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홍 나무 아래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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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미조 세이시, 정명원 역, [백일홍 나무 아래], 시공사, 2013.

Yokomizo Seichi, [SATSUJINKI], 1976.

  요코미조 세이시는 일본 추리소설의 거장으로 국민 탐정 '긴다이치 코스케'가 등장하는 시리즈로 유명하다. 이것을 오마주한 것일까? [소년탐정 김전일](긴다이치 소년의 사건부)은 긴다이치 코스케의 외손자이고, 할아버지의 이름과 명예를 걸고 사건을 해결한다. 수많은 작품 중에서 초기작으로 분류되는 [백일홍 나무 아래]를 읽었다. 제목은 낭만적이지만, 태평양 전쟁 직후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 전후문학으로 폐허가 된 도시의 황폐함을 반영하고 있다. 4개의 단편 모음이다.

  살인귀

  흑난초 아가씨

  향수 동반자살

  백일홍 나무 아래

  현대의 소설하고 비교하면 여러 가지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이런 글이 모이고 쌓여서 오늘의 미스터리 왕국을 이룬 게 아닐까. 추리 작가의 등장, 괴짜 탐정의 활약, 허구와 현실을 오가는 구성, 깜짝 반전과 숨은 이야기... 등 현대 작가의 집필 방식은 여기에서 영향을 받은 게 아닌가 싶다.

  내가 추리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은 전쟁 전부터였는데 작가로서 아직 이름이 알려지기 전에 전쟁이 일어나 바로 전장에 소집되었다. 전쟁이 끝날 무렵 나는 조선 남쪽에 있어서 외지파견군 중에서는 가장 먼저 본토로 돌아올 수 있었다.

  돌아와 보니 양친도 형제도 죽고 집도 불타 없어져버렸다. 즉 나는 완전히 혼자, 그것도 무일푼으로 세상에 던져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

  이전부터 내가 쓰는 작품에는 일종의 강렬한 색채가 있다는 평을 들었는데, 전쟁 후에는 특히나 그 색채가 선명해졌다. 일단 전보다 나를 둘러싼 제약이 많이 사라지기도 했고, 내가 전쟁을 통해 신경이 단련되는 걸 넘어서 거의 마비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전후의 나는 피투성이 시체를 봐도 놀라지 않을 정도로 죽음에 무딘 사람이 되었기에, 소설 속에서 점점 피를 많이 쏟아냈고 여기저기 굴러다닐 정도의 시체를 장기 말을 움직이듯 갖고 놀았다.(p.21-22)

  일본인은 전쟁에 가는 것을 죽으러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처럼 남자로 태어나서는 인간 세상의 즐거움도 모르고...... 라는 것이 미혼인 아들을 전장에 보내는 부모의 탄식이었다. 가메이의 양친도 그러했다. 그래서 무리하게 가나코의 부모를 설득해 갑작스럽게 결혼식을 올렸다. 그다음 날 준키치는 '환호성을 뒤로한 채' 떠났다.(p.29)

  '살인귀'는... 전장에서 돌아온 추리 작가는 모든 것을 잃고 글의 색채마저 바뀌었다. 전쟁터로 나가는 남자를 위해 결혼해서 하룻밤 사랑을 나눈 여자는 언제 올지 모르는 남자를 기다리다 지친다. 오백 명에 한 명꼴로 아직 발견되지 않은 살인범이 있다는... 전쟁의 상흔이 남은 도시에서 살인귀가 활동한다.

  이곳에는 '흑난초 아가씨'라는 별명을 가진, 두꺼운 베일을 쓴 여성이 이따금 나타났는데, 베일을 썼으니 아무도 얼굴을 본 적은 없고 또 어디 사는 누구인지 모르지만 청초한 용모든 사치스런 옷이든 상당한 가문의, 그것도 젊은 영양처럼 보여서 점원들은 흑난초 아가씨라는 별명을 붙였다고 하더군. 그런데 이 여성은 항상 물건을 훔쳐가고, 게다가 신기하게도 그런 도둑질을 막으면 안 된다는 규칙이 이 백화점에는 있는 것 같더만...(p.112-113)

  아무튼 더없이 볼품없는 이 일류 빌딩의, 역시 특별히 볼품없는 5층, 즉 최상층에 최근 묘한 사무실이 생겼다.

