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구 - 그때 우릴 미치게 했던 야구
시게마츠 기요시 지음, 김대환 옮김 / 잇북(Itbook)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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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게마츠 기요시, 김대환 역, [열구], 잇북, 2010.

Shigematsu Kiyoshi, [NEKKYU], 2002.

  야구에 관한 기억... 프로야구가 출범하기 이전에는 모두가 고교야구에 열광하는 시절이 있었다고 한다. 고향의 선수가, 출신 학교의 팀이 서울에 올라와 결승전을 치르는 날에는 야구장에서 동창회와 동문회가 같이 열리기도 하고... 심지어 후배 선수에게 잘하라는 응원과 함께 무작정 고기를 사 먹여서, 요즘과는 다르게 형편이 그다지 좋지 않던 때라 갑작스러운 폭식으로 배탈이 나서 경기를 망쳤다는 우스갯소리도 들었다. 항상 '역전의 명수'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며 역전 야구의 묘미를 알게 해준 군산상고... 아무튼, 그 옛날 아마추어 야구와 함께 웃고 함께 아쉬워하던 시절이 있었다.

  먼 저편의 꿈이라도 좋다. 실제로는 가지 못해도 상관없다. 고시엔이 있다. 확실히 그곳에 있다. 그걸 믿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았다.(p.246)

  프로야구가 출범한 해에는 이다음에 커서 어른이 되면, 우리는 쉽게 야구선수가 되는 줄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어느 동네를 가도 한적한 골목이나 빈 공터에서는 너나 할 것 없이 박철순이 되어 공을 던지고 김우열, 백인천, 이만수, 김봉연, 김용희... 가 되어 방망이를 휘두르며 시간을 보냈다. 내 나이 또래라면 누구나 어렸을 때의 야구를 향한 열정이 있었을 것이다. 조금 더 자라나서 우리는 엘리트 체육으로 선수가 되기 위한 스포츠는 있어도 취미나 또 다른 즐거움을 위한 야구는 플레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일본은 생활 체육으로 청소년 시절의 스포츠 활동이 우리와는 전혀 다른듯하다. 시게마츠 기요시의 [열구]는 고시엔 출전을 꿈꾸는 고교 야구의 열정과 성인이 되어 중년의 나이를 바라보며 지난날을 회상하는 그리고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혼슈의 서쪽 끝에 있는 인구 10여만 명의 항만도시이자 성시인 스오 시가 온통 들썩였던 20년 전 여름.

  구제도의 중학교부터, 아니 정확하게는 한코부터 이어져 내려온 100여 년 전통을 자랑하는 현립 스오 고교, 사람들은 슈코라 부르는 그 학교가 여름의 고시엔 대회 지역 예선을 거짓말처럼 연전연승하고 있었다.(p.16-17)

  야구부실에 있던 여덟 명 모두가 어느새 캄캄한 그라운드에 나왔다. 두 사람씩, 네 쌍. 하늘 꼭대기에 걸린 달빛에 의지해 포물선을 그리며 공이 오간다. 연습용 공에는 모두 사인펜으로 '열구'라 쓰여 있다. 슈코 야구부의 전통이다. 진노가 던진 공을 받아 달빛에 비춰 보니 동그스름한 글자의 '열구'가 보였다. 교코가 쓴 글자였다.(p.65)

  서른여덟의 시미즈 요지는 도쿄에서 언론 출판의 일을 하다가 불황으로 회사가 넘어가고 이런저런 사정으로 퇴직하여 고향에 내려온다. 아내는 미국에 유학 중이고, 어머니는 몇 개월 전에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가 홀로 있는 집에 머물며 데리고 온 딸과 함께 다시 전원생활에 적응하는 중에 옛날을 회상한다. 20년 전 여름, 슈코라고 불리는 현립 스오 고교는 오랜 전통의 명문이지만, 야구는 별 볼 일 없는 팀이었다. 하지만 야구를 향한 열정은 그 누구보다 강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이들은 연습을 쉬지 않았고, 낡아서 실밥이 풀린 공에는 '열구'라는 글자를 써넣으며 고시엔 출전을 목표로 투혼을 불살랐다. 그런데 매번 지기만 하던 팀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지역 예선에서 잇따른 행운(?)으로 거짓말처럼 연전연승한다. 하지만 그동안 함께한 행운의 여신은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어디론가 사라지고 뜻밖의 예상치 못한 사건에 연루되어 출전이 금지된다. 모두의 꿈을 한순간에 날려버린 사건... 그때의 상처는 아물 때도 되었지만, 여전히 가슴 한쪽이 쓰리다.

  "가메처럼 마누라 부모님한테 신세를 지는 것도 스트레스이겠지만, 자기 부모와 아내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도 여간 괴롭지 않다."

