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환화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4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1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히가시노 게이고, 민경욱 역, [몽환화], 비채, 2014.

Higashino Keigo, [MUGENBANA], 2013.

  오랜만에 만나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몽환화]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번에는 '꽃'과 연관된 이야기인데, 일본 사회의 시대상과 맞물려 흥미로운 한 편의 미스터리를 완성하고 있다. 현대의 작가 중에서 다작으로 손에 꼽을 수 있고, 어떤 책을 읽어도 어느 정도의 만족감을 느낄 수 있으며, 항상 새로운 시도가 돋보이므로... 매번 그의 작품을 대할 때마다 남다른 기대감에 사로잡히고는 한다. 꽃이라니... 두 편의 짧은 프롤로그로 시작하는데, 처음부터 그 내용이 심상치 않다.

  2011년 3월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일본의 원자력에 관한 정책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화석 연료와는 다르게 굴뚝이 전혀 필요 없는 친환경 에너지로만 알려진 원자력의 허상이 온 세상에 알려졌다. 철저한 언론의 차단으로 구체적인 심각성을 가늠할 수는 없으나 상상을 초월하는 오염수가 바다로 흘러들었고, 방사성 물질이 대지를 뒤덮었다. 한 기업, 한 국가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의 생존과 관련된 만큼 누군가는 이것을 끝까지 지켜보고 돌보아야 하지 않을까?

  "할아버지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셨어요." 곁에 있던 리노가 참지 못하고 나섰다. "꽃이 유일한 대화 상대였어요. 마당에 화분이 많죠? 그것들을 손질할 때 가장 즐거워하셨어요. 꽃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늘 말씀하셨거든요. 그러니까 아마 사건의 진상을 알고 있는 것은 꽃들일 거예요."(p.61)

  "꽃과 잎의 형태가 바뀌는 것은 중요하지 않아. 문제는 색깔이지. 나팔꽃에 대해선 그리 잘 알지 못하지만 이것만은 알아. 노란색 나팔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p.135)

  아키야마 슈지는 신종 꽃 그러니까 자연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꽃을 개발하거나, 또는 과거에는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사라지고 없는 꽃을 되살리는 연구를 했었다. 은퇴 후에도 연구에 대한 미련 때문인지 자신의 집에서 마당 가득 꽃을 키우고 있다. 한때는 수영 유망주로 올림픽을 바라보기도 했으나 무슨(?) 연유로 그만두고 평범하게 사는 손녀 딸 아키야마 리노는 할아버지의 집을 찾았다가 꽃을 가꾸는 모습을 보고 이것을 블로그에 올리는 일을 한다. 그러던 중에 할아버지는 노란색의 특별한 꽃을 보여주고는 며칠 뒤에 의문의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사건 현장에서 꽃이 담긴 화분이 사라진다.

  소타가 적을 두고 있는 물리에너지 공학 제2과는 간단히 말하면 과거의 원자력공학과이다. 명칭을 바꾼 것은 조금이라도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 인기가 눈에 띄게 떨어지고 있다. 사실, 소타가 입학했을 때만 해도 원자력 자체에는 미래가 있다고 생각했다. 화석연료에 의존하는 시대가 아닌 것만은 분명했고 태양력발전이나 풍력에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되었다. 'CO2 감소의 기대주'라는 간판도 원자력 추진의 힘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소타도 '미래를 바라보고' 이 학문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지진과 원자력발전소 사고가 미래 지도를 완전히 망가뜨렸다...(p.73-74)

  가모 소타는 청소년 시절의 일(?)로 가족과의 관계가 여전히 서먹하다. 그래서 일부러 집에서 떨어진 곳의 대학으로 진학했으며, 지금은 원자력공학을 공부하고 있다. 일찌감치 경찰 공무원으로 자리를 잡은 형과는 다르게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까 고민 중이다. 오랜만에 찾은 집에서 특별한 꽃과 관련된 일로 형을 찾아온 여자를 만난다. 그리고 형을 대신해서 돕는데, 자신의 가족과 관련되어 모르던 사실을 하나씩 알게 된다.

  "내가 나팔꽃에 흥미를 가진 것은 아버지의 동생 즉 삼촌의 영향이야. 삼촌이 다양한 변화 나팔꽃을 피우는 것을 곁에서 보다가 나도 흥미가 생겼지. 하지만 삼촌은 어느 날 내게 말했어. 어떤 꽃을 피워도 좋지만 노란 나팔꽃만은 쫓지 마라. 이유를 물었더니 그것은 몽환화이기 때문이라고 했어."

  "몽환화?"

  "몽환夢幻의 꽃이라는 의미일세. 그 뒤를 쫓으면 자기가 멸하고 만다고, 그렇게 얘기했어."(p.220)

  "응." 리노는 충혈이 된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우리, 어딘가 닮았어요. 열심히 자기가 믿는 길을 선택했는데 어느새 미아가 되어버렸네요."

  "정말이네." 소타가 대답했다.(p.296)

  금단의 꽃, 몽환화라고 불리는 노란색 나팔꽃에는 어떤 비밀이 숨겨진 것일까? 도대체 무슨 꽃이기에 사람들은 꽃에 열광하고, 또 그토록 꽃을 경계하는 것일까? 비밀을 알고 꽃을 소유하려는 사람과 이것을 막으려고 대를 이어 꽃을 숨기는 가문이 있다. 소설은 살인 사건의 해결을 위해 단서를 쫓아 범인을 추적하는 형사와 꽃의 비밀을 찾아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두 남녀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꽃에 관한 궁금증은 높은 가독성으로 책에서 눈을 뗄 수 없게 하는 매력이 있다.

  "세상에는 빚이라는 유산도 있어." 소타가 말했다. "그냥 내버려둬서 사라진다면 그대로 두겠지.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누군가는 받아들여야 해. 그게 나라도 괜찮지 않겠어?"(p.420)

  [몽환화]는 신비한 기분이 드는 제목과 처음 프롤로그만 읽었을 때에는 꽃의 비밀이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타임슬립이나 삶과 죽음의 경계를 초월하는 판타지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이야기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렀고, 심지어는 원자력발전과 관련된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어서 더 큰 재미가 있었다. 오늘의 편리함을 위해 미래의 불편함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이들에게 "세상에는 빚이라는 유산도 있어"라는 작가의 말이 제대로 의미 전달되기를 바란다. 일본과 우리의 미래를 위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