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동스 2 - 우리 자리로 돌아오다 옹동스 2
Snowcat(권윤주) 지음 / 예담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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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OWCAT(권윤주), [옹동스②], 위즈덤하우스, 2016.

  봄은 날씨가 좋아서, 여름은 더워서... 이런저런 핑계로 두 계절 동안 독서를 하지 못했다. 다시 책 읽기를 시작해야 한다는 마음하고 다르게 몸은 그냥 늘어져 있었는데, 반가운 선물을 받았다. 글보다 그림이 더 많은,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나는 세상의 어떤 것보다 책 선물이 제일 좋다. 커피 물을 끓이고, 조용한 음악을 틀고, 푹신한 의자에 앉아서 책을 펼친다. 고양이 사진, 고양이 엽서, 고양이 이야기는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옹동스'라는 제목은? 작가가 오랫동안 함께한 고양이 '나옹'과 새로 들어온 고양이 '은동'을 붙여 만든 합성어이다. 문득 1권이 궁금한데... "사람이 죽으면 먼저 가 있던 반려동물이 마중 나온다는 얘기가 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무척 좋아한다."라는 인터넷 짤방으로 유명하다. 솔직히 이런 책이 있는 줄 몰랐는데, 그래서 더 재미있게 읽었다. 고양이는 신비롭다!

  저는 괜찮아요.

  먼 훗날, 우리가 다시 만나는 날.

  그때 가서 되돌아보면

  지금 이 고단한 삶은

  찰나와도 같을 테니까요.(p.93-95)

  나옹이는 시크한 수고양이이고, 은동이는 호기심 많은 암고양이이다. 한집에 사는 고양이 관찰기, 길고양이의 고단한 삶, 나이 든 나옹이의 투병기... '우리 자리로 돌아오다'라는 부제는 아픈 고양이를 키우며 일상의 회복을 바라고 있다. 책을 읽으며 시간을 거스르는 경험을 했는데, 2016년 당시 12년을 함께한 나옹이는 담석을 앓고 있었다. 5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나옹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은동이는? 아, 알고 싶지 않은 현재이다.

  책 읽기, 사진 찍기, 글쓰기는 늘 열망하는 것인데, 한동안 잊고 있었다. 하나씩 일상을 회복하기를, 행복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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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콜라티에
우에다 사유리 지음, 박화 옮김 / 살림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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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에다 사유리, 박화 역, [쇼콜라티에], 살림, 2012.

Ueda Sayuri, [CHOCOLATIER NO KUNSHO], 2008.

  쇼콜라티에(chocolatier)란 프랑스어로 초콜릿을 만들고, 초콜릿을 이용한 디저트를 만드는 사람을 의미한다. 초콜릿을 소재로 하는 소설은 초콜릿만큼이나 달콤하다. 일본에서는 양과자 장인이 되려면 고베로, 화과자 장인이 되려면 교토로 가야 한다는 말이 있다. 소설 [쇼콜라티에]는 고베에 있는 화과자점과 초콜릿 전문점을 배경으로 6개의 이야기 모음이다.

  제1화 거울의 소리

  제2화 일곱 번째 페브

  제3화 월인장사(月人將士)

  제4화 약속

  제5화 꿈의 초콜릿 하우스

  제6화 쇼콜라티에 훈장

  책을 읽는 동안 케이크와 디저트의 유혹을 피할 수 없다. 그래서 커피와 함께 초콜릿을 씹으며 책장을 넘겼다. 내용이 내용인지라... 다이어트를 고민하고, 혈당 수치를 고려해야 하는 이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다. 밸런타인데이와 크리스마스 등 특별한 기념일에 더 돋보이는 초콜릿에 관한 이야기는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내가 좋아하는 소설을 바로 알게 되었는데... 흥미로운 소재, 개성 있는 캐릭터, 깨알 정보, 반전 있는 사연 그리고 무엇보다 가벼워야 한다. 독서는 머리를 쓰는 게 아니라 쉬는 과정이다...ㅎㅎ 여기에 딱 들어맞아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과자의 맛은 미각만으로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양이나 포장 등 고객의 마음을 흔들 수 있는 요소를 최대한 활용해서 제품을 만들고 팝니다. 아야베 씨도 판매 현장에 몸담고 계시니, 고객에게 제품을 정신적으로 어떻게 어필하느냐에 따라 매출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아이들은 평범한 과자에 자신들만의 가치를 부여해서, 과자가 좀 더 맛있게 느껴질 수 있도록 자신들만의 방법을 찾아냈던 거죠."(p.52)

  아야베 아카리는 20대 중반으로 고베에 있는 화과자점 후쿠오도의 점원이다. 아버지처럼 화과자에 남다른 열정이 있는 것은 아니고, 단지 디저트를 좋아한다. 얼마 전 매장 옆에 초콜릿 전문점 쇼콜라 더 루이가 새로 문을 열었다. 전통 있는 화과자점하고는 다르게 고급스러운 느낌의 초콜릿 전문점에는 손님이 몰려든다. 그녀는 디저트를 맛보기 위해 갔다가 도난 사건을 목격한다. 그러면서 나가미네 가즈키 셰프를 만나는데, 초콜릿 장인의 신비로움... 중년의 남자는 실력뿐만 아니라 현자와 같은 조언을 한다.

