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자나무
아야세 마루 지음, 최고은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2월
평점 :
절판


아야세 마루, 최고은 역, [치자나무], 현대문학, 2021.

Ayase Maru, [KUCHINASHI], 2017.

  사랑, 이별, 그리움... 남녀 관계에 관한 7개의 단편이다. 작가의 상상력은 대단한데, 과감한 은유와 상징으로 판타지? 기담? 이세계물(異世界物)? 등을 보는 것 같다. 해석과 취향의 문제겠지만, 기발하면서 난해하다. 누군가는 숨은 의미 찾기를 즐길 수 있고, 나는 불명확성의 함정에서 허우적거렸다. 장편보다는 단편이 까다롭고, 단편보다는 시가 어렵다. 읽을 때는 흥미로운데, 읽은 후에는 미궁에 빠지는 이상한(?) 소설이다. 두 번을 읽었다.

  치자나무

  꽃벌레

  사랑의 스커트

  짐승들

  얇은 천

  가지와 여주

  산의 동창회

  일본식 정서와 감정은 충분한데, 색다른 분위기이다.

  "좌우지간 뭐라도 받아줘. 뭐든 좋으니까."

  "그럼 팔을 줘요."

  "팔? 내 팔?"

  "응. 잘 때 날 쓰다듬는 손길이 좋았거든."(p.11-12)

  팔을 돌려받은 부인은 미친 듯 피어난 치자꽃을 올려다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사랑이란 말이 없었으면 좋았을걸. 그랬으면 분명 용서할 수 있었을 텐데."(p.36-37)

  '치자나무'는, 배우 지망생과 스폰서로 만나 10년을 불륜으로 이어온 관계에서 남자는 이별을 통보한다. 그동안의 신세로 갖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하라는 남자의 말에 여자는 한쪽 팔을 달라고 한다. 따뜻한 손길을 간직하고 싶었을까? 남자는 거리낌 없이 팔을 떼어 주고 떠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의 부인이 팔을 찾으러 온다. 마음의 상처도 아픈 곳을 이렇게 쉽게 떼어낼 수 있다면... 공원 나무 사이에서 치자나무를 발견한다.

  나처럼 남자를 응시하는 주변 학생들은 여전히 인격을 지닌 살아 있는 인간이 아니라 과제의 대상으로서 관찰하는 싸늘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아무도 복사뼈에 피어난 꽃이 보이지 않는다는 듯, 담담하게 목탄을 움직이고 있다. 나 혼자만 고요히 타오르며, 인간의 몸에서 피어난 기괴한 꽃에 욕정을 느끼고 있었다. 초조해하며 남자의 뒷모습을 그려나갔다. 손끝을, 목덜미를, 복사뼈의 꽃을.(p.44-45)

  "너희는 가짜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아들이 잠든 후에야 간신히 입을 열었다. 나는 그런 유진이 가여웠다.

  "너희를 만날 때까지는 누군가를 좋아해본 적이 없었어. 분명 운명이다, 신이다, 그런 존재의 축복이라 마음 한구석에서 믿고 있었지."

  "나는 진짜 세상으로 돌아가야 해."

  "유진, 제발......"(p.68)

  꽃벌레는,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남자의 복사뼈에 핀 꽃과 여자의 눈꼬리에 핀 꽃으로 운명적 연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행복한 결혼생활... 그런데 그들의 눈에 보인 꽃의 정체는, 기생하는 벌레가 뇌를 조종하는 것이라는 연구가 발표된다. 여자는 현실에 만족하지만, 남자는 실체를 알기 위해 구충제를 복용한다. 조작된 세상에서의 행복인가? 진실한 세상에서의 외로움인가? 사랑의 부조리...

  그곳에는 지극히 평범한 여성이 서 있었다. 나이는 30대 중반쯤 될까. 살짝 눌린 반 단발머리에, 한눈에도 저렴하다는 걸 알 수 있는 펑퍼짐한 하얀 티셔츠와 린넨 바지, 눈썹만 그린 화장기 없는 둥근 얼굴, 굳이 칭찬하자면 토이푸들이나 포메라니안이 연상되는, 눈동자가 큰 눈은 귀여웠다. 하지만 미인이라 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녀의 발치에는 아마 두 살도 안 된 듯한, 연회색의 고급스러운 원피스와 분홍색 샌들 차림의 작은 여자아이가 오도카니 서 있었다. 여성은 나를 보고 안녕하세요, 하고 환하게 웃었다.(p.99)

  엄청난 사랑이었다. 강 건너에서 타오르는 해바라기밭, 건드려서는 안 되는 미술관의 명화. 나는 그저 한 관객으로서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 공기에 축축한 냄새가 섞이나 싶더니 이내 내리치듯 소나기가 쏟아졌다.(p.106-107)

  "어느 봄날 저녁에, 저기 공원 벤치에서 마치야 씨가 잠든 나나코를 안고 작은 소리로 노래하는 걸 보고, 아, 좋다, 생각했어요. 그 느낌을 오래도록 간직했고요. 여유롭고, 안심할 수 있고, 살짝 반짝이면서 시간이 멈춘 듯한, 그런 이미지를 쫓는 동안 완성된 옷이에요. 그러니까 감사의 표시로 받아주세요."(p.114)

  "......이 일을 하길 잘했어."

