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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네 가지 비밀과 한 가지 거짓말(체험판)
방현희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7월
평점 :
판매중지
안개 속을 걷다가 출구를 찾지 못하고 계속해서 같은 자리만 뱅뱅 도는 느낌이다. 차가운 공기가 서늘하게 살갗을 스쳐서 닭살이 오돌토돌 났다. 앙상하게 시들어 새까맣게 죽은 나뭇가지만이 안개 속에서 나를 붙잡으려는 듯 손을 뻗치고 있다. 그 손에 붙잡히면 나 역시 마른 고목으로 뿌리를 내려 다른 방문자만 기다리게 될까봐 몸을 움츠려 피한다. 저 멀리서 어떤 집의 그림자가 보인다. 가서 쉬고 싶지만 나는 그 언저리만 돌고 있다. 이 책을 읽고 난 후 느낌이다. 묘하고 조금은 복잡한 구성이라서 쉽게 읽히지 않아 우선 등장인물의 사연을 대략적으로 정리해 봤다. 이 내용은 상당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다.
마르셀
마르셀의 어머니는 삷 자체가 공포로 다가오는 심한 우울증의 돌파구로 아버지가 아닌 남자들과 몸을 섞으며 창녀처럼 굴다 길에서 죽었다. 아버지는 책에 나오지 않은 연유로 돌아가셨고 모국인 프랑스로 운구 되는 도중 비행기가 테러리스트에 의해 폭파되어 시체가 바다 속으로 사라졌다. 마르셀은 여행지에서 한국인인 규와 뜨거운 사랑을 나눈다. 마르셀은 일본행 도중 한국에 들려 규를 찾는다. 하지만 규는 마르셀과의 관계를 그저 여행지의 짧은 사랑이라고 치부한다. 마르셀은 그런 규에게 실망을 느끼고 관계를 정리한다. 규는 마르셀이 한국에서 지낼 집을 소개해준다. 거기서 마르셀은 장을 만난다. 장은 방송국 연출자이고 마르셀과는 전에 리포터와 PD로 만났었다. 그리고 다시 장의 집에서 둘은 조우하는데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책에서는 집에서의 만남이 처음이라고 서술되어있다는 점이다. 마르셀과 장은 격렬하게 서로를 탐한다.
닥터정
마르셀의 심리치료사다. 마르셀은 장과의 관계의 끝이 자신의 죽음이라고 생각하지만 벗어날 수 없다는 두려움과 절망감에 정신과 의사를 찾는데 바로 닥터정이다. 닥터정은 아름다운 마르셀에게 호감이 있다. 장은 어쩌면 유행에 한참 뒤쳐진 의사다. 환자에 대한 깊은 연민과 우유부단함으로 인스턴트 진료를 따르지 않으려고 한다. 닥터정은 마르셀과의 상담 도중 유혹을 느끼며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목을 죄려는 가학적인 행동을 하기도 한다. 닥터정은 아버지의 훈육으로 일종의 남성성을 거세당할 뻔했다. 그는 원초적으로 내재되어있는 늑대와 같은 공격성을 지키기 위해 몰래 권투를 배웠다. 닥터정은 마르셀이 상담에 오지 않자 그녀를 걱정하며 그녀와의 상담시간을 더듬다가 마쓰코를 떠올린다. 마르셀과 비슷한 이유로 자신을 찾아왔던 2년 전 실종된 동양인 여자. 닥터정은 실종된 마쓰고가 사실은 이미 죽었다고 단정 지었었다. 그랬던 과거를 생각하며 마르셀 역시 그렇게 되었을까 걱정되어 그녀가 머물었던 장의 집에 찾아간다. 하지만 마르셀을 찾지 못하고 돌아온다. 그리고 그의 병원에 장이 찾아온다. 장은 있지도 않은 사람이 있다고 느끼는 게 가능하냐고, 분명 있는데 없기도 하다는 알 수 없는 말을 그에게 남긴다.