  "근데 페브가 뭐야?"

  쇼고가 끼어들었다.

  "도자기로 만든 인형이야. 보통은 갈레트 데 루아 안에 한 개씩 넣어서 구워. 갈레트 데 루아는 크리스마스 케이크처럼 가족이 한데 모여 잘라 먹는 과자인데, 페브가 들어 있는 파이 조각을 먹는 사람은 그날 하루 동안 왕 노릇을 할 수 있는 풍습이 있대."(p.70-71)

  "월인장사가 누군데요?"

  "월인장사는 밤을 다스리는 신(神)이에요. 원래는 달을 타고 다니죠."

  "민요슈에 실린 노래라면 굉장히 오래되었을 텐데 마치 판타지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네요. 환상적이에요."

  "일본 최초의 소설인 다케토리 모노가타리(竹取物語)도 달나라 공주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어요. 아마 일본인들은 오랜 옛날부터 달에 대해 특별한 판타지를 품고 있었던 모양이에요. 항간에는 월인장사가 견우라는 설도 있는데, 달이 하늘 끝까지 건너면 직녀와 견우의 만남이 시작된다고 해요."

  "그렇군요. 칠월칠석을 표현한 과자군요?"(p.126)

  "그냥 내키는 대로 하는 것 같아도 손님들이 제품을 고르는 데는 저마다의 사정이 있는 거야. 자네의 생각 따윈 중요치 않아. 우린 고객이 원하는 대로 해 줘야 할 의무가 있어. 게다가 저 케이크를 먹는 가족 중에는 자작나무와 돼지풀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이 있단 말이야."

  "네?"

  "알레르기 환자가 있다구. 멜론이나 키위를 먹어도 발작을 일으키지. 한번 호흡곤란 상태에 빠지면 죽을 수도 있단 말이야."(p.203-204)

  초콜릿은 당뇨병 환자에게는 쥐약이다. 당분뿐만 아니라 대량의 유지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당분을 뺀 비터 초콜릿이라고 안심해서는 안 된다. 기름 덩어리나 마찬가지니까.(p.243)

  "단순히 칼로리를 줄인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단맛과 유분의 함량이 줄어들면 초콜릿 본연의 맛을 해칠 수 있거든요. 다야마 씨는 초콜릿의 부드러운 감촉과 매끄러운 식감, 적당하게 새콤쌉싸름하면서도 은은하게 단맛이 나는 향이 풍부한 초콜릿을 만들어 달라고 주문했습니다. 상당히 까다로운 조건이지만 손님이 열성적일수록 만드는 사람도 보람을 느끼기 마련이죠."(p.246)

  간사이 쇼콜라 클럽의 모델이 된 프랑스 단체는 '클럽 드 클로크르 더 쇼콜라'. 약칭으로 'CCC'라고 한다. 1981년에 설립되어 요리평론가 클로드 루베를 중심으로 작가, 저널리스트, 디자이너 등 창조적인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회원은 150명 정원제. 회원이 되려면 기존 회원이 탈퇴하기를 기다려야 하는 독특한 클럽이었다. 정기적으로 모여 스위트나 먹으며 웃고 떠드는 사교 모임에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초콜릿 질의 향상과 유지에 힘쓰고 때로는 날카로운 비평도 아끼지 않는 단체이다. 한편 변호사나 판사, 정치가 등 자격 조건을 법조계 사람들로 제한하는 '르 클럽 데 쇼콜라 오 파레'라는 단체도 있다.(p291)

  초콜릿을 둘러싼 6개의 이야기는 매력적이다. 부유하게 자란 아이는 고가의 과자를 질리도록 먹어서 새로운 맛을 찾는데, 해서는 안 되는 일을 벌인다. / 모임에서 여섯 사람은 결혼하는 친구를 위해 파이 안에 페브(과자 속에 넣는 도자기)를 넣기로 하는데, 여섯 개가 아니라 일곱 개가 들어 있다. / 양과자 셰프에게 평가받기 원하는 화과자 장인, 그런데 그가 만든 디자인으로 초콜릿 제품이 출시된다. / 프랑스 레스토랑의 숨은 사연... 오래전 동료와의 약속이 있었다. / 은퇴 후 초콜릿 하우스를 열고 싶어 하는 당뇨병 환자의 열성과 저칼로리 초콜릿. / 간사이 쇼콜라 클럽에서의 해프닝... 고급 스위트와 일반 과자 사이의 논쟁이 있다.

