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인 - 魔人, 판타스틱 클래식 01
김내성 지음 / 페이퍼하우스 / 2009년 4월
평점 :
품절


[09.06.18]


추리소설의 리뷰를 쓰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모든 내용을 다 쓸 수는 없기 때문에. 쓰지 말아야 할 것들, 그러니까 스포일러에 대해서는 끝까지 입을 다물어야 하기 때문에. (입이 근질근질한데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랍니다!) 핵심 내용은 적절히 숨긴 채 떡밥들을 최대한 잘 활용하여 리뷰를 쓰는 수밖에.

떡밥, 해서 말이지만 우리나라 탐정소설(요새는 흔히 추리소설이라고 하지만, 소설 <마인> 안에서도, 그리고 <마인>과 관련된 글에서도 탐정소설이라 칭하고 있으니 이것으로 통일)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김내성이야 말로 떡밥의 제왕. 출생이 모호한 해월이라는 존재에서부터, 얽히고 얽힌 관계의 비밀이라든지, 기괴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묘사력, 베일에 가려 있는 연애사까지 등등등.

작가는 특히 탐정소설답지 않게(?) 인물들의 연애감정에 대단한 공을 들였는데 책 말미 정혜영 교수가 쓴 "해설"에 따르면 다 이유가 있었다. 탐정소설이 한국 독자들에게 익숙하지 않던 시기, 그것과는 무관하게 번안소설 <장한몽> 이래로 재력과 관련된 연애사 에피소드는 일반화되어 있었다. 작가는 탐정소설이라는 장르가 익숙하지 않은 당대의 독자들을 위해 신파 코드를 대거 끌어드림으로써 독자들에게 다가간 것이었다. 아예 대놓고 다음과 같이 쓰기까지 한다. "먼 듯하면서도 가까운 것은 젊은 남녀의 마음과 마음이라고, 이것은 연애소설독본 제일과에 쓰여 있는 말일 것이다."(184p)라든지, "점점 격해가는 두 사람의 감정이었다. 사나이 둘에 계집 하나! 그것은 어느 세계에서느 평화를 멀리하는 하나의 비극적 요소일 것이었다."(191p)

이야기는 (당시 한국의 실정과는 거리가 먼) 가장무도회에서부터 시작한다. "세계적인 무희 주은몽(*여주인공)은 결혼식을 앞두고 (*연 가장무도회에서) 주홍빛 망토를 둘러쓴 괴인(*해월)의 습격을 받는다." 그후 해월은 조금씩 조금씩 주은몽의 숨통을 조여가며 범행을 일삼는다. 그리고 조선 최고의 명탐정 유불란이 등장하여 이 둘은 일생일대의 대격돌을 펼친다. "숨 가쁘게 반전을 거듭하는 사건 속에서 번득이는 명탐정 유불란의 날카로운 추리. 유불란은 악마의 손으로부터 주은몽을 구하고 경성 시민을 안심시킬 수 있을 것인가?"(책뒤표지)

해월이라는 정체 불명의 존재를 등장시킴으로써 소설은 기괴하면서도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조장하고 있지만, 주지하다시피 이 소설은 판타지소설이 아니라 탐정소설이다. 전봉관 교수가 <판타스틱> 2009년 봄호 "<마인> 속 경성과 경성 문화"에도 썼듯이, "탐정소설에서 미학적으로 중요한 것은 현실성(reality)이 아니라 핍진성(verisimiltude)"(211p)이다. 이야기의 내적 개연성이 다른 어느 장르의 소설보다 명확하게 드러나야 하는 것이 탐정소설의 임무. 그러므로 이 점만 잊지 않는다면 요즈음의 추리소설에 익숙한 독자라면, 아니, 그저 상식적으로만 생각해본다면 범인의 실체를 파악하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김내성의 필치 역시 독자를 상식적으로 생각하지 못하게 할 만큼 뛰어나다.

