는 진실에 허무해하는 사람이 아닐까.


이 장면은 어렵지 않게, 얼마전 벌어진 용산사태를 떠오르게 한다. 그들의 대결이, 경찰(용역) 측에 저항했던 철거민들과 이들을 몰아내려다 결국 그들을 죽여버린 정부(공권력)와의 대결구도로 치환되어 읽히는 건 단지 내가 대단히 시사문제에 관심이 많고 동시에 검찰측의 수사결과에 무척이나 불만이 많기 때문인 걸까.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상식이 무엇인지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진실이 무엇인지 알고자 하는 사소한 욕구만 있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다. 덧붙여 말하자면, 평소에는 잘 드러나지 않는, 각 개인이 지니고 있는 윤리에 대한 (불편한) 감각을 일깨워주는 일이 문학작품이 지니는 최대한의 덕목이 아닐까. 독자들의 감성(감정)에 호소하여 흥행에 성공한 작품들, 그러니까 베스트셀러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그런 덕목.


최근에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가 대단한 인기를 누리고 있다. 나는 이 소설의 단점 혹은 가치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간단한 이유인데, 이 책을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 눈물과 감동의 도가니였다는 식의 숱한 독자평들을 봐서도 앞으로도 별로 읽을 일은 없을 것 같다. 뜬금없이 <엄마를 부탁해>를 언급한 건, 이 소설이 '엄마'를 다룬 소설이기 때문이고 "'삶 자체를 사랑하는 것만큼 사랑하는' 딸에게 보내는 서간문 형식"(267)의 <철의 시대> 역시 엄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똑같이 엄마를 다루는데 왜 어떤 소설은 베스트 셀러가 되고 어떤 소설은 별로 읽히지도 않은 채 품절 위기에 놓이는 걸까. 남자 작가라서 엄마에 대해 잘 알지 못했기 때문일까. 그건 아닌 것 같고, 잘 모르겠지만 어렴풋하게나마 추측은 가능할 것 같다. 우리가 엄마를 떠올렸을 때 가슴 속에서 발생하는 뭉클뭉글한 그럼 감정, 그 감정에 기대어 이야기를 전개시키면 인기만발의 일일 드라마처럼 독자에게 호감을 살 가망성이 크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이름 하에 엄마들이 가지고 있는 자식에 대한 애증,집착,선망 등을 근본적으로 성찰하여 풀어쓴다면 아마 독자들의 호응을 얻어내기가 쉽지는 않을 것 같다. 당연한 소리지만 나는 후자 쪽에 훨씬 더 큰 가치를 두는 편이다. 더 말해 무엇하겠냐만, <철의 시대>는 정확히 후자 쪽의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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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09-02-15 1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보관함에 들어갑니다 ~

닉네임을뭐라하지 2009-02-16 12:58   좋아요 0 | URL
네, 이 책도 조만간 품절이 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