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러드 더 라스트 뱀파이어 - 야수들의 밤 밀리언셀러 클럽 80
오시이 마모루 지음, 황상훈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4월
평점 :
절판


오시이 마모루, 황상훈 역, [블러드 더 라스트 뱀파이어 - 야수들의 밤], 황금가지, 2008.

Oshii Mamoru, [KEMONOTACHI NO YORU - BLOOD The Last Vampire], 2000.

  [블러드 더 라스트 뱀파이어 - 야수들의 밤]은 도서정가제의 시행을 앞두고 떨이로 구매한 책 중에서 가장 싼 가격으로 손에 넣은 작품이다. 다소 직설적인 제목과 만화 같은 표지는 어쩌면 경박스럽게(?) 보일 수 있지만, 사실 책의 내용은 인류학을 중심으로 역사, 경제, 사회, 문화, 종교... 등 폭넓은 지식체계를 기반으로 인간과 인간을 닮은 또 다른 인간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 책은 배우 전지현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 <블러드>(크리스 나흔 감독, 2009.)의 원작이고, 저자인 오시이 마모루는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를 만든 감독이다.

  학교에 가면 그들은 본질적으로 소수에 지나지 않아 행실이 불량한 문제아 또는 악질 선동자로 낙인 찍힌 채, 생활 지도라는 이름 아래 공공연하게 이루어지는 수많은 공갈 및 협박들에 거의 혼자 힘으로 대항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또 집에 가면 '아들의 미래를 위해서'라는 절대적인 이데올로기 아래 공갈, 회유, 눈물 등을 포함하는 끔찍한 지옥도가 거의 매일같이 되풀이되었다. 혈육간에 오가는 언쟁으로 황폐해진 가정은 말 그대로 소모전을 반복하는 전장이었다.

  학교와 가정. 이 두 전선을 오가는 그들의 유일한 안식처는 거리였다.(p.34-35)

  1969년. 어느 당파에 속하지 않은 무당파로, 미와 레이는 도립 K고교 민주화 투쟁위원회의 학생 활동가이다. 실제로 어떤 사회 개혁을 목적으로 하는지 아니면 그저 젊은 날의 혈기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마르크스나 레닌주의는 아니라고 하면서 행동하는 실천가로 반정부 투쟁에 참여하고 있다. 도심의 대규모 시위는 (만화를 보는 것처럼 시각적인 묘사가 뛰어난데) 소속에 따라 서로 다른 색깔의 헬멧을 쓰고, 나름의 성향에 따라 온건하거나 과격한 전술을 구사하고 있다. 대치 중에 예상치 못한 갑작스러운 기동대의 반격으로 시위대는 순간 힘을 잃고 뿔뿔이 흩어진다. 레이는 헬멧을 벗어 던지고 한적한 건물 사이로 숨는데, 교복 차림으로 피투성이의 날이 선 일본도를 휘두르는 여자와 수상한 두 명의 외국인... 그는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목격한다.

  "살인 사건이라고 보는 근거가 몇 개 있지. 첫 번째는 사인. 피해자들은 다량의 혈액을 잃었고, 그것이 직접적인 사인이 된 것은 틀림없어.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체에 외상이 전혀 없었어. 단 하나, 손목에 작은 교상이 있었던 것을 제외하면 말이지."

  "교상?"

  "물린 상처 말이야."(p.48)

  자신을 경시청 형사부 조사 1과의 형사라고 하는 고토다 하지메는 불쑥 집으로 찾아와 그날 본 것을 집요하게 묻는다. 아직 세상에는 알려지지 않은 사건이 있는데, 연쇄적인 고교생 활동가의 죽음과 실종이 있다는 것이다. 피해자는 손목에 물린 상처만 있었는데, 다량의 혈액을 잃은 의문의 죽임을 당한 것이다. 이들은 모두 무산자 동맹인 에스에르(SR)파의 고교생 위원회이고, 사건을 전후로 사야라는 여학생의 움직임을 포착한 상황이다. 이제 남은 생존자는 단 한 명이다.

  "말 그대로지. 세계 어떤 문화권에 가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가족이나 친구에게 죽음을 가져다주는 녀석들이 존재하잖아? ... 슬라브의 뱀파이어, 러시아의 우피르, 그리스의 브뤼콜라카스, 루마니아의 스토리고이, 북부 독일의 나하제어......"

