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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 과정 Ⅰ

일반적으로 자기 수련을 말하거나 에니어그램을 말하거나 공통점이 있습니다. 자기를 발견하고, 자기를 수련하여 온전함을 지향하는 과정이 같습니다. 자기 관찰이나 자기 기억이 그 과정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언제 생각하여도 넘침이 없습니다. 그 까닭은 첫째, 에니어그램을 평면적으로나 정태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에니어그램은 영속적 운동성’이라 말하는 뜻을 되새겨야 합니다.

따라서 에니어그램을 공부하는 이들은 언제 어떤 경우라도 사람을 보든지 사물을 보든지 뭐를 봐도 고정 관념이나 고착된 시각을 벗어나야 합니다. 누구나 에니어그램을 통하여 자기 발견을 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성격 유형을 알았다고 해서, 그것을 고착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현재 에니어그램 성격 유형 아홉 가지 가운데서, 어느 하나를 자신의 유형으로 확인한 것은, 일차적으로 그것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과정에 일정 기간 동안 머무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그것과 자신을 ‘비동일시’하는 과정으로 이행하게 됩니다. 여기서 변화 과정이 중요합니다. 온전함을 향하여 나아갈 때, 현재 내가 발견한 나의 성격 유형은 한 작은 점으로 표시되고 있음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의 성격 유형의 점은 원의 둘레에서 9분의 1지점에 위치합니다. 이 점은 전체, 통합, 온전함의 회복을 향하여 들어가는 진입점입니다. 변화의 과정에서 우리는 습성으로 지니고 온 것 가운데 포기하며 내려놓을 것도 있고, 확인하며 끌어안을 잠재력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포기와 확인이 교차하며 이행하는 것 자체가 변화입니다.

통합의 방향으로 이행하여 건강하게 발달하는 것도 변화의 과정이지만, 비통합 내지는 퇴화의 방향으로 이행하며 불건강하게 퇴행하는 것 또한 변화의 과정입니다. 이렇듯이 변화 과정에는 통합과 퇴화, 긍정과 부정의 두 방향이 있습니다. 깨어 있는 의식으로 집중하며 의도적으로 수련함으로써 변화의 과정을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노력을 하지 않아도 변화는 계속 됩니다. 어떤 형태로든지 정지 상태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어쩐 방향을 지향하는 변화 과정을 선택할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인생을 과정으로 이해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의식적인 노력에 의한 변화도 있으나, 전혀 노력하지 않아도 변화는 필연적으로 옵니다. 예를 들자면, 어떻게 늙은 것인가를 생각하고 느끼며 의도적인 노력을 기울이면서 건강하게 아름답게 늙어 가는 과정의 변화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이 드는 것 자체를 의식하지도 않고 생각 없이 느낌도 없이 맥놓고 살면서 되는 대로 살아도 나이는 먹고 늙어가기 마련입니다. 다만 어떻게 나이 듦에 대하여 생각하며 변화 과정을 갈 것인가는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에니어그램을 배우는 사람들에게도 변화 과정은 선택에 좌우됩니다.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적극적인 변화와 소극적인 변화도 있습니다. 의도적인 변화도 있고 자연적인 변화도 있습니다. 자발적 고난과 필요한 고난을 견디며 이겨내는 변화도 있고, 불필요한 고난을 겪으며 떠밀리듯 겪는 변화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나이 들면서 화를 덜 낸다’며 변화를 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은 어찌 보면 자연적 변화의 결과라 할 것입니다. 그야말로 기가 빠져서 화를 덜 내는 것뿐이지, 격정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도 격정이 자극을 받거나 유발되면, 젊었을 때와 다름없이 화를 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도적이며 의식적인 수련에 의하지 않는 변화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따라서 변화는 격정에 초점을 맞춰서 이루어져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에니어그램 수련은 ‘강박 충동에서 관상 기도’로 가는 과정입니다. 에니어그램 변화 과정은 따지고 보면 죄악에서 덕목으로 변환하는 것입니다. 아홉 가지 성격 유형은 저마다 격정이라는 죄, 곧 죽음에 이르는 죄와 동일시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표면으로 나타날 때 강박 충동이 됩니다. 그러므로 나를 어떤 유형으로 파악할 때 고정 관념으로 또는 고착적으로 받아들이면, 에니어그램은 사실상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또 하나의 짐을 지우거나, 또 다른 가면 하나를 덧씌우는 결과에 다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에니어그램 유형을 이해한다는 것은 나 자신이나 남을 보면서 변화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제 눈 속에 들보는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과 희망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격정을 밝히 보면서 변화를 위한 수련에 집중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에니어그램 변화 과정은 포기할 것과 확인할 것을 집중하며 수련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의식적인 자기 관찰이 수행되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 습관적으로 격정이 나를 사로잡는지 관찰해야 합니다. 또 어떤 경우에 자신이 격정을 사로잡고 타성적인, 기계적인 언행을 자제하였든가를 생각하며 의식적인 자기 기억을 수행합니다. 이 때에 비로소 의식적인 자기 변화가 수행되는 것입니다.

월터 윙크는 ‘변화’를 위한 성서 연구에서 주창합니다. ‘개인과 사회와 역사의 변화로 이어지지 않는 성서 연구는 파산 선고되어 마땅하다. 왜냐하면, 변화로 이어지지 않는 성서 연구는 지적 허위성만 조장할 따름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에니어그램의 지식이 변화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이는 더 큰 굴레를 씌우는 결과에 빠지게 되고 허위성이나 위선에 빠지게 됩니다. 에니어그램 수련은 우리를 ‘자아의 감방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올바른 수련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단편적인 지식은 우리를 또 다른 형태의 감옥에다 가두는 결과가 됩니다.

티눈과 들보의 비유에서 볼 수 있듯이 격정의 속성은 명백히 보입니다. 다만 남의 눈에는 명백히 보이는데 비하여, 자신만이 못 보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래서 자기 관찰과 자기 기억이 의식적으로 수행되어야 하며, 그 때에만 자신의 격정이 보이게 됩니다. ‘제 눈의 들보를 깨닫는’ 의식의 눈을 뜨게 됩니다.

에니어그램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문제가 바로 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격정을 붙잡고 수련하기도 바쁠 터인데, 남의 격정을 가지고 말하는 경우를 흔히 봅니다. 실은 에니어그램 수련을 지도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남의 격정을 말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멘토링을 할 때, 깨어 있는 의식으로 감성과 지성과 행동의 균형과 조화 속에서 관찰하면서도, 뜨거운 동정심을 가지고, 상대방 유형의 덕목을 향하여 나갈 수 있는 가능성과 비전을 내다보면서 돕는 지혜와 분별력과 애정이 요청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남의 격정을 말하는 것이 비난이나 판단으로 전락하기 십상입니다. 누가 실수를 하거나 잘못을 했을 때, 그 사람이 의도적으로 잘못한 것이 아니라, 그 자신도 어쩔 수 없이 안고 고민하며 씨름하는 ‘모자람이나 흠이나 문제’ 때문에 빚어진 일이라 하면, 그것은 필경 그의 격정 때문에 빚어진 일이 분명합니다. 그런 경우라면, 비난이나 판단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될 뿐 아니라 오히려 격정을 더욱 불붙게 하는 결과가 됩니다. 변화에는 오히려 격정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통찰과 더불어 뜨거운 동정심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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