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의 향연 - 플라톤에서 움베르토 에코까지 한 권으로 즐기는 유쾌한 고전 여행
이진경.이정우.심경호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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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의 향연>은 한겨레 신문에서 연재된 글을 모아 낸 책이다. 신문의 지면에 실린 글들이므로  당연히 내용은 간략하다. 한 권의 고전을 소개하는 지면이 6페이지를 넘지 않는다.
 
얼마전에 들뢰즈의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에 대한 고병권 선생의 서평을 읽은 적이 있었다. 분량은 원고지 한 장 정도의 요악문이었는데 정말 탁월했다. <고전의 향연>의 이진경 선생이 쓴 푸코의 <광기의 역사>에 대한 소개글 역시 그에 못지 않다. 물론 책의 첫 장을 장식하는 이정우 선생의 <소크라테의 변론>에 대한 소개글 역시 탁월하기는 마찬가지다. 이 두 글은 서가에 꼽힌 채 먼지만 뒤집어 쓰고 있던 책을 다시 꺼내서 먼지를 털게 만들었다. ㅡ.ㅡ;

어쨌거나, 이진경 선생이 쓴 <광기의 역사>에 대한 글을 여기 조금만 소개해 볼까 한다. 

근대 이성은 왜 '광기'를 몰아냈는가?

세익스피어의 작품에는 빈번하게 광기가 등장한다. 악마적 힘에 사로잡힌 맥베스 부인의 광기, 질투에 눈먼 오셀로의 광기, 낙담한 리어 왕의 광기, 그리고 모르는 게 좋았을 진실을 본 햄릿의 광기 등등. 대부분 광기는 비극적 경험으로 다루어진다. 그것은 '정상인'들을, 혹은 그들의 질서를 위협하는 것이란 점에서 저 멀리 떼어두고픈 것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세상의 어떤 비밀을 담고 있거나 비밀을 엿본 데서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부왕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본 햄릿이 미쳐가듯이.
 
그러나 반대로 희극적인 광기들도 있다. 리어 왕의 어릿광대, 좀더 강하게는 소설과 세상을 하나의 연속체로 경험하는 돈키호테의 광기, 혹은 성직자들의 추한 비밀을 들추어내는 에라스무스의 '우신'(광인을 뜻하는 독일어 'Narr'는 바보란 뜻도 포함한다). 이들은 풍자를 통해서든, 아니면 풍자에 의해서든 가벼운 웃음을 수반하는 광기들이다. 

아마도 정반대처럼 보이는 이 두 가지 모습은 서구의 르네상스인들이 경험했던 광기의 두 형상일 것이다. 그렇지만 분명한 건 어느 경우든 광인들이 갇히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수용소라는 유형의 공간에도, 혹은 침묵이라는 무형의 공간에도 오히려 이 시기 광인은 '이동 공간의 포로'였다. '바보들의 배'를 타고 물 위를 순례하는, 아니면 어딘가 모를 곳에서 와서 모를 곳으로 가는, 혹은 말을 타고 방랑을 하는 이동이 광인들을 다루는 일반적 방식이었다. 

푸코가 '고전주의 시대'라고 부르는 17~18세기에 이르면 이들은 수용소에 갇히게 된다. 직역하면 '종합병원'이라고 불러야 할 구빈원이 대대적으로 만들어지는데, 광인들은 이제 부랑자, 빈민, 범죄자 등등과 더불어 감금된다. 물론 그중 일부는 시립병원에 수용되어 '치료'를 받게 되지만, 대부분은 도덕적인 죄악을 뒤집어쓰고 왕의 봉인장이나 치안 감독관의 요청, 혹은 친척이나 이웃 사람 등의 공모에 의해 갇히게 된다. 광기는 세상의 비밀이 아니라 인간 안에 존재하는 어떤 동물성과 연결되었고, 그것은 거꾸로 사람들에게 구경거리로 전시되기도 했다. 마치 동물처럼. 혹은 사람들의 즐거움을 야기하는 추문처럼.    


침묵의 '고고학'

18세기 말을 지나면서 감금된 자들의 대대적인 석방이 행해졌다. 물론 광인과 죄인들은 여전히 갇혀 있어야 했다. 광인과 함께 갇히는 '이중의 처벌'을 비난하는 죄인들로부터 광인은 분리되어 정신병원에 수용된다.