이 소설에는 이를테면 "어찌 됐든 필자는 여기서 잠깐 붓 끝을 돌려, 독자들의 머리를 어지럽게 한 이 복잡한 사건을 절반 이상이나 단순화시킨 하나의 명 논문을 여러분께 소개하고자 한다"(167p)와 같은 독특한 문체가 종종 등장한다. 요사이 소설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데, 그러니까 3인칭 화자가 소설과 거리 유지를 하지 않은 채 소설 속에 직접 등장하는 장면. 가라타니 고진이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에서 언문일치와 관련하여 모리 오가이의 <무희>와 후타바테이 시메이의 <뜬구름>을 비교하며 언급한 부분이 자연스레 떠올랐는데, "해설"에서는 문맹률과 관련해서 설명한 부분이 있어 눈에 띄었다. "지식습득의 기초적인 문자해독 능력조차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이 상황에서 과학적 추론에 기반한 논리적 사고력과 같은 조선민족의 이지적 활동을 기대하기란 분명 불가능했다." 그리하여 작가는, "추리의 부분을 독자들에게 맡기기보다는 가능한 작가의 설명의 부분으로 남겨둠에 의해 추리의 묘미가 아닌 추리의 난해함으로부터 독자들을 구원"(486p)한 것이었고 그것이 작가의 탐정소설 창작방안이었다는 점.

소설 막판의 떡밥들은 먹다가 체할라 싶을 만큼 그 설정이 과하다는 생각이 들어 조금 아쉬웠다. 더욱이 아쉬운 건, "해설"에 따르면 그런 장치들이 작가가 소설 외적인 차원에서 말하고 싶었던 것을 전달하는 수단으로 표현되었다기보다는 단순히 에피소드 차원으로 전락했다는 점. 물론 어느 나라 근대에도 뒤지지 않을 화려한 배경 속에서의 막판 추격신은 꽤 인상적이었다. 자연스레 19세기 말이나 20세기 초를 배경으로 한 프랑스 (소설이)라든지, 일본 (애니메이션)이 떠오를 만큼.

소설의 제목은 <마인>이다. 마귀 마(魔)자에 사람 인(人)자를 써서 마인. 과연 작가 김내성은 어떤 이유로 이런 제목을 붙였을까. 처음엔 제목마저도 떡밥이었구나 싶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많은 의미가 담긴 제목일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과연, 소설 속에서 진정한 마인은 과연 누구일까. (떡밥이 좀 부족한 듯하지만 이쯤에서 마쳐야지 더 썼다간 범인이 누구인지 확 불어버릴...)


사족1.

다음은 "해설"에 있는 구절이다. "생활을 위해 통속 역사소설 창작에 손을 대면서 김동인이 표했던 자괴감, 자기비하와 같은 심각할 정도의 '순문학 중심주의적' 태도가 이 시기 조선의 문단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이십, 삼십 년대 작가들에게 있어서 탐정소설의 창작이란 생활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타협해야 했던 수치스러운 경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480p) 그로부터 칠팔십여 년이 흘렀다. 과연 문단의 태도가 그때와 비교해 얼마나 달라졌는지 잘 모르겠다. 조금은 나아졌겠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소설 토양을 갉아먹는 것처럼밖에 보이지 않는, 아 놀라워라 이토록 고귀한 순문학 중심주의적 태도.

사족2.

소설 한구절이 현 남북정세와 맞물려 괜히 눈에 밟혔다. 주은몽의 남편 백영호가 주은몽에게 말한다. // "아무튼 집안이 너무 음침해서 못쓰겠소. 이젠 몸도 어지간히 회복되었으니 우리 신혼여행 겸 어디 산수 좋은 데로 여행이나 떠납시다. 무엇보다도 당신의 기분을 좀 전환시켜야지! 우리 내일이라도 떠납시다. 금강산은 어떻소?" //(149p) 무려, "금강산은 어떻소?"란다. 이 구절이 마치 "우리 날도 더운데 이번 주말에 달나라 여행이나 갈까?"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져 착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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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언제나 금요일은 아니지!
호어스트 에버스 지음, 김혜은 옮김 / 작가정신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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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09.06.12]


