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앞의 생 (특별판)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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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
대부분의 사람들은 로맹 가리 이전에 에밀 아자르를 읽었다고 하지만, 나는 로맹 가리를 먼저 읽고 에밀 아자르를 읽었다. 물론 그의 전체 작품을 다 읽은 건 아니고 몇몇 작품만을 읽었다. 로맹 가리의 작품 중 처음 읽은 것은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라는 단편인데 순전히 제목 때문에 읽었다. 서점에서 처음 이 소설(집)의 제목을 보았을 때 아니 제목의 활자가 처음 눈의 망막을 통해 뇌에 전기신호를 보냈을 때 도저히 책을 사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을만큼 매력적이었다. 아니 자극적이었다. 그때는 그랬다. 

'자기 앞의 생'이란 제목도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만큼은 아니지만 사람을 끌어당기는 인력이 있다. 매력이라고 해도 좋다. 내용 역시 말할 것도 없이 매혹적이다.


2.
책의 뒤에 로맹 가리의 유서라 할 수 있는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이 함께 실려 있는데, 읽어보면 로맹 가리 이 양반 '멋지다'란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그의 유서에 적힌 마지막 말처럼 그는 그의 생을 온전히 다 살아냈다. 그런 고로 그는 "멋지다" 
그가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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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신성가족 - 대한민국 사법 패밀리가 사는 법 희망제작소 프로젝트 우리시대 희망찾기 7
김두식 지음 / 창비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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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작년 구월 초순에 쓴 글이다.  

 

1.
전작 <헌법의 풍경>을 읽고나서, 아주 제대로 충격 받았더랬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주 마음의 각오를 단단히 하고 읽었다.
전작만한 충격파는 먹지 않았지만, 그래도 역시~!!  ㅡ.ㅡb

부제가 '대한민국 사법 패밀리가 사는 법'인데, 말 그대로 사법 패밀리들이 어떻게 성벽을 쌓고 그 속에서 지네들끼리만 해쳐먹는지, 그리고 그런 해쳐먹는 구조가 워낙에 일상사이다 보니까, 이것이 나쁜 것인지조차 모르는 판검사들을 보니 참 한심하다는 생각에 앞서, 썩어도 이렇게 썩었나! 하는 생각과 함께, 미래에 대한 기대를 접게 만든다. 저자는 그래도 희망은 있다고 외치지만 또 나 역시 저자의 그런 희망에 일면 동의하지만, 이 정권 아래서는 그런 희망의 꽃이 피기는 요원하고, 다음 정권때는......., 좀 더 좋은 방향으로 바뀌지 않을까하는 희망을 어거지로 가져본다.


2.
그리고 저자 역시 '대한민국 사법 패밀리의 신성가족'임을 무의식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곳이 있는 데.
책 322쪽에 이런 애기가 나온다.

[ 우선 시민들 입장에서는 판검사들도 자신과 똑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공부 잘한 사람들이라고 무조건 한수 접고 들어가는 습관도 바꾸어야 합니다. ........(중략) 일단 용감하게 "판사님, 저하고 얘기 좀 하시죠?", "검사님, 제 얘기도 좀 들어주시죠"라고 말을 붙이면 의외로 판검사들이 귀를 기울이는 모습을 발견할 겁니다.
그렇게 했더니 판검사들이 자꾸 무시한다고요? 그럴 때는 편지를 쓰십시오.
...............(중략) 법률용어를 못 쓰니까 수준이 낮을 수는 있어도 "진실이 들어 있고, 원통함이 들어 있고, 억울함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걸 판검사가 읽으면 반드시 먹혀들게 되어 있습니다.]

위에서 문제가 되는 문구는 법률용어를 못 쓰니까 수준이 낮을 수는 있어도라는 문구다.
저자가 앞에 있다면 물어 보고 싶다.
"아니, 법률용어가 일상용어보다 수준이 높다고 누가 그래요?"
"식민시대 때 왜놈들 말(한자로 된)을 그대로 우리말 독음으로 읽은 법률용어가, 그래서 말도 안 되는 비문 투성이인 법률용어가, 일상용어보다 수준이 높다고 누가 그래요?"