광기는 이제 이성 아닌 무엇이 아니라, 이제 막 이성의 문턱에 도달한, 그래서 한시바삐 인간이 되어야 할 어떤 것이 된다. 하지만 '인간'의 이름으로 행해진 진단이나 치료는 광기의 비밀을 알려는 어떤 의도와도 무관하게, 다만 광인들을 하나의 대상으로 삼아 정상적으로 행동하게 만드는 것만을 목표로 하는 관찰과 조처들의 집합이 된다. 고문이나 처벌 등을 통해서 그나마 행해지던 광기와의 대화는 끝나고, 보상과 처벌에 체제 안에 광인으로 하여금 스스로 알아서 정상적으로 행동하게 하려는 조련의 기술이 그것을 대신하게 된다.

이로써 광기는 절대적 침묵 속으로 들어간다. 의사가 광인을 대신해서 광기에 대해, 광인에 대해 말한다. 광인 역시 말하지만 그 말은 들리지 않는다. <터미네이너 2>의 시작 부분에서 정신병원에 갇힌 사라 코너는 미래 세계의 진실에 대해 말하지만, 그리고 또 다른 터미네이터가 올 테니 그것에 대비해야 한다고 반복해서 말하지만, 그 말은 누구의 귀에도 들리지 않는다. 그것은 '과대망상'이라고 불리는, 광기의 한 증상일 뿐인 것이다. 이성의 담지자만이, 의사나 간호사만이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광기를 서술하는 모든 말들은 이제 정신의학의 용어들을 빌려야 한다. 그 용어들로 자신을 말하려 하는 한, 이미 그것은 의학적 이성이 대신 말하는 광기, 그 이성의 안의 광기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된다. 광기는 이제 자신을 표현할 언어마저 잃어버린 것이다.

이처럼 절대적 침묵 속에 갇힌 광기로 하여금 말하게 하는 것, 침묵 속에서 광기를 '발굴' 하는 것, <광기의 역사>에서 푸코가 하고자 하는 건 바로 이것이다. 이런 자신의 작업을 그는 '침묵의 고고학'이라고 명명한다. 이를 통해 자신의 대립물을 침묵 속에 가두고 '타자화'하는(쉽게 말하면, 배제하고 억압하는) 이성의 권력이 드러난다. 이성은 논리적 자영성을 통해 설득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타자를 때론 수용소 안에, 때론 병원 안에, 혹은 거대한 침묵 속에 가두고 억압함으로써 작동한다는 것이다.

또한 여기서 푸코는 광기란 이성이라는 절대적 타당성의 바깥에 있는 무엇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다르게 다루어지고 다른 관계 속에서 다른 방식으로 말했던 것임을 보여주고자 한다. 또 다른 보편성을 주장하는 철학적 담론이 아니라, 이른바 '이성의 보편성'을 그것의 '타자'와 상이한 관계 속에 있음을 보여주는 '역사'의 형식으로 다루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이를 위해 푸코는 광기에 대한 네 가지 상이한 '의식'이 어떻게 상이한 배치를 만들면서 상이한 역사를 직조하는가를 드러내고자 한다.

그런데 여기서 '역사'란, 이성이 그 타자와 다른 관계 속으로, 다른 배치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음을 보여주려는 것이란 점에서, 미래의 시제를 갖는 희망의 이름이라고 해야 한다. 따라서 <광기의 역사>가 광기에 대한 무책임한 예찬이라는 오래된 비난은, 두께만큼이나 두터운 이 저작의 치밀한 진지함을 날려 보내기엔 너무 무력하고 거친 것이다.

물론 광기의 소리를 전하는 푸코 자신의 언어는 이성의 언어가 아니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이성의 언어를 통하지 않는, 광기의 언어 자체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자크 데리다의 반론으로 인해 유명해진 이 논란은, 이성과 광기의 대립이 역사적이라는 푸코의 주장과 역사 '이전의' 어떤 근본적인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는 데리다의 주장으로 소급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스웨덴 웁살라 대학의 방대한 자료들을 뒤져서 '발굴'해낸 광기의 역사를 꿰뚫어 뒤집기엔 데리다의 비판은 너무도 얇고 너무도 '철학적'이다.