  "어?"

  "저 멀리 보이는 아름다운 꽃밭처럼, 닿을 수 없는 것만 좋아하게 되는 나는 평생 이렇게 살 줄 알았어. 하지만 좋아하는 것에 닿지 않고도 연결될 수 있는 방법은 분명 더 많겠지."(p.115-116)

  '사랑의 스커트'는, 출장 미용을 하러 간 곳에서 우연히 학창 시절에 짝사랑했던 남자를 만난다. 그는 유명 패션 디자이너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집주인 여자에게 빠져 있다. 이미 결혼해서 아이가 있는, 지극히 평범한 여자를 바라보는... 그녀를 위해 스커트를 만들어 주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한다. 달라진 표정과 집중력... 집주인 여자는 옷을 받고 아주 기뻐한다.

  불륜을 벌이고, 처자식을 외면하고, 유부녀를 스토킹하는 것에서 일본식 정서와 감정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그런데 헤어지는 연인에게 한쪽 팔을 떼어주고, 한눈에 반한 사랑은 뇌를 지배하는 기생충의 영향이라는 설정은 아주 놀라웠다. 짝사랑하는 이가 다른 이를 짝사랑하는 것은 살면서 수없이 경험했고, 또 그이의 짝사랑을 돕는 것은 나의 이야기였다...ㅜㅜ 사랑 아닌 사랑, 이별 아닌 이별, 그리움 아닌 그리움은 어지럽고 복잡하다!

  비교적 얇은 책이라서 가볍게 한 번, 미궁에 빠진 뒤 정신을 바짝 차리고 또 한 번을 읽었다. 연이어 두 번을 읽은 책은 거의 없는데, 그만큼 답답함(?)이 있었나 보다. 제158회 나오키상 후보에 올랐다고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아쿠타가와상이 어울린다는 생각이다. 과감한 은유와 상징은 미스터리라기보다 순문학에 가까운 느낌이다. 읽을수록 빠져드는 매력이 있지만, 여전히 오리무중인 기분을 지울 수 없다. 살면서 많이 사랑하고, 이별하고, 그리워했다면... 이해의 폭은 더 넓었겠지...;;

  뱀이 되는 여자가 그리 드문 건 아니다. 그 밖에도 뱀보다 수는 적지만, 큰 개, 호랑이, 지네나 거미 등 여자들은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했다. 변화한 여자들은 동이 트기 전, 아직 움직임이 둔한 남자들을 찾아가, 사랑하는 이를 붙잡아 머리부터 와그작와그작 잡아먹는다. 그런 짓을 하는 여자들은 대부분 스구리처럼 감정 기복이 심하고 공격적이며, 혼자만의 생각에 빠지는 타입의 여자가 많다. 나는 그런 맹렬한 욕구를 가져본 적이 없었다.(p.125-126)

  우리는 세상의 절반밖에 못 보는 거네. 작은딸의 목소리가 귓가에 되살아났다. 세상의 절반밖에 못 보더라도, 충만감을 느낄 수 있다면 그걸로 좋다. 모든 걸 알려고 드는 건, 꼭 사랑하는 사람을 못 믿는 것 같으니까.(p.140)

  '짐승들'은, 여자는 온몸에 비늘이 돋아 하얀 뱀으로 변해서 바람나 헤어진 연인을 잡아먹으러 간다. 멈출 수 없는 충동, 다른 여자를 만나 다정하게 구는 것을 참지 못한다고 한다. 일찍 남편하고 결혼해서 두 딸을 키우며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경험이다. 그런데 작은딸이 좋아하는 남자아이를 잡아먹고 울면서 돌아온다. 동이 트면 남자들이 활동하고, 해가 저물면 여자들이 움직이는 세상이다.

  "북쪽 아이들하고 같이 놀 수 있는 곳이 있어. 좋아하는 옷을 맘껏 갈아입힐 수도 있고. 요즘에는 뭘 만들어도 아이들은 입기 싫다고 하잖아. 옷을 갈아입히거나 화장을 시키면서 놀 수 있어. 시간 안에는 뭘 해도 되고. 안고 같이 잘 수도 있어."

  "어머, 좋은데?"

  "그렇게 천사 같은 아이들을 안아볼 수 있다고?"(p.161)

  "원래대로 돌아갈 수는 없단다."

  돌아간다는 건 그 생활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숨죽인 인형의 생활. 아들은 내가 거부하리라곤 상상도 못 했는지 황망한 얼굴로 입을 벌리고 있었다. 문득 소나기가 퍼부은 듯 마음이 젖어들었다.