설사 법률용어가 수준이 높다면 그 수준을 정하는 근거는 무언가?  또 그 수준을 결정하는 건 누군가? 누가 그에게 그런 권리를 주었는가?

저자가 별 생각없이 한 말이겠지만, 그 말 속에서 저자 역시 신성가족의 일원임을 그리고 그 일원임을 자랑스러워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면 내가 과민한 걸까?

그래서일까? 저자가 '팔로역정, 법조인이 이겨내야 하는 여덟가지 유혹'편에서 첫 번째로 꼽은 것이 '새로운 언어로의 입문'인데, 이 새로운 언어 즉 법률용어에 대한 반성이 전혀 없다. 그리고 이 법률용어를 누구나 쉽게 그 뜻을 알수 있도록 고쳐나가야 하겠다는 의지도 찾아 볼 수 없으며, 다만 '새로운 언어'는 어렵고 이 언어로 씌어진 사법시험은 더 더 더 엄청 어렵다는 것을 강조하고, 나아가 이 언어로 소통하는 신성가족이 되는 것은 무지무지무지하게 어렵다는 것만을 강조한데 그친 것은 참 아쉬운 부분이다.

그렇지만, 저자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책들이 좀 더 많이많이 나와줬으면 좋겠다. 비록 책으로나마  신성가족의 성벽을 넘어서 소통을 하다보면, 후일, 얼굴을 마주하고 차 한잔 나누면서 얘기하는 날도 오지 않겠는가.  그 날이 오면 신성가족이란 높은 성벽도 사라지고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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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술보 2010-02-05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준이 낮다'는 건 저자의 인식이 아니고 법조인들이 그렇게 생각할 거라는 얘기 아닌가요?

녹차 2010-02-13 2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저자의 생각으로 읽었습니다. 위에도 썼지만 저자는 어려운(?,실상은 일본어 한자의 우리말 음독인) 법률용어에 대한 반성을 전혀 찾아 볼 수 없었으니까요.
 
공무도하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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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30일 나의 일기에서 발췌했다.  

 

책을 사 놓기는 이 주 전 쯤에 사 놓고 읽기는 어제 읽었다.

김훈 선생이 그리는 우리의 시대는 참 각박하고 삭막하며, 이 시대를 사는 인간들의 삶은 참 남루하고 비루하며 비참하기조차 하다.
책을 읽다보면 선생의 전작들이 우후죽순처럼 기억의 저편에서 떠오른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곳의 풍경이나 대상을 묘사할 때는 <풍경의 상처>로 대변되는 선생의 일련의 수필집들이 떠오르고, 소방관 박옥출은 중편 <빗살무늬토기의 추억>과 겹쳐지며 비닐하우스에 혼자사는 아이를 물어 죽인 개의 이야기를 할 때는 <개>가 악기와 노목희의 이야기는 <현의 노래>와 <언니의 폐경>이 후에의 손톱손질은 <화장>을 생각나게 한다. 그리고 문정수 기자는 선생의 젊은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한 점들 위에 서서 이 책을 볼 때 이 책은 김훈의 '똥'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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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에드워드 사이드 읽기
박홍규 지음 / 우물이있는집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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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책의 내용은 주로 사이드의 주저 <오리엔탈리즘>에 관한 얘기다. 박홍규 선생이 번역하기도 한 책이다.

촘스키의 책은 꽤 많이 번역되어 있지만, 사이드의 책은 번역된 것이 거의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


2.
아래는 책을 읽다가 메모 해 둔 것을 옮긴 것이다.


3.
국제법 : 제국주의의 수단으로 기능, 국제법 자체가 그런 필요에 의해 나왔으며, 침략 후 상대가 전혀 모르는 교묘한 언어로 조약이란 것(형편없이 불평등한)을 맺고, 군대를 진주시켜 법과 질서, 법의 지배를 미명으로 삼아 식민지를 유지하는 것이다.
이는 동양에 대한 서양침략의 합리화이며 서양의 우월성에 대한 합리화이다.

더불어 박홍규 선생의 전공이 바로 법(노동법)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구절이 눈에 띈다.

법학 자체가 '학문'이 아니라 권력의 하수인적 '기술', 또는 하수구와 같은 쓰레기 치우기에 불과하다는 주장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학문은 순수한가?


