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5월 어느 날...

 

서론

1. 서정주의 연혁 미당 서정주는 1915년 5월 18일 전북 고창에서 태어나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벽”이 당선되어 등단하여 그 해 11월 김동리, 함형수, 오장환 등과 함께 동인지 “시인부락”을 창간하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하여 2000년 12월 24일 타계할 때 까지 1,000편에 가까운 시를 남긴 시인으로서 그의 시세계의 폭넓음과 깊이로 해서 한국 현대시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로 손꼽힌다. 한때 친일성향의 ‘인문사’에서 발행한 잡지 “국민문학”의 편집 일을 보며 친일 시와 종군기 등을 썼고 1980년 전두환 군사정부를 찬양한 일이 있다. 그래서 우리 현대 시사에서 대표적인 원로 시인으로 대가(大家)를 이룬 시인으로 평가하기도 하고 일제와 독재 권력의 주변을 맴돈 훼절(毁節) 시인으로 낙인찍기도 한다. 2. 서정주의 생애 및 활동 서정주의 생애와 활동을 잠시 살펴보면 서정주는 일제 강점기인 1915년에 전북 고창군 부안면 선우리(속칭 질마재)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정은 이 당시 대표적인 민족 자본가이자 민족 지도자였던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 일가의 농토와 소작인을 관리하던 부친 덕분에 경제적인 곤란을 겪는 정도는 아니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일찍이 개명하여 근대 교육을 받았으나, 그의 어머니는 이런 근대와는 거리가 먼 ‘신라’와 같은 평범한 농사꾼이었다. 따라서 그는 근대적인 문물들이 다양한 형태로 자리 잡기 시작하는 도시적인 삶과 사람과 자연이 함께 어우러져서 살아가는 시골(질마재)의 원초적인 삶 사이에서 방황하는 인간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후 그는 일제 강점, 민족 해방, 6.25 전쟁, 분단된 국가, 독재 정권의 횡포, 민중들의 피맺힌 반독재 투쟁과 같은 민족사의 파란만장한 여러 가지 우여곡절들을 온몸으로 체험하였다. 그리고 이런 체험을 시라는 언어예술을 통하여 꾸준히 형상화하고 있으며, 이런 시적 체험은 다양한 시각에서 독자들에게 다가가고 있다.

본론

1. 서정주의 시세계 세단계로 구분 서정주의 시적 편력을 시기별로 구분하여 보면, 세 단계로 나눌 수가 있다. 먼저 보들레르와 니체, 희랍 신화의 영향 아래 자신의 온몸을 보여준 초기시와 해방 이후 순수시의 논리를 표방하면서 우리 민족의 전통과 정신의 세계를 추구하였던 중기시, 소박하고 진솔한 삶이 어우러진 교향의 이미지와 방황하는 떠돌이의 삶을 표현한 후기시로 나눌 수 있다. 초기에는 해방 전 창작으로 “화사집”이 대표적이며, 중기는 대략 두 번째 시집 “귀촉도”에서부터 “서정주 문학전집”까지, 후기는 “질마재 신화” 이후의 시 창작이 이에 속한다. 물론 이런 시기 구분은 각 시기의 특성과 해당 시집의 주조가 일치하느냐는 여부를 주목한 대략적인 나눔일 뿐이다.