  과자 하나를 두고 과거와 현재의 대립이 아닌 공존과 조화를 말한다. 장인의 열정은 존경해야 하고, 개인의 취향은 존중되어야 한다. 초콜릿 디저트 셰프의 활약은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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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 Isaka Kotaro Collection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소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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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사카 고타로, 김소영 역, [마왕], 웅진지식하우스, 2006.

Isaka Kotaro, [MAOU], 2005.

  이사카 월드 3부작 [사신 치바](웅진지식하우스, 2006.)와 [골든 슬럼버](웅진지식하우스, 2008.)에 이어서 [마왕]을 읽었다. 번역 출간한 곳에서 판매를 목적으로 정한 시리즈겠지만,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작가는 이전의 소설하고는 다르게 독자가 원하는 통쾌한 반전을 버리고, 작가로서 좋아하는 것을 썼다고 한다. 그런데 기대가 너무 컸던 것일까?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는 알겠으나 갈등의 구조가 약하고, 오픈된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느 날 갑자기 초능력을 소유하게 된 두 형제라는 흥미로운 캐릭터의 설정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활약은 없다. 싱거운 맛! 아, 자극이 필요하다!

  내가 노인의 몸속으로 파고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은 지하철의 좌석이 아니라 앞에 있는 저 손잡이 옆이라고 암시하면서 노인의 육체를, 모피라도 뒤집어쓰는 듯한 감각으로 나의 몸과 포갠다. 뺨이 가늘게 떨린다. 솜털이 흔들리는 듯한 바람을 느끼고, 전기가 통하기라도 한 것처럼 살갗이 부르르 떨렸다.(p.22)

  어린 시절에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은 형제는 서로를 의지하며 한 집에서 살고 있다. 형 안도는 30보 이내의 거리에서 남의 말을 조종할 수 있다. 동생 준야는 1/10 확률 내에서는 무조건 이긴다. 마왕-형 안도의 이야기와 호흡-동생 준야의 이야기는 다른 관점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을 제공한다. 이사카 고타로의 특징일까? 한 소설 내에 다양한 장르와 다른 이야기가 섞인 모습을 여기에서도 보이는데... 초능력을 지닌 형제라는 판타지, 일본의 파시즘과 우경화를 비판하는 사회파, 의문스러운 형의 죽음을 파헤치는 미스터리... 많은 것을 한 번에 이야기하고 있다.

  "사실 인간이란 금지된 것들을 부수면서 성장해 왔잖아. 금지된 것일수록 에로틱하게 느껴지는 법이지. 인간을 충동질하기에 가장 손쉽고 빠르고 강력한 건 성욕이고. 다시 말해서 인간이 진화해 올 수 있었던 최강의 무기는"하고 나는 말한다.

  "무기는?" 시오리가 몸을 앞으로 쭉 뺀다.

  "호기심이야"하고 나는 대답한다.(p.35)

  "우리에게......" 이누카이는 홀로 침착하게 손가락을 세웠다. "정치를 맡긴다면, 5년 안에 경기를 회복시키겠습니다. 5년 안에 노후생활까지 보장하죠."

  다른 의원들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웃었지만 이누카이는 꿋꿋하기만 했다. 손바닥을 펼친다. "5년입니다. 만약 실패한다면, 내 목을 날려도 좋습니다."(p.46)

  우리와 마찬가지로(아니, 이것 또한 일제의 잔재라는 생각) 일본에서는 정치를 향한 불신과 혐오가 팽배하다. 구태의연한 정책으로 자기 잇속만 챙기는 집단... 그런데 야당인 미래당에서 이누카이라는 의원이 나와 파격적인 행보를 보인다. 모든 것을 뜯어고치겠다는 공약, 집권 5년 안에 경기를 회복하지 못하면 목을 날려도 좋다는 강경한 발언으로 대중의 지지를 얻는다. 여기에는 미국과 중국을 향한 외교 정책의 변화와 평화헌법의 개정을 포함하고 있어 논란이 된다. 안도는 그의 당선을 우려하여 선거 유세장으로 간다.

