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안인
우밍이 지음, 허유영 옮김 / 비채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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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작가의 글을 만난다는 것은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을 만나는 설레임과는 또 다른 설렘을 갖게 한다.

대만의 소설가 ‘우밍이’작가의 『복안인』도 그러한 설렘으로 읽게 되었다.

작가에 대해서 제대로 잘 알아보지 않고 신세계를 경험하듯 읽게 된 『복안인』은 어렵지 않다고 생각되면서 쉽지도 않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다.

현실 어디엔가 있을 법한 ‘와요와요’섬의 ‘아트리에’의 이야기와 ‘H시’로 불리는 곳의 ‘앨리스’와 주변인들의 이야기가 교차하며 이야기는 어우러진다.

현실에 있을 법 하기도 하지만, 동화에만 나올 것 같은 ‘와요와요’ 섬의 이야기와 차남이라는 이유로 가족과 부족 무리에서 떠나와야만 한 ‘아트리에’의 생(生과) 사(死)가 함께 하는 모험.

어느 날 갑자기 사고인지 실종인지 모르게 사라진 남편과 아들을 여전히 기억하고 기다리는 ‘앨리스’의 알 수 없는 나날들.

모든 이들의 만남이 되는 큰 사건(?)이 되는 ‘쓰레기 소용돌이’까지.


몽롱한 환상 속에 일어나는 일들로 가득한 『복안인』의 이야기들은 소설일까 다큐멘터리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게 한다.

오랜 시간 동안 인간들이 자연을 망가뜨리고 해하던 벌을 받게 된 것이라고 생각이 드는 ‘쓰레기 소용돌이’는 현실에도 곧 닥쳐올 재앙의 전조가 아닐까 싶기도 했다.

《일곱번째 시시드》라는 바를 운영하는 ‘하파이’의 이야기 또한 아주 약간의 충격을 주기도 했다.

중요 인물인 ‘다허’의 전 부인과 같은 ‘마사지사’라는 직업을 갖고 있었고, 여성 성노동자로서 지냈던 삶을 담담하게 서술한 점이 그랬다.


『복안인』은 많은 것에서 새로웠다.

인물들의 이름이나 부족, 그들의 생활환경과 배경은 물론이고 한 번이라도 들어보거나 생각해 본 적 없는 이야기들이 가득해서 완벽하게 적응하며 읽기가 쉽지는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이야기에 적응한 이후에는 그들의 감정에 빠르게 공감하며 푹 빠져서 읽을 수 있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았고 잘 알지 못하는 곳이기에 내게는 미지의 세계와 같은 ‘대만’이라는 곳이 궁금해지고, 대만의 이야기들이 궁금해지기도 했다.

‘우밍이’ 작가님의 다른 이야기들과도 만나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P15

섬은 크지 않았다. 보통 사람 걸음으로 아침 먹을 때 출발하면 점심 먹을 무렵이 조금 지나 한 바퀴를 다 돌 수 있었다. 섬이 크지 않기 때문에 섬사람들은 습관적으로 지금 ‘바다를 향해 있다’ 또는 ‘바다를 등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바다를 향하는 것과 등지는 것의 기준은 섬 한가운데 있는 야트막한 산이었다. 그들은 대화를 할 때는 바다를 향하고, 밥을 먹을 때는 바다를 등졌으며, 제사를 지낼 때는 바다를 향하고, 사랑을 나눌 때는 바다를 등졌다. 카방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함이었다. 와요와요 섬에는 추장이 없고 ‘노인’만 있다. 노인 중 가장 지혜로운 사람을 ‘바다를 닮은 노인’이라고 불렀다.


P36

거대한 진동음이 몇 분간 계속된 뒤 모든 것이 고요해졌다. 앨리스는 너무 지쳐 다시 잠이 들었다. 규칙적인 파도 소리에 눈을 떠보니 아직 날이 밝기 전이었다. 앨리스가 침대에서 일어나 창밖을 내다봤을 때, 바다 위 무인도에 서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멀리서 파도가 미세한 포말을 일으키며 고집스럽게 한 겹 한 겹 육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앨리스는 하루에 두 번씩 밀물에 감금됐다가 몇 시간 뒤 풀려났다. 만조 수위가 높은 사리 기간에는 바다가 조용히 집의 배수로를 애 돌아 포위한 뒤 후문 앞에 각양각색의 물체를 남기고 갔다.]


