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8월에 연극배우 손숙의 모노드라마 “셜리 발렌타인”을 봤다.
자녀를 둔 42세의 평범한 주부가 이혼한 친구의 제안으로 그리스 해변으로 떠나 자신의 삶을 뒤돌아본다는 내용으로 꿈을 잃고 사는 셜리의 인생을 통해 관객들에게 꿈이 무엇이었는지 물으며 삶을 충분히 즐기며 살아야 된다고 말하는 연극이었다.
연극을 보며 나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난 지금 잘 하고 있어!”하고 자신 있게 외쳤다.
올해로 결혼 7년차에 접어든 나는 6살.4살의 딸아이와 남편, 시어머님과 살며 내년에 이 세상에 태어날 또 다른 생명을 잉태하고 있는 평범하면서도 행복한 주부다. 그리고 바쁜 주부이다.
물론 외롭고 짜증나고 힘들 때도 있지만 그래도 행복하다고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즐겁게 지내고 있다.
나의 즐거움에는 고강복지회관에 소속된 “작은소리” 동아리의 몫이 크다. “작은소리”를 모르고 살았다면 얼마나 지루한 생활을 하고 있을까 상상도 안 된다.
“작은소리”를 통해 처음으로 내 마음에 새긴 말은 ‘나의 로프를 남편에게만 매지 말라’는 것이었다. 내용인 즉, 내 인생의 목적을 남편에게 혹은 자녀에게만 두지 말고 나의 취미를 찾고, 주변의 친구를 만들고, 배우고 싶었던 것을 배우고, 하고 싶은 일을 충실히 하면서 삶의 목적을 분산시키라는 것이다. 남편이나 자녀에 한정을 두어 로프를 매어두면 그 로프가 끈어졌을 때 충격이 크지만 여러 곳에 로프를 매어 두면 로프가 하나 끈어져도 그다지 충격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 다음으로 들은 말은 나 스스로 공부와 관련이 멀다고 느끼며 “빈 깡통이 요란한 소리가 난다”며 그림책과 동화에 대한 토론에 참여하기를 두려워하자 “빈 깡통이라고 표현을 해야 주변에서 채워 줄 수 있으니 절대 의기소침 할 필요 없는 곳이 작은소리”라고 했다.
이런 이야기들이 지금도 “작은소리” 활동을 하는 나의 생활태도에 중심이 되어 주고 있다.
고향 대구에서 신데렐라를 꿈꾸던 처녀시절을 보내고 백마 탄 왕자는 아니었지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콩까지를 씌운 남편을 따라 경기도 어디쯤에 있는 줄도 몰랐던 부천 고강본동에 정착을 하게 되었다.
이 곳에서 내가 유일하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남편뿐이었다. 하루 종일 집에서 밥을 먹고 나서 한 일이라고는 잠자고 책 읽고 TV만 보면서 남편이 직장에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다행히 함께 사시는 시어머님이 노인복지회관에 나가서 노래도 배우시고 운동도 하신 덕분에 그나마 숨통이 트였다. 지금은 두 손녀들 재롱 보는 것이 훨씬 즐겁다며 노인복지회관에는 안 나가시고 대신에 내가 고강복지회관으로 발길을 옮겼다.
첫 아이를 낳고 백일이 막 지났을 때 지역정보지를 통해 고강복지회관에서 ‘어린이 책을 읽은 어른들의 모임’이라는 내용으로 성인 동아리 회원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어떤 모임인지 궁금하여 전화를 했더니 우선 참석해 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처음으로 고강복지회관에 발을 들여 놓게 된 것이 2000년 11월 2일이었다. 그날은 잊혀지지 않는다. 동네 아줌마들끼리 모여 수다를 떠는 것이 아니라 ‘어린이들과 함께 보는 그림책 공부하기’라는 하나의 목표를 두고 모여 토론하는 시간이었다.
사실 그때는 모여 수다를 떨 동네 아줌마들도 만나지 못한 상태였기에 무척 무료한 생활을 할 때였다.
1999년에 먼저 공부를 시작한 1기모임이 따로 있었고, 그 뒤를 이어 2기가 새롭게 결성되는 찰나에 내가 들어가게 된 것이다.