그 사람, 장
마르셀은 자기를 바치겠다고 하면서 장에게 다가온다. 장은 바치다, 는 말을 들으면 어머니가 생각난다. 장의 어머니는 일본인이다. 한국인인 아버지는 그렇게 싫어하는 나라의 여자와 사랑에 빠졌고 멀었던 눈이 떠지자 짐스러워했다. 그는 장과 어머니를 구석방에 가두어 남들 눈을 피해 숨기고 다른 여자와 정식으로 결혼해서 두 살림을 차렸다. 밤마다 자신을 찾아오는 아버지가 여전히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던 어머니는 종래는 모든 것을 바쳤지만 남은 건 아무 것도 없다고, 사요나라, 인사를 하고 떠났다. 장은 아무 것도 아닌 게 되었다. 장은 일본인을 혐오하는 한국인들 사이에서 자신을 미워하게 되고 그에 대한 반발심으로 가학적으로 변한다. 후에 그는 방송국에서 마쓰코를 만나서 한눈에 반해버린다. 자기를 떠난 어머니를 닮은 마쓰코. 하지만 장은 자신과의 섹스에서 아무 열망도 못 느끼는 그녀를 발견한다. 그러다 우연히 마쓰코의 목을 조르는데 그녀가 깊은 쾌감을 느끼는 걸 목격한다. 장은 그녀와 잠시라도 같이 있고 싶고, 그녀를 붙잡고 싶고, 그녀와 서로 사랑한다고 믿고 싶어서 목을 조른다. 그러다 마쓰코가 자신을 떠날 거란 걸 알고 그녀의 사요나라, 마지막 인사를 막기 위해 목을 오랫동안 조르다가 그녀를 죽인다. 그리고 몇 년 후 마르셀을 만난다. 그리고 마르셀의 '바치겠다.'는 말에 어머니와 마쓰코의 사요나라가 떠올라 정사도중 마르셀의 목을 세게 움켜쥔다. 마르셀이 죽었다고 생각한 장은 황망한 마음에 도망치다 다시 집으로 돌아오지만 마르셀의 시체는 사라지고 없다. 그리고 장은 마르셀과 마쓰코가 다녔던 병원, 닥터정의 병원 예약증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 두 여자가 환각이 아닐까하는, 정신병의 일종으로 환영을 보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고 닥터정의 병원으로 향한다.
마쓰코
마쓰코는 장이 샤프펜슬을 건네 줄 때야 비로소 그를 알아봤다. 알고는 있었지만 그를 의식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재일교포인 아버지와 사랑에 빠진 어머니는 도망치듯 같이 산다. 아버지는 잘생기고 다정했으며 상냥했다. 어머니는 아버지는 사랑했지만 그가 한국인이라는 열등감에 벗어날 수 없어 결국 그녀와 함께 집을 떠난다. 마쓰코의 어린시절도 그렇게 끝났다. 그녀의 손에는 파버파스텔, 샤프펜슬 만이 쥐어졌고 특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샤프펜슬을 힘주어 잡아 공부만 했다. 샤프펜슬에서 벗어난 지 6년 후 그는 장이 건네는 샤프펜슬에서 결핍된 유년시절을 떠올리며 어떤 갈망을 느낀다. 갈망을 이기지 못하고 그녀는 장에게 이끌린다. 또 그녀의 갈망은 장의 두손이 그녀의 목을 조르게끔 한다. 그녀는 원하면서도 원하지 않는 상태가 된다. 그 결핍을 치유하기 위해 마쓰코는 닥터정을 찾아간다.
작가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캐내고 싶어 책을 읽으면서 많은 메모를 했지만 다 읽은 지금 문장이 끝나기가 무섭게 생기던 수많은 궁금증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듯해 모두 버렸다. 다른 유전자를 갖고 있는 이방인들, 서로가 이방인이 된 이방인들. 섞이지 않기 위한 경계심과 그 잔혹함을 말하고 싶은 건지, 인간의 가학적인 면과 피학적인 면을 말하고 싶은 건지, 인간의 정체성이란 어디에서 오는가 화두를 던지고 싶은 건지, 결핍에 관해서 말하고 싶은 건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어쩌면 이 들을 말하고 싶었는지도, 아니면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내 그릇이 이것밖에 되질 않아 모를 수도 있다. 참으로 알쏭달쏭하다.
