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용을 보여 주는 거울 - 첫사랑을 위한 테라피 내인생의책 푸른봄 문학 (돌멩이 문고) 15
마르탱 파주 지음, 배형은 옮김 / 내인생의책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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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탱 파주, 배형은 역, [숨은 용을 보여주는 거울], 내인생의책, 2013.

Martin Page, [TRAITE SUR LES MIROIRS POUR FAIRE APPARAITRE LES DRAGONS], 2009.

살다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나이가 어리고 경험이 적어서 크게 고민한 때가 있었다. 5년 전 엄마의 죽음으로 심리 치료 상담을 해야 하고, 아침에는 기르던 개가 죽었다. 의사인 아버지는 정신이 나갔는지 잠옷 차림으로 진료를 하고, 무엇보다 첫사랑의 실연은 열네 살 소년의 마음을 괴롭힌다. 마르탱에게 몰아친 상실의 아픔이다. 지금은 첫사랑이 언제? 누구였는지? 기억조차 가물거리는 나이에 첫사랑을 위한 테라피... 마르탱 파주의 [숨은 용을 보여주는 거울]을 읽었다.

[숨은 용을 보여주는 거울에 대하여]는 다니엘 아리스가 [회화의 역사]에서 인용한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학자 파올로 토스카넬리가 쓴 신비서의 제목이다...(p.4)

책을 읽을 때마다 제목에 집중한다. 작가는 조금 특이한 제목에 관해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지만, 솔직히 그 의미를 모르겠다. 이탈리아의 어느 신비서에서 인용했다는 것, 아름다우나 제대로 해석하기 어렵다는 것, 용과 거울은 등장하지 않고 은유적 표현이라는 것... 우울한 위트가 넘치는 짧은 소설이다.

마리가 내 삶 속으로 들어왔다. 그 애에 대해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 마리의 머리칼은 다른 여자애들의 머리와는 조금 다르다. 그 애의 몸짓은 조금 느리거나 조금 빠르다. 고양이 눈을 가진 마리에겐 독특한 아름다움이 있다. 사람들 사이를 걷고 있어도 절대 그 속에 섞여 들지 않는다. 상처에서 흘러내리는 한 방울의 피처럼 주위로부터 도드라져 보인다. 마리가 나타나면 온 세상이 한발 뒤로 물러서는 것처럼 보인다. 나무의 초록빛이 가시고 하늘의 푸른빛은 바래며 비도 촉촉함을 잃는다. 마리는 특별한 동시에 자연스럽기 그지없다.(p.15)

주인공 마르탱은 작가의 이름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기 경험을 기록한 자전적인 소설은 아니라고 한다. 전부 상상이고, 단지 그 시절의 감정이라고 한다. 아무튼, 마르탱의 삶에 고양이 눈을 가진 아름다운 소녀 마리가 들어온다. 같은 반, 함께 있는 순간순간이 소중하다. 도서관에서 마리가 먼저 사귀자는 말을 한다. 가장 듣고 싶은 말이지만, 당황과 충격... 서투른 사랑은 60분을 넘기지 못한다.

"있잖아, 우리는 아무래도 친한 친구로 지내는 게 더 나은 것 같아."

테이블 위에 펼쳐진 책 속의 원자 폭탄이 하나하나 차례로 터지며 나를 가루로 만들었다. 내가 말했다.

"아."

마리는 가 버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렇다. 이것이 내 첫 번째 러브 스토리다. 이게 마지막이면 좋으련만.(p.19-20)

(나도 제일 듣기 싫었던 말...) 친한 친구로 지내는 게 더 나은 것 같아... 마리는 60분 만에 사랑 고백을 철회하고 떠나간다. 마르탱의 이별, 아픔, 위로와 성장에 관해서이다.