  파시즘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명확한 대답은 없다. 적어도 나는 잘 모른다. 20세기에 탄생한 독자적인, 반지성적이며 본능적인 정치체계라고 풀이해 봤자 결국 그것은 아무것도 뜻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굳이 말하자면 파시즘이란 바로 '통일되어 있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애당초 파시즘의 프랑스어 어원인 'faisceau'는 '몇 개의 총부리를 다발로 묶어서 세우는 일'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즉 갖다 붙이자면 이 '수박씨의 줄'이 나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생리적으로나 본능적으로나 저항감을 느끼게 하는 이 섬뜩함은 파시즘이 갖는 공포와 닮지 않았을까? 생각해. 생각해.(p.53)

  그것을, 하고 나는 입을 열 뻔했다. 그것을 실현하려고 하는 자가 바로 이누카이가 아닌가. 무솔리니와 꼭 닮은 경력을 가진 남자가 피 끓는 젊은이처럼 용맹과 힘을 떨치며 "5년 안에 안 되면 목을 날리라"는 말로 젊은이들을 선동하고 있다. 이 남자라면 '자유의 나라'와 '인구 13억의 나라'한테도 단호한 태도로 맞서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게 한다.(p.100)

  한미일의 관계를 보면서 일본은 무조건 친미 성향이 강할 것으로 생각했다. 나의 착각! 여기에 등장하는 몇몇 인물은 일본이 미국에 종속되어 끌려가는 게 아니라 대등한 외교를 요구하고 있다. 중국과의 마찰에서도 군대가 없으니 무시당한다는 인식으로 일본은 바뀔 필요가 있다고 한다. 자유의 나라 미국과 13억 인구의 나라 중국에 좀 더 단호하게 맞설 수 있는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파시즘으로 이들의 목마름을 채워줄 선동가가 나타난 것이다.

  "사실은 조사를 하는데"하며 그는 모니터를 옮기고 있다.

  "조사?" 우리 회사에 그런 부서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나는 생각이 나지 않았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는데 굳이 조사를 해야 하는 것만큼 귀찮은 일도 없어"하고 그는 푸념하듯이 말했다. 그 옆얼굴은 예민하고 차가워 보였다. 나는 그를 관찰하고 있을 뿐이었는데도 으스스하니 하기가 돌고 좀처럼 그런 일이 없는데 닭살이 돋기에 흠칫 놀랐다.(p.145)

  더구나 며칠째 우중충한 날씨라 기분까지 우울했다. 기온도 습도도 높았고 끈적끈적한 날씨였다.

  재미있게도 잔업을 마치고 돌아가는 지하철에서 그 자재 관리부의 치바라는 남자와 이틀 연속으로 만났다.(p.152)

  사신 치바의 등장... 안도에게 자재 관리부의 치바가 접근한다. 사신은 곧 죽을 사람에게 다가가 일주일을 조사하고, 적합 여부를 보고한다. 소설 [사신 치바]하고의 연결점이다.

  안도의 이야기는 도쿄를 배경으로 하고, 준야의 이야기는 센다이를 배경으로 한다. 센다이는 소설 [골든 슬럼버]에서 폭탄 테러로 총리가 암살된 곳이다.

  슈베르트의 <마왕>에서는 마지막에 아이가 어떻게 됐지? 나는 이미 대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캐묻는다. 스스로의 멱살을 잡아당기며 "어떻게 됐지?"하고 추궁한다.

  "죽었잖아"하고 나는 대답한다. 노래의 마지막, 아버지가 말을 몰아 집에 도착했을 때 품에 안겨 있던 아이는 이미 죽어 있었다. 아이일 수밖에 없는 나는 그 사실에 지독한 공포를 느꼈다. '양치기 소년'처럼 제 입으로 한 거짓말이 불러온 비극이라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런 잘못도 없는 아이가 왜 죽어야만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마왕의 존재를 알아채고 아버지에게 호소했지만, 아이는 구원받지 못한 것이다.(p.167-168)

  [현행]

  제9조 일본 국민은 정의와 질서를 기초로 하는 국제평화를 성실히 희구하고, 국권의 발동에 의거한 전쟁 및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는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는 영구히 이를 포기한다.

  2. 전항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육해공군 및 그 이외의 어떠한 전력도 보유하지 않는다. 국가의 교전권 역시 인정하지 않는다.(p.244)

  "쓸데없는 일로 주민투표씩이나 하지 말라는 것?" 준야가 물었다.

  "반대파도 단단히 약속을 해두어야 된다는 것?" 나도 그녀를 빤히 본다.

  "잘난 놈들은 약아빠졌으니까 조심해야 된다는 것." 미쓰요 씨가 딱 잘라 말했다.(p.250)

  안도의 죽음 5년 후, 준야는 시오리와 결혼하고 센다이로 이사한다. 총리 이누카이의 집권 후 바뀐 세상, 평화헌법으로 불리는 헌법 제9조를 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형의 죽음에 관한 의혹, 준야는 다음을 준비한다. 일본의 우경화 분위기에서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사람들이 날뛰고 소란 피우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겠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무섭기도 하고. 하지만 최소한 있지. 뒤집힌 치마 정도는 바로잡아줄 줄 아는, 뭐 그게 무리라면 치마를 바로잡아주고 싶다고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고 싶다고 생각해."

