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는 추적추적 내리는데 내게는 살이 부러진 우산 하나뿐이었다. 내가 짐을 나르겠으니 리옹으로 돌아가시라고 해도 올리비에 수사님과 이혜정 수녀님은 나의 무거운 짐을 들고 따라오셨다. 평생을 살아도 수녀님 수사님들은 자기 소유라곤 성경책과 책, 그리고 옷 한두 벌 뿐이라는데 한 달 여행하는 나는 뭘 이리 많이 넣었을까. 게다가 정작 필요한 우산은 하나뿐이고 살까지 부러져 비는 한쪽 어깨를 적시고 있다. 나는 무거운 내 트렁크가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꼭 필요한 우산이 살이 부러진 채인 것까지 내 인생하고 똑 닮았다는 생각까지 들어서였다. 불필요한 것은 많아 다른 사람들을 수고롭게 만들고 필요한 것은 고장난 그런 인생....... 비는 한여름 장맛비처럼 계속 내리고 있었다. 춥고 적적하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테제공동체는 내가 유럽에서 돌아본 수도원 중에 제일 가난한 곳이었다. 어떤 기부도, 설사 뜻 있는 상속도 받지 않는다는 원칙이 50년 동안 지켜지는 곳, 모든 비용은 참가자들에게 실비로 받는 숙박료와 수사님들의 노동으로 충당한다고 했다. 실제로 밤이 깊어가는데 손수레 같은 것을 끌고다니는 수사님들의 모습이 보였다.-129쪽
서울에서 테제공동체가 '빛과 소리로 마음을 움직인다'라는 원칙이 있다는 것을 알고 오긴 왔는데 막상 대성당에 들어가니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 그곳의 '화해의 교회'입구에는 "여기 서 있는 그대 화해하십시오" 라는 말이 써 있다. 그런데 여기 제각기 자유로우 털썩 앉아 있는 젊은이들의 얼굴은 스스로와도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듯 그렇게 고뇌에 차 보였다. -132쪽
누군가를 미워하고, 미워하다 못해 증오하고, 그를 죽여버리고 싶다 못해, 그냥 저절로, 내 손에 피 한 방울 안 묻히고, 그 사람이 고통스러운 병에 걸려 천천히 죽어가기를 바랐던.. 이를 악물던 그런 황폐한 날들이 내게도 있었다. 증오가 사랑보다 강렬한 것을 알게 되고, 미움 앞에서 사랑은 얼마나 무력하게 사위어 가는지 알게 되었던 그런 날들이 내게도 있었다. 그를 파괴하고 싶은 욕망이 결국 나 자신을 파괴하고 싶은 욕망의 다름 아니었따는 것도 모르던 그런 날들이..... 다시 신앙을 찾았을 때 나는 기도했다. -240쪽
송봉모 신부님의 <상처와 용서>라는 책에 그런 말이 나온다. 용서는 상대방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그래 그 사람도 이런 이런 사정이 있었어. 그러니 나한테 잘못했을 거야." 이렇게 말하는 것은 값싼 용서이고, "나는 그 사람을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이름으로 그 사람을 용서하게 되기를 바랍니다"라는 게 진짜 용서라고..... H.나우엔의 말처럼 우리는 "상처를 딛고 일어설 자유"를 얻어야 한다. 나 역시 많이 편안해진 후에, 돈이나 명예, 사랑이나 이름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고 날마다 되뇌이며 살던 어느 날 깨닫게 되었따. 내가 상처에 대하여, 그것이 차마 집착인 줄도 모르고, 그 어느 것보다 더 무섭게 집착하고 있었다는 것을. -2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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