우리 개는 활기차고 충직했으며 행복한 삶을 누렸다. 오늘 아침 개가 죽은 것을 발견했을 때 나는 울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내 눈에서 눈물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개 때문만이 아니라 사라져 버린 마리의 사랑 때문에, 엄마 때문에,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 때문에, 썩어가는 이 집 때문에, 살짝 제정신이 아닌 아빠와 쉽지 않은 게 분명한 미래 때문에.(p.28)

"내가 나비라면 마리와 사귄 시간이 진짜 멋졌을 텐데."

나는 펄럭펄럭 날갯짓을 했다. 아무도 웃지 않았다. 역시나 내 개그는 실패였다.

내가 노렸던 포인트를 바카리가 이해하고 다른 애들에게 설명해 주었다.

"나비의 수명은 종에 따라 다르지만 대개 몇 시간에서 며칠 정도야. 그러니까 만약 마르탱이 나비였다면 마리와 사귄 시간은 정상 범위에 들어갈 거라는 얘기지."(p.49)

머릿속에서 이런저런 생각이 떠돌아다녔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라진 뒤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자주 궁금해하곤 했다. 엄마는 돌아가셨지만 사라지지 않았다. 엄마는 언제나 나를 지켜 준다. 엄마는 늘 곁에 있다. 엄마가 살아 있다면, 이렇게 말했을 텐데 라든가 이렇게 했을 텐데 하는 것들이 나에게 용기를 준다. 하지만 엄마의 자리가 비어 있는 건 사실이다. 그 빈자리는 절대 사라지지 않고 나와 함께할 것이다.

마리가 내 인생에서 사라진 일은 좀 다르다. 마리가 남긴 빈자리는 계속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단지 일시적인 사라짐, 사라지고 말 사라짐이니까. 몇 주, 몇 달 뒤면 내 사랑의 슬픔은 다 나을 것이다(설사 그때를 오늘은 떠올리기 어렵다고 해도).(p.74-75)

엄마를 잃었고, 개를 잃었고, 마리를 잃고... 언젠가는 아빠도, 친구들도 잃게 되겠지... 이별과 상실의 아픔, 그리움... 후회와 원망, 슬픔... 그리고 이런 게 모여서 나를 만드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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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밟기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검은숲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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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야마 히데오, 최고은 역, [그림자밟기], 검은숲, 2015.

Yokoyama Hideo, [KAGEFUMI], 2003.

최근에 읽다가 중간에서 멈춘 책이 몇 권 있어서 쉽게 읽을 수 있는, 끝을 볼 수 있는 일본소설을 찾았다. 오랜만에 만난 요코야마 히데오의 소설은 진중한데, 빠르게 읽을 수 있어서 매우 만족이다. 신문기자 출신으로 경찰 소설의 대가라는 수식어는 늘 기대하게 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밤털이 도둑을 주인공으로 (물론 경찰 세계를 풍자)하는 7개의 단편 모음이다. 범죄, 추리의 옷을 입고 사람 사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소식, 각인, 포옹, 업화, 사도, 유언, 행방

과거의 사건은 현재를 지배하고 있다. 마카베 슈이치는 '철벽의 마카베'로 불리는 밤털이 전문이다. 교육자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한때 법학을 전공하며 사법시험을 노릴 정도로 똑똑했다. 하지만 쌍둥이 동생 게이지가 빈집털이를 하다가 경찰에 쫓기고, 이것을 비관한 어머니는 집에 불을 질러 가족 모두가 죽는다. 홀로 남은 마카베는 남의 집에 들어가 물건을 훔치고, 경찰에 체포되어 감옥에 가는 생활을 한다.