매주 한 번씩 모여서 두 시간씩 하나의 주제를 두고 만남을 계속하는 사이에 큰 딸은 그림책과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물론 나도 그림책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림책에 대한 이론 공부가 끝나자 우리나라 작가에 대해 시대별로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토론을 했다. 옛이야기에 대한 공부도 병행해서 내 아이에게만 책을 읽어주고 이야기를 들려 줄 것이 아니라 주변의 아이들에게도 책을 읽어주고 옛이야기를 들려 줄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책 읽어 주는 방’이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고강복지회관 내의 도란도란 어린이 도서관에서 4년 전부터 매달 2회씩 “작은소리”회원들이 진행하고 있다.
우리 아이들이 선생님이 되어 앞에 서서 책 읽어주는 엄마를 얼마나 자랑스러워하는지 모른다. 기뻐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 계속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참 도란도란 어린이 도서관도 “작은소리”의 목소리로 만들어진 공간이다. 이제는 공립문고라는 근사한 타이틀도 붙었지만 “작은소리”가 작은 목소리로 큰 힘을 발휘한 자랑꺼리 중의 하나이다. 그 성과에 나도 함께 했다는 것이 도서관을 드나들 때 마다 얼마나 뿌듯한지 모른다.
1년에 한번 뿐이지만 “작은소리” 내에서 엄마가 만든 멀티동화극장을 준비하는 일도 즐겁다. 그림책을 스캔 뜨고, 배역을 정해서 연기 아닌 연기 연습도 하고, 어울리는 배경음악도 준비하고, 400석이나 되는 강당에서 아이들에게 보여줄 때는 “나도 이런 일을 할 수 있구나!”하며 회원들이 스스로 감동을 하기도 한다.
이렇듯 어린이 책과 함께 하는 엄마이기에 당연히 도서관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도서관 내의 각종 행사에 자원봉사를 많이 하고 있지만, 고강복지회관에서 활동하고 있는 동아리이기에 복지회관에서 필요로 하는 손길에도 적극적으로 활동을 하고 있다.
혼자서 하기에는 부담스럽고 선뜻 나서기 힘들지만 함께 뭉쳤기에 가능한 일들이 많이 있다. 경로식당도 “작은소리”가 생긴 이후 매달 둘째 주 화요일에 “작은소리” 회원들이 한번도 거르지 않고 참여하고 있는 봉사이다.
시어머님께 제대로 점심 진지를 차려드리지도 못하면서 경로식당에서 식판을 닦고 있는 내 모습에 모순을 느끼기도 했지만 그 덕분에 내가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고 또 내가 사회에 조금이나마 공헌하는 것이 아니냐며 스스로 자부심을 가져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11월이 되면 “작은소리”에 참여하여 활동한지 만 5년이 된다. 5년이란 시간이 짧은 시간은 아니었다. 어느 덧 백일이었던 지현이가 6살이 되었고, “작은소리” 안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있는 지윤이가 4살이고, 또 “작은소리”와 함께 자라날 셋째아이가 지금 나와 함께 숨 쉬고 있다.
나는 내 아이들이 “작은소리”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고스란히 받아들여 멋지고 참한 아이들이 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 물론 아이들 뒤에 서 있는 나의 미래도 당당하고 근사하리라 믿는다.
“작은소리”에서 아동도서에 대한 학습과 토론 활동이 출발점이 되어 따로 공부를 시작하여 지금은 독서지도사라는 명함도 갖게 되어 고강복지회관에서 초등학생들에게 독서지도를 할 수 있는 기회도 얻을 수 있었고, 더 깊이 공부하고 싶은 마음에 방송통신대 국어국문과에 편입하여 공부하고 있는 중이다.
나의 처음 사회생활은 돈을 벌기 위한 직장생활이었다면, 나의 두 번째 사회생활은 주변의 사람들과 서로 교감하고 나누고 사랑할 수 있는 고강복지회관에서 시작되었다. 어느 날 1기 선배님이 한참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정경숙씨는 고강복지회관 편 아니에요?” 하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 반대로 나는 고강복지회관이 내 편이라고 생각한다. 고강복지회관이 나에게 커갈 수 있는 길을 보여주었고 변화하라고 부채질을 했으니 말이다.
고강복지회관은 아마 복지회관 주변에 모여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편일 것이다. 복지회관이 주민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충분히 주지는 못하지만 필요하다고 외치면 필요한 것을 해결해주려고 관심을 가져주는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기 때문에 “작은소리”도 고강복지회관의 편이 되어 고강복지회관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생각하고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 안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내가 있다.
우리는 악어와 악어새처럼 공생하며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