  가엽기도 하지, 이 아이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다. 제 무구한 소원이 어째서 거부당하는 것인지. 자신이 당연하다 여기는 생활이, 나를 학대하는 일이라는 걸 모른다. 아버지를 두려워하고, 어머니에게 어리광을 부리는 정상적인 이 아이는 분명 평생 이해하지 못하리라.(p.186)

  '얇은 천'은, 어느 순간 남편과 아들로부터 무시와 외면을 당한 여자는 살아있는 인형 놀이를 하러 간다. 전쟁을 피해 북쪽에서 온 난민들 사이에는 천사 같은 아이가 있다. 그들은 생계를 위해 아르바이트를 한다. 약속된 시간, 비밀의 방에 들어가면 눈을 가린 소년이 있다. 간식을 먹이고, 옷을 만들어 입히고, 끌어안고 잠을 잔다... 여자는 그곳에서 자신이 가르치는 아이를 만난다.

  "사랑하니까, 내가 가진 건 다 줬어요. 남편뿐 아니라 노아에게도, 하루카에게도 다 줬죠. 날마다 밥을 차리고, 빨래를 하고, 다림질도 하고, 도시락도 쌌어요. 쌀을 씻어야 하니까 네일아트는 엄두도 못 냈어요. 고기도, 생선도 30년 동안 찌꺼기만 먹었어요. 잠자리도 피하지 않았죠. 좋은 아내, 좋은 엄마가 되려고 했어요. 다 줬어요. 정말로, 다."(p.208)

  젖어 있는 동안에는 염색했다는 실감이 들지 않았다.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드라이어로 뿌리부터 말리는 동안에 어머, 하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뭔가 다르다. 머리끝이 희미하게 보랏빛으로 변한 것뿐인데, 거울 속 여자는 여느 때보다 경박해 보였다. 밝고 차가운, 새로운 여자다.

  ...

  오우미 씨가 뭐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하나도 안 들렸다. 느닷없이 새 귀걸이를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머리카락 빛깔에 잘 어울리는 진주와 골드 이어링. 옷도 새로 사야지. 화려한 무늬의 원피스로.(p.216)

  '가지와 여주'는, 남편이 외도 상대와 함께 차를 타고 가다가 사고로 죽었다. 여자는 장례를 치르고, 시청으로 가서 혼인 관계를 정리한다. 지난 30년 동안 남편과 자식에게 해온 헌신의 끝이었다. 거울을 보니 뭔가 달라진 얼굴... 단골 미용실의 폐업으로 이발소에 가서 가지색으로 염색을 한다. 얻어온 여주로 요리를 하고... 새로운 여자로 홀로 선다.

  그래도 바로 거절하지 않은 건, 동창 중 절반 가까이 되는 여자아이들이 벌써 세 번째 임신을 맞이해 배에 알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모범생 무리에는 가장 친했던 고토도 끼어 있었다. 세 번의 산란을 끝낸 여자는 대부분 기운이 다해서 숨이 끊어진다. 이번이 친구들과 작별할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p.227-228)

  "알을 품는 건 즐거웠어?"

  내 물음에 고토는 큼지막한 꽃봉오리가 활짝 피듯 웃었다.

  "당연하지. 즐겁다는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어. 지금도 행복해."

  "알을 품는 것도 낳는 것도 내 눈에는 무척 힘들어 보이던데. 그렇지는 않았어?"

  남의 일이지만 오랫동안 의문으로 여겼던 일이다. 과격하게 반응할 것 같아서 다른 사람한테는 물어볼 수 없었다. 지금 고토라면 아무 함의도 없는 단순한 질문으로, 적당한 무게로 되받아칠 것 같았다.

  "몸은 힘들고 괴롭지만, 그만큼 즐거웠어. 봐, 힘들지만 즐거운 일도 있잖아. 그런 느낌이야."(p.251-252)

  '산의 동창회'는, 세 번의 산란을 끝내면 대부분의 여자는 기운이 다해 숨이 끊어진다. 가장 친했던 친구와 마지막 작별이 될 수 있기에 동창회에 참가한다. 사고를 당하고, 해수로 변하고, 수명을 다해 쇠약해진 소식... 산란을 경험하지 못한 여자는 친구의 마지막을 기록으로 남긴다. 임종을 지키고, 기록하고, 자고, 일어나고... 세상은 조금씩 변하고 그리고 동창들은 모두 죽었다.

  짐승으로 변하고, 산란해서 알을 품는 기묘한 이야기보다 은밀한 취미를 즐기고, 염색하고 요리하는 현실의 이야기가 더 와닿았다. 여기에서도 충동적 욕구, 은밀한 사생활, 가족의 해체라는 측면에서 일본식 정서와 감정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좋아하는 상대를 잡아먹고, 살아있는 인형 놀이를 하고, 목숨 건 산란을 한다는 설정은 매우 놀라웠다. 가지색으로 염색으로 하고, 새로운 요리를 익히며 다시 삶을 시작하는 중년 여자에게서는 희망을, 홀로 남아 모두가 떠나간 자리를 지키며 회상하는 여자에게서는 연민이 느껴진다. 나도 점점 나이들어 이런 때가 오겠지...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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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홍 나무 아래 긴다이치 고스케 시리즈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13년 11월
평점 :
품절


요코미조 세이시, 정명원 역, [백일홍 나무 아래], 시공사, 2013.