그럴 법도 했다. 게이지가 세상을 떠난 지 이제 곧 15년이다. 친어머니의 손에 타 죽은 영혼에게 갈 곳은 없었던 것인지, 게이지는 달리 길을 찾지 못하고 하나의 생명을 나누어 가진 형제에게 되돌아왔다......(p.22)

혼자가 되었다는 건 외톨이가 되었다는 것이다. 자신의 그림자를 잃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승에 미련이 남은 게이지가 마카베의 마음에서 떠나지 못하는 게 아니었다. 마카베가 불러들인 것이다. 동생을 아무 데도 보내고 싶지 않아서, 그림자가 없는 어둠에서 도망치고 싶어서, 그래서 게이지의 영혼을 불러들여 자기 안에 붙잡아둔 것이다. 그날부터 지금까지......(p.135)

특이한 것은, 이것이 실제로 일어난 일인지 아니면 정신적인 문제인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마카베에게 게이지의 목소리가 들린다. 미드 <덱스터> 시리즈에서 주인공의 곁에 죽은 아버지와 여동생이 나타나듯이, 마카베의 마음에는 게이지가 함께하고 있다. 게이지는 마카베의 내면을 반영하는 거울이고, 반사된 그림자이다.

도시의 이면에는 평범하지 않은 삶이 있다. 기구한 팔자의 여인, 부패한 형사, 친구의 질투, 비정한 야쿠자, 부모를 잃은 소녀, 아들을 기다리는 노인 그리고 사랑하지만 함께하지 못한 연인이다. 마카베는 음지에서 해결사 역할을 하는데... 2년 전 자신이 감옥에 가게 된 과정을 알아내고, 형사의 죽임을 파헤치고, 소중한 사람의 누명을 벗겨내고, 도둑 사냥에 나선 야쿠자와 담판을 짓고, 산타클로스의 역할을 대행하고, 잠시 스친 인연으로 유언을 전달하고, 사랑하는 이를 보호한다.

죽은 쌍둥이 동생의 영혼이 붙어있는 밤털이 도둑의 활약은 아주 매력 있다. 때로는 냉혹하고 때로는 자비롭게, 번뜩이는 재치와 뛰어난 통찰력, 사랑하는 여인을 두고 동생과의 갈등 심리, 경찰과 관료 사회의 불신... 안타까운 가족사는 방황하는 인생을 노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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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부살인, 하고 있습니다 모노클 시리즈
이시모치 아사미 지음, 민경욱 옮김 / 노블마인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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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시모치 아사미, 민경욱 역, [청부살인, 하고 있습니다], 노블마인, 2018.

Ishimochi Asami, [KOROSHI-YA, YATTEMASU], 2017.

책 읽기 좋은 계절이다. 하지만 개인적인 바쁨과 복잡함으로 심오한 메시지의 글보다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일본소설을 찾았다. 소설 [청부살인, 하고 있습니다]는 블랙 유머, 심리 서스펜스, 휴머니즘이 담긴 일상의 미스터리로 작가만의 특별한 색채를 구현하고 있다. 7개의 연작 단편 모음인데... 가능한 경우의 수를 이야기로 펼쳐놓아 짜임새가 있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논리적 서술이 돋보인다. 그리고 등장하는 주요 인물의 성격은 명확하다.

검은 물통의 여자

종이기저귀를 사는 남자

동반자

우유부단한 의뢰인

흡혈귀가 노리고 있다

표적은 어느 쪽

표적이 된 살인청부업자

인물의 성격과 청부살인의 규칙이 매우 흥미롭다. 도미자와 마쓰루는 중소기업을 상대로 경영 컨설팅 연구소를 운영하지만, 부업(주업?)으로 청부살인을 한다. 의뢰가 들어오면 사흘 이내로 답을 하고, 계약이 성사되면 2주 안에 일을 처리해야 한다. 선수금으로 300만 엔, 완료하면 잔금으로 350만 엔을 받는다. 옵션-특별한 주문을 요청하면 수수료가 붙는다. 일에 실패하면 선수금 반환과 함께 거액의 위약금을 물어줘야 한다. 위법한 일이나 신용은 절대적이다.

선수금과 잔금을 합쳐 650만 엔이라는 금액 설정에는 이유가 있다. 도쿄 증시 일부상장기업의 사원 평균 연봉이 대체로 그 정도이다. 일본을 대표하는 기업 사원이 1년간 열심히 벌어야 겨우 얻을 수 있는 돈을 지불하면서까지 상대를 망자로 만들고 싶은가. 의뢰인에게 그 각오를 묻는 것이다.

