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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등록자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7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18년 10월
평점 :
히가시노 게이고, 민경욱 역, [미등록자], 비채, 2018.
Higashino Keigo, [PLATINUM DATA], 2010.
과거하고 비교해서 현대의 경찰 수사는 첨단의 방식으로 바뀌었다. 지문과 혈액형 대조에만 의존하던 과학수사는 CCTV 판독과 DNA 분석이라는 엄청난 발전을 이루었다. 그렇다면 미래에는 어떻게 변화하게 될까? 작가의 상상력은 'DNA 프로파일링'을 말하고 있는데, 사건 현장에서 발견한 체모를 가지고 직접 범인을 유추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등록된 DNA 데이터를 기반으로 친족 관계뿐만 아니라 얼굴, 신체 특징을 알 수 있다면... 점점 현실로 다가오는 우리 미래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여기에 어떤 문제는 없는 것일까? 영화 <플래티나 데이터>(2013.)의 원작,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미등록자]를 읽었다.
"내 상상은 여기부터야. 그녀가 진찰받은 병원이 본인에게 알리지 않고 무단으로 DNA 샘플을 자네 연구소에 제출하고 있다. 그 병원만이 아니라 몇몇 병원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만약 그렇다면 자네 연구소는 방대한 DNA 데이터를 갖추고 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위법행위이고, 거기 기초해 이뤄진 수사는 위법수사일 뿐이지. 그래서 나스 과장이 그렇게 말한 거야. 처음 용의자를 추리하는 과정에 문제가 있다고. 어때, 내 상상이?"(p.35)
DNA 프로파일링을 완성하려면, 전체 인구의 유전자 데이터를 축적하고 있어야 한다. 범죄 해결과 예방을 이유로 개인 정보와 사생활이 간섭받는다면, 아니 국가의 통제라고 해아 하나... 논란의 여지가 있다. 시험 단계에서 경찰은 비밀리에 불법적인 데이터를 구축하고, 국회의 법안 통과를 기다리고 있다. 세금 추징과 같은 국가의 정보 이용이고, 또 몇몇 사건을 해결하지만... 수사 1과 형사 아사마 레이지는 뭔가 거리낌을 떨쳐버릴 수 없다.
"유감스럽지만 현 단계의 데이터베이스에서 이번 샘플과 높은 일치율을 보이는 것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특수분석연구소에서는 이번 샘플을 'NF13'으로 등록했습니다."
"NF?" 아사마의 입에서 절로 질문이 튀어나왔다.
"NOT FOUND의 약칭입니다. 이번 건과 마찬가지로 일치 대상을 찾지 못한 경우가 이제까지 열두 건 있습니다. 이번이 열세 번 째입니다."
"뭐야. 도움이 안 되네."
"지난 열두 건 중 여덟 건이 데이터베이스가 확충되면서 해결되었습니다. NF13의 정체 판명되 시간문제입니다."
아사마가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 정말 그럴까."(p.45-46)
경찰청 특수분석 연구소 주임 분석원 가구라 류헤이는 DNA 정보 분석 시스템을 거의 완성해 놓았다. 그러나 한동안 사건 해결의 만능열쇠로 작용하던 DNA 프로파일링은 NF13... 열세 번째 NOT FOUND의 등장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살인 사건 현장에서 발견한 DNA는 어느 누구와도 일치하지 않는다. 모든 국민의 유전자 정보를 등록해 완벽하게 관리하는 일은 수학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주장과 천재 수학자의 프로그램 개발로 NF13의 정체 판명은 시간문제라는 의견 대립은 아주 팽팽하다.
"유전자는 인생을 결정하는 프로그램이다, 이게 자네의 지론이지."
"인생이라는 프로그램의 근간을 이룬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다양한 정보를 얻고, 때로는 수정합니다. 하지만 어떤 정보를 삶에 활용하고 어떤 정보를 버릴 것인지는 결국 본인에게 주어진 초기 프로그램에 달려 있습니다."
"그게 유전자다?"(p.60)
인간의 범죄는 결국 유전자의 지배를 받는 것일까? 범죄를 저지르는 마음의 움직임까지 유전자와 관련이 있다고 믿는 가구라는 시스템의 완성을 앞두고 살인 누명을 쓴다.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모발 한 가닥, 유전자 분석을 하니 자기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철저한 과학 신봉자였던 그는 자신이 만든 시스템 안에서 누군가가 쳐 놓은 덫에 걸리게 된 것이다. 누명을 벗고 시스템의 오류를 바로잡아야 한다.
"예술은 작가가 의식해서 만들어내는 게 아니다. 그 반대이다. 예술은 작가를 조종해 작품으로 이 세상에 나타난다. 작가는 노예다."(p.72)
도대체 인간과 기계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런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구성 물질이 다르다는 것 외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을까.
마음이란 존재할까. 그럼 마음은 무엇인가. 뇌라는 물질이 만들어 낸, 행동을 조절하는 프로그램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닐까. 그 증거로, 뇌가 고장 나면 정신에도 지장이 생긴다. 뇌 속 물질을 보충하면 우울증이 완화된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가구라는 자기 손을 살펴봤다. 몇 시간씩 며칠씩 계속 바라보며 장기와 뇌와 혈액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사색의 대상은 세포가 되었다.
얼마 후 그는 목표 지점에 도착했다. 그것이 유전자였다.(p.84)
"범인이 정액을 남긴 이유 말이야. 지금까지는 BNA 수사 시스템 망에 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범인이 단순히 욕망에 따라 저지른 짓이라고만 생각했어. 하지만 다른 의미가 있을 수도 있겠어. 정액을 남기면 경찰은 안심하고 초동수사를 게을리한다. 그 결과, DNA 수사 시스템뿐만 아니라 기존 수사망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p.260)
누명을 쓴 도망자와 뒤를 쫓는 경찰 이야기는 스릴러와 로드 무비를 연상하게 한다. 유전자 분석 외에 다중인격 그리고 뇌를 전기 자극하여 쾌감을 얻는 도구, 과학 수사의 명과 암은 다소 철학적이다. 예술의 영역까지 침범하는 기술 문명, 인간과 기계의 근본 차이에 관한 질문, 유전자의 영향력... 여기에서도 데카르트의 명언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의 의미를 떠오르게 한다. 자유로운 생각의 유뮤, 이것은 인간과 기계를 구분하는 척도이다.
어느 시대나 특권층은 존재하는 것인가 보다. 정치가와 고위직 사람들은 유전자 등록 시스템 안에서도 특별한 대우를 받는다. 혹시 모를 범죄와의 연결성을 근원부터 차단하기 위해... 그들은 그들만의 특권을 누리고 있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앞으로 일어날지도 모르는 사회 문제를 여실히 폭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