2. 초기시의 특징 초기 단계의 특징으로는 첫 시집 “화사집(花蛇集)”(1941)에서부터 두 번째 시집 “귀촉도(歸蜀道)”(1948) 이전까지의 시기로, 정열적이고 관능적인 생명의식이 그 특징을 이룬다. “화사집”에 실린 “자화상”, “문둥이”, “화사”, “입맞춤” 등이 이 시기의 대표적인 시이다. “애비는 종이었다.”로 시작되는 “자화상”은 자신의 생애에 관한 전기적 사실을 시로 표현하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성년이 된 시의 제작 시점까지의 체험을 시적으로 형상화한 것으로, 자신의 가족사를 축약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을 통하여 자신의 내면과 외면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다. 즉 마름이었던 아버지와 늙은 할머니, 늘 가난하였던 어머니, 외할머니, 바다에 나갔다가 죽은 외할아버지, 그리고 그 외할아버지를 닮은 손톱이 까만 어머니의 아들인 ‘나’가 등장인물로 설정되고 있으며, 이런 인물들의 삶을 통하여 나의 모습을 뒤돌아보고 있다. 이처럼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냄으로써, 숨길 것이 하나도 없는 투명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서고 있다. “화사”에서의 “석유 먹은 듯...... 석유 먹은 듯...... 가쁜 숨결”과 ‘붉은’ 색조는 그의 보들레르적 관능과 원시적 생명력의 추구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렇듯 서정주의 초기시는 육체와 물질적 상징의 세계를 추구한 보들레르와 초극하는 인간상을 추구한 니체를 수용하여, 자신을 발가벗진 원초적인 상태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이 때 그의 시적 형상화의 근원으로 작용하는 것이 체험이며, 이 체험을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 곧바로 그의 시이기도 하다.

3. 중기시의 특징 중기 단계는 두 번째 시집 “귀촉도”에서 시집 “서정주 시선”(1956)이전까지의 시기로, 초기의 관능적인 세계를 벗어나 동양적인 내면과 감성의 세계에 대한 탐구를 보여준다. 특히 한국의 전통적 정서를 노래하게 된 과정이 이 시기에 해당된다. 특히 신라 연구의 차원에서 “삼국유사”를 읽으면서 ‘신라정신’과 불교적인 인연설이나 윤회설을 서정적인 언어와 시적 이미지화로 표현함으로써, 그가 해방 이후에 일관되게 주장한 순수시의 세계가 무엇인가를 실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과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시로는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 “꽃”, “민심”, “국화 옆에서”(경향신문 1947. 11. 9) 등이 있다. “국화옆에서”의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엣 /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서 선 /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격정과 관능, 절망과 분열의 몸과 마음을 쉬게 하고 안식처로서의 ‘꽃’과 ‘누님’의 발견은 곧 새로운 생명을 발견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시에서 보이는 시적 언어와 비유적 이미지의 효과적인 표현은 순수시의 실체를 보여줌은 물론, 시사적으로나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영예로운 찬사를 받기도 한다. 그리고 “귀촉도”(춘추 1943. 10). “춘향유문(春香遺文)”(민성 1948. 5)등에서와 같이 한국적 정서를 탐색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화사집”류의 열기가 완전히 가시지 않고 있으며, “무등에서”(현대공론 1954. 11). “산중문답(山中問答)”(현대문학 1955. 1) 등에서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관념적 달관의 경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생명의 발견과 달관, 동양적인 정관의 입장은 화해를 바탕으로 하며, 여기서의 화해는 사회현실과의 치열한 대결 끝에 얻어진 것이 아니라 개인의 내면적인 갈등과 회의를 거쳐 얻어진 것으로 이후의 시적 변모에 큰 영향을 준다.