어쩌면 의뢰인은 대부호라 650만 엔 정도는 아이 용돈 정도로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확인할 수 없다. 왜냐면 나는 의뢰인이 누군지 모르기 때문이다.(p.13)

쓰카하라 슈운스케는 구청에서 일하는 지방공무원이다. 어린 시절부터 친구이고, 청부살인의 연락책이다. 이세도노 아쿠타가와는 잘나가는 치과 병원장이다. 도미자와하고 접점은 없고, 비밀 의뢰를 받는다. 일의 절차는 의뢰인의 보험증으로 신원을 확인하고, 살해 대상을 쓰카하라에게 전달한다. 이때 의뢰인의 정보와 살해 동기는 알려주지 않는다. 쓰카하라는 이것을 도미자와에게 전달하고... 그래서 의뢰인과 청부업자는 서로를 알지 못한다. 이들은 건당 50만 엔의 수수료를 받는다. 이와이 유키나는 만화가이고, 도미자와의 연인으로 가끔 청부살인의 조력자 역할을 한다.

"응. 사람은 왜 청부살인업자에게 살해를 의뢰할까?"

...

"나는 의뢰인과 접촉하지 않아. 동기도 모르지. 그래도 여러 명을 죽이다 보면 그냥 알게 되는 게 있어. 인간은 원한이나 증오만으로는 청부살인업자를 고용하지 않아. 그런 동기라면 직접 손을 대지. 청부살인업자를 고용하기 위한 조건은 내 생각으로는 상대가 살아 있으면 명확하고 구체적인 불이익이 생기는 경우야... 원한이나 증오는 상대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결코 없어지지 않아. 어떻게 해서든 상대를 죽이려고 들겠지. 이 경우는 죽이는 것 자체가 목적이니까. 하지만 청부살인업자를 고용하는 이유는 달라. 명확하고 구체적인 불이익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면 죽일 필요가 없지."(p.132-133)

청부살인은 철저한 비즈니스이다. 따라서 선과 악의 구별은 무의미하고, 살해 동기는 자칫 감정을 개입시켜 일을 그르칠 수 있으므로 비밀이다. 살해 동기와 이유, 도대체 누가? 왜? 이것은 독자의 호기심을 유발해서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으로 작용한다. 퇴근하고 매일 밤 놀이터 수돗가에서 검은 물통을 비우는 여자가 있다. 주말이면 마트에서 종이기저귀를 사는 독신남이 있다. 이들은 표적이 되어 쓰러지는데... 검은 물통의 정체와 종이기저귀를 사는 이유가 궁금하다.

모자(母子) 사이라고 밝힌 중년 여자와 젊은 남자는 결혼 사기를 당했다고 하면서 일을 의뢰하지만, 정작 둘의 관계가 의심스럽다. 청부업자는 일하는 도중에 갑작스러운 중지 명령을 받고, 한 달이 지나서 재의뢰를 받는다. 목덜미에 바늘을 찔러 흡혈귀의 이빨 자국을 남겨 달라는 옵션 의뢰가 들어오고, 표적을 따라가 보니 한 집에 같은 이름으로 두 여자가 살고 있다. 하나하나 세세한 내막이 궁금하다. 그리고 의뢰인과 청부업자는 서로를 알지 못하기에 벌어진 뜻밖의 상황... 도미자와에게 도미자와를 죽이라는 의뢰가 들어온다. 살인 청부의 규칙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능한 경우의 수를 펼쳐놓고, 논리적으로 하나하나 따지며 살해 동기와 이유를 유추하는 과정은 아주 기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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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 측 증인
고이즈미 기미코 지음, 권영주 옮김 / 검은숲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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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즈미 기미코, 권영주 역, [변호 측 증인], 검은숲, 2011.