4.
근대 일본의 동양관, 조선관 :
일본 현대학문의 기초를 쌓았다는 후쿠자와 유키치는, 문명 = 유럽 = 진보를, 미개 = 아시아 = 정체와 대비하면서 아시아 정체의 원인을 서양과 같이 18세기 이래의 전제주의에서 구했다. 그러나 일본은 동양의 예외로 보면서 특히 조선을 극단적으로 폄하하는 비역사적인 용어를 구사하여 대비시켰다. 동시에 조선은 서양이 동양에 대해 그랬듯이 관능적인 대상으로 묘사되어 일본의 방탕한 무리들을 내보내는 장소, 도덕적인 본토에서는 불가능한 성적 체험의 유발지로 묘사하기도 했다.

* 언젠가 읽은 <밤의 일제 침략사>가 생각난다.


5.
"만일 학생들에게 회의를 갖게 할 수 없다면, 교사는 학생들을 결국 지식과 도덕에 예속되는 노예로 만드는 셈이다. 진정한 교육이란 권위자들이 말하는 것을 아무 여과없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의심하고 배움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6.
사이드는 서양이 만든 동양에 관한 모든 이야기가 예술과 학문으로 제도화되어 서양의 동양지배를 정당화하는 권력 장치로 기능하는 과정으로 오리엔탈리즘을 분석한 것이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서양과 동양이라는 구별 자체가 서양에서 만든 그러한 학문권력의 기초였다고 하는 점이다. 그것은 문명과 야만 선진과 후진이라는 구별과 마찬가지이다. 그런 구별 밑에는 학문과 권력의 야합이 있음을 사이드는 비판한다.


7.
원서 읽기를 학문 자체로 혼동하는, 그것이 바로 한국의 학문이다.

일본에서는 자연과학을 제외한 인문사회과학의 외국박사는 거의 인정되지 않는다. 사실상 거의 무의미한 것으로 인식된다.

*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반대다. 외국학교의 박사 소지자가 아니면 교수로 임용되기는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더구나 그 외국박사란 것도 거의 90퍼센트 이상이 미국 학교 박사학위다.


8.
오늘의 우리 대학에는 학문이 없다. 미국의 오리엔탈리즘에 세뇌되어 '미국유학 + 정경유착'으로 일관한 원로교수들에게 그 책임이 있다.


9.
<국화와 칼>(루스 베네딕트) :
기본적으로 자기의 이상화에 의한 다른 문화의 가치판단.
문화의 복합성과 역사성을 무시한 안이한 일반화, 에피소드주의, 개념규정의 애매함, 조사대상이 갖는 객관적인 특수성 무시 등 수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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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사랑하고 죽음을 생각하라 - 에리히 케스트너 평전
박홍규 지음 / 필맥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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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케스트너의 평전이다.

1.
오래전 그야말로 코흘리개(초등학교 3학년 쯤) 시절 읽은 <하늘을 나는 교실 (Das fliegende Klassenzimmer)>은 지금까지 내가 읽은 최고의 동화임은 물론이거니와 장르를 불문하고 내가 읽은 최고의 책 베스트 10을 꼽으면(실제로 꼽아보지는 않았다) 반드시 상위권에 들만한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저자 에리히 케스트터에 대해선 아는 것이 전무했다. 심지어 고교시절 국내에 광풍처럼 휘몰아 쳤던 시집 <마주보기>의 저자인지도 몰랐다. (내 책장에 꼽혀 있는 시집 <마주보기>는 초판 5쇄본인데 1988년 산(産)이다. 말 그대로 쌍팔년도 시집이다. 이 시집은 1988년도에 무려 100만 부 가까이 팔렸다. 상상이 가는가. 1980년 대 후반에 100만 부라니. 그것도 시집이. 80년 대나 90년 대 초반에는 시집이 몇십만 부씩 팔리는 수퍼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전 세계적으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기이한 현상이 국내에 심심찮게 벌어지곤 했었다. 과연 시인 공화국 '조선'의 맥을 잇는 후손으로 가히 부끄럽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다.)