눈꺼풀 같이 얇은 창호지에 대한 이미지의 묘사가 마음에 들었다. 나는 항상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는 아침에 개운하게 기지개를 피는 로망이 있다. 햇살은 금빛으로 부드럽게 부서지고 서늘한 바람에 커튼이 살랑인다. 밖은 찻소리나 말소리가 들리지 않고 알 수 없는 새만이 작은 소리로 지저귄다. 이런 아침이 창호지에 투영되어서 기분이 좋았다. 내가 원하는 아침은 아마도 창호지문이 있으면 더 좋을 것이다. 하지만 묘사가 너무 도에 지나쳐서 작가마저도 자신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묘사가 계속 되면 더 이상 참신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주인공들의 성애 장면은 아름답지도 않고 그렇다고 현실적이지도 않아서 전혀 에로틱하지 않았다. 그러니 손목을 간질이거나 목덜미가 팔딱거리는 축축한 분위기를 원하는 분들은 불감증을 해소하기 위해 섣불리 이 책을 선택하면 안 된다. 묘사가 마치 영화 형사를 볼 때의 느낌이었다. 강동원이 주연이었던 형사는 영상은 아름답지만 너무 큰 괴리가 있어서 크게 감흥이 없었다. 또 영상미만 주구장창 추구하여 지루하기까지 하였다. 책 초반의 묘사는 단편소설에 더 어울릴 듯하다. 다행히 중반에 가면서 군더더기 같은 묘사가 깔끔해진 느낌이어서 글에 집중할 수 있었다. 작가가 계속 내게 수수께끼를 냈다. 그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초반에 늘어지는 묘사를 지나쳐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궁금증을 자아낼 수 있는 건 작가로서 큰 장점이다. 지나친 묘사를 줄인다면 더 좋은 소설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장이 그렇게 된 이유에는 결핍으로 점철된 지난 역사가 있다. 현실적이지 않은 장의 집에서 여자들은 홀린 듯 장에게 목을 내어 준다. 여자들은 어째서 자신들을 희생자가 되도록 내버려 두었을까. 그저 홀려서 그랬다는 건 빈약한 이유다. 장의 결핍이 그녀들의 결핍을 일깨워 불러들였는지도 모른다. 이게 아니라면 아마도 그건 장의 어머니의 저주일 것이다. 그녀의 원한이 집에 내려앉아 장을 조종했는지도 모른다. 부모의 사랑과 방관은 장에게 결국 저주일터이니. 그 역사는 책의 이야기에는 꼭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사람이 잔혹해 진 건 꼭 가정에 문제가 있어서일까. 사람은 태생적으로 학대 본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운 아기라는 말이나 초등학생이 좋아하는 여자에게 짓궂은 장난을 치는 것도 원시부터 내려오는 가학의 DNA의 영향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제목에 대해서 생각해봤다. 네 가지 비밀은 책의 주인공인 마르셀, 닥터 정, 정, 마쓰코의 숨기고 싶은 어두운 면을 말한다. 나는 미국드라마를 좋아하는데 미국드라마의 주인공들은 무슨 이유였던 간에 가까운 사람이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건 무슨 큰 잘못을 하는 마냥 군다. 나는 좀처럼 이해가 되질 않는다. 비밀은 나만의 것이다. 세상에 내놓을 판단은 오롯이 스스로의 몫이다. 가까운 사람이라고 비밀을 캐물을 권리가 주어지는 건 아니다. 어두운 비밀은 또 다른 말로는 상처라고 부를 수 있다. 각각 다른 생채기를 갖고 있던 주인공들은 어쩌면 그 생채기를 덮기 위해 더 큰 상처를 스스로 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럼 한 가지 거짓말은 무얼까? 주인공 중 누군가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걸까. 주인공들이 종국에는 그렇게 된 이유가 거짓된 자기 위안 때문이라는 걸까. 아니면 작품을 관통해서 작가가 독자에게 보내는 하나의 거짓말이라는 걸까.
장은 닥터정이기도 하고 마르셀은 마쓰코이기도 했다. 서로가 다른 듯 닮아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부모와 같다. 그들이 아직도 내게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 네명이서 내 머릿속에서 떠들고 있어 글을 쓰는 지금도 마음이 어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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