4. 후기시의 특징 후기 단계는 시집 “신라초(新羅抄)”(1961)와 “동천(冬天)”(1969)이 나온 시기로, 신라의 정신과 새로운 동양사상의 탐구가 중심이 되며, 신라와 불교에서 구원의 등불을 발견한 서정주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다. 업보처럼 지고 있던 고향과 그의 고향 사람들에게서 그는 ‘신라적인 것’을 발견하고 있다. 그러나 이 단계에 이르면, 초기시와 같은 원초적인 죄의식을 드러내기보다는 ‘신화’라는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고 있으며, 이런 인간들의 삶에 대하여 시인의 따뜻한 애정을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지식인이 되어 시를 쓰는 자신에 비하여 훨씬 예술과 일치된 삶을 살고 있는 고향 사람들에게서 진솔함을 찾아내고 있다. 이제 그는 인생의 말년에 고향에 돌아와서 그 고향 사람들과 어울려서 살고 싶은 것이며, 같은 맥락에서 후기시에 보이는 방랑과 방황은 이런 고향 찾기의 시세계라고 할 수 있다. 후기시에서는 앞 시기에 얻어진 화해의 마음은 심화되어 전래의 샤머니즘뿐만 아니라, 노장사상과 유교까지 받아들이고 있으며 특히 불교의 윤회사상과 인연설에 열중하고 있다. 시집 “신라초”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통해 얻은 ‘신라적 체험’에 바탕을 주고 있으며, 신라를 하나의 역사적 공간이 아니라 화해에 의해 인간과 자연, 신화가 융합된 초월적 세계로 보았다. 시집 “동천”에서는 “신라초”에서 얻은 동양적 정신을 좀더 심화시켜 고전적인 절제의 경지를 보여주었는데, 이것은 지칠 줄 모르고 구도자의 행로를 걸어온 시인의 자신감과 원숙의 경지를 입증해주는 한편, 사회와 역사와 멀어진 개인적 구도라는 점에서 비현실적이고 추상적인 관념세계로의 도피, 형이상학으로의 도피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의 여섯 번째 시집 “절마재 신화”(1975)에서는 어린시절 고향 마을사람들과 풍속을 산문양식에 담아내 동양적 정신을 확대하여 ‘고향’을 깊이 있게 탐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 이후로도 정력적으로 창작활동에 전념해 “떠돌이의 시”(1976). “산시”(1991), “늙은 떠돌이의 시”(1993) 등의 시집을 냈다. 1983년과 1991년 2번에 걸쳐 민음사에서 “미당 서정주 시선집”을 펴냈다.

5. 서정주의 기타 활동영역 및 시인으로서의 위치 그밖에 “최체부의 군속지망”(조광 1943.9)을 비롯한 소설 2편과 평론집으로 “시창작교실”(1956), “시문학 개론”(1959), “한국의 현대시”(1969), “시문학 원론”(1983) 등을 펴냈지만 20권이 넘는 시집을 포함한 시전집의 분량에서도 알 수 있듯이 창작의 주류는 시였으며, 시를 통해 대중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1955년 아세아자유문학상, 1966년 대한민국 예술상을 받았으며, 타계 후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초기에는 인간 존재의 실상을 야수적 육성으로 노래한 시를 썼고 이어 동양적 신비의 세계를 민족적 정조와 율격으로 노래한 시를 발표했으며, 禪的 초월을 통한 영생주의의 시혼을 보이는 등 매우 다양한 경향의 시를 계속 발표하였다. 서정주는 한국 시의 새로운 경지를 연 시인이다. 여리고 감상적인 서정에서 과감히 탈피하여 본능적 야수성을 드러냄으로써 시단에 충격을 주었던 것이다. 시공을 초월하는 비약적 상상, 파괴적이고 낯선 이미지, 육정적 몸부림의 호흡, 정령주의라고 할 아니마(anima)의 신비로운 세계, 광기에 가까운 생명감의 표출 등 실로 놀라운 세계를 열었던 시인이다. 어떤 이는, 서정주의 위대함에는 그의 장수(長壽)가 한몫을 하고 있다고 했는데, 그는 다양한 시풍을 보여 주었을 뿐만 아니라 점진적 변모의 과정을 통해 한국 시의 새 장(場)을 열어 갔으며, 그럴 때마다 진경(珍景)을 보였다는 점에서 장수(長壽)도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사실이다. 서정주는 오랜 기간 동안 시작을 전개하였지만 그의 상상력의 한 가운데는 전통적이고 토속적인 사유체계의 뿌리가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 그는 정치적인 측면에서 지대한 과오를 범하기도 하였지만, 시의 영역에서는 한국 시사에서 보기 드물게 큰 성과를 이루어 냈다. 그의 시편 하나하나는 시적 긴장 속에 깊고 진한 향기를 내뿜고 있다.

