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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들의 들판
공지영 지음 / 창비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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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아버지 원망하지 말아라. 좋은 분이셨다. 만일 네게 엄마에 대해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았다면, 그건 미워서가 아니라 매우 사랑해서였을 거야. 네 아버지 네 엄마 정말 사랑했으니까. 너무 사랑하면 너무 무서워져서 아무 말도 할 수 없고 어무 기억도 하고 싶지 않은 법이니까. 네 아버지 죽을 때까지 아마 엄마 잊지 못했을 거야. 네 엄만 참 좋은 여자였으니까."
수연도 이제 안다. 너무 사랑하면 너무 무서워진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자신의 부모를 두고 한쪽이 한쪽을 매우 사랑했다는 말을 듣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래서 자식에게조차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수연은 알 수 없었다. 사랑했는데 왜 이혼했나요? 사랑했는데 왜 내게는 아무 말 없이, 설명도 없이 그저 죽었다고 했나요? 사랑했는데 어떻게 헤어져서 다른 사람과 또 결혼하나요? 라고 묻기에 그녀는 이미 너무 커버렸다. 하지만 커버렸다고 해서 그 의문이 사라진 것은 물론 아니었다. -223쪽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 미라처럼 바짝 마른 건조한 손가락으로 수연의 볼을 한번 쓸어내렸다. 그러면 그때 아버지가 바라보던 것은 자신이 아니라 엄마였던가, 나연의 말대로 엄마가 죽기 전 자신을 알고 울 때 그게 수연을 안고 우는 것임을 알았다는 것처럼. 그래, 그런지도 몰랐다. 정작 다른 것들을 향하는 손가락들, 만지고 싶은 것을 만나지 못하고 부르고 싶은 이름을 차마 부르지 못하는 것들, 그리운 것들은 그렇게 멀리 있어서 그저 그려보는 것인가보았다. -2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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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의 수도원 기행
공지영 지음 / 오픈하우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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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라도 프랑스를 여행하실 분은 파리에서 샤르트르를 거쳐 대서양 연안의 그랑빌 쪽으로 가는 도로를 달려가면 되겠다. 언제라도 다시 프랑스에 간다면 북부 노르망디 해변의 에트르다(Etretat)와 함께 다시 한 번 꼭 가고 싶은 곳으로 내게는 기억되는 길이었다. -38쪽

미국의 골프선수 할 서튼..미국 남부 석유재벌집의 아들로 태어나 남부러울 것 없이 자라서 스물다섯 살의 나이에 전 미국의 골프대회를 휩쓸고 난 후 10년간 세 번의 이혼을 하고 극심한 슬럼프에 빠졌다가 재기한 그는 말한 적이 있다 "인생에서 제가 깨달은 한 가지 사실은, 삶이란 무엇인가를 깨닫기 전에 우리는 서른다섯 살을 넘어버린다는 겁니다.처음에 나는 빠른 차가 있으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포르셰를 샀죠. 그 다음엔 집이 있었으면 했습니다. 그래서 집을 샀죠. 그런데 그 다음에 비행기가 한 대 있으면 행복할 수 있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비행기를 한 대 샀지요. 그러고 난 다음에 깨달은 것입니다. 행복은 결코 돈을 주고 살 수는 없다는 것을......." -.쪽

카뮈가 그렇게 말했다. 내가 만일 내 인생의 전환기를 느낀다면 그것은 내가 얻은 바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가 잃은 그 무엇 때문이라고..... 지난 세월 동안 나는 노력하면 무엇이든 이루 수 있다는 터무니없는 자신감을 잃었고, 누군가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줄 거라는 기대를 잃었다. 그러니 이제 또 무엇을 잃고 서울로 돌아가야 하는지, 새벽이 올 때가지 그렇게 혼자 뒤척이며 나는 깨어 있었다. -225쪽

내 생이 내 것이 아니듯, 내 뭄이 내 말을 듣지 않듯, 내 혀가 마음과는 다른 말만 골라 하듯, 마음대로 되는 건 없는데, 그중 제일 말을 듣지 않는 이 마음이라는 것이 제멋대로 과거로 거슬러오르기 시작했다.
회개라는 성서상의 용어는 원래 히브리어로 '거슬러올라가다' '물살을 거슬러올라가다' '악한 것에 대항하다' '자기 자신을 극복하는데 폴요한 조건을 설정하다' 라는 어원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안 건 최근이었다. ...그러니 그 밤 나는 회개를 하고 있었던가. 시간의 물살을 거슬러 과거로 올라가면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나는 침대 머리맡에 앉아 나의 어리석음이 펼쳤던 내 인생의 드라마를 두 눈 똑바로 뜨고 다시 바라보는 형벌을 받았다. 이제 순종이라는 말의 아름다운 의미를 알 만한 나이가 된 나는 무릎을 꿇고 대답했다. 아멘 -224쪽