P164

다허는 리모컨을 찾아 텔레비전 볼륨을 낮추고 테이블에 들러붙은 신문을 펼쳤다가 (지금은 이런 곳에서만 신문을 구독한다) 조금 전 아나운서가 보도한 뉴스가 바로 얼마 전 신문의 1면 주요 뉴스라는 걸 알았다. 제목은 ‘위기! 쓰레기 소용돌이 타이완 덮친다’였다.

[타이완이 곧 쓰레기에 포위당할 것으로 보인다. 197년 해양학자 찰스 무어는 북태평양에서 세계 최대 쓰레기 더미라고 불릴 만한 광활한 면적의 플라스틱 폐기물을 발견했다. 일각에서는 이것을 쓰레기 섬 또는 쓰레기 소용돌이《Trash vortex》라고도 부른다. 쓰레기 소용돌이는 해저 해류의 영향으로 계속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는데, 미국 캘리포니아 해안 500해리 지점에서 처음 형성돼 지금은 일본 해안까지 확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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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론은 어쩌다
아밀(김지현) 지음 / 비채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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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밀》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는 소설가이자 번역가인 ‘김현아’ 작가의 작품을 처음 만나게 됐다.

『멜론은 어쩌다』는 여덟 편의 이야기로 구성된 ‘퀴어(?), SF소설’이 묶여있다.

‘비채 서포터즈’가 아니라면 내가 선뜻 선택하기 쉽지 않은 이야기들이라 큰 공감과 이해는 쉽지 않았다.

‘뱀파이어’와 함께 공존하는 사회나, 천국과 지옥에서 어린 마음으로만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이야기들은 동화인지 판타지인지 모를 만큼 흥미롭기도 하지만 큰 선입견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완벽한 공감을 하기 어려운 ‘퀴어’의 이야기들은 글쎄...

아직 내 마음은 크게 열려있지 않은가 싶기도 했다.

미래의 어느 날에는 있을 수 있을 ‘섹스 로봇’의 이야기는 그나마 현실적으로 이해를 해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하는...

이 또한 완벽하게 이해하거나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기는 힘들었다고 생각된다.

사람들의 입에 쉽게 오르내리거나, 선입견 없이 바라보기 어려운 이야기들을 너무 깊은 심각함이나 결코 가볍게만 써내려 가지 않았을 작가님의 필력에는 존경의 마음이 들기도 했다.

평범하지 않은 이들의 이야기가 평범한 이야기처럼 읽거나 들을 수 있을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게 도와주는 작품이 될 것 같다.

유전자 조작으로 최고 우등 DNA로 인간이 만들어지고 탄생과 성장하며 대중의 사랑을 받을 수 있게 한다는 《아이돌 하려고 태어난 애》의 이야기는 어쩌면 현실이 될 수 있는 미래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 감춰진 이야기가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장면은 영화 ‘식스센스’급의 반전의 묘미를 느끼기도 했다.

여덟 편의 이야기 모두 흥미롭고 매력적인 이야기로 가득하다.

재미가 없을 수 없고, 한 편 한 편을 읽을 때마다 이야기 속에 집중할 수 있게 해주는 몰입도를 높여주기도 한다.

생각지도 못했던 이야기들, 상상하지 못했던 이야기들로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내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라면, 주인공들과 같은 친구가 있다면 나는 어떤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을지에 대한 얕지 않은 고민의 시간까지도...


요즘에 들어 디스토피아적 소설을 많이 만나고 있다.

소설은 현실과 다른 이야기이지만, 현실에 기반을 두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그래서인지 미래가 생각보다 밝지 않기도 하고, ‘그 미래의 삶을 나는 살고 싶지 않다.’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도 모를 무서움을 느끼기 때문이 아닐까...

밝은 세상으로 가득한 미래를 꿈꾸는 이야기들이 많지 않다는 막연한 두려움을 느끼는 기존에 읽었던 ‘디스토피아 소설’과는 확연히 다른 『멜론은 어쩌다』는 ‘그럴 수도 있겠다.’라는 공감은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야기 하나하나에는 ‘완벽한 공감’을 못 하지만 책을 읽고 난 후에 느끼는 내 감정은 생각의 변화가 있었다고 말 할 수 있다.

어렵고, 심각하지만 생각보다 가볍게 읽을 수 있었던 『멜론은 어쩌다』를 주위 분들에게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다.