Koizumi Kimiko, [BENGO GAWA NO SHONIN], 2009.

고전의 재발견, 일본에서 오래전에 발표한 추리 문학의 의미를 찾아서 재출간한 책이다. 현대의 눈높이에서는 이야기 구조가 단순하고, 캐릭터 특징이 단조로운 아쉬움이 있다. 그럼에도 소설 [변호 측 증인]은 (스포일러 주의!) 서술트릭의 개척(?)이라는 의미에서 읽어볼 만하다. 1963년에 처음 발표한 소설을 2009년에 되살렸고, 국내에는 2011년에 번역했으며...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나서 읽게 되었다...;;

'피고를 사형에 처한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왜 남편을 보지 않았을까? 물론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남편이 어떤 태도로, 어떤 표정으로 그 말을 듣는지 나는 도저히 확인할 수 없었다.(p.14)

존속살해 혐의로 피고를 사형에 처한다는 판결... 여기에는 어떤 억울함이 있을까? 소설은 영화보다 한 편의 연극을 보는 기분이다. 한정된 공간에서 제한된 등장인물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일관된 논조로 전개한다. 꼬인 매듭이 마지막 장에서 해결-정리하는 구성, 낭만적인 묘사는 고전의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네 행운에 찬물을 끼얹으려는 건 아닌데."

야시마 산업의 유명한 아들이 '클럽 레노'의 미미 로이와 사랑에 빠져 결혼하기로 했을 때, 에다는 이렇게 운을 떼고 말했다.

"시집가서 네가 고생할 건 누가 봐도 뻔해. 아니, 스트리퍼라서 그렇다는 게 아니야. 난 너만큼 좋은 아내가 될 여자는 없다고 생각하는걸. 문제는 그 사람이야. 이 바닥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을 방탕한 사람이란 말이야. 일족의 골칫덩이라고 이야기되는 그 사람을 새사람이 되게 한 건 네 힘이란 말을 듣게 해야 해. 지면 안 돼. 무슨 일이 있어도 지면 안 돼. 넌 벌거벗고 춤추는 생활에서 발을 빼는 거야."(p.34)

나미코는 클럽 레노의 스트리퍼이다. 불행한 가정사로 이류 카바레에 흘러들어 미미 로이라는 이름으로 춤을 춘다. 어느 날 클럽에 놀러 온 야시마 스기히코는 그녀를 보고 한눈에 반한다. 야시마 산업의 외동아들, 방탕한 골칫덩이... 하지만 사랑은 진지했고, 집안의 허락 없이 둘만의 결혼식을 올린다. 갑작스러운 신분 상승과 불편한 나날... 야시마 나미코는 남편의 생활을 바로잡고, 저택의 안주인으로 인정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말이네, 유기. 경찰이 반드시 진범을 잡는 건 아닌 모양이던데. 내가 저번에 비서 애한테 빌려서 읽은 외국 탐정소설에선 죄도 없는 인간이 감옥에 들어가지 뭔가. 게다가 경찰에서 한번 잡고 나면 얼마 있다가 무죄가 밝혀져도 체면이 손상된다고 그냥 범인으로 꾸미더군. 그게 어느 나라 이야기였더라. 음, 그게 분명히......"(p.125-126)

유산 상속을 둘러싸고 가족이 한자리에 모인 날 밤에 야시마 류노스케 회장이 살해된다. CCTV와 과학수사가 일상화된 현대와는 다르게 경찰은 목격자 진술을 확보하고, 범행 동기에 초점을 맞추어 용의자를 검거한다.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

이게 그렇게 기적적인 일인가?

사건 수사를 담당했던 경찰관은 자신의 오인 체포를 인정하면 안 되나? 자기가 잡은 용의자의 무고함이 판명되면 그걸 인정하면 안 되나? 다시 진범을 체포하면 안 된다는 말인가?