Yokomizo Seichi, [SATSUJINKI], 1976.

  요코미조 세이시는 일본 추리소설의 거장으로 국민 탐정 '긴다이치 코스케'가 등장하는 시리즈로 유명하다. 이것을 오마주한 것일까? [소년탐정 김전일](긴다이치 소년의 사건부)은 긴다이치 코스케의 외손자이고, 할아버지의 이름과 명예를 걸고 사건을 해결한다. 수많은 작품 중에서 초기작으로 분류되는 [백일홍 나무 아래]를 읽었다. 제목은 낭만적이지만, 태평양 전쟁 직후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 전후문학으로 폐허가 된 도시의 황폐함을 반영하고 있다. 4개의 단편 모음이다.

  살인귀

  흑난초 아가씨

  향수 동반자살

  백일홍 나무 아래

  현대의 소설하고 비교하면 여러 가지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이런 글이 모이고 쌓여서 오늘의 미스터리 왕국을 이룬 게 아닐까. 추리 작가의 등장, 괴짜 탐정의 활약, 허구와 현실을 오가는 구성, 깜짝 반전과 숨은 이야기... 등 현대 작가의 집필 방식은 여기에서 영향을 받은 게 아닌가 싶다.

  내가 추리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은 전쟁 전부터였는데 작가로서 아직 이름이 알려지기 전에 전쟁이 일어나 바로 전장에 소집되었다. 전쟁이 끝날 무렵 나는 조선 남쪽에 있어서 외지파견군 중에서는 가장 먼저 본토로 돌아올 수 있었다.

  돌아와 보니 양친도 형제도 죽고 집도 불타 없어져버렸다. 즉 나는 완전히 혼자, 그것도 무일푼으로 세상에 던져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

  이전부터 내가 쓰는 작품에는 일종의 강렬한 색채가 있다는 평을 들었는데, 전쟁 후에는 특히나 그 색채가 선명해졌다. 일단 전보다 나를 둘러싼 제약이 많이 사라지기도 했고, 내가 전쟁을 통해 신경이 단련되는 걸 넘어서 거의 마비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전후의 나는 피투성이 시체를 봐도 놀라지 않을 정도로 죽음에 무딘 사람이 되었기에, 소설 속에서 점점 피를 많이 쏟아냈고 여기저기 굴러다닐 정도의 시체를 장기 말을 움직이듯 갖고 놀았다.(p.21-22)

  일본인은 전쟁에 가는 것을 죽으러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처럼 남자로 태어나서는 인간 세상의 즐거움도 모르고...... 라는 것이 미혼인 아들을 전장에 보내는 부모의 탄식이었다. 가메이의 양친도 그러했다. 그래서 무리하게 가나코의 부모를 설득해 갑작스럽게 결혼식을 올렸다. 그다음 날 준키치는 '환호성을 뒤로한 채' 떠났다.(p.29)

  '살인귀'는... 전장에서 돌아온 추리 작가는 모든 것을 잃고 글의 색채마저 바뀌었다. 전쟁터로 나가는 남자를 위해 결혼해서 하룻밤 사랑을 나눈 여자는 언제 올지 모르는 남자를 기다리다 지친다. 오백 명에 한 명꼴로 아직 발견되지 않은 살인범이 있다는... 전쟁의 상흔이 남은 도시에서 살인귀가 활동한다.

  이곳에는 '흑난초 아가씨'라는 별명을 가진, 두꺼운 베일을 쓴 여성이 이따금 나타났는데, 베일을 썼으니 아무도 얼굴을 본 적은 없고 또 어디 사는 누구인지 모르지만 청초한 용모든 사치스런 옷이든 상당한 가문의, 그것도 젊은 영양처럼 보여서 점원들은 흑난초 아가씨라는 별명을 붙였다고 하더군. 그런데 이 여성은 항상 물건을 훔쳐가고, 게다가 신기하게도 그런 도둑질을 막으면 안 된다는 규칙이 이 백화점에는 있는 것 같더만...(p.112-113)

  아무튼 더없이 볼품없는 이 일류 빌딩의, 역시 특별히 볼품없는 5층, 즉 최상층에 최근 묘한 사무실이 생겼다.