'이성과 광기' , '동일자와 타자'에 대한 글도 있지만 여기서 접는다. 오랜만에 자판을 쳤더니 손등이 아프다.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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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폭의 계보 살림지식총서 28
방성수 지음 / 살림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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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100페이지 쯤 되는 소책자다. 그러므로 내용 역시 소략하다.


얼마전에 <조폭 연대기>(데이비드 사우스웰 지음)을 읽었는데 우리나라 조폭에 대한 내용은 없길래 뭔가 아쉽던 차에 그냥저냥 읽긴 읽었는데, 현대의 조폭들에게는 객관적인 시선을 잘 유지하던 작가가 해방 전후의 조폭이었던 '김두한'에 대해서는 그런 시선을 유지하지 못한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조폭에 대한 나의 생각은, "조폭은 깡패고 양아치며 사회의 악이다."라는 것이다. 

그런 나의 관점으로 볼 때 '김두한' 역시 그냥 '조폭이고 깡패며 양아치'다.
나와바리 다툼 중에 일본놈 몇명 때려준 걸 가지고 민족의 독립지사보다 더한 대접을 받는 거 우습지 않나?

영화나 드라마에서처럼 김두한이 멋진 중절모에 좋은 양복 입고, 삐까번쩍한 빠에서 호스티스 끼고 삐루 마시는 돈이 어디서 나왔는지 경제학적으로다가 한 번 접근해보면 그 이유는 명명백백하게 드러난다.

그 돈(김두한이 삐루 마시는)을 혹은 그 수입을 지가 일해서 혹은 농사지어서 또는 장사해서 벌어서 지출했겠는가?
 
그 돈, 그거 막말로 조선상인들한테서 삥 뜯은거다.

삥 뜯기는 조선상인들 입장에서 보자면, "이왕지사 삥 뜯기는 거, 그래도 왜놈들한테 뜯기는 거 보다는 같은 핏줄인 조선인 깡패한테 뜯기는 것이 낫지!" 라는 말로 위로할 수도 있겠으나,
내가 만약 당시 삥 뜯기는 조선상인이었다면, "왜놈들한테 나라 뺏긴 것도 억울하고 원통해서 딱 돌아가시기 일보 직전인데, 같은 조선놈들끼리 도와 주지는 못할 망정 삥을 뜯어? 왜놈들보다 더 징한 놈들이 바로 이놈들일세, 이놈들아 내 돈 내놔라! 네 놈들이 나한테서 삥 뜯어서 삐루 처 마시는 돈이면 만주벌판에서 추위에 곱아진 손 호호 불어 가면서 독립운동하는 독립군들한테 뜨뜻한 국밥 한 그릇 사 먹이고 남은 돈으로 털장갑 한 켤레 사 줄 수도 있는디. 아이고매 억울하고 분한 거~!!"

왜, 갑자기 전라도 사투리가?  ㅡ.ㅡ;;;


그리고 정말 웃긴 건 '김두한'이가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라고 주장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증거라고는 김두한의 말 밖에 없다.

그런데 나는 웬만해선 '조폭이나 깡패 혹은 양아치'들이 하는 말 안 믿는다.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일자무식의 양아치가 "나는 독립군 대장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요." 하는 말을 아무런 증거도 없이 믿으라고? 설사 부정할 수 없는 증거를 내어 놓는다고 해도 나는 못 믿겠다. 죽은 김좌진 장군이 살아 돌아와서 "이 놈이 내 자식 맞소~!" 하기 전까지는. 

그런데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아니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김두한의 말을 믿더군. 일말의 의심도 없이. 거참~!!

만의 하나 김두한이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 맞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호부(虎父) 밑에 견자 없다더니, 그 말도 다 개소리군."

이어서 말 하자면,

"아비는 조선 민중의 해방을 위해서 전 재산을 다 팔아 독립운동 하다가 어느 이름 모를 산기슭에 누웠는데, 아들은 조선 민중을 등 쳐 먹고 살았다니....,"

덧붙이자면,

"하긴, 그래도 안중근 의사의 아들보다는 낫잖아. 그놈은 이토 히로부미 아들한테 가서 제 애비가 죽을 죄를 지었다고 무릎꿇고 사죄까지 했는데, 참...., 그러고 보니 호부 밑에 견자 없다는 말은 참참.....,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얘기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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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론 - 제3판 개역본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강정인.김경희 옮김 / 까치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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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읽은 '군주론'은 삼성출판사에서 나온 것이었는데 읽기가 굉장히 버거웠었다.