 결론

1. 서정주의 시세계의 영역 미당 서정주의 시세계는 1936년의 등단부터 치더라도 60년이 넘는 세월에 걸쳐져 오는 동안 결코 단일하지는 않다. ‘생명파’라는 이름을 얻은 초기 시의 탐미적 관능의 세계와 불교로 대표되는 동양정신을 추구한 후기 시 사이에는 적지 않은 차이가 존재한다. 그럼에도 서정주의 시를 관류하는 공통점이자 그로 하여금 ‘시인 부락의 족장’이니 ‘하나의 정부’니 하는 별명을 듣게 한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말을 다루는 그의 천부적인 감각이라 해야 할 터이다. 그의 고향 전라도의 사투리를 적절하게 활용하는 미당 서정주의 시 언어는 민족어의 가능성을 한껏 키운 것으로 평가된다. 그는 30년대를 주름잡던 김기림과 이상의 모더니즘이나 초현실주의를 극복 대상으로 삼는 한편 20년대의 감상적이고 낭만적인 시적 경향과도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이 같은 시세계에 영향을 준 것은 고향의 원초적 서정과 외국의 문학세계였다. 이와 함께 광범위한 문학적 체험은 다양한 편력을 낳게 했다. 그는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출발해 짜라투스투라로 이어지는 신성과 초인정신에 관심을 가짐은 물론 보를레르와 이백으로부터는 인간의 질곡과 자연의 시심을 두루 섭렵했다. 고로 미당 서정주는 시세계의 폭 넓음과 깊이로 해서 한국 현대시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임에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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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2005-09-21 1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정주의 시세계를 3단계로 나뉘어 서술한 것입니다.
 

  2004년 10월 어느날...

 

“心想成事(심상성사)”라는 말이 있다. ‘마음속에 내가 품고 있으면 꼭 일이 성사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즉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고 보아야겠다.

  나의 꿈은 선생님이 되는 것이었다. 그 것도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는 것이었다.

  어릴 적부터 수도 없이 바뀌어 온 꿈들 속에서 항상 마음 한 곳에 자리 잡고 있던 선생님이라는 직업은 나를 피해갔다.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며 새로운 것에 도전하기 보다는 그 속에서 나름대로 의미를 찾고 안주하는 삶을 살았다.

  결혼이라는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맞아 부천이라는 곳에 살게 되었으나, 생면부지의 사람들 속에서 이방인처럼 겉돌다가 고강복지회관의 성인동아리 ‘작은 소리’라는 모임에 참석하면서 나의 작은 사회활동이 시작되었고, 이 곳에 아는 사람도 생기기 시작했다.

  ‘어린이 책을 함께 읽는 어른 모임’의 목적을 가지고 모이는 모임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아이들 책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어린이 책에 대한 이론서들도 접하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공부가 시작된 것이다.

  책과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마음이 예쁘다. 그리고 넉넉하다. 항상 맑고 깨끗한 마음과 더불어 살아가야 함을 느끼는 사람들과 만남이 지속되다보니 나도 모르게 그 예쁜 마음에 물들어 거창한 봉사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 손길이 필요한 이웃들과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그리고 내 아이만 잘 키운다고 우리 아이가 행복한 것이 아니라는 진리도 터득했다. 내 아이와 함께 살아갈 아이들이 모두 잘 커야 내 아이가 행복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내 아이만 바라보고 챙기던 마음이 이웃에 있는 아이들에게도 자연스럽게 눈길이 돌려졌다.

  그 즈음에 새로운 도전을 하여 독서지도사라는 자격증을 가지게 되었다. 정식 교사는 아니지만 나도 선생님이 된 것이다.