  "그거 설마 흡혈귀들?"(p.124)

  "흡혈귀라는 건 말이지. 죽음이라는 설명할 수 없는 사태를 설명하기 위한 지역적이며 집약적인 표현으로, 일종의 도피처였어. 가슴에 말뚝을 박아넣는 것은 죽은 자의 위협으로부터 도망치는 방법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고 말이야. 예를 들어 흡혈귀에 물린 인간은 흡혈귀가 된다는 전설은 전염병을 설명하는 당시의 가장 뛰어난 상징적 은유였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갈 거야. 물론 이런 식의 해석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관점에서 보면 터무니없이 허황하지만 말이지. 이러한 상징들의 재미있는 점은, 당시의 인간들이 모을 수 있는 모든 정보를 모아, 그것들이 서로 모순되지 않으면서도 당시 당사자들조차 이유를 알지 못하고 보편적으로 행하던 풍습의 대부분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끔 짜맞추었다는 것이지...... 뭐, 그건 딴 이야기고."(p.125)

  임시 회의를 소집하고, 경찰을 끔찍이 싫어하는 어린 혁명가들은 친구이자 동료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제한적인 동맹을 맺는다. 그들은 임무를 분담하고 실종자와 사야라는 여학생에 관해서 은밀하게 정보를 수집한다. 그러면서 서서히 초월적인 힘의 존재가 드러나는데...

  "하지만 실제로 흡혈귀라고 불리는 자들은 엄연히 실존하고 있다네...... 아니, 정확히는 흡혈 인간이라고 불러야 할까? 허구 속의 흡혈귀와 공통점이라고는 흡혈을 한다는 것, 자외선에 과민 반응을 보인다는 것, 외관을 변형시킬 수 있다는 것, 이 세 가지분이지만. 유감스럽게도 불로 불사는 아니야. 수명이 경이적으로 길긴 하지만, 느리긴 해도 노화가 존재하고 죽음으로부터 도망치지는 못하더군."(p.209)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그들이 '인간'이라는 지구상 다른 어떤 곳에서도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한 존재의 내부에서만 살아왔기 때문이라네. 그들이 살아남기 위해서 맞서 싸워야 했던 존재이자 능력을 개발해야 하는 이유가 된 대상은 자연이 아니라 바로 진화사에서 갈라져 나온 형제인 인간이었던 거야. 그들은 우리의 선조가 도구를 가진 유인원의 무리였을 때부터, 우리 선조의 모습으로 내부에 기생하여 전문적으로 인간을 포식하며 살아온 거라네...... 말하자면, 그들은 인간만을 상대로 진화해 온 걸세."(p.214-215)

  "수렵 가설이란 게 뭐지?"

  ...

  "유인원 중 일부가 무기를 가지고 살육을 시작했을 때, 처음으로 인간으로서 자신의 능력에 눈을 떴다는 가설일세."(p.215)

  "우리들의 선조가 동물을 잡아먹음으로써 적응해 온 유인원이라면, 우리를 잡아먹으면서 나란히 진화를 해온 그들이 우리와 닮아 있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가장 정당한 이야기이지...... 그들은 우리의 사악한 모습을 정확히 비추어내는 거울과 같은 존재라네. 내가 아까 그들은 인간이라고 말한 것은 그러한 의미도 담겨 있었다네......"(p.260-261)

  "그들이 인간을 죽이는 일은 극히 적지. 기생자가 숙주를 죽이는 것은 자살 행위라는 것을 생각하면 쉽게 납득이 갈 거야. 하물며 고등한 지성의 소유자인 그들이 무작위로 사람을 죽일 리도 없고...... 적어도 근대 이후에 그들은 인구가 밀집된 지역에 숨어들어, 폐쇄적인 작은 집단에 기생하면서 그 구성원들을 먹이로 삼아 살아왔다네. 우리들은 그것을 할렘이라 칭하고 있지. 아예 대놓고 사냥터니 식당이니 하고 부르는 자들도 있네. 그들의 흡혈 행위 구조는 아직 불명확한 부분이 많지만, 아마도 먹이가 되는 인간은 그들에게 정신적으로 매우 의존하게 되는 듯하더군. 스스로 나서서 피를 공급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명령에 따라 새로운 대상을 집단 내로 끌어들이기도 할 정도로...... 그것이 가족이든 친구이든 상관없이 말일세."(p.262)

  인간 사이에서 인간과 닮은 모습으로 있으나 인간의 피를 흡혈하며 살아가는 또 다른 인간은 전설로 내려오는 흡혈귀와 비슷하면서도 조금은 다르다. 인간이 도구를 사용하여 수렵하며 진화해 온 것이 정당하듯, 이들도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며 생존을 위한 진화를 하고 있었다. 초인적인 힘으로 몸을 변형할 수 있어서 인간을 죽이기보다 숙주로 삼아 기생하는 구조를 형성하였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존재를 아는 인간은 주종관계를 형성하여 그들에게 의존하고 있다.

  작가는 마치 어떤 계시를 받은 것처럼 인간과 죽음에 관해서, 또 다른 인간에 관해서 일필휘지(一筆揮之)로 거침없이 쓰고 있는데... '수렵 가설'로부터 '수렵 가설의 비판'을 지나 '기계론적 철학'과 '종교의 영역' 그리고 '다윈의 진화론'에 이르기까지 지루할 정도로 다양하고 어려운 이론을 끌어와서 뱀파이어의 세계관을 완성하고 있다. 자체의 이야기보다는 이것을 토대로 앞으로 전개될 많은 이야기가 더 기대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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