  입구 종이 위에는-이라는 말은 유리가 없으니 종이가 붙어 있기 때문에-영화 타이틀 같은 글자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긴다이치 코스케 탐정사무소(p.132)

  '흑난초 아가씨'는... 에비스야 백화점 3층 15호 매장은 귀금속과 보석을 판매하는 곳이다. 검은 외투와 두꺼운 베일로 얼굴을 가린 여자, 흑난초 아가씨가 물건을 훔치는데 직원은 이것을 막아서는 안 되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다. 신임 주임은 이것을 모르고 살해당하는데, 백화점 지배인은 쓰러져가는 허름한 건물에 입주한 긴다이치 코스케 탐정사무소에 조사를 의뢰한다.

  인생 초기에 남편의 죽음이라는 비극에 직면한 그녀는 평생 혈육의 불행에 시달려야만 했다. 장남인 마쓰타로도 차남인 마쓰지로도 잇달아 전쟁에서 목숨을 잃었고, 외동딸 마쓰에의 남편인 가와사키 겐타마저 전쟁 말기에 히로시마에서 원폭으로 사망했다. 게다가 그 배우자들도 차례차례 남편 뒤를 따라 죽었기 때문에 올해 일흔이 된 마쓰요에게는 자식도, 며느리나 사위도 남아 있지 않았다.(p.176)

  "아하하, 이건 한 방 먹었구려. 그런 말을 들으면 바로 여기가 가루이자와란 사실을 잊어먹는다오. 헌데 긴다이치 씨, 생각해보니 여기, 동반자살의 명소였소."

  도도로키 경부가 말하는 것은 오래전 여기서 고명한 문사가 동반자살을 해서 세상을 놀라게 한 사건일 것이다. 그 비석이 바로 근처에 세워져 있는데 긴다이치 코스케는 일부러 그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다.(p.200)

  '향수 동반자살'은, 긴다이치 코스케는 유명 화장품 회사 도키와 상회의 요청으로 출장 조사를 떠난다. 가루이자와 아사마산은 동반자살 명소로 알려진 곳인데, 진한 향수 냄새를 풍기며 미래 도키와 상회의 총수가 될 후계자가 주검으로 발견된다.

  "그래서 가와지 군의 전언은 뭡니까?"

  "가와지는 어떤 사건에 대해 당신과 대화를 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가와지는 죽기 직전까지 그 사건으로 괴로워했죠. 혹시 네가 살아서 돌아가면...... 하고 가와지는 자주 저한테 말하곤 했습니다. 사에키 이치로 씨를 찾아가서 이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고 수수께끼를 풀어주게. 그러지 않으면 나는 죽어도 죽을 수 없다고 하더군요. 이런 말씀을 드리면 제가 무슨 얘길 하는지 당신은 아실 거라 싶은데요?"(p.270)

  "앗, 잠깐. 당신의 이름은...... 당신의 이름은......?"

  "제 이름 말입니까? 제 이름은 긴다이치 코스케, 변변찮은 남잡니다."(p.306)

  '백일홍 나무 아래'는, 지팡이를 쥐고 한쪽 의족을 끌면서 가파른 언덕에 오르던 남자는 불에 탄 나무 사이에서 백일홍을 발견한다. 잠시 옛 기억을 떠올리며 누군가를 추모하는데, 귀환병 차림의 남자가 다가온다. 내면의 상처가 채 가시기 전에, 낯선 남자는 죽은 동료의 전언을 가지고 왔다. 과거의 수수께끼를 풀어야 한다.

  전후 일본은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커다란 후유증을 남기고, 상황은 참담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일어난 의문의 살인 사건은 시대의 아픔을 매우 잘 반영한다. 모두가 전쟁의 피해자...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일본은 피해자이기 전에 가해자이다. 패전국의 음울함 속에서 빛나는 긴다이치 코스케의 활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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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의 비극 노리즈키 린타로 탐정 시리즈
노리즈키 린타로 지음, 이기웅 옮김 / 포레 / 201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노리즈키 린타로, 이기웅 역, [1의 비극], 포레, 2013.

Norizuki Rintaro, [ICHI NO HIGEKI], 1991.

  오래전에 출간했는데, 최근에 tvN 드라마 <더 로드 : 1의 비극>(2021.)으로 제작되어 다시 주목받는 책이다. 노리즈키 린타로의 소설을 많이 읽지는 못했는데, 입소문으로 늘 관심 두는 작가이다. 그만의 매력은, 작품 안에 자신의 이름을 가진 캐릭터(노리즈키 린타로라는 탐정)를 등장시켜 독자로 하여금 허구와 현실을 헷갈리게 하는 재주가 있다. 한 남자가 과거에 벌인 잘못은 현재에 올무가 되어 가족을 불행에 빠뜨린다. 제목으로 비극인 것을 알겠는데, 왜 '1의' 비극일까?