P9 

기영의 인생에서 미나는 유일한 레즈비언 친구였다. 유일한 뱀파이어 친구이기도 했다. 두 가지 다 친구로서는 비범한 요소이겠지만, 굳이 따지자면 기영에게는 전자를 받아들이는 과정이 더 어려웠다.

중학교 시절 단짝이었던 미나는 기영에게 커밍아웃과 동시에 사랑 고백을 했다. 라일락이 짙은 향기를 내뿜던 5월의 어느 날이었다.


P45 

저 여자가 분명히 자신을 거절할 것 같고, 거절하지 않는대도 비웃고 괴롭히고 상처 주고 배신하고 결국엔 버릴 것 같아서 무서웠다.

여자를 만나본 적도 없으면서 여자를 혐오하는 어떤 남자들하고는 달랐다. 다르다고 믿었다. 영민은 일단 여자였으니까. 그리고 여자를 만나본 적 있었다. 그게 문제였다. 영민의 첫사랑은 그를 철저하게 망가뜨렸다.


P213

나는 정부 공인 백마녀다. 마녀 학교에서 교육받고, 면허를 따고, 사업자등록증을 내고 정식으로 장사하는 마녀. 나는 학교에서 배운 대로 선하고 적법한 마법만 행한다. 사람들에게 기쁨과 행복과 건강을 선사하는 것이 내 역할이다.

요즘 나 같은 떳떳한 백마녀는 흔치 않다. 면허 없이, 또는 면허가 있으면서도 사악한 저주를 행하는 불법 흑마녀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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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앉는 프랜시스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김춘미 옮김 / 비채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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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앉는 프랜시스』로 ‘마쓰이에 마사시(まついえまさし, 松家仁之)’ 작가님의 작품과 처음 만나게 됐다.

이르지 않은 나이로 일본 문단에 화려하게 등장했다는 이야기로만 알고 있는 작가님의 신간과 만나게 되어 여름의 끝자락에 몽글몽글함으로 마음을 가득 채울 수 있었다.


소란한 도쿄를 뒤로 하고 홋카이도의 작음 마을에서 우편 배달일을 시작하게 된 서른다섯의 ‘무요 게이코’는 세상의 소리를 모은다는 ‘데라토미노 가즈히코’를 만나게 된다.

동네와는 조금 외떨어진 곳에 혼자 살고 있는 ‘가즈히코’와 《어른의 연애》를 하게 되면서 커져가는 사랑의 감정과 주위의 시선에 대한 버거움까지 ‘게이코’를 완벽한 편안함으로 이끌어주지는 않는다.

서로에 대해서 제대로 알아가기도 전에 ‘연애’부터 시작하게 되면서, 작은 마을의 특징(?)과도 같은 관심들이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게이코의 ‘쿨’함으로 별것 아닌 일들이 돼버린다.

그렇지만 왠지 모를 답답함이 남아있다.

옛사랑을 잊고, 현재의 사랑으로 새로운 삶에 열심히 부딪혀나가는 게이코의 일상이 어찌 보면 단조롭기도 하지만 그녀 나름의 평안함으로 만들어 나간다.


생각지도 못한 그의 ‘현재진행형이라고 할 수 있는 과거’마저 어쩜 저렇게 넘길 수 있을까 싶을 만큼 가볍게 넘어 가는 게이코의 연애관이나 사람에 대한, 사랑에 대한 마음가짐에 몇 번을 놀라기도 했다.

『가라앉는 프랜시스』의 ‘프랜시스’는 과연 누구일까가 처음부터 궁금했는데 매우 극적으로 알게 해주지 않아서 나도 모르게 “아…….” 정도로만 그친 것에 약간의 아쉬움이 있긴 하다.(아주 개인적인 취향입니다...)

게이코의 일상이나 우편배달을 시작한 동네의 풍경들은 눈앞에 보일 듯이 잔잔하게 읽을 수 있고, ‘게이코’와 ‘가즈히코’의 사랑은 회오리와 같이 사랑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래서인지 전혀 지루할 틈도 없고, 이들의 사랑에 어떤 일들이 더 일어나는지 알고 싶은 마음에 눈을 뗄 수 없기도 했다.


작가님께 조련 받는 착한 독서가의 모습으로 설레며 읽은 『가라앉는 프랜시스』,,,

10대, 20대를 지나 어른이 되어가며 영화나 드라마를 보며 현실에서는 만나기 어려운 사랑의 순간들을 보며 꿈꾸고 싶은 마음에 ‘사랑’과 ‘연애’ 이야기를 읽게 된다.