  호어스트 에버스가 쓰고 김혜은이 옮겨 작가정신에서 나온 <세상은 언제나 금요일은 아니지>를 보았다. 읽다보면 큭큭 거린다며 추천을 받아 보게 된 책인데 아니나 다를까 읽는 내내 피식피식 큭큭 거리며 보았다. 이 책은 1997년부터 2001년까지 5년에 걸쳐 정기 낭독 무대에서 공연된 짧은 이야기 모음집인데, 발표한 작품 중에서 작가가 가장 마음에 드는 것들을 모은 뒤 작품 내재적 질서에 따라 차례를 꾸민 책이다. 그냥 읽기만 해도 꽤 재미있는데 작가가 자신의 유머와 감정을 살려 직접 낭독해주면 어지간한 코메디 프로그램 못지 않겠구나 싶었다. 이야기 대부분이 아마도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반추해가며 (약간의 과장 내지는 왜곡을 섞어) 구성했을텐데, 어떻게 자신의 과거 혹은 기억을 이다지도 유쾌하게 꾸며낼 수 있는 건지, 삶을 바라보는 마인드나 인생을 대하는 태도가 참 긍정적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 앞날개에 작가 사진이 나와 있는데, 사진에서 보이는 장난기 가득한 눈빛과 웃음 딱 그만큼이 이야기 속에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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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 좀 들어봐
줄리안 반즈 지음, 신재실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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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09.06.09]


줄리언 반스가 쓰고 신재실이 옮겨 열린책들에서 출간된 <내 말 좀 들어봐>를 봤다. 두 번째로 읽는 소설이다. 이전에 <플로베르의 앵무새>를 읽은 적이 있고, <101/2장으로 쓴 세계 역사>를 읽다 만 적이 있다. 어쨌거나 줄리언 반스는 소설이라는 서사장르 혹은 이야기형태를 참 잘 알고 대단히 좋아하는 작가라는 생각이 많이 든다. 소설가 김연수가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로 줄리언 반스를 한손에(혹은 양손에) 꼽는 이유도 조금은 알 것 같고.

아무려나 이 소설은 간단히 줄여 말하면 고품격 연애사랑결혼(심지어 인생) 소설이다. 통속적인 소재(삼각관계)를 사용했지만, 통속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시켰으며, 굉장히 신선하면서도 놀라운 결말을 이끌어 냈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 다시금 하게 된 생각. 세상에서 가장 찌질한 종은 남자이며, 세상에서 가장 멋있는 종은 여자라는 사실. 더불어 여자가 멋있다는 걸 아는 종은 남자밖에 없다는 사실 또한.

이 글을 쓰며 문득 연애와 사랑의 차이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는데, 굳이 차이가 있다면 연애는 좀더 관계의 문제에 가깝고 사랑은 좀더 감정의 문제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연애는 대체로 어렵고, 사랑은 종종 힘든 것.

인상적인 구절이 많아 발췌해둔 부분도 많고, 그래서 단평으로 끝내기 아쉬운 소설인데 다음에 읽을 책을 위해 이 정도에서 그쳐야겠다. 무엇보다 오늘 정말 오랜만에 만나서 이야기 나눈 친구와의 말대로 앞으로 잔뜩 책을 읽어야 하니까. "옮긴이의 말" 부분도 여러 모로 괜찮았는데, 그중에서 오늘의 대화와 관련하여 발췌해두고 싶은 구절. "독자가 기대하는 소설은 재미있어야 하고, 이상적으로는 진리를 말하는 소설이라야 될 것이다."(347) 역시 뭐랄까, 정답이나 해결책이나 위안이 아니라, 진리를 말할 수 있는 소설이라야 하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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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09-06-15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결과(?) 다시금 하게 된 생각. 세상에서 가장 찌질한 종은 남자이며, 세상에서 가장 멋있는 종은 여자라는 사실. 더불어 여자가 멋있다는 걸 아는 종은 남자밖에 없다는 사실 또한.
-> 후훗. 하고 미소지었어요.

닉네임을뭐라하지 2009-06-16 15:06   좋아요 0 | URL
네네 ^^
후훗, 하고 미소지어주셔서 감사합니당~
 
연암집 지만지 고전선집 380
박지원 지음, 박수밀 옮김 / 지만지고전천줄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09.06.04]


내가 박지원이라는 존재를 처음 인식한 건 언제였을까. 그후, 박지원의 글을 읽어봐야겠다 마음 먹은 건 또 언제였을까. 연 암 박지원의 학문적 성취와 사상이 집대성되어 있다는 <열하일기>를 구입하고도 쉽사리 이 책을 집어들지 못했다. 방대한 분량 탓도 있었겠지만 책을 읽는다고 그 속에 담긴 박지원의 철학이나 사상, 문장 등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한국문학사상 최고의 문장가"(9)라 일컬어지는 박지원. 그는 나에게 그림의 떡이었다. 맛보고 싶어도 맛보고 싶어도 맛볼 수 없는 그런.