  "운이 좋았군. 범인이 엉뚱한 실수를 안 했으면 저기에 당신 자식이 있었을 텐데."(p.16)

  도미사와 시게루는 내 아들이다.(p.18)

  그제야 상황이 파악됐다. 범인은 아이를 오인 유괴한 것이다. 그것도 하필이면 다카시와 시게루를. 다카시가 무사한 대가라고 하지만 이런 잔인한 착각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어떤 의미에서 최악의 궁지에 몰린 셈이었다. 등에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했다.(p.43)

  종합광고대행사 신토 애드에서 SF(세일즈 프로모션) 국장으로 있는 야마쿠라 시로는 아들이 유괴되었다는 연락을 받는다. 그런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유괴범은 오인해서 아들 다카시가 아니라 같은 반 친구인 도미사와 시게루를 데려갔다. 표면적으로 범인은 야마쿠라 가가 아닌 도미사와 가의 아이를 잘못 납치한 것이지만, 실상은 시게루 또한 시로의 아들이다. 7년 전에 아내 모르게 외도로 낳은 아들... 일인칭 시점의 전개는 급박한 심리를 잘 묘사한다.

  미치코가 자책하는 데는 말 못 할 이유가 있다. 두 아이는 자연스럽게 사이가 가까워진 것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미치코의 의지가 있었다. 미치코는 나를 압박하기 위해 다카시와 시게루를 친구 사이로 만들었다. 복수극의 1막이었다. 그런데 얄궃게도 그 공작이 오늘의 오인을 초래했다. 애당초 친구는커녕 서로 알 일조차 없던 아이들이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미치코 본인이 아이를 궁지로 몰아넣은 셈이다. 이런 결과를 자초한 스스로를 지독히 원망하고 있으리라.(p.63)

  책임이란 결국 주관적인 것이다. 객관론이란 책임 회피의 한 편법에 불과하다.

  ...

  "당신이 시게루를 죽였어!"(p.107)

  시게루에게는 아무 죄도 책임도 없다. 시게루는 자신이 바라서 태어난 것이 아니다. 나와 미치코의 도리에 어긋난 관계가 시게루라는 존재를 탄생시켰을 뿐이다.

  그럼에도 내 증오는 미치코가 아니라 그 결과로 탄생한 시게루에게 향해 있었다. 미치코를 증오할 수는 없었다. 미치코를 증오한다는 것은 나 자신을 증오하는 것과 같았다. 나는 그때 일을 우발적인 사건으로 인식했다. 나와 미치코는 불우한 길동무였을 뿐이다. 시게루만 없었으면 그 일은 과거의 신기루처럼 지나갔을 것이다. 죄는 모두 시게루라는 존재에 응축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시게루가 다카시와 같은 반이 되어 함께 성장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견디기 힘든 공포감을 줬다.(p.146)

  아들을 대신해서 납치된 아이를 구해야 하는 도의적 책임과 현재의 가정을 지키고자 하는 이기심... 아이를 구하되 그 아이가 아들이라는 사실을 세상이(아내가) 알아서는 안 된다. 시로는 유괴범이 요구하는 돈을 들고 약속 장소에 나가지만, 치명적인 실수로 몸값 전달에 실패한다. 곧이어 시게루는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고... 범인을 찾기 위한 노력은 남모르게 과거의 아픔을 하나씩 들추어야 한다. 가족사의 비밀, 원한, 복수...

  "알아냈습니다. 노리즈키 린타로, 이름이 특이하지만 본명입니다. 직업은 추리작가."

  "그랬군." 그래서 경찰과 아는 사이겠지. "잘 팔리는 작가인가?"

  "책을 몇 권 냈지만 베스트셀러라 할 정도는 아닙니다. 아직 상과도 인연이 없고요. 서평도 그리 긍정적이지 않군요. 꽤 통렬한 서평 하나가 눈에 띄었습니다. '노리즈키는 순전한 백치거나, 번드르르한 모방자거나, 혹은 둘 다다.'" 구로다가 인용하며 폭소를 터뜨린다.

  "대단한 작가는 아닌 모양이군. 아직 젊은가?"

  "예, 서른이 안 됐습니다. 아직 미혼이고, 홀아비인 아버지와 함께 사는 이른바 부자 가정입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가 다름 아닌 경시청 수사 1과 경사네요."(p.153-154)

  탐정 노리즈키 린타로의 등장... 경시청 수사 1과 경사의 아들로, 아마추어 범죄연구자로, 추리 작가로, 기괴한 사건의 해결사로, 엘러리 퀸 이후 최고의 명탐정으로 활약한다. 그는 함정에 빠진 시로를 도우며 결정적인 단서를 찾아내는데...

  지금은 익숙하지만, 초반부터 몰아치는 연속된 반전은 아주 신선하다. 사연 많은 인생과 그릇된 행동으로 일어난 사건은 일본 미스터리의 재미를 더하고 있다. 책임감과 이기심 사이에서 가정을 지키기 위한 내적 고뇌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고, 범인의 유추는 실패했다.

  일인칭으로 서술하는 '1의 비극'외에 삼인칭으로 서술하는 '3의 비극'이 있고, [요리코를 위해](포레, 2012. 모모, 2020.)하고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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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동스 2 - 우리 자리로 돌아오다 옹동스 2
Snowcat(권윤주) 지음 / 예담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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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OWCAT(권윤주), [옹동스②], 위즈덤하우스, 2016.