  ...

  "커다란 홍수는 막을 수 없다 해도, 그래도 그 속에서 소중한 것은 잊지 않을 것 같은 그런 두 사람으로 보였습니다요." 미쓰요 씨는 우스갯소린지 말꼬리에 높임말을 썼다.(p.287)

  바꿀 수 없는 대세의 흐름에서도 최소한의 이성, 양심, 소중한 것을 잊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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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 슬럼버 - 영화 <골든슬럼버> 원작 소설 Isaka Kotaro Collection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소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6월
평점 :
절판


이사카 고타로, 김소영 역, [골든 슬럼버], 웅진지식하우스, 2008.

Isaka Kotaro, [GOLDEN SLUMBER], 2007.

제5회 서점대상

제21회 야마모토 슈고로상

2009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1위

  이사카 코타로? 고타로? 요즘에 나오는 책은 '고타로'로 표기하는 것 같다. 골든 슬럼버란? 영국의 록 그룹 비틀스가 1969년에 발표한 앨범 <애비 로드>의 수록곡이다. 굳이 번역하면 '황금 낮잠'이라고... 같은 제목으로 일본에서 그리고 한국에서 영화를 제작했다. 서점대상은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 긴 분량으로 장황한 이야기가 펼쳐지나 꼬리의 꼬리를 무는 전개는 매력적이다.

  비틀스의 열한 번째 앨범이 <애비 로드>였다. 실제로 이 뒤에 <렛 잇 비> 앨범이 나왔고 그게 마지막 작품이 됐지만 녹음 자체는 <애비 로드>가 더 나중이었다. 즉 비틀스가 마지막으로 녹음한 앨범이 <애비 로드>라는 말이다. 이미 분열된 밴드를 폴 매카트니가 어렵사리 뭉치게 했고, 앨범 후반의 여덟 곡은 각각 따로 녹음한 곡을 폴 매카트니가 이어 붙여서 장대한 메들리로 완성했다. 메들리의 마지막 곡이 <디 엔드>라는 게 참 깔끔하다고 모리타는 곧잘 말했다.(p.127)

  "시작 부분 기억나?" 그렇게 말한 뒤 모리타는 첫 부분을 흥얼댔다. "Once there was a way to get back homeward."

  "옛날에는 고향으로 가는 길이 있었다는 의미던가?"

  "반사적으로, 대학 시절 함께 놀던 때가 떠올랐어."

  "대학 시절?"

  "돌아갈 고향이라는 말을 들으면 머릿속에는 늘, 그 시절 우리가 떠올라." 모리타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그의 시선을 더듬더듬 따라가보면 불현듯 시간이 일그러지며 대학 시절, 패스트푸드점에서 잡담으로 세월을 보내던 20대의 자신들과 맞닥뜨릴 것 같았다.(p.127-128)

  과거의 경험(결정)이 현재의 나를 있게 했겠지... 만약, 그때 다르게 했더라면, 내 삶은 달라졌을까? 꿈꾸던 대학 시절이 그립다. 그때의 친구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소설 [골든 슬럼버]는 총리 암살사건을 파헤치는 스릴러이고, 대중을 감시하는 사회 그리고 언론의 무분별한 보도를 비판하는 사회파 미스터리이고, 과거의 회상으로 펼쳐지는 청춘 드라마이다. 작가는 어느 것 하나 놓치기 싫었던 것 같다. 조금은 과한듯하면서도 장르를 바꿔가며 과거와 현재(미래)를 오가는 구성은 다른 재미를 준다.

  "죄 없는 사람들이 비참하게 살해당하는 것을 두고만 볼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누구나 할 말이 없다. 평소 같으면 대단한 개인 정보, 사생활 침해라며 거세게 반발했겠지만, 1년 남짓한 공포가 센다이 시민은 물론 전 국민을 휘감은 탓인지 법안은 순조롭게 통과되었다. 그리고 얼마 뒤, 센다이 시가지에는 정보 수집용 단말기, 요컨대 시큐리티 포드가 설치되었다. 범죄 방지와 수사정보의 질과 양 향상을 목적으로, 거리를 지나는 행인의 영상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압축영상으로 포드 내에 보존되었다. 물론 사용한 휴대전화 및 PHS 발신자 정보도 기록되었다.(p.35)