내 생이 결코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내 인생은 나의 것이어야 한다는 이 딜레마. 우리 삶에 상처를 입힌 사람들을 용서할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면서 바로 그 순간에도 나는 또한 남에게 잊지 못할 상처를 주고 있는 딜레마...... -224쪽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왜 아이를 낳고 싶었는지 알게 되었듯, 그렇게 알 것 같았다. 하나님은 아름다운 창조물을 그리운 것들과 나누고 싶었나보다. 좋은 걸 보면 생각나는 게 사랑이니까. 그래서 그들에게 자신을 만든 신을 거부해도 좋을 무서운 자유, 그 신성의 일부까지 부여하셨나보다. 사랑은 스스로 찾아오는 것이니까. 그래서 하느님은 나를 기다려주신 것이다. 18년 동안 물끄러미 바라만 보면서, 당신이 가진 전지전능의 능력을 오직 기다리는 데 사용하신 것이다....... 뭐하러 사람을 지으셨느냐고 하느님을 원망하고 나 자신을 미워하며 오래도록 헤매어다니던 한 사춘기 소녀의 영혼에게 하느님은 이제야 대답을 주신다. 이렇게 오래도록 헤매어다닌 후에야. -283쪽

그리하여 나는 알게 되었다. 신께서 나를 위해 날을 개게 해주시고 바람을 잠자게 해주시며 결국 이 모든 하늘과 땅, 우주만물을 지어주셨음을, 나 공지영이 아니라 당신이 지으신 '모든 나'를 위해서...... 나는 하느님이 왜 천지를 창조하시고 동물까지도 창조하시고 당신 스스로 "하느님 모기에 참 좋으셨다"해놓고 이 골칫덩어리 인간을 만들었는지, 어렵풋하게 알 것 같았다. -283쪽

장 루슬로의 시
다친 달팽이를 ㄹ보게 되거든 도우려들지 말아라. 그 스스로 궁지에서 벗어날 것이다. 당신의 도움은 그를 화나게 만들거나 상심하게 만들 것이다. / 하늘의 여러 시렁 가운데서 제 자리를 떠난 별을 보게 되거든 별에게 충고하고 싶더라도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라. 더 빨리 흐르라고 강물의 등을 떠밀지 말아라. 강물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280쪽

처음 아르장탕 관상수도원을 나와 거리를 떠돌면서 나는 희미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수도원은 꼭 수도원 건물 속에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이다. 수도원에 그토록 가고 싶어 수도원만 찾아다니는 기행을 하면서 수도원과 기행 그 자체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 이건 그냥 내 삶의 어느 날이란 걸 알게 된 것이다.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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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들의 들판
공지영 지음 / 창비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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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 인간들은 예깜 같은 거 가질 수 있는데, 그런 예깜 같은 것이 적중한 일, 말하자면 인생이 책이라면 그 페이지를 넘겨주는 손길 같은 일...... 그런 일들이 내게 일어났네.-68쪽

자네가 이니셜로 J라고 표기했지만 그게 누군지 나로서는 대충 짐작이 가네. 이제야 고백이랄 것도 없는 고백을 하자면 그녀를 나 역시 한 때는 설레는 눈으로 바라본 일이 있었네. 그녀는 우리 모두의 말하져면, 여주인공 같은 사람이 아니었겠나. -69쪽

나는 고립된 무인도처럼 외로운 광주시민들에게 신문을 가져다주던 그의 모습을 떠올렸네. 그것을 받아들고 우리는 외롭지 않다고 기뻐하던 광주시민들의 얼굴도 떠올렸네. 진정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건져내는 것은 아마도 외롭지 않다는 사실, 외롭다고 느낀다면, 고립되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미 죽음을 이마에 대고 있는 것...... 그때 힌츠페터씨에게 신문을 받아든 사람들, 아마 그들 중 더러는 죽고 더러는 이 땅을 떠나갔겠지만 그렇게 그는 다시 그 답장을 그들로부터 받은 건 아니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 -92쪽

지난번 아우슈비츠에 갔을 때도 그런 생각을 했네만 선한 것들, 진실들, 정의들은 이상하게 아주 작아. 아우슈비츠는 크고, 그것을 묘사한다는 것은 "대서양을 한방울도 남김없이 마시는 것처럼, 지구를 포옹하는 것처럼 불가능한 일"이라고 누군가는 말했네. 폭력은 수용소처럼 거대하고 때로는 범국가적이지만, 사람을 살리게 하는 것들은 웃음들, 편지들, 따듯한 말들, 혹은 한통의 필름들, 하나의 작은 마음들, 진실을 향한 결단들 혹은 당신은 잊혀지지 않았다고 말해주는 따스한 음성들..... 선한 일은 맨손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이라고 생각했네. -93쪽