  봄은 날씨가 좋아서, 여름은 더워서... 이런저런 핑계로 두 계절 동안 독서를 하지 못했다. 다시 책 읽기를 시작해야 한다는 마음하고 다르게 몸은 그냥 늘어져 있었는데, 반가운 선물을 받았다. 글보다 그림이 더 많은,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나는 세상의 어떤 것보다 책 선물이 제일 좋다. 커피 물을 끓이고, 조용한 음악을 틀고, 푹신한 의자에 앉아서 책을 펼친다. 고양이 사진, 고양이 엽서, 고양이 이야기는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옹동스'라는 제목은? 작가가 오랫동안 함께한 고양이 '나옹'과 새로 들어온 고양이 '은동'을 붙여 만든 합성어이다. 문득 1권이 궁금한데... "사람이 죽으면 먼저 가 있던 반려동물이 마중 나온다는 얘기가 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무척 좋아한다."라는 인터넷 짤방으로 유명하다. 솔직히 이런 책이 있는 줄 몰랐는데, 그래서 더 재미있게 읽었다. 고양이는 신비롭다!

  저는 괜찮아요.

  먼 훗날, 우리가 다시 만나는 날.

  그때 가서 되돌아보면

  지금 이 고단한 삶은

  찰나와도 같을 테니까요.(p.93-95)

  나옹이는 시크한 수고양이이고, 은동이는 호기심 많은 암고양이이다. 한집에 사는 고양이 관찰기, 길고양이의 고단한 삶, 나이 든 나옹이의 투병기... '우리 자리로 돌아오다'라는 부제는 아픈 고양이를 키우며 일상의 회복을 바라고 있다. 책을 읽으며 시간을 거스르는 경험을 했는데, 2016년 당시 12년을 함께한 나옹이는 담석을 앓고 있었다. 5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나옹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은동이는? 아, 알고 싶지 않은 현재이다.

  책 읽기, 사진 찍기, 글쓰기는 늘 열망하는 것인데, 한동안 잊고 있었다. 하나씩 일상을 회복하기를, 행복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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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콜라티에
우에다 사유리 지음, 박화 옮김 / 살림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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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에다 사유리, 박화 역, [쇼콜라티에], 살림, 2012.

Ueda Sayuri, [CHOCOLATIER NO KUNSHO], 2008.

  쇼콜라티에(chocolatier)란 프랑스어로 초콜릿을 만들고, 초콜릿을 이용한 디저트를 만드는 사람을 의미한다. 초콜릿을 소재로 하는 소설은 초콜릿만큼이나 달콤하다. 일본에서는 양과자 장인이 되려면 고베로, 화과자 장인이 되려면 교토로 가야 한다는 말이 있다. 소설 [쇼콜라티에]는 고베에 있는 화과자점과 초콜릿 전문점을 배경으로 6개의 이야기 모음이다.

  제1화 거울의 소리

  제2화 일곱 번째 페브

  제3화 월인장사(月人將士)

  제4화 약속

  제5화 꿈의 초콜릿 하우스

  제6화 쇼콜라티에 훈장

  책을 읽는 동안 케이크와 디저트의 유혹을 피할 수 없다. 그래서 커피와 함께 초콜릿을 씹으며 책장을 넘겼다. 내용이 내용인지라... 다이어트를 고민하고, 혈당 수치를 고려해야 하는 이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다. 밸런타인데이와 크리스마스 등 특별한 기념일에 더 돋보이는 초콜릿에 관한 이야기는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내가 좋아하는 소설을 바로 알게 되었는데... 흥미로운 소재, 개성 있는 캐릭터, 깨알 정보, 반전 있는 사연 그리고 무엇보다 가벼워야 한다. 독서는 머리를 쓰는 게 아니라 쉬는 과정이다...ㅎㅎ 여기에 딱 들어맞아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과자의 맛은 미각만으로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양이나 포장 등 고객의 마음을 흔들 수 있는 요소를 최대한 활용해서 제품을 만들고 팝니다. 아야베 씨도 판매 현장에 몸담고 계시니, 고객에게 제품을 정신적으로 어떻게 어필하느냐에 따라 매출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아이들은 평범한 과자에 자신들만의 가치를 부여해서, 과자가 좀 더 맛있게 느껴질 수 있도록 자신들만의 방법을 찾아냈던 거죠."(p.52)

  아야베 아카리는 20대 중반으로 고베에 있는 화과자점 후쿠오도의 점원이다. 아버지처럼 화과자에 남다른 열정이 있는 것은 아니고, 단지 디저트를 좋아한다. 얼마 전 매장 옆에 초콜릿 전문점 쇼콜라 더 루이가 새로 문을 열었다. 전통 있는 화과자점하고는 다르게 고급스러운 느낌의 초콜릿 전문점에는 손님이 몰려든다. 그녀는 디저트를 맛보기 위해 갔다가 도난 사건을 목격한다. 그러면서 나가미네 가즈키 셰프를 만나는데, 초콜릿 장인의 신비로움... 중년의 남자는 실력뿐만 아니라 현자와 같은 조언을 한다.

