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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수를 죽이고 - 환몽 컬렉션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0
오쓰이치 외 지음, 김선영 옮김, 아다치 히로타카 / 비채 / 2018년 11월
평점 :
오쓰이치 외, 김선영 역, [메리 수를 죽이고], 비채, 2018.
Otsuichi, [MEARISU WO KOROSHITE](GENMU KOREKUSHON), 2016.
작년 말과 올해 초에 이어서 읽은 책이다. 오쓰이치는 일본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들어본 이름 중의 하나인데, 드디어 그를 만났다. 누군가는 특유의 잔혹함(?)이 없어서 오쓰이치가 맞느냐는 의문이 들었다고 한다. 단 한 권으로 작가를 평가할 수 없지만, 여기에는 따뜻함과 힐링이 있어서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듯하다. '환몽 컬렉션'이라는 부제와 함께 오쓰이치 외에 다른 이름이 보이는데, 같은 작가의 다른 필명이라고 한다. 이름을 다 기억하지 못하는 복잡함으로...;; 소설 [메리 수를 죽이고]는 7개의 단편 모음이다.
사랑스러운 원숭이의 일기
염소자리 친구
소년 무나카타와 만년필 사건
메리 수 죽이기
트랜스시버
어느 인쇄물의 행방
에바 마리 크로스
살면서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는 경험,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 있는가? '사랑스러운 원숭이의 일기'는 친구들과 약에 취해 버둥거리고 있을 때,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품으로 잉크병이 전해진다. 어린 시절에 훌쩍 사라진 아버지의 사연은 죽음조차도 무덤덤하였지만, 잉크를 가지고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사소한 것으로 시작된 변화와 성장의 기회였다. '메리 수 죽이기'는 현실의 도피처로 창작물의 세계에서 꿈꾸는 캐릭터를 만들어 낸다. 동아리 선배의 조언으로 자기 글을 쓰기 위해 메리 수를 죽이기 시작하는데, 부족한 현실을 채우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가상의 세계가 아니라 현실에서 행복을 찾는다. 메리 수는 일본에서 2차창작 관련 용어 중 하나로, 작가의 소망이 불쾌할 정도로 투영된 오리지널 캐릭터를 가리킨다.
나는 몇 년 전, 잉크병 뚜껑을 열고 글씨를 쓰고 싶어졌던 순간의 충동을 떠올렸다. 나는 잉크병 뚜껑을 열었다. 동시에 글씨를 쓰고 싶어졌다. 글을 풀어내고 싶어졌다. 글을 쓰고 싶다는 충동이 갑자기 생겨나다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어쩌면 성장이란 시간의 흐름이 가져오는 필연일지도 모른다.(p.23)
2차창작소설은 내게 인간관계 그 자체였다. 사이토 로빈슨이나 사이온지 선배, 신도 선배처럼 <천개의 문> 필자들과 화제를 공유하고, 난생처음으로 내가 속해도 될 장소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메리 수를 쫓아내야만 한다. 내 문장에서. 내 소설에서. 메리 수라 불리는 소녀, 그 개념적 존재를 죽여서 지워내지 않는 한, 나는 성장할 수 없다.(p.187)
학교 폭력과 따돌림의 문제, 피해 학생은 자살이 아닌 가해자를 살해한다. '염소자리 친구'는 살인자를 벽장 안에 숨겨주는데, 그동안 당한 아픔을 외면했기에 그 순간만큼은 함께하고 싶었나 보다. 모진 고교 생활에서는 희생양이 필요한 것일까? 살인사건의 진실은 다른 곳에 있다. '소년 무나카타와 만년필 사건'은 냄새나고 불우한 소년이 반에서 일어난 만년필 분실과 따돌림 사건을 한 방에 해결한다.