잊고 있던 풋풋한 마음을, 조금 더 어른이 된 성숙한 마음을 번갈아 가며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지는 것도 느끼곤 한다.

오랜만에 그런 감정으로 읽은 것 같다.

낯선 곳에서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으로 새 삶을 살아 보고 싶다는 소설 같은 마음이 아직도 내게 남아 있구나 싶은 마음으로...

‘게이코’와 ‘가즈히코’의 남은 이야기는 어떠할지, 행복으로만 가득한 그들의 사랑과 일상에 다시 한번 더 몽글한 마음을 더하고 싶다.

어릴 때부터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로 끝나는 동화를 보면서도 ‘어떻게?’라는 궁금증을 갖고 있던 터라 열어놓은 채 마무리가 되는 책을 보면 다음 이야기가 너무나 궁금해지고, 속편을 기다리는 편이다.

지금도 그런 마음이다.

작가님께 이런 소망의 마음이 닿기를 한동안 꿈꿔야겠다.


P40

그러고 보니, 아까 데라토미노가 말하던 ‘프랜시스’란 누구일까. 프랜시스는 남자 이름 아니었나, 게이코는 생각한다. 수염이 덥수룩한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그렇지만 《소공녀》의 프랜시스 호지슨 버넷은 여류 작가이다. ‘가오루薰’처럼 남자일 수도, 여자일 수도 있는 이름인가? 어느 쪽이든 안치나이 마을에 와서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다. 어쩌면 데라토미노는 오디오 마니아로, 연인이 외국 남자인가? 그러니까 이렇게 스스럼없이 여자인 나을 집으로 초대하는 건가? 마당의 빨랫줄에 걸린 하얀 세탁물이 정연하게 바람에 흔들리던 광경이 떠오른다. 혼자 사는 것치고는 숫자가 많았던 것 같은 생각이 든다.


P113

가즈히코의 집에 간 날은 마지막에 목욕을 한다. 게이코는 하얀 타일이 발린 청결한 공간을 좋아했다. 천천히 옷을 주워 입고, 떨어진 머리카락을 꼼꼼하게 줍는다. 샴푸 냄새를 풍기면서 한밤중에 집으로 돌아간다. 자기가 운전해서 돌아왔으니까 어쩔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지만, ‘데려다줄까?’라는 말을 해주지 않는 것이 게이코의 작은 불만이었다. 게이코는 충일된 감각에 깃든 약간의 허무함과 엔진 소리, 진동만을 동반한 채 헤드라이트가 비추는 숲길을 혼자 집으로 향한다.


P167

강가의 커다란 돌에 걸터앉았다. 여기에는 나만 있다 게이코는 끊임없이 흐르는 강물 속에서 움직이는 물고기의 모습을 보려고 눈에 주의를 기울였다. 눈은 아무래도 수면의 움직임에 이끌린다. 그래도 지지 않고 집중해서 응시한다. 차차 강바닥 부근에 돌이 늘어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움직이지 않는 돌.

게이코의 머리는 생각해야 할 일들로 꽉 차 있었다. 그렇지만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제 곧 날이 저물려고 한다. 강물이 까만색을 띠기 시작한다. 그 시커먼 물속 깊이 까만 그림자가 둘, 셋 가로질러 가는 것이 보인다.

물고기에게 게이코의 모습은 보이지 않을 것이다.

게이코에게도 지금의 자기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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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스틱 자개장 - 전대미문의 자개장 타임머신
박주원 지음 / 그롱시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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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스틱 자개장』은 제목부터 《판타스틱한 이야기》가 펼쳐질 것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10년째 작가 지망생인 ‘박자연’이 살고 있는 ‘양평 집’(어머니와 남동생과 함께 살고 있다)에는 아버지의 것일 수도 있고, 어머니의 것일 수 있는 ‘자개장’이 있다.

나의 어린 시절 기억에도 우리집에는 자개장이 있었다.

얼마 전 드라마 ‘폭삭 속았수다’의 주인공 집에도 자개장이 나온 것을 보았다.

‘자개장’은 예전에는 나름 부의 상징이며, 경제력의 훈장과도 같은 큰 의미가 있는 가구다.