시집 <마주보기>의 뒷편에 저자의 조그만 사진과 함께 실린 소개글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에리히 케스트너, 현대 독일을 대표하는 작가, 시인, 정신과 의사"
이따위 엉터리 소개글을 읽고 어찌 내 어린시절 <하늘을 나는 교실>의 작가와 동일 인물임을 알 수가 있었겠는가. 더구나 '정신과 의사'라니, 평생을 의학에 비판적이었으며 심지어는 결핵에 걸려 입원하라는 의사의 권유를 콧방귀로 응수하고 죽기 직전까지(75세로 영면) 위스키와 흡연을 즐긴 그가 '의사'라니. 맙소사. 이만하면 국내에 번역된 그의 시집의 번역 수준을 알만하지 않은가. 그러므로 내가 정신과 의사이자 시인인 에리히 케스트너와 <하늘을 나는 교실>과 <에밀과 탐정>을 지은 그 동화 작가가 동일인물 임을 인지하지 못하고 보내야 했던 몇 년의 세월에 대한 책임의 절반 쯤은 엉터리 소개글을 실은 출판사에 미룬다. 그러니 출판사여 혹시라도 창고에 쌓여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는 시집이 몇 권 있다면 착불이라도 좋으니......, 벌써 망했다면 미안하이.
어쨌거나, 이러저런 번역의 오류에도 불구하고 백만 부라니. 당시 우리의 시대 상황이 어떠했는지를 생각해보면 전혀 이해 불가능한 것만도 아니다. 그 격통의 시대에 아프지 않은 사람 누구이며, 누군들 위로받고 싶지 않았겠는가.
 

2.
에리히 케스트너는 그 공포의 나치시대에 망명하지 않고 그대로 독일에 남았다. 그리고 나치에 저항했다. 침묵함으로써. 12년 간. 그리고 살아남았다. 나치 시대에 독일에서 나치에 협조하지 않고 망명하지도 않고 살아남은 사람은 에리히 케스트너가 거의 유일하다고 한다.


3.
평전을 쓴 박홍규 선생은 에리히 케스트너의 시를 다시 번역하면서, 그의 시는 정신적으로 병든(그래서 정신병원이 성업하고 있는)현대인을 치료해주는 시가 아니라 정치적 참여 시라고 말한다.
"한국이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고? 아니다. '대포가 꽃피는 나라'(케스트너의 시)다. 우리나라는 독일 이상으로 병영의 나라, 군대의 나라다."


4.
삶을 사랑하고 죽음을 생각하라!
때가 오면 자랑스럽게 물러나라.
한 번은 살아야 한다,
그것이 제 1의 계율이고,
한 번만 살 수 있다,
그것이 제 2의 계율이다.

이 평전의 제목이기도 한 위의 시는  <두 가지 계율(Die zwei Gbote)>은 <간단 명료>라는 시집에 나오는 시이지, <어른들을 위한 케스트너 책>의 마지막에 나오는 시이기도 하다.
이 시를 읊으면서 나도 이제는 죽음에 대해 생각해야만 할 때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게 남은 죽음이 얼마나 되는지를 생각하고 나의 죽음을 생각하고 또 그것들이 가져 올 상실과 슬픔과 위안을 생각해야 할 때라는 것을.  

위의 시를 읊다보니 문득 성원근 시인의 시집<오, 희디흰 눈속 같은 세상>에 나오는 시 <탈주범의 모놀로그 11>이 생각나서 옮겨본다.

삶이 두렵다고 해서 죽음이 익숙해지는 것도
죽음이 두렵다고 해서 삶이 편안해지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낯설고 낯설음


5.
<천국보다 좋은 곳>

여러 사람을 모아놓고 염라대왕이 물었다.
"지옥에 가고 싶은 사람 손들어 보시오."
아무도 손들지 않았다.
"천국에 가고 싶은 사람은?"
모두 다 손들었다.
"지금 천국에 가고 싶은 사람?"
몇 사람이 손을 들었을까?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전 세계 기독교인들에게 들려주고픈 시다.
이 시를 읽을 때 리처드 도킨스가 <만들어진 신>에서 했던 얘기가 생각나서 혼자서 피식거리며 웃었다. 여름철 열무김치와 꽁보리밥 한 사발 배부르게 먹은 후 대청에 큰대자로 누워 솔솔 잠이 들 무렵 홑바지 틈으로 새는 방귀같은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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