그가 자신의 오인 체포를 공표하기 위해 법정에 서면 세상이 뒤흔들리기라도 하나? 그런 일을 하는 경찰관이 존재하면...... 아니, 그런 경찰관이 존재한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는 말인가? 그런 이야기는 현대에서는 처녀 수태나 루르드의 기적이나 마찬가지로 허황된 이야기인가?(p.233)

작가는 1960년대 당시의 경직된 사회 분위기를 담으려고 했을까? 경찰의 오인 체포와 수사 과정에서의 실수를 말하는 것은 공권력의 신뢰를 떨어뜨리는 것이고, 체면을 손상하는 일이기에 좀처럼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낸다. 그래서 변호 측 증인으로 증언대에 오르는 인물...

서술트릭은 작가와 독자의 두뇌 싸움으로 예상하지 못한 반전이 있다. 이런 글을 쓴다는 것이 경이롭다! 추레한 복장으로 별 볼 일 없는 외모를 지닌 변호사가 등장하는데, 괴짜 변호사의 활약을 첨가하면 어땠을까...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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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 무죄
다이몬 다케아키 지음, 김은모 옮김 / 검은숲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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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몬 다케아키, 김은모 역, [완전 무죄], 검은숲, 2022.

Daimon Takeaki, [KANZEN MUZAI], 2019.

  (나는) 잘 쓰지 않는 말인데, 억울하게 뒤집어쓴 죄를 '원죄'(원통할 원寃, 허물 죄罪)라고 한다.

  재판에서 확정된 판결에 중대한 오류나 불공정이 있는 경우 이것을 구제하기 위해 '재심'(再審)을 청구한다.

  다이몬 다케아키는 원죄와 재심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정의와 진실이 맞붙는 한 편의 드라마를 완성했다. 소설 [완전 무죄]는 일본의 사법 제도를 파헤치며 개선을 요구하는 사회파 미스터리이다. 복역 중인 무기수와 변호사는 검찰과 경찰을 상대로, 피해 유가족을 상대로, 언론과 세상의 편견을 상대로 대립하는데... 과연 정의란 무엇이고, 어디까지가 진실인가?

  아야가와강 사건은 히라야마가 범행을 부정했다고는 하나, 차에 피해자의 머리카락이라는 유력한 증거가 남아 있었다. 또한 히라야마는 취조를 받다가 한 번은 자백했다. 현장검증 때도 시신이 있었던 장소를 정확히 가리켰으므로, 정황상 일본변호사협회도 원죄일 가능성이 있는 사건으로 보지 않았다.(p.32)

  실제로 만나보니 그냥 얌전한 남자라는 인상이었다.

  하기야 달리 흉악한 살인범과 직접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으니 비교는 불가능하다. 히라야마에게서 제일 많이 느껴지는 감정은 체념이었다. 히라야마는 근본적으로 체념에 지배당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나 그것만으로는 정말로 살인을 저질렀는지 저지르지 않았는지 알 수가 없다.(p.48-49)

  마쓰오카 지사는 도쿄의 대형 로펌 페어튼 법률사무소 소속 젊은 변호사이다. 증거주의를 원칙으로 불확실한 증언을 밝혀내고, 경찰의 무리한 정의감으로 인한 억울한 죄를 변론한다. 그녀는 21년 전에 발생한 소녀 유괴 살해사건, 아야가와강 사건의 재심 청구를 맡게 되는데... 여기에는 뜻밖의 사연이 있다.

  지금까지 매일 악몽에 시달리는 기억... 당시 가가와현의 만노정, 마루가메, 아야가와에서 연이어 세 명의 소녀가 납치되었다. 다카기 유카는 실종이고, 이케무라 아키호는 시신으로 발견되고, 그 사이에서 마쓰오카는 겨우 탈출했다. 어린 시절에 잊을 수 없는 참혹한 경험이다. 원죄를 주장하는 그때의 범인을 변호해야 한다. 그의 범행이 아니라면, 진범을 찾아야 한다... 자신을 괴롭혀온 괴물과 맞서 싸울 기회이다.