  꿈을 가진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당당히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내 마음 속 한가운데에 닭이 알을 품듯 그 소중한 꿈을 품고 살았기에 새로운 도전을 과감하게 시도할 수 있었고, 그리고 작은 성공을 이루어 설렘과 기대로 가득 찬 병아리 선생님이 된 것이다.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기회가 조금씩 많아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낯설고 어설프던 내 모습에 1년이라는 시간이 덧붙어서 조금씩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있다.

  선생님이라는 부르던 친구들 앞에서 어색해하던 내가 이제는 아줌마라고 부르는 것 보다 선생님이라고 불러주는 것을 더 즐기게 되었다. 너무 간사한가?

  그 간사한 마음에 책임을 지려고 나를 업그레이드 시키는 데 주저하지 않고 있다. 요즘아이들은 모두가 도시아이들이다. 그래서 자연이 어떻게 성장하고 변화하고 존재하는지 접할 기회가 거의 없다. 사실 나도 그 쪽으로는 문외한이었다. 그래서 무심히 넘기던 나무와 풀과 숲에 관심을 가지고 아이들에게 전해 주기 위해 자연생태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고 꾸준히 하고 있다. 그리고 경영학을 전공한 실력이다 보니 경제 관련 책은 쉽게 전할 수 있지만 기타의 도서들에 혹시나 부족한 점이 있을까 해서 국문학공부도 시작하여 하고 있다.

  나를 업그레이드 시키는데 관심을 가지니 세상이 달리 보이기 시작한다. 결혼과 아이가 나를 집이라는 울타리 속에 묶어 두는 존재라고 생각했었는데, 어느새 결혼이 나를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게 해 주고, 아이가 커 가면 엄마도 함께 커서 아이의 힘이 되어야 함을 알기에 나에게 더 많이 공부하라고 더 크게 발전하라고 떠미는 것을 느낀다. 

  집안일에 재주가 있다면 밥하고 요리하고 청소하는 것이 좋은 엄마의 역할로 충분하지만 집안일에 영 소질이 없는 나에게는 좋은 엄마가 못 된다는 딜레마에 빠지게 했다. 사실 지금 이순간도 그렇다. ‘나 엄마 맞아!’하는 생각이 스스로의 가슴을 콕콕 찌른다. 하지만 독서지도사라는 직업이 아이들에게 앞으로 좋은 엄마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 줄 것이라고 믿는다.

  내 가슴 속에 새롭게 품은 꿈은 내 아이와 함께 내 아이의 친구들과 함께 나도 커가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숨통을 튀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하나를 덧붙이면 책을 읽을 때 스트레스가 풀리는 나를 우리 아이들이 닮아 주기를 바란다.

  똑 같은 상황을 두고 보는 사람마다 모두 다르게 느낀다. 지금까지처럼 항상 밝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마음만은 잃어버리지 않기를 기원한다.

  그리고 아줌마로서 가장 소중한 꿈인 우리 가족 모두 건강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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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에 연극배우 손숙의 모노드라마 “셜리 발렌타인”을 봤다.

자녀를 둔 42세의 평범한 주부가 이혼한 친구의 제안으로 그리스 해변으로 떠나 자신의 삶을 뒤돌아본다는 내용으로 꿈을 잃고 사는 셜리의 인생을 통해 관객들에게 꿈이 무엇이었는지 물으며 삶을 충분히 즐기며 살아야 된다고 말하는 연극이었다.

연극을 보며 나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난 지금 잘 하고 있어!”하고 자신 있게 외쳤다.

올해로 결혼 7년차에 접어든 나는 6살.4살의 딸아이와 남편, 시어머님과 살며 내년에 이 세상에 태어날 또 다른 생명을 잉태하고 있는 평범하면서도 행복한 주부다. 그리고 바쁜 주부이다.

물론 외롭고 짜증나고 힘들 때도 있지만 그래도 행복하다고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즐겁게 지내고 있다.