다음에 한국에 나가면 우리 작은 술집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며 이야기하세. 어쩌면 잊혀진 노래를 부를 수도 있을까. J에게 짧은 편지 한통 띄우려하네. 그냥 잘 있느냐고 물어보려고 하네. 나도 잘 있다고, 너를 잊지 않고 있다고, 우리들의 깃발과 함성과 노래처럼 그것은 사라지지 않고 다만, 다음 챕터로 넘어갈 뿐이라고. 사랑하는 친구 소식 바라네. -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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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의 수도원 기행
공지영 지음 / 오픈하우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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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는 추적추적 내리는데 내게는 살이 부러진 우산 하나뿐이었다. 내가 짐을 나르겠으니 리옹으로 돌아가시라고 해도 올리비에 수사님과 이혜정 수녀님은 나의 무거운 짐을 들고 따라오셨다. 평생을 살아도 수녀님 수사님들은 자기 소유라곤 성경책과 책, 그리고 옷 한두 벌 뿐이라는데 한 달 여행하는 나는 뭘 이리 많이 넣었을까. 게다가 정작 필요한 우산은 하나뿐이고 살까지 부러져 비는 한쪽 어깨를 적시고 있다. 나는 무거운 내 트렁크가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꼭 필요한 우산이 살이 부러진 채인 것까지 내 인생하고 똑 닮았다는 생각까지 들어서였다. 불필요한 것은 많아 다른 사람들을 수고롭게 만들고 필요한 것은 고장난 그런 인생....... 비는 한여름 장맛비처럼 계속 내리고 있었다. 춥고 적적하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테제공동체는 내가 유럽에서 돌아본 수도원 중에 제일 가난한 곳이었다. 어떤 기부도, 설사 뜻 있는 상속도 받지 않는다는 원칙이 50년 동안 지켜지는 곳, 모든 비용은 참가자들에게 실비로 받는 숙박료와 수사님들의 노동으로 충당한다고 했다. 실제로 밤이 깊어가는데 손수레 같은 것을 끌고다니는 수사님들의 모습이 보였다.-129쪽

서울에서 테제공동체가 '빛과 소리로 마음을 움직인다'라는 원칙이 있다는 것을 알고 오긴 왔는데 막상 대성당에 들어가니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 그곳의 '화해의 교회'입구에는 "여기 서 있는 그대 화해하십시오" 라는 말이 써 있다. 그런데 여기 제각기 자유로우 털썩 앉아 있는 젊은이들의 얼굴은 스스로와도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듯 그렇게 고뇌에 차 보였다. -132쪽

누군가를 미워하고, 미워하다 못해 증오하고, 그를 죽여버리고 싶다 못해, 그냥 저절로, 내 손에 피 한 방울 안 묻히고, 그 사람이 고통스러운 병에 걸려 천천히 죽어가기를 바랐던.. 이를 악물던 그런 황폐한 날들이 내게도 있었다. 증오가 사랑보다 강렬한 것을 알게 되고, 미움 앞에서 사랑은 얼마나 무력하게 사위어 가는지 알게 되었던 그런 날들이 내게도 있었다. 그를 파괴하고 싶은 욕망이 결국 나 자신을 파괴하고 싶은 욕망의 다름 아니었따는 것도 모르던 그런 날들이..... 다시 신앙을 찾았을 때 나는 기도했다. -240쪽

송봉모 신부님의 <상처와 용서>라는 책에 그런 말이 나온다. 용서는 상대방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그래 그 사람도 이런 이런 사정이 있었어. 그러니 나한테 잘못했을 거야." 이렇게 말하는 것은 값싼 용서이고, "나는 그 사람을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이름으로 그 사람을 용서하게 되기를 바랍니다"라는 게 진짜 용서라고..... H.나우엔의 말처럼 우리는 "상처를 딛고 일어설 자유"를 얻어야 한다. 나 역시 많이 편안해진 후에, 돈이나 명예, 사랑이나 이름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고 날마다 되뇌이며 살던 어느 날 깨닫게 되었따. 내가 상처에 대하여, 그것이 차마 집착인 줄도 모르고, 그 어느 것보다 더 무섭게 집착하고 있었다는 것을. -2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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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들의 들판
공지영 지음 / 창비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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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녀에게 약간 등을 진 채로 호주머니에서 담배를 하나 꺼내물었다. 이제 생의 굽이를 돌아 막 건너편 언덕에 도착해 안도하고 있는 나른함 같은 것이 그에게는 있었다. -9쪽

"여기까지 따라와서 바라는 게 대체 뭐요?"
그가 물었다. 상대하고 싶지 않으니 빨리 용건을 끝내라는 기색을 감추지도 않겠다는 듯 성의없는 발음이었다. 어기까지, 따라와서, 바라는 거...... 시간이 많다면, 십년쯤 전으로 시간을 되돌린다면 그녀는 그 낱말들 하나하나를 가지고 그와 다툴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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