  20년 전, 센다이에서 가네다 사다요시 총리 암살사건이 일어났을 때 매스컴은 지극히 당연하게도 야단법석을 떨었다. 이제 와 차분히 돌아보면 도가 지나친 광적인 소란이었다. 텔레비전과 신문은 경찰청 발표를 거르지 않고 내보냈고 진위가 불확실한 일반인 제보까지 줄줄이 방송하며 시청자들을 선동했다. 아오야기 마사하루를 범인으로 지목한 근거는 상황 증거뿐이었지만, 기이할 정도로 초기부터 실명이 텔레비전에 노출되었다. 놀라운 일이지만 지금도 종종 일어나는 일이니 그러려니 할 뿐이다.(p.69)

  센다이 시가지에서 폭발물 테러로 가네다 총리가 사망한다. 선거에서 파란을 일으키며 당선된 젊은 총리는 고향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퍼레이드 중이었다. 사건이 일어난 순간 TV로 생중계되고, 도시는 혼란에 빠진다. 신칸센과 재래선의 운행 중단, 주요 도로에 경찰 배치, 부총리 기자 회견, 경찰청 경비국 종합정보과에서 수사를 맡는다. 센다이에서는 (이전에 일어난 연쇄살인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시큐리티 포드를 도입하고 있었다. 즉시 정보 수집 및 분석이 이루어진다.

  사건 다음 날, 경찰청은 신속하게 용의자를 발표한다. 폭파사건 직후 검문을 피해 달아났고, 목격자의 증언이 있었다. 이어서 매스컴은 용의자에 관해서 진위를 가리지 않고 보도 경쟁을 벌인다. 택배 기사로 일한 아오야기 마사하루는, 2년 전에 아이돌 가수를 치한으로부터 구해낸 영웅이었는데... 한순간에 총리 암살범으로 쫓기게 된다. 억울한 누명... 너, 오즈월드가 될 거라는 음성이 들린다.

  "마을마다 예산은 다르지만 말이야, 그래도 여름 휴가철이면 시집갔던 딸이 아이들 데리고 친정 와서 식구들끼리 함께 구경 가거나 하는 점은 똑같지. 온갖 직업에 다양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불꽃놀이를 보겠다고 한자리에 모여서 하늘로 펑펑 솟아오르는 광경을 보며 아, 크다, 예쁘다, 내일도 다시 힘내야겠다, 생각을 하고, 내년에도 또 보러 오자는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다는 점이 불꽃축제의 좋은 점이라고."(p.209-210)

  "불꽃놀이는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사람이 보는 거잖아. 내가 보고 있는 지금, 어쩌면 다른 곳에서 옛 친구가 같은 것을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유쾌하지 않아? 아마 말이지, 그런 때는 상대도 같은 생각을 하지 않을까. 난 그렇게 생각해."

  "같은 생각?" 아오야기는 무심코 반문했다.

  "추억이란 건 대부분 비슷한 계기로 부활하는 거야. 내가 떠올리고 있으면 상대도 떠올리고 있지."(p.210)

  '나는 범인이 아니야. 아오야기 마사하루.' 자신이 쓴 글자가 남아 있다. 약간 비스듬하게 누운, 눈에 익은 글씨체다. 문제는 그 밑이었다. 아오야기의 글자보다 가늘고 예쁜 글씨체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그럴 줄 알았어.'

  아오야기는 한동안 물끄러미 종이를 내려다봤다. 눈을 꾸욱 감는다. 눈에 익은 글씨체인지, 글을 쓴 진심이 무엇인지,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목구멍에서 소리가 새어 나올 것만 같았다. 얼른 안 가도 돼? 그렇게 말하듯 차가 계속 진동을 한다. '그럴 줄 알았어.' 이 한 마디가 가슴을 꽉 죄어온다.(p.368)

  "생각해보면 우리는 말이에요, 멍하게 있는 동안에 법률은 만들어지고, 세금이나 의료 제도는 바뀌고, 그러다 또 어디서 전쟁이 나도 그런 흐름에 반항할 수 없도록 되어 있잖아요. 좀 그런 구조라고요. 나 같은 놈이 멍하게 있는 사이에 자기들 마음대로 다 밀어붙이죠. 전에 책에서 읽었는데, 국가란 국민의 생활을 지키기 위한 기관이 아니래요. 듣고 보니 그렇더라고요."(p.400)

  "각 곡을 필사적으로 이어 붙여 메들리로 완성한 폴은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 이렇게 말한 게 누구였더라, 기억나지 않는다. "분명 뿔뿔이 흩어진 멤버들을 다시 한 번 뭉쳐보고 싶었던 거야."(p.452)

  오랜만에 대학 친구를 만나 옛이야기를 나누었을 뿐인데, 모든 증거는 짜 맞춘 것처럼 아오야기를 범인으로 몰고 있다. 조작된 이미지... 언론 보도는 여기에 힘을 싣고, 감시 사회에서 빠져나갈 틈은 없다. 사흘간의 도망자 이야기이다.