  입구 종이 위에는-이라는 말은 유리가 없으니 종이가 붙어 있기 때문에-영화 타이틀 같은 글자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긴다이치 코스케 탐정사무소(p.132)

  '흑난초 아가씨'는... 에비스야 백화점 3층 15호 매장은 귀금속과 보석을 판매하는 곳이다. 검은 외투와 두꺼운 베일로 얼굴을 가린 여자, 흑난초 아가씨가 물건을 훔치는데 직원은 이것을 막아서는 안 되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다. 신임 주임은 이것을 모르고 살해당하는데, 백화점 지배인은 쓰러져가는 허름한 건물에 입주한 긴다이치 코스케 탐정사무소에 조사를 의뢰한다.

  인생 초기에 남편의 죽음이라는 비극에 직면한 그녀는 평생 혈육의 불행에 시달려야만 했다. 장남인 마쓰타로도 차남인 마쓰지로도 잇달아 전쟁에서 목숨을 잃었고, 외동딸 마쓰에의 남편인 가와사키 겐타마저 전쟁 말기에 히로시마에서 원폭으로 사망했다. 게다가 그 배우자들도 차례차례 남편 뒤를 따라 죽었기 때문에 올해 일흔이 된 마쓰요에게는 자식도, 며느리나 사위도 남아 있지 않았다.(p.176)

  "아하하, 이건 한 방 먹었구려. 그런 말을 들으면 바로 여기가 가루이자와란 사실을 잊어먹는다오. 헌데 긴다이치 씨, 생각해보니 여기, 동반자살의 명소였소."

  도도로키 경부가 말하는 것은 오래전 여기서 고명한 문사가 동반자살을 해서 세상을 놀라게 한 사건일 것이다. 그 비석이 바로 근처에 세워져 있는데 긴다이치 코스케는 일부러 그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다.(p.200)

  '향수 동반자살'은, 긴다이치 코스케는 유명 화장품 회사 도키와 상회의 요청으로 출장 조사를 떠난다. 가루이자와 아사마산은 동반자살 명소로 알려진 곳인데, 진한 향수 냄새를 풍기며 미래 도키와 상회의 총수가 될 후계자가 주검으로 발견된다.

  "그래서 가와지 군의 전언은 뭡니까?"

  "가와지는 어떤 사건에 대해 당신과 대화를 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가와지는 죽기 직전까지 그 사건으로 괴로워했죠. 혹시 네가 살아서 돌아가면...... 하고 가와지는 자주 저한테 말하곤 했습니다. 사에키 이치로 씨를 찾아가서 이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고 수수께끼를 풀어주게. 그러지 않으면 나는 죽어도 죽을 수 없다고 하더군요. 이런 말씀을 드리면 제가 무슨 얘길 하는지 당신은 아실 거라 싶은데요?"(p.270)

  "앗, 잠깐. 당신의 이름은...... 당신의 이름은......?"

  "제 이름 말입니까? 제 이름은 긴다이치 코스케, 변변찮은 남잡니다."(p.306)

  '백일홍 나무 아래'는, 지팡이를 쥐고 한쪽 의족을 끌면서 가파른 언덕에 오르던 남자는 불에 탄 나무 사이에서 백일홍을 발견한다. 잠시 옛 기억을 떠올리며 누군가를 추모하는데, 귀환병 차림의 남자가 다가온다. 내면의 상처가 채 가시기 전에, 낯선 남자는 죽은 동료의 전언을 가지고 왔다. 과거의 수수께끼를 풀어야 한다.

  전후 일본은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커다란 후유증을 남기고, 상황은 참담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일어난 의문의 살인 사건은 시대의 아픔을 매우 잘 반영한다. 모두가 전쟁의 피해자...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일본은 피해자이기 전에 가해자이다. 패전국의 음울함 속에서 빛나는 긴다이치 코스케의 활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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