요즘 시대에 남아있다면 무겁고 자리만 많이 차지하는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기도 하지만, 현재까지 갖고 있다면 자개장 주인에게는 우리가 짐작할 수 없는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큰 의미가 없고, 엄마에게 처분을 재촉하는 ‘자연’의 모습을 그래서 이해가 되기도 한다.

『판타스틱 자개장』은 그러한 ‘자연’에게 《판타스틱한 경험》을 하게 해준다.


번듯한 직장에 평범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린 여동생 ‘서연’에 비해 아직 아무런 성과 없이 마흔이 다 된 나이에도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자연’은 작가의 꿈을 버리지 못하며 살아간다. 

가족과도 그리 썩 좋지 않은 데다가 절연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아버지와의 관계는 회복하기 힘들어 보인다.

아버지가 쓰러지시고 혼수상태에 빠진 아버지를 돌보는 일마저 크게 마음이 쓰이지 않을 만큼 메마른 감정으로 가득하다.

어머니보다 먼저 주인인 자개장의 주인인 아버지의 혼수상태는 ‘자연’에게 시간을 거스르게 만드는 엄청난 경험을 하게 해준다.

어느 날 이었던 과거로 돌아가는 일들이 반복되며 아버지와의 건강을 회복시키려는 노력과, 관계 회복을 위해 ‘고군분투’하게 된다.

그동안 알지 못한 아버지의 생활과 생각을 알게 되고, 이해하게 되는 일들을 겪으며 잊고 있던 아버지의 사랑도 다시 기억한다.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나아진 관계와 자신의 미래를 위한 ‘자연’의 이야기는 ‘시간 여행’을 하는 이야기가 있는 여러 영화를 생각나게 했다.

시간을 거스르며 과거의 일들에 의해 현재가 바뀌기도 하는 영화 ‘나비 효과’와 ‘어바웃 타임(About Time)’이 많이 생각났다.

그래서인지 『판타스틱 자개장』도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진다면 정말 재미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좋아하는 배우 부녀인 ‘전무송’님과 ‘전현아’님의 추천 또한 책을 읽고 싶은 마음과 기대를 크게 하기도 했다.

살아가면서 가끔은 ‘그때’라는 과거로 돌아가서 현재를 바꾸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후회되는 일들이 생길 때일 것이다.

나에게는 ‘자연’의 ‘자개장’이 없기에 하루하루, 시간 시간을 후회 없이 살아야 한다는 마음이 더 커지기도 했다.

친구나 지인들과의 관계는 물론이고 가족에게도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지 않는 후회 없는 삶을 살아가도록 해야 한다는...

잘 지켜지지 않는 항상 하는 생각이지만...

『판타스틱 자개장』을 통해 또 한 번 더 나를 돌아보게 됐다.


P37

서랍을 탁 닫고 고개를 돌리다 문득 자개장에 시선이 꽂혔다. 엄마가 옷을 꺼내던 옷장 칸을 활짝 열었다. 고급스러운 모피 코트부터 색색이 다양한 여성 외투들이 가득 걸려 있었다. 옷들을 모두 한쪽으로 밀어붙이니 앉을 만한 공간이 생겼다.

바닥에 개어 놓은 바지와 셔츠들을 깔아뭉개며 벽에 기대앉았다. 그리고 문을 닫으려다 당황했다. 검게 옻칠이 된 문은 매끈 한데다, 붙어있는 거라곤 납작한 경첩뿐이라 잡을 곳이 없었다. 할 수 없이 모서리를 잡고 문을 닫다가 하마터면 문틈에 손가락을 찧을 뻔했다.

젠장! 낼모레 마흔을 앞두고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문을 꼭 닫자, 옷장 안은 칠흑처럼 캄캄했다. 마치 관 속에 누운 것 같기도 하고, 내 미래 같기도 했다. 

문득 뒷덜미에 살랑거리는 바람의 감촉이 느껴졌다. 하지만 밀폐된 공간에 바람이 들어올 리 없었다. 기분 탓인지도.

점차 아늑하고 몽롱한 느낌에 졸음이 밀려왔다. 잠들기 직전까지 떠올린 생각은 하나였다.

어제가 꿈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P39

그때 윙- 하는 진동음이 들렸다. 어제처럼 책상 위 수북한 책더미 아래에 휴대폰이 깔려 있었다.

어젯밤에 분명 침대 위에 올려뒀었는데?

