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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늑대 - 미네르바의 올빼미 02 ㅣ 미네르바의 올빼미 2
멜빈 버지스 지음, 유시주 옮김, 이선주 그림 / 푸른나무 / 2003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최후의 늑대(멜빈 버지스 작. 유시주 옮김. 이선주 그림/푸른나무 펴냄)'는 사람의 일을 대신 할 수 있는 로버트를 만들고, 사람에게 편리한 것들을 만들며 자연을 파괴하며, 세상의 모든 자연이 사람을 위해 존재하고 있다는 듯 행동하는 인간이라는 종족에 의해 희생당하여 이미 300년 전에 멸종이 된 영국 늑대들의 관점에서 쓰여진 작품이다.
작가는 이야기의 시간적 배경을 영국 늑대의 마지막 무리가 멸종되어 가는 과정을 현재의 시간대로 옮겨 그렸다. '최후의 늑대'를 통해서 인간을 대표하는 사냥꾼의 관점이 아닌 실버와 그레이컵이라는 영국 늑대 모자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끌어가며, 나쁜 선입관으로 표현되는 늑대라는 이미지의 오해를 바로 잡으려는 노력이 담겨있다.
또한 작가는 이야기 속에 나오는 벤이나 그의 부모 존 틸러 부부를 통해 최후의 늑대를 잡아서 전리품으로 삼으려는 잔인무도한 사냥꾼과는 달리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며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도 표현하고 있다.
희귀하거나 멸종위기에 놓인 생명체를 사냥하는 광적인 사냥꾼이 최초의 늑대를 발견한 뒤, 3년 간 남은 늑대를 차례로 죽여 가는 과정에서 실버가 이끄는 늑대 무리의 삶과 고통을 보여 줌으로 인간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늑대의 입장에서 삶을 바라보게 된다.
사냥꾼은 자신의 능력이 아닌 제니라는 충견을 이용해 늑대 무리의 냄새를 찾아서 사냥을 계속 해 나간다. 늑대무리들은 사냥꾼의 덫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한 마리씩 차례로 죽어간다. 어미 실버마져 죽었을 때 새끼 늑대 그레이컵은 필사적으로 도주하여 자기의 이름을 지어준 벤의 목장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보통의 개들처럼 사람들과 동화되지 못한다. 고고한 야생의 왕자처럼 자존심이 강한 늑대의 본성을 잊지 않는다. 어느 정도 자라자 그레이컵은 떠날 때가 된 것을 안다.
영국의 전역을 떠돌아다니지만 자신과 같은 냄새를 풍기는 종족을 만나지 못한다. 항상 혼자였고, 한 곳에 머무르지도 않았다. 스코틀랜드의 외딴 서해안에서 그레이컵은 다시 찾을 수 있으리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어떤 냄새와 마주쳤다. 그것은 사냥꾼의 냄새였다.
늑대를 다 죽였다고 생각했던 사냥꾼은 그레이컵의 출연에 당황했지만, 최후의 늑대를 잡을 수 있는 행운이라 여기지만, 쫓는 자와 쫓기는 자라는 입장이 완전히 뒤바꿔버린다. 그레이컵이 사냥꾼을 교묘하게 바로 뒤에서 쫓아가는 것이다.
나중에 사냥꾼이 그 사실을 눈치챘을 때는 이미 늦은 상황이다. 그레이컵을 피해 절벽에서 바다로 뛰어들어서도 삶을 열망하지만 사냥꾼은 늑대의 밥이 되느냐, 바다에 그대로 가라않느냐의 기로에 서서 선택의 의지도 없이 몸이 마비된 상태에서 파도에 몸을 맡기고 깊은 바다 속으로 가라않았다.
야생 동물이지만, 그들은 사교적이고 친근한 동물이다. 이 작품을 읽는 동안 그레이컵이 늑대로 인식되지 않았다. 단지 품위가 있고 단아하고 자존심 강한 생명체로 다가왔다. 그는 살아남았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늙을 것이고 모든 생명체가 그렇듯 종말을 맞이할 것이다. 이런 진실을 알면서도 작가와 같은 마음으로 늑대가 존재하길 기대해 본다.
산업시대를 거치며 찌든 환경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환경을 평가하는 척도가 되는 것은 그 속에 얼마나 다양한 생명체들이 함께 존재하는가 이다. 특정한 한가지의 종이 많다고 해서 좋은 것이 아니다. 다양한 종이 함께 공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평가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작가의 염원처럼 자연 속에서 인간과 함께 야생동물들 비롯한 모든 생명체가 함께 공존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