일 년에 한 번, 사제가 두 마리의 숫염소를 골라 한 마리를 신에게, 나머지 한 마리를 아사셀에게 바친다. 신에게 바친 염소는 속죄에 사용할 피를 얻기 위해 도살한다. 다른 한쪽, 아사셀에게 바친 염소는 사제가 모든 사람들의 죄를 고백한 뒤에 죄를 짊어지워 황야로 추방한다.(p.93)
무나카타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우리 학교로 전학을 왔는데 지금까지도 친구가 없다. 그가 미움을 받는 이유는 명확한데, 가까이 다가가면 악취가 나기 때문이다. 며칠씩 목욕을 안 하는지 머리카락은 기름으로 번들거리고 손톱 사이에는 새까만 때가 껴 있었다. 옷은 누레서 누가 봐도 며칠, 어쩌면 몇 주는 빨지 않은 것 같았다. 자리를 바꿀 때 그 옆에 앉게 된 여학생이 울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무나카타가 쩔쩔 매기도 했다.(p.130)
'트랜스시버'는 2011년 동일본대지진 쓰나미로 아내와 아이를 한꺼번에 잃은 남자의 그리움에 관해서이다. 술에 취해 잠들었을 때, 아들의 트랜스시버에서 아빠를 찾는 목소리가 들린다. 마음속에는 죽은 아내와 아들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어느 인쇄물의 행방'은 3D 프린터 기술의 미래를 말하는데, 기술적인 가능성 외에 많은 논란이 예상된다. '에바 마리 크로스'는 인체 악기가 등장하는데, 사라진 연인의 목소리가 분명하다.
지진과 쓰나미의 영향으로 노심이 융해된 후쿠시마의 원자력발전소에서 다량의 방사성 물질이 쏟아져 나왔다. 눈에도 보이지 않고, 인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명확하게 정의를 내리지 못한 채로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왔다. 막연하고 어렴풋한 불안을 끌어안은 채로, 뭐 괜찮겠지, 하고 암시를 걸며 공기를 마시고 있었다.
"경계란 항상 모호해요. 각자 자기만의 현실 인식에 따라 믿는 것을 스스로 정의해갈 수밖에 없죠."(p.224)
"그럼 책도 3D 프린터로 만들면 될 텐데."
그의 제안을 풀어 말하면 이러하다. 자택에 제본용 3D 프린터와 책의 재료를 보관해두고 읽고 싶은 책의 데이터를 다운로드한다. 전자책처럼 텍스트만 담긴 데이터가 아니라 장정이나 재질 등 단행본을 구성하는 모든 정보가 담긴 데이터다. 그것을 3D 프린터로 출력한다. 펄프 입자나 그와 비슷한 재료를 차곡차곡 겹쳐 활자가 인쇄된 종이로 묶은 책을 집 안에서 손쉽게 만든다는 뜻이다. 그 방법이라면 공장 생산으로는 실현할 수 없었던 복잡한 장정도 가능해진다. 전자서적과는 달리 묵직한 책으로 수중에 남을 것이다.(p.248)
"정말 있었어. 그걸 만져도 보았고, 품에 안아보기도 했네. 묘하게도 은근히 따스하고 마치 피가 통하는 것처럼 보드라웠어. 품에 안고 있으면 웅크린 아이를 안고 있는 것처럼 이상한 기분이 들었네.(p286)
오쓰이치라는 이름을 대표로 해서 모인 환몽 컬렉션은 종합선물세트를 떠오르게 한다. 성장동화, 판타지, 스릴러, 추리, SF, 호러, 괴담... 등 다양한 장르를 경험할 수 있다. 단편 소설인데도 짜임새 있는 구성으로 끝을 분명하게 매듭지어서 좋았다. 과연 작가의 상상력은 이런 것이구나... 라는 감탄이 나올 정도로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돋보이기도 했고, 현실의 아픔을 함께 이야기해서 따뜻함을 느낄 수 있다. 잉크병 하나로 변화와 성장을 시작하게 된다는 '사랑스러운 원숭이의 일기'가 가장 선명하게 떠오르는데, 현실의 나에게 가장 필요한 조언이 아닌가 싶어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