  "근데 페브가 뭐야?"

  쇼고가 끼어들었다.

  "도자기로 만든 인형이야. 보통은 갈레트 데 루아 안에 한 개씩 넣어서 구워. 갈레트 데 루아는 크리스마스 케이크처럼 가족이 한데 모여 잘라 먹는 과자인데, 페브가 들어 있는 파이 조각을 먹는 사람은 그날 하루 동안 왕 노릇을 할 수 있는 풍습이 있대."(p.70-71)

  "월인장사가 누군데요?"

  "월인장사는 밤을 다스리는 신(神)이에요. 원래는 달을 타고 다니죠."

  "민요슈에 실린 노래라면 굉장히 오래되었을 텐데 마치 판타지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네요. 환상적이에요."

  "일본 최초의 소설인 다케토리 모노가타리(竹取物語)도 달나라 공주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어요. 아마 일본인들은 오랜 옛날부터 달에 대해 특별한 판타지를 품고 있었던 모양이에요. 항간에는 월인장사가 견우라는 설도 있는데, 달이 하늘 끝까지 건너면 직녀와 견우의 만남이 시작된다고 해요."

  "그렇군요. 칠월칠석을 표현한 과자군요?"(p.126)

  "그냥 내키는 대로 하는 것 같아도 손님들이 제품을 고르는 데는 저마다의 사정이 있는 거야. 자네의 생각 따윈 중요치 않아. 우린 고객이 원하는 대로 해 줘야 할 의무가 있어. 게다가 저 케이크를 먹는 가족 중에는 자작나무와 돼지풀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이 있단 말이야."

  "네?"

  "알레르기 환자가 있다구. 멜론이나 키위를 먹어도 발작을 일으키지. 한번 호흡곤란 상태에 빠지면 죽을 수도 있단 말이야."(p.203-204)

  초콜릿은 당뇨병 환자에게는 쥐약이다. 당분뿐만 아니라 대량의 유지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당분을 뺀 비터 초콜릿이라고 안심해서는 안 된다. 기름 덩어리나 마찬가지니까.(p.243)

  "단순히 칼로리를 줄인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단맛과 유분의 함량이 줄어들면 초콜릿 본연의 맛을 해칠 수 있거든요. 다야마 씨는 초콜릿의 부드러운 감촉과 매끄러운 식감, 적당하게 새콤쌉싸름하면서도 은은하게 단맛이 나는 향이 풍부한 초콜릿을 만들어 달라고 주문했습니다. 상당히 까다로운 조건이지만 손님이 열성적일수록 만드는 사람도 보람을 느끼기 마련이죠."(p.246)

  간사이 쇼콜라 클럽의 모델이 된 프랑스 단체는 '클럽 드 클로크르 더 쇼콜라'. 약칭으로 'CCC'라고 한다. 1981년에 설립되어 요리평론가 클로드 루베를 중심으로 작가, 저널리스트, 디자이너 등 창조적인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회원은 150명 정원제. 회원이 되려면 기존 회원이 탈퇴하기를 기다려야 하는 독특한 클럽이었다. 정기적으로 모여 스위트나 먹으며 웃고 떠드는 사교 모임에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초콜릿 질의 향상과 유지에 힘쓰고 때로는 날카로운 비평도 아끼지 않는 단체이다. 한편 변호사나 판사, 정치가 등 자격 조건을 법조계 사람들로 제한하는 '르 클럽 데 쇼콜라 오 파레'라는 단체도 있다.(p291)

  초콜릿을 둘러싼 6개의 이야기는 매력적이다. 부유하게 자란 아이는 고가의 과자를 질리도록 먹어서 새로운 맛을 찾는데, 해서는 안 되는 일을 벌인다. / 모임에서 여섯 사람은 결혼하는 친구를 위해 파이 안에 페브(과자 속에 넣는 도자기)를 넣기로 하는데, 여섯 개가 아니라 일곱 개가 들어 있다. / 양과자 셰프에게 평가받기 원하는 화과자 장인, 그런데 그가 만든 디자인으로 초콜릿 제품이 출시된다. / 프랑스 레스토랑의 숨은 사연... 오래전 동료와의 약속이 있었다. / 은퇴 후 초콜릿 하우스를 열고 싶어 하는 당뇨병 환자의 열성과 저칼로리 초콜릿. / 간사이 쇼콜라 클럽에서의 해프닝... 고급 스위트와 일반 과자 사이의 논쟁이 있다.

  과자 하나를 두고 과거와 현재의 대립이 아닌 공존과 조화를 말한다. 장인의 열정은 존경해야 하고, 개인의 취향은 존중되어야 한다. 초콜릿 디저트 셰프의 활약은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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