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단처럼 검다 스노우화이트 트릴로지 3
살라 시무카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살라 시무카, 최필원 역, [흑단처럼 검다], 비채, 2016.

Salla Simukka, [MUSTA KUIN EEBENPUU(AS BLACK AS EBONY)], 2014.

  드라마를 한 번에 몰아서 보거나 시리즈를 연이어 끝까지 읽었을 때는 뭔가 하나의 산을 넘은 기분이고, 특히 책장에 꽂힌 책을 바라볼 때는 나름의 성취감이 들기도 한다. 조금은 생소한 핀란드에서 건너온 소설은 백설공주라는 의미를 가진 18세 소녀 루미키 안데르손을 주인공으로 '스노우화이트 트롤로지'... 백설공주 3부작을 완성한다. 시리즈의 첫 번째 [피처럼 붉다](비채, 2015.)와 두 번째 [눈처럼 희다](비채, 2016.)를 읽었을 때는 솔직히 작품의 매력을 알아채지 못했다. 살라 시무카라는 이름의 유명세와 52개국으로의 판권 수출은, 나에게는 그냥 그런 영 어덜트 픽션에 불과했다. 여성적인 감성이 맞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알듯 모를듯한 주인공의 내면세계는 불편하고, 그것이 어떤 해결 없이 암시로만 끝나서 불만이었다. 후반부에 급하게 마무리하는 사건은 어정쩡한 느낌이고... 하지만 세 번째 [흑단처럼 검다]를 읽으면서 하나하나의 의문이 풀리는데, 세 권을 다 읽어야 비로소 진가를 확인할 수 있다.

  "그보다 훨씬 오래 됐어. 페로의 버전은 1600년대에 나왔고, 그림형제의 버전은 1800년대에 발표됐다고. 이야기 자체는 그보다 훨씬 오래됐고. 그거 알아? 옛날 버전에선 왕자가 부드러운 키스로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깨우지 않는다는 거. 그는 공주를 강간해. 공주는 쌍둥이를 낳을 때까지 깨어나지 않고 말야."(p.14)

  동화 [백설공주]와 [흰 눈과 붉은 장미]에 이어서 이번에는 [잠자는 숲속의 공주]의 원형인 [들장미 공주]를 차용하고 있는데, 마찬가지로 까다로운 현실은 동화속 세상으로 서서히 물들어간다. 처음에는 피 묻은 돈을 추적하면서 국제적인 마약 조직에 엮이고, 다음에는 프라하에서 집단 자살을 모의하는 컬트 종교에 연루되었으며, 이번에는 협박 메시지를 보내는 스토커와의 대결이다. 이전의 작품에서 루미키는 우울한 분위기로 남을 믿지 않는 자기만의 규칙을 가지고 외롭게 지냈다. 남들하고 다르게 따뜻하고 친밀감이 느껴지지 않는 가족과 헤어진 연인에 대한 그리움이 지배적이었고... 하지만 두 번의 사건을 해결하면서 그녀는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다른 일상으로 돌아온다. 새로 남자 친구를 사귀고, 학교 연극에도 참여한다. 따돌림과 학교 폭력에 시달리던 지난날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손엔 피가 묻어 있어, 루미키.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사실이지.

  난 네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어.(p.29)

  이름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난 다른 이름들도 알고 있어. 넌 루미키지. 백설공주. 한때 들장미 공주처럼 잠들어버린 누군가가 있었다는 거 기억해?(p.48)

  아니, 겉으로는 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마음은 복잡하다. 그녀에게 전해진 쪽지는 과거의 어두운 기억을 강제로 끄집어내는데, 지금까지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낱낱이 알고 있다. 그는 그녀가 잊었던 기억을... 왜 우울하게 사는지, 왜 가족이 서먹한지... 기억을 되살리는 열쇠를 준다. 마치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처럼, 이것이 그녀의 삶을 파괴하더라도 그녀는 자기의 비밀을 찾아 나선다. 그녀를 소유하고자 하는 왜곡된 욕망은 서서히 숨통을 조여오고...

  "용기가 공포를 이긴다는 얘기들을 하잖아. 하지만 난 공포가 우리가 평소에 하지 않는 행동을 하게끔 이끌어낸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공포 그 자체가 용기일 수밖에."

  ...

  "하지만 공포는 도망치게 만들고 용기는 남아서 싸우게 해요." 알렉시가 말했다.

  "그렇게도 볼 수 있지. 하지만 공포는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에게서 가장 적절한 반응을 끄집어내잖아.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역시 죽음의 공포지. 우릴 도망치게도 하지만, 맞서 싸울 용기도 주지." 헨리크가 말했다.(p.95-96)

  "네 파일을 읽으니 네 영혼이 훤히 보이더군. 내 영혼만큼이나 새까맸어. 흑단처럼 검은 영혼. 그때부터 난 널 사랑하게 됐지."(p.159)

  몹시 추운 눈길을 달리고, 뙤약볕 아래에서 발에 땀이 차도록 달리고, 이번에는 빗속을 달린다. 공포를 이겨내는 용기인가? 아니면 공포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용기인가? 루미키는... 아니. 이제 겁내지 않을 거야. 죽을 만큼 두렵지만 참아낼 거야... 남모르게 자기를 지켜보는 눈을 향해 달려간다.

  [흑단처럼 검다]는 앞의 두 권에서 조각난 주인공의 감정을 하나씩 추스른다. 그녀는 왜 따로 규칙을 만들어서 자신을 통제하는지, 그녀의 가족은 왜 다른 가족하고 다른지, 이성하고 상반되게 흘러가는 감정의 곡선...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소설이 의문을 제시하고 확장했다면, 이번에는 퍼즐을 끼워 맞추고 있다. 십 대 후반의 두려움과 내재한 아픈 기억을 해결하는 과정... 조금씩 착실하게 억압된 과거를 삶의 일부로 만드는 과정을 한 편의 스릴러로 보여준다.

  책을 한 권으로 몰아서 편집하면 어땠을까? 짧은 분량이 가장 아쉽다. 그리고 한 권씩 읽을 때마다 뭔가 끊기는 듯하고... 일반적으로 500~600페이지를 넘기는 소설이 다반사인데, 200~300페이지의 분량은 모자라 보인다. 무엇보다 세 권을 전부 읽어야 작품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으므로 한 권으로 붙였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언젠가는 만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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