  형사로서는 복 받은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오점이라 불러야 할 일이 딱 하나 있다. 아야가와강 사건 당시의 수사 방법이다.

  하지만 아리모리는 확신한다. 히라야마가 이케무라 아키호를 죽였다고. 설령 수사에 문제가 있었을지언정 진실은 흔들리지 않는다. 이제 와서 재심 청구가 받아들여져 만에 하나라도 히라야마가 무죄판결을 얻어낸들 누가 기뻐한다는 말인가.(p.62-63)

  "경찰의 정의는 범인을 체포하는 것, 검찰의 정의는 재판에서 지지 않는 것, 내가 있던 법원의 정의는 법적 안정성. 딱 잘라 말해 전부 그 하나만으로는 아무 의미도 없어. 변호인의 정의도 마찬가지야. 그런 건 통하지 않는데도 뻔하디뻔한 변호를 해놓고, 부당한 판결이니 뭐니 부르짖을 뿐 현실에는 눈길을 주지 않지. 모두가 정의에 매몰되는 바람에 무고하고 약한 사람만 눈물을 흘려......"(p.91)

  피해자를 위해, 사회정의를 위해, 목숨 걸고 이 거짓말을 관철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 믿는 것이리라.

  "정의라는 놈이 제일 큰 악이야."(p.133)

  아리모리 요시오는 강력반 형사로 복무하다 경감으로 퇴직했고, 범죄 피해자를 지원하는 민간단체에서 자원봉사를 한다. 피해자 유족을 위로하며 살고 있는데, 21년 전 사건의 재심 청구 소식을 듣는다. 경찰 생활의 유일한 오점으로 생각하는 당시의 수사 방식... 그러나 그가 잡아넣은 자는 정황상 진범이 확실하다.

  저자는 각자의 처지에서 매몰된 정의를 비판한다. 경찰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범인을 체포하는 것, 검찰은 어떤 이유를 막론하고 재판에서 이기는 것... 불의를 범할지라도 피해자를 위해, 우리 사회를 위해 악인은 놓쳐서는 안 된다는 정의가 통용되던 과거의 수사 방식을 정면으로 꼬집는다.

  한 번이라도 경찰의 의심을 받으면 진범이 발견되지 않는 한, 그 사람은 계속 위험인물로 여겨진다. 그건 경찰을 신뢰하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 내면에는 강한 힘을 따르고 싶은 굳은 의식이 존재하므로, 강한 힘으로 한번 사회에서 배제된 인간이 복귀하기는 상상 이상으로 어렵다.

  무죄판결을 받았으니까 그 사람은 평범한 사람과 다를 바 없다...... 아무리 그렇게 생각하려 해도 보통 사람에게는 힘든 일이나 누명을 벗고 풀려난 '흉악한 살인범'과 단둘이 하룻밤을 보내라고 하면 분명 대다수는 겁을 먹을 것이다.(p.175-176)

  또한 사람의 변하지 않는 인식을 지적한다. 한번 경찰과 검찰의 지목을 받으면, 죄가 없더라도 세상의 편견에 부딪혀야 한다.

  마쓰오카는 재심 청구심에서 당시 경찰의 강압 수사와 증거 조작을 입증해야 하는데, 그녀의 논리는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낙타가 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진범은?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다.

  경찰과 검찰이 주장하는 정의와 무기수와 변호사가 주장하는 진실의 대결은 매우 흥미롭다. 여기에 언론의 태도와 바뀌지 않는 세상의 이목은 우리의 현실을 잘 반영한다. 어쩌면 과거에 나를 유괴했을지 모르는 수감자를 변호하는 변호사의 심리 상태, 범인을 꼭 잡고자 하는 경찰의 막중한 책임, 원죄를 주장하는 무기수의 억울함... 등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게 한다. 오랜만에 사회파 미스터리의 교과서 같은 작품을 만났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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