  "내 이름에는 숲이라는 뜻의 '森(주 : 수풀 삼)'자가 두 개나 들어가니까. 숲과 인연이 질기단 말이야. 그래서인지 가끔은 숲의 목소리가 들려."(p.89)

  필자는 실제로 이 원고를 쓰기 전에 숲 속에 있는 공동묘지까지 찾아가 합장을 하고 왔다. 물론 대답은 얻지 못했고, 숲의 목소리도 듣지 못했다.(p.84)

  비틀스의 '골든 슬럼버'를 들으며(흥얼거리며) 고향 같은 대학 생활을 그리워하고, 앨범이 만들어진 배경처럼 청소년식문화연구회도 어떻게든 한 번 뭉치기를 바라고, 헤어진 연인은 친구보다 못한 관계이고, 우리만의 추억이 있고, 알 수 없는 거대한 권력 앞에서 가리지 않고 도움을 주는... 낭만적인 스릴러이다. 어쩌면 결말이 다소 허망하게 보일 수 있으나, 사건 20년 뒤의 르포를 누가 썼는지를 상상하면 이보다 좋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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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P.G. 스토리콜렉터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선영 옮김 / 북로드 / 2011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미야베 미유키, 김선영 역, [가상가족놀이](R.P.G.), 북로드, 2011.

Miyabe Miyuki, [R.P.G.], 2001.

  유명세에 비해서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을 많이 읽지 못했다. 그래서 묵은 책 읽기로 선택했다. 소설 [가상가족놀이]의 원제 [R.P.G.]는 롤플레잉 게임(Role-Playing Game)의 약자이다. 우리 말로 역할놀이라고 해야 하나... 지금은 인터넷 게임 등에서 자주 접할 수 있지만, 일본에서 처음 출간했을 당시에는 어느 정도 신선함이 있었을 것 같다. 하지만 세월의 흐름은 거스를 수 없었는데, 현재의 익숙함이 발목을 잡는다.

  "어젯밤, 옛날 일기를 들춰보니 함께 일했던 게 15년하고 8개월 전 일이더군요."

  치카코는 복스러운 뺨을 누그러뜨리며 다케가미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두 사람은 악수를 나누었다.(p.10)

  아키쓰라는 형사는 뭔가 오해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치카코와 다케가미는 특별히 개인적으로 친한 것도 아니다. 마돈나라니, 천만의 말씀이다. 치카코 쪽이 세 살 연상이고 처음 얼굴을 마주했을 때 서로 이미 가족이 있었다. 로맨스는 일절 없다. 다만 일할 때 마음이 잘 맞아 연대감이 있었다. 그 후 꽤나 다른 길을 걸어왔지만 그래도 다케가미의 인품이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기뻤고, 치카코 역시 그 무뚝뚝하고 정직한 형사의 눈에 자신이 너무 다른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p.80)

  경찰소설이다. 등장하는 주인공을 눈여겨봐야 하는데, 소설 [모방범](문학동네, 2012.)의 다케가미 에쓰로와 [크로스파이어](RHK, 2009.)의 이시즈 치카코의 만남으로 시작한다. 이전 소설의 독자라면, 두 주인공의 조우가 매우 반가웠을 텐데... 아쉽게도 나는 어느 것 하나 읽지 못했다. 물론 이전의 소설을 읽지 않아도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아무런 문제는 없다. 하지만 경시청 수사 1과 4계 소속 데스크 담당으로 일하는 다케가미와 본청 방화수사반에서 스기나미 경찰서로 강등 인사된 치카코의 배경을 알면 더 재미있겠지... 15년 만의 만남이다.

  도코로다 료스케에게는 인터넷상에 또 다른 '가족'이 있었던 것이다.

  아내와 딸과 아들. 도코로다 료스케를 포함해 4인 가족이었다. 그들은 서로를 '아버지', '어머니', '가즈미', '미노루'라고 부르며 빈번히 메일을 주고받았고 채팅으로 대화를 했다. 또한 그들의 관계는 인터넷상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실제로, 적어도 한 번은 얼굴을 마주한 적도 있는 듯했다. 도코로다 료스케가 가즈미에게 또 만나고 싶다는 메일을 보냈던 것이다.(p.77-78)

  스기나미 구 니쿠라 초 3번지 분양주택 공사장에서 시신이 발견된다. 피해자는 48세 도코로다 료스케이다. 그리고 이 사건이 있기 사흘 전, 시부야 구 마쓰마에 초에 있는 노래방 주얼에서 21세 이마이 나오코라는 여대생이 교살당했다. 밝혀진 증거에 의하면 동일범의 소행이다. 수사본부는 피해자와 주변을 조사하는데, 인터넷상에서 특이점이 있다. 대부분의 범죄는 불법 사이트하고 연관이 있겠지만, 여기서는 그게 아니라 피해자는 게시판과 채팅방, 이메일을 이용해서 가족놀이를 하고 있었다. 현실의 가족 이외에 웹에서 아버지, 어머니, 가즈미, 미노루라는 또 다른 가족이 있었다.