나의 즐거움에는 고강복지회관에 소속된 “작은소리” 동아리의 몫이 크다. “작은소리”를 모르고 살았다면 얼마나 지루한 생활을 하고 있을까 상상도 안 된다.

“작은소리”를 통해 처음으로 내 마음에 새긴 말은 ‘나의 로프를 남편에게만 매지 말라’는 것이었다. 내용인 즉, 내 인생의 목적을 남편에게 혹은 자녀에게만 두지 말고 나의 취미를 찾고, 주변의 친구를 만들고, 배우고 싶었던 것을 배우고, 하고 싶은 일을 충실히 하면서 삶의 목적을 분산시키라는 것이다. 남편이나 자녀에 한정을 두어 로프를 매어두면 그 로프가 끈어졌을 때 충격이 크지만 여러 곳에 로프를 매어 두면 로프가 하나 끈어져도 그다지 충격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 다음으로 들은 말은 나 스스로 공부와 관련이 멀다고 느끼며 “빈 깡통이 요란한 소리가 난다”며 그림책과 동화에 대한 토론에 참여하기를 두려워하자 “빈 깡통이라고 표현을 해야 주변에서 채워 줄 수 있으니 절대 의기소침 할 필요 없는 곳이 작은소리”라고 했다.

이런 이야기들이 지금도 “작은소리” 활동을 하는 나의 생활태도에 중심이 되어 주고 있다.

고향 대구에서 신데렐라를 꿈꾸던 처녀시절을 보내고 백마 탄 왕자는 아니었지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콩까지를 씌운 남편을 따라 경기도 어디쯤에 있는 줄도 몰랐던 부천 고강본동에 정착을 하게 되었다.

이 곳에서 내가 유일하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남편뿐이었다. 하루 종일 집에서 밥을 먹고 나서 한 일이라고는 잠자고 책 읽고 TV만 보면서 남편이 직장에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다행히 함께 사시는 시어머님이 노인복지회관에 나가서 노래도 배우시고 운동도 하신 덕분에 그나마 숨통이 트였다. 지금은 두 손녀들 재롱 보는 것이 훨씬 즐겁다며 노인복지회관에는 안 나가시고 대신에 내가 고강복지회관으로 발길을 옮겼다.

첫 아이를 낳고 백일이 막 지났을 때 지역정보지를 통해 고강복지회관에서 ‘어린이 책을 읽은 어른들의 모임’이라는 내용으로 성인 동아리 회원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어떤 모임인지 궁금하여 전화를 했더니 우선 참석해 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처음으로 고강복지회관에 발을 들여 놓게 된 것이 2000년 11월 2일이었다. 그날은 잊혀지지 않는다. 동네 아줌마들끼리 모여 수다를 떠는 것이 아니라 ‘어린이들과 함께 보는 그림책 공부하기’라는 하나의 목표를 두고 모여 토론하는 시간이었다.

사실 그때는 모여 수다를 떨 동네 아줌마들도 만나지 못한 상태였기에 무척 무료한 생활을 할 때였다.

1999년에  먼저  공부를 시작한 1기모임이 따로 있었고, 그 뒤를 이어 2기가 새롭게 결성되는 찰나에 내가 들어가게 된 것이다.

매주 한 번씩 모여서 두 시간씩 하나의 주제를 두고 만남을 계속하는 사이에 큰 딸은 그림책과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물론 나도 그림책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림책에 대한 이론 공부가 끝나자 우리나라 작가에 대해 시대별로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토론을 했다. 옛이야기에 대한 공부도 병행해서 내 아이에게만 책을 읽어주고 이야기를 들려 줄 것이 아니라 주변의 아이들에게도 책을 읽어주고 옛이야기를 들려 줄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책 읽어 주는 방’이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고강복지회관 내의 도란도란 어린이 도서관에서 4년 전부터 매달 2회씩 “작은소리”회원들이 진행하고 있다.