휴대폰을 들여다본 난, 눈을 의심했다. 거미줄처럼 깨져 있어야 할 액정에 실금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멀쩡한 화면이 켜지자 난 비명을 지를 뻔했다.

3월 31일 금요일 오전 8시 30분

오늘은, 어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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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던 일을 멈추고 바닷속으로
조니 선 지음, 홍한결 옮김 / 비채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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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던 일을 멈추고 바닷속으로』라는 제목만으로 나의 ‘집콕, 방콕 휴가’에 찰떡인 책을 만나게 되었구나 싶었다.

쉬면서 느긋하고 한가롭게 읽을 수 있을 책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작가는 ‘쉼을 위한 쉬는 시간’을 마련해야만 하는 ‘번 아웃’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며 《쉼의 시간》을 만들어 간다.

나의 ‘쉼’과는 완전히 다른 작가의 ‘쉼의 시간’을 읽으면서 역시 ‘작가는 작가인가 보다.’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나라면 마냥 늘어지고 ‘넷플릭스’와 ‘유튜브’를 끼고 누워서 ‘뒹굴뒹굴’이 태반이었을 텐데 말이다.

작가 가족들의 소소한 이야기며 그림들이 참 행복하게 살았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구나 싶은 마음에 모든 글이 사랑스럽다 느껴졌다.

『하던 일을 멈추고 바닷속으로』는 나에게는 ‘잠수’의 의미로 다가왔지만, 작가에게는 ‘도약’의 의미가 있구나 싶었다.


중국계 캐나다인인 저자와 가족들의 이야기가 같은 아시아인의 정서를 건드려주고, 가족이 주는 안정감과 편안함을 느끼는 마음까지도 내게 와닿는 것 같았다.

가장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이 가장 힘들다고 하는 말에 공감하게 되는 요즘의 내 감정까지 건드려주는 따뜻함...

짧은 이야기, 조금 더 길어진 이야기인 평범한 일상의 이야기가 긴장감 가득하게 읽는 소설보다 더 재미있게 읽힐 줄은 몰랐다는 것이 내 솔직한 마음이다.


아주 가볍게 읽으려고 했던 『하던 일을 멈추고 바닷속으로』는 전혀 가볍지 않다.

책을 다 읽고, 마음이 가고 눈이 갔던 글을 다시 들춰보게 되기까지 했으니 책 속에 푹 빠져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번 아웃’이라고 낙담하거나 늘어지지 않을 힘과 마음을 기르고 싶다는 소망까지 생긴 것 같다.

더 튼튼하고 건강한 마음을 갖고 싶다는 마음까지도...

무엇을 할지 모를 시간이 생길 때면 그저 뒹굴뒹굴하기만 했던 나의 ‘쉼 시간’에 용기라는 힘을 주신 작가님의 글에 무한 감사를 드린다.


P10 

끊임없이 생산해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벗어나려고 했는데, 잠깐 일을 내려놓고, 일 걱정을 잊고 느긋이 쉬면서 충전할 방법을 찾고, 이런저런 생각에 자유롭게 빠지는 시간을 갖게 되자마자 그런 시간을 글로 남겨야겠다 싶어진 것이다. 기록해서 모아놓지 않으면 잊히고 사라질 것 같았다.

내가 쉬고 충전하고 카타르시스를 느껴봤자 그게 다른 사람에게 무슨 의미가 있냐는 물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아니, 더 솔직히 말하면 나 자신에게도 의미가 없는 것 같았다). 어쨌든 그래서 ‘휴식 시간’에 휴식을 한 게 아니라, 그 틈을 타 다른 일을 하려고 휴식 시간을 기다렸다.

그런 휴식을 통해 이 책이 탄생했다.


P189

나는 내가 평생 일을 한다는 게 당연하게 생각된다. 그러지 않는 세상은 상상하기 어렵다. 내가 아는 한 만국 공통어에 가장 가까운 것은 일이 아닐까 싶다. 항상 일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나를 짓눌러서 매사 우선순위가 거기에 좌우된다. 누구와 만나고 무엇을 하는 데 시간을 쓸지 하는 문제가 다 그렇다.

일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는 것도 상상하기 어렵다. 내가 일하지 않고도 잘 살아가는 장면이 그려지지 않는다. 그러니 자발적으로 선택한 활동에, 자발적으로 선택한 동료들과 함께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면서 작은 자유, 아니 눈곱만큼의 위안이라도 얻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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