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사랑하고 죽음을 생각하라 - 에리히 케스트너 평전
박홍규 지음 / 필맥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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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케스트너의 평전이다.

1.
오래전 그야말로 코흘리개(초등학교 3학년 쯤) 시절 읽은 <하늘을 나는 교실 (Das fliegende Klassenzimmer)>은 지금까지 내가 읽은 최고의 동화임은 물론이거니와 장르를 불문하고 내가 읽은 최고의 책 베스트 10을 꼽으면(실제로 꼽아보지는 않았다) 반드시 상위권에 들만한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저자 에리히 케스트터에 대해선 아는 것이 전무했다. 심지어 고교시절 국내에 광풍처럼 휘몰아 쳤던 시집 <마주보기>의 저자인지도 몰랐다. (내 책장에 꼽혀 있는 시집 <마주보기>는 초판 5쇄본인데 1988년 산(産)이다. 말 그대로 쌍팔년도 시집이다. 이 시집은 1988년도에 무려 100만 부 가까이 팔렸다. 상상이 가는가. 1980년 대 후반에 100만 부라니. 그것도 시집이. 80년 대나 90년 대 초반에는 시집이 몇십만 부씩 팔리는 수퍼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전 세계적으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기이한 현상이 국내에 심심찮게 벌어지곤 했었다. 과연 시인 공화국 '조선'의 맥을 잇는 후손으로 가히 부끄럽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다.)

시집 <마주보기>의 뒷편에 저자의 조그만 사진과 함께 실린 소개글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에리히 케스트너, 현대 독일을 대표하는 작가, 시인, 정신과 의사"
이따위 엉터리 소개글을 읽고 어찌 내 어린시절 <하늘을 나는 교실>의 작가와 동일 인물임을 알 수가 있었겠는가. 더구나 '정신과 의사'라니, 평생을 의학에 비판적이었으며 심지어는 결핵에 걸려 입원하라는 의사의 권유를 콧방귀로 응수하고 죽기 직전까지(75세로 영면) 위스키와 흡연을 즐긴 그가 '의사'라니. 맙소사. 이만하면 국내에 번역된 그의 시집의 번역 수준을 알만하지 않은가. 그러므로 내가 정신과 의사이자 시인인 에리히 케스트너와 <하늘을 나는 교실>과 <에밀과 탐정>을 지은 그 동화 작가가 동일인물 임을 인지하지 못하고 보내야 했던 몇 년의 세월에 대한 책임의 절반 쯤은 엉터리 소개글을 실은 출판사에 미룬다. 그러니 출판사여 혹시라도 창고에 쌓여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는 시집이 몇 권 있다면 착불이라도 좋으니......, 벌써 망했다면 미안하이.
어쨌거나, 이러저런 번역의 오류에도 불구하고 백만 부라니. 당시 우리의 시대 상황이 어떠했는지를 생각해보면 전혀 이해 불가능한 것만도 아니다. 그 격통의 시대에 아프지 않은 사람 누구이며, 누군들 위로받고 싶지 않았겠는가.
 

2.
에리히 케스트너는 그 공포의 나치시대에 망명하지 않고 그대로 독일에 남았다. 그리고 나치에 저항했다. 침묵함으로써. 12년 간. 그리고 살아남았다. 나치 시대에 독일에서 나치에 협조하지 않고 망명하지도 않고 살아남은 사람은 에리히 케스트너가 거의 유일하다고 한다.


3.
평전을 쓴 박홍규 선생은 에리히 케스트너의 시를 다시 번역하면서, 그의 시는 정신적으로 병든(그래서 정신병원이 성업하고 있는)현대인을 치료해주는 시가 아니라 정치적 참여 시라고 말한다.
"한국이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고? 아니다. '대포가 꽃피는 나라'(케스트너의 시)다. 우리나라는 독일 이상으로 병영의 나라, 군대의 나라다."


4.
삶을 사랑하고 죽음을 생각하라!
때가 오면 자랑스럽게 물러나라.
한 번은 살아야 한다,
그것이 제 1의 계율이고,
한 번만 살 수 있다,
그것이 제 2의 계율이다.

이 평전의 제목이기도 한 위의 시는  <두 가지 계율(Die zwei Gbote)>은 <간단 명료>라는 시집에 나오는 시이지, <어른들을 위한 케스트너 책>의 마지막에 나오는 시이기도 하다.
이 시를 읊으면서 나도 이제는 죽음에 대해 생각해야만 할 때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게 남은 죽음이 얼마나 되는지를 생각하고 나의 죽음을 생각하고 또 그것들이 가져 올 상실과 슬픔과 위안을 생각해야 할 때라는 것을.  

위의 시를 읊다보니 문득 성원근 시인의 시집<오, 희디흰 눈속 같은 세상>에 나오는 시 <탈주범의 모놀로그 11>이 생각나서 옮겨본다.

삶이 두렵다고 해서 죽음이 익숙해지는 것도
죽음이 두렵다고 해서 삶이 편안해지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낯설고 낯설음


5.
<천국보다 좋은 곳>

여러 사람을 모아놓고 염라대왕이 물었다.
"지옥에 가고 싶은 사람 손들어 보시오."
아무도 손들지 않았다.
"천국에 가고 싶은 사람은?"
모두 다 손들었다.
"지금 천국에 가고 싶은 사람?"
몇 사람이 손을 들었을까?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전 세계 기독교인들에게 들려주고픈 시다.
이 시를 읽을 때 리처드 도킨스가 <만들어진 신>에서 했던 얘기가 생각나서 혼자서 피식거리며 웃었다. 여름철 열무김치와 꽁보리밥 한 사발 배부르게 먹은 후 대청에 큰대자로 누워 솔솔 잠이 들 무렵 홑바지 틈으로 새는 방귀같은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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