  "이제부터 나는 이쪽 취조실에 세 사람을 불러 순서대로 심문을 할 거란다."

  다케가미의 설명에 가즈미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 다 생전에 아버님과 교류가 있었던 사람들이야. 다만 가즈미 양에게는 사전에 그들의 이름이나 연령, 어디 사는 어떤 사람이고 아버님과 어떤 사이였는지 말하지 않을 거다. 이야기를 듣는 사이에 자연히 알게 될 테니까."(p.82-83)

  경찰서 취조실 매직미러를 사이에 두고 심문이 이루어진다. 남동생 미노루를 시작으로, 딸 가즈미 그리고 어머니가 순차적으로 동석하며 가상가족놀이에 관해서 증언한다. 그들은 모두 현실에서 얻지 못한, 결핍된 것을 인터넷 가족을 통해서 얻으려고 했다. 관심과 돌봄, 외로움과 고민거리... 이들은 완벽한 가족의 모습이었고, 오프라인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살인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범인을 찾아내는 과정... 영화보다는 한 편의 연극을 보는 기분이고, 진실게임을 하는 듯하다.

  "우리는 늘 그랬어요. 셋이서 살지만 서로 간섭을 안 해요. 아버지는 바빠서 거의 집에 안 계시고, 어머니도 자기 일이 아니면 안중에도 없어요. 패션이니 연예인이니, 시시한 얘기는 하죠. 하지만 정작 중요한 얘기는 해도 소용이 없어요. 고등학교 입시 때만 해도 그랬는걸요. 전 추천 입학이었는데, 어머니는 선생님한테만 죄다 맡겨놓고 모른 척. 선생님이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그만이라는 식이었어요... 자기 생각을 말하고, 누가 그 생각에 대해 이것저것 말해주는 게 굉장히 즐거운 일이라는 걸 처음 알았어요. '어머, 그래? 마음대로 해.' 이게 아니라 제가 열심히 생각한 걸 열심히 받아주고 대답해주는 사람이 있다니 기뻤어요."(p.136-138)

  "보세요, 형사님,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거잖아요? 하지만 인간은 얼굴을 마주하면 얼굴밖에 안 봐요. 외면만 본다고요. 마음을 이어주는 진정한 끈은 그런 외면을 초월한 곳에만 있는데, 친구도, 부모도, 제가 웃으면 즐거우니까 웃는다고만 생각해요. 저는 진정한 나를 감추고 남들한테 맞추는 건데 말예요. 다른 사람들하고 똑같은 생각을 하고 똑같은 감정을 느끼는 시늉을 하고, 제가 그렇게 힘겹게 따라하는 줄 알아차리지도 못해요. 아무도 저를 한 사람의 인간으로 보지 않아요. 그냥 풍경인 거예요. 하지만 인터넷 속에서라면 마음을 터놓을 수 있고, 진정한 내 모습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고......"(p.154-155)

  다케가미는 말을 이었다.

  "물론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는 모릅니다. 집안 분위기가 냉담해서 도코로다 씨가 바람을 피웠는지도 모릅니다. 인터넷 속에서 이상적인 상대를 찾아 가족놀이를 했는지도 모릅니다. 혹은 도코로다 씨가 그렇게 멋대로 구니까 집안 분위기가 차가워졌는지도 모릅니다. 어느 쪽이 먼저인지는 모릅니다. 혹은 견해가 다를 뿐, 둘 다 먼저인지도 모르지요."(p.236-237)

  "사이버 공간에서 자라나는 인간관계에는 현실 사회의 인간관계와 비슷한 가치도 있고 온기도 있어요. 허위나 거짓말만 횡행하는 건 아니에요. 그야말로 얼굴을 맞대지 않기 때문에, 자기 모습이나 입장에 얽매이지 않기 때문에 털어놓을 수 있는 본심도 있고, 거기에서 자라나는 친애의 감정도 있는 거예요."(p.240-241)

  이 책을 읽으며 가족이란 무엇인가? 라는 원론적인 의문이 들었다. 혼인이나 혈연으로 맺어져 한집에 산다고 해서 다 가족일까? 무관심하고 냉담한 분위기에서의 가족은 오히려 남보다 못한 관계이다. 그렇다면 인터넷 공간에서 가상의 가족은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 현실의 필요를 잠시 충족할 수는 있어도 정답이 되기는...;; 시대가 변하며 점점 가족이 해체되고 있다는데, 진정한 가족의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때로는 집이 지옥이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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