까치출판사에서 강정인 교수와 김경희 선생의 공동번역으로 나온 이번 <군주론>은 술술 잘 읽힌다.
그만큼 번역이 잘 되었다는 얘기다.


1. 읽으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구절

새로운 형태의 제도를 만드는 것보다 더 어렵고 위험하며 성공하기 힘든 일은 없다는 점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구질서로부터 이익을 누리던 모든 사람들이 개혁자에게 적대적이 되는 반면,
새로운 질서로부터 이익을 누리게 될 사람들은 기껏해야 미온적인 지지자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미온적인 지지만 받는 이유는 잠재적 수혜자들이 한편으로 과거에 법을 일방적으로 전횡하던 적들을 두려워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회의적인 속성상 자신들의 눈으로 확고한 결과를 직접 보기 전에는 새로운 제도를 신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변화에 반대하는 세력들은 혁신자를 공격할 기회가 있으면 언제나 전력을 다하여 공격하는 데에 반해서,
그 지지자들은 오직 반신반의하며 행동할 뿐입니다. 따라서 개혁적인 군주와 미온적인 지지자들은 큰 위험에 처하게 마련입니다.


2. 셰익스피어의 어느 작품에서 읽었는 줄 착각하고 있었던 구절

운명은 가변적인데 인간은 유연성을 결여하고 자신의 방식을 고집하기 때문에, 인간의 처신 방법이 운명과 조화를 이루면 성공해서 행복하게 되고, 그렇지 못하면 실패해서 불행해진다고 결론짓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신중한 것보다는 과감한 것이 더 좋다고 분명히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운명은 여성이고 만약 당신이 그 여성을 손아귀에 넣고 싶어 한다면, 그녀를 거칠게 다루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녀가 냉정하고 계산적인 사람보다는 과단성 있게 행동하는 사람들에게 더욱 매력을 느낀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운명은 여성이므로 그녀는 항상 청년들에게 이끌립니다.
왜냐하면 청년들은 덜 신중하고, 보다 공격적이며, 그녀를 더욱 대담하게 다루고 제어하기 때문입니다.


1번을 읽은 분들은 저도 모르게 우리나라의 현실과 아주 딱 맞아 떨어진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2번을 읽은 분들은 저도 모르게 운명에의 도전 정신이 불끈하고 솟구칠 것이다.

나는 <군주론>을 읽으면서 위와 같은 생각이 들었다.
잔인한 현실을 깨닫고 그럼에도 운명에의 도전 의지가 꺾이지 않았다.
'그거면 된거다'라고 자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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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은 반역인가 - 우리 번역 문화에 대한 체험적 보고서
박상익 지음 / 푸른역사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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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번역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짚고 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우리나라의 번역 문제에 대해서 누구나 한 마디 이상의 불평,불만을 가지고 있을 줄 안다.
우리나라의 번역의 문제는 뭔가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한데, 그 근본적인 대책이란 것이 개인이나 일개 출판사가 나서서 해결 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기 때문에 귀착점은 국가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어느 세월에?

우리도 백여년 전의 일본처럼 국가 주도하에 '번역원'같은 기관을 세워 운영하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국가대계인지 아는 놈이 그래 정치한다고 껍죽대는 그 수많은 놈들 중에 한 놈도 없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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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 게임 - 마일즈 보르코시건 시리즈 2 행복한책읽기 SF 총서 13
로이스 맥마스터 부졸드 지음, 김상훈 옮김 / 행복한책읽기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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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일즈의 전쟁>을 읽은 지 하도 오래돼나서, 주인공 마일즈를 빼놓고는 누가 누군지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다가 300페이쯤 읽으니 하나 둘씩 기억이 나기 시작하는 신비로움을 경험했다. 

개인적인 소감은, 재밌긴 한데, 피튀기는 장면이 너무 없어서, 긴장감이 좀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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