우리 아이들이 선생님이 되어 앞에 서서 책 읽어주는 엄마를 얼마나 자랑스러워하는지 모른다. 기뻐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 계속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참 도란도란 어린이 도서관도 “작은소리”의 목소리로 만들어진 공간이다. 이제는 공립문고라는 근사한 타이틀도 붙었지만 “작은소리”가 작은 목소리로 큰 힘을 발휘한 자랑꺼리 중의 하나이다. 그 성과에 나도 함께 했다는 것이 도서관을 드나들 때 마다 얼마나 뿌듯한지 모른다.

1년에 한번 뿐이지만 “작은소리” 내에서 엄마가 만든 멀티동화극장을 준비하는 일도 즐겁다. 그림책을 스캔 뜨고, 배역을 정해서 연기 아닌 연기 연습도 하고, 어울리는 배경음악도 준비하고, 400석이나 되는 강당에서 아이들에게 보여줄 때는 “나도 이런 일을 할 수 있구나!”하며 회원들이 스스로 감동을 하기도 한다.

이렇듯 어린이 책과 함께 하는 엄마이기에 당연히 도서관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도서관 내의 각종 행사에 자원봉사를 많이 하고 있지만, 고강복지회관에서 활동하고 있는 동아리이기에 복지회관에서 필요로 하는 손길에도 적극적으로 활동을 하고 있다.

혼자서 하기에는 부담스럽고 선뜻 나서기 힘들지만 함께 뭉쳤기에 가능한 일들이 많이 있다. 경로식당도 “작은소리”가 생긴 이후 매달 둘째 주 화요일에 “작은소리” 회원들이 한번도 거르지 않고 참여하고 있는 봉사이다.

시어머님께 제대로 점심 진지를 차려드리지도 못하면서 경로식당에서 식판을 닦고 있는 내 모습에 모순을 느끼기도 했지만 그 덕분에 내가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고 또 내가 사회에 조금이나마 공헌하는 것이 아니냐며 스스로 자부심을 가져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11월이 되면 “작은소리”에 참여하여 활동한지 만 5년이 된다. 5년이란 시간이 짧은 시간은 아니었다. 어느 덧 백일이었던 지현이가 6살이 되었고, “작은소리” 안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있는 지윤이가 4살이고, 또 “작은소리”와 함께 자라날 셋째아이가 지금 나와 함께 숨 쉬고 있다.

나는 내 아이들이 “작은소리”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고스란히 받아들여 멋지고 참한 아이들이 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 물론 아이들 뒤에 서 있는 나의 미래도 당당하고 근사하리라 믿는다.

“작은소리”에서 아동도서에 대한 학습과 토론 활동이 출발점이 되어 따로 공부를 시작하여 지금은 독서지도사라는 명함도 갖게 되어 고강복지회관에서 초등학생들에게 독서지도를 할 수 있는 기회도 얻을 수 있었고, 더 깊이 공부하고 싶은 마음에 방송통신대 국어국문과에 편입하여 공부하고 있는 중이다.

나의 처음 사회생활은 돈을 벌기 위한 직장생활이었다면, 나의 두 번째 사회생활은 주변의 사람들과 서로 교감하고 나누고 사랑할 수 있는 고강복지회관에서 시작되었다. 어느 날 1기 선배님이 한참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정경숙씨는 고강복지회관 편 아니에요?” 하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 반대로 나는 고강복지회관이 내 편이라고 생각한다. 고강복지회관이 나에게 커갈 수 있는 길을 보여주었고 변화하라고 부채질을 했으니 말이다.

고강복지회관은 아마 복지회관 주변에 모여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편일 것이다. 복지회관이 주민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충분히 주지는 못하지만 필요하다고 외치면 필요한 것을 해결해주려고 관심을 가져주는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기 때문에 “작은소리”도 고강복지회관의 편이 되어 고강복지회관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생각하고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 안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내가 있다.

우리는 악어와 악어새처럼 공생하며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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