이런 즈음, 지만지에서 <연암집>이라는 제목을 달고 박지원의 책이 나왔다. 박지원의 "문학과 사상, 삶에 대한 모든 글들이 담겨 있다"(11)고 할 수 있는 <연암집>. 책 서두에 있는 "편집자 일러두기"에 따르면 이 책은 "1932년 활자본으로 17권 6책으로 간행된 박영철본 <연암집>을 저본"으로 삼았고, "<연암집>에 실린 산문 237편 가운데 39편, <열하일기>에 실린 글 가운데 5편을 골라"(4)서 실었다. 글을 옮긴 박수밀에 의해 분류되고 선별된, 그야말로 박지원 산문의 에센스라고 봐도 무방한 그런 책. 박지원 월드, 그 광활환 우주를 안내해줄 입구의 돌로 제격인 책이었다.


책은 옮긴이에 의해 네 개의 파트로 나뉘어져 묶여 있다. 첫 번째 파트의 제목은 "사이에서 생각하기". 어쩌면 박지원 사상의 정수라고도 할 수 있는 '사이'. 다양성을 존중하는 가치관이라고 봐도 무방한 그의 이 사상은, "참되고 바른 견해는 진실로 옳다 그르다 하는 시비의 가운데에 있는 것"(33)이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다. 옮긴이 역시 박지원의 이런 사상을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핵심문장으로 꼽아 책 뒤표지에다 실었다.


// 아! 저 까마귀를 보라. 그 날개보다 더 검은색이 없긴 하나 얼핏 옅은 황금색이 돌고, 다시 연한 녹색으로 반짝인다. 햇볕이 비추면 자주색으로 솟구친다, 눈이 어른어른하면 비취색으로도 변한다. 그러므로 내가 비록 푸른 까마귀라고 말해도 괜찮은 것이고 다시 붉은 까마귀라고 말해도 상관없는 것이다. 저 사물은 본디 정해진 색이 없는데도 내가 눈으로 먼저 정해버리는 것이다. 어찌 그 눈에서만 판정할 따름이랴? 보지도 않으면서 마음속에서 미리 판정해버린다. (36)// 박지원은, 세상사에 오로지 하나만의 정답은 없으니 그 사이에서 혹은 차이를 통해 진리에 다가가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 파트의 제목은 "문장가의 마음"이다. 그 스스로가 대단히 뛰어난 문장가였던 박지원은 과연 글쓰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어떤 문장을 쓰는 작가를 좋은 문장가라고 생각했을까. 이를테면 박지원은 글쓰기를 병법에 비유하고 있다. 그리하여, "군사를 잘 쓰는 장수에겐 버릴 군사가 없고, 글을 잘 쓰는 자에게는 따로 가려 쓸 글자가 없"(77)고 말한다. 사소한 일상생활이나 자잘한 습관을 통해서도 글쓰기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 이 책을 보는 사람이 기와 조각이나 벽돌도 버리지 않는다면, 화공의 번지는 먹에서 흉악한 도둑의 뻗친 수염을 얻게 될 것이다. 남의 귀 울음은 듣지 못해도 내 코고는 소리를 개닫는다면 작가의 뜻에 가까우리라."(82) 하지만 결국 그가 말하고 싶은 말은 다음 한 문장이면 족할지도 모르겠다. 세상의 모든 일이 그러하듯, "몰두해야 이룬다"(104)고.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몰두해야만 성취할 수 있다고. 글쓰기는 두말 할 나위 없거니와.


세 번째 파트의 제목은 "생활의 발견"이다. 앞의 두 파트에 비하자면, 내밀한 일기 혹은 아주 사적인 에세이의 느낌이 많이 나는 글들이 모여 있다. 친구를 잃은 슬픔이라든지, 아름다운 자연에 대한 감상, 혹은 어떤 사람에 대한 추억, 여행길에서의 단상들을 담담하게 적어두고 있다. 대단히 사소한 기록이지만, 그런 것들을 기록함으로써 그야말로 생활을 새롭게 발견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비유에선 그저 입이 떡 벌어질 뿐이다. "개구리 소리는 마치 멍청한 원님 앞에 사나운 백성들이 몰려와 소송을 제기하는 것 같고, 매미소리는 공부를 엄격하게 시키는 서당에서 시험일이 닥쳐 글을 소리 내어 외는 것 같고, 닭 울음소리는 올곧은 한 선비가 자기 임무로 여기고 바른말 하는 것 같았다."(135) 자연에서 나는 소리를 통해, 참신하면서도 적확하게 일상생활과 비교하고 있다.


네 번째 파트는, 범박하게 말해 현실(사회)참여적인 글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제목 또한 "현실과 사회". 꼭 참여적이지 않더라도 개인적인 생각들이 많이 담긴 것이, 요샛말로 신문 칼럼이나 사설과 같은 글들이라고 보면 적절할 듯하다. 친구나 벗에 대한 생각들, '열녀'라는 사회제도에 대한 관점, 오랑캐를 보는 시선, 학문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비롯하여 살면서 보고 들은 것들에 대한 주관을 가감없이 선보이고 있다.


리뷰를 쓰기 위해(응?) 두 차례로 나누어 책을 완독하기는 했으나, 음, 글쎄, 박지원의 <연암집>은 그런 식으로 읽어서는 그 의미를 제대로 찾아내기 힘들 것 같다. 뭐랄까, 아침에 일어나서 천천히 차를 한잔 마실 정도의 여유를 가지고, 책을 펼쳐 손길이 닿는 곳에 있는 글을 한두 개씩 꼭꼭 씹어가며 음미해야 아마 이 책을 제대로 맛볼 수 있지 않을까. 어쨌거나 입구의 돌을 열어제쳤으니, 이제 박지원의 세계를 여유롭게 (혹은 치열하게) 유영할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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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양장)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윤성원 옮김 / 문학사상사 / 200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09.05.17]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와 <1973년의 핀볼>의 차이는 전자가 먼저 씌었고 후자가 나중에 씌었다는 점이다. 그게 전부고 또한 결정적이다. 무슨 말장난 같지만 그 외의 다른 차이점을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가 <1973년의 핀볼>보다 우위에 설 수 있는 건 단지 전자가 먼저 씌었다는 이유뿐이다.

예전부터 하루키의 작품 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최고로 꼽아 왔는데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 그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예전과 지금의 이유는 아마도 다를 것이다. 아무려나 지금의 이유는, 이 소설이 아무도 보지 못한 새로운 소설의 지형을 그려냈기 때문이다. 하루키는 20세기 중반의 일본 작가들이 근대문학의 최첨단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사소설이라는 형태의 소설을 완전히 끝까지 밀고 가버렸다. 심지어 다른 사람들로부터 "이런 소설따위 누가 못 쓰냐"는 얘기를 들을 만큼 끝까지. 하지만 결국 하루키가 만약 위대한 작가가 될 수 있다면, 아무도 쓰지 않았던 "이런 소설따위"를 그가 가장 먼저 써버렸기 때문이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콜럼버스의 달걀이 된 셈이다.

하루키의 영향을 받은 한국의 많은 작가들은 하루키의 소설에서 느껴지는 공허한 정취나 의도적으로 수집된 무의미한 디테일(개인적 취향)을 주로 패러디(모방,모사)했다. 하지만 아무도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 보여지는 구조를 베끼지는 못했다/않았다. 사소설이라는 일본 문단 특유의 양적 질적 토양이 부족하기도 했겠거니와, 사실은 그의 소설이 (근대)소설(양식)이 끝났다는 걸 얘기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1973년의 핀볼>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의 패러디 혹은 아류 혹은 속편이다. 패러디 작품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특정 한 작품에 대한 패러디에 그쳐서는 안 된다. 이를테면 어떤 총체적인 집단(부류,시대)에 대한 패러디가 시도되어야 한다. 이를테면 <돈 키호테>나 <마담 보바리>와 같이. 하지만 패러디 작품임에도 <1973년의 핀볼>이 살아남은 이유는 이 작품 속에서 20세기 하루키 월드를 이루어낸 작품들ㅡ이를테면 <양을 쫓는 모험>이라든지,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태엽갑는 새>, <상실의 시대(노르웨이의 숲)>ㅡ의 씨앗이 발아할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패러디 작품이 결국 모태가 되어버린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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