  맞장구는 치지 않았다. 진노도 그 이상은 푸념하지 않았다. 서른여덟 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0년. 서로 다른 삶이 있고,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것도 다르다. 그 무게를 비교하거나 동정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우린 이제 그 정도는 아는 나이가 되었다.(p.133)

  "나, 고타이 엄마랑 설에 둘만 있었잖아. 그때 나한테 왕따 당하면...... 도망가도 된다고, 정말로 힘들면 도망가도 전혀 상관없다고. 그리고 이 동네엔 도망간 사람을 쫓아올 정도로 본성이 악한 아이는 없다고 했어. 또 제일 좋지 않은 것은 도망갔는데 도망가지 못했다고, 도망갈 수 없었다고 생각하면 그건 이미 아웃이고,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들어진다고......"(p.151-152)

  부원총회에서 정해진 야구부의 슬로건은 '야구를 통한 밝고 즐거운 고교 생활을 보내자.'였다. 비나 눈이 오는 날의 맹연습은 '밝고 즐거운 고교 생활'에는 반하는 것이므로 중지. 짧게 깎은 머리도 '밝고 즐거운 고교 생활'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가끔은 야구부 외의 친구들과 놀거나 가족과 보내지 않으면 '밝고 즐거운 고교 생활'을 보낼 수 없으므로 일요일 연습은 쉬는 것이 당연하고, '밝고 즐거운 고교 생활'은 공부도 빼놓을 수 없기 때문에 정기 시험 전 일주일은 야구부실을 닫는다.

  "요컨대 고교 생활의 일부인 거야, 야구는. 그 이상의 것이 아냐. 우리 때처럼 다른 걸 전부 희생해가며 야구에 몰입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달라."(p.158)

  진노도 가메야마도, 그리고 교코도, 현재를 살고 있다. 아무리 힘들어도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시간 속에 있다. 나는 이 마을에 돌아와서 옛날 일만 돌아보고 있다. 이 마을에 남은 추억을 끄집어내는 것만이 나의 일상이었다.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아니면, 도망가도 된다고 교코는 말했다.(p.159)

  달려 나가는 쪽이 빠르다고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1루에 헤드슬라이딩을 하길 바란다. 수비에 나가고 들어올 때는 전력질주를 하길 바란다. 한여름 폭염 속을 달리는 것이나 빗속에서 공을 쫓는 것의 '의미' 따위 묻고 싶지 않다. 햇볕에 새까맣게 그을리고, 집에 오면 시체처럼 쓰러져 자고, 이기면 친구와 얼싸 안고, 지면 아이처럼 울기도 하고, 그게 내가 생각하는 '고교구아'였다.(p.174-175)

  나이를 먹고 있다고는 말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젊음을 잃어가고 있다. 하룻밤 자고 나도 풀리지 않는 피곤이 몸속 깊숙이 엉겨 붙는다. 마음속은 어떨까. 여든 살까지 산다고 하면 아직 반환점을 돌기도 전인데, 장래의 꿈을 그릴 여지는 이제 별로 남아 있지 않은 듯한 기분이 든다.(p.179)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추억 이야기만 하고 있을 순 없다.

  꿈 이야기만 나눌 수도 없다.

  달콤새콤하지도 않고 장밋빛도 아닌 현실을, 설령 무거운 걸음이라 해도 한 걸음씩 내디디지 않으면 안 된다.(p.194)

  "그럼, 그런 식으로 도망가지 마."

  나도 모르게 어깨가 움찔했다.

  도망가도 돼, 하고 말해준 사람이 있었다.

  20년 전에 도망쳤고, 그래서 살았고, 지금 고향에 돌아온 사람이 있다.(p.229)

  "고교 야구란...... 슈코의 야구란 지는 것에 묘미가 있다고 우린 자와 옹께 배웠습니다. 고교 야구에서 계속 이기는 학교는 고시엔에서 우승하는 단 한 곳밖에 없습니다. 어느 학교나 한번은 집니다. 지는 것이 고교 야구입니다. 자와 옹, 당신은 우리들에게 져도 가슴을 펴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지는 것이 얼마나 멋지고 소중한 경험인지를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었습니다. 우리는 어른이 되어도 지는 일뿐이었습니다. 계속 이기기만 하는 사람은 필시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당신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잘 싸웠다, 잘 싸웠어.'하고...... 어른이 되고 나서 자와 옹 당신의 목소리가 고교 시절 이상으로 또렷하게 들립니다. 그 목소리에 힘을 얻고, 용기를 얻으며 우리는 인생이라는 이름의 그라운드에 서서 행복이라는 이름의 백구를...... 아니 열구를 쫓아다니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자신을 응원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우리는 당신께 배웠습니다......"(p.251-252)

  빚에 시달리며 손님이 오지 않는 가게를 하는 친구, 불임으로 아내와 부모의 갈등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친구, 싱글맘으로 트럭 운전을 하며 아들을 키우는 친구... 요지만 해도 재취업을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하고 딸의 진로를 생각해야 한다. 도쿄로 돌아가 살기를 원하는 아내와 외동아들로서 홀로 계신 아버지를 부양해야 하는 책임감이 마음을 무겁게 한다. 요즘에 하는 야구는 내가 했던 옛날의 야구와 다르고... 인생의 반환점을 코앞에 둔 나이에 마냥 과거를 추억하며 살 수 없고 미래를 꿈꾸기는 더 어렵다. 그래도 한 걸음씩 나아가야 한다.

  비슷한 나이라서 그런지 책을 읽는 내내 시미즈 요지에게 감정의 이입이 많이 되었다. 막연히 결정을 뒤로 미루는 어쩌면 우유부단한 모습까지도 비슷하고... 원래 야구의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이 책을 선택하고 읽기 시작했다. 물론 야구 이야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인생의 절반을 사는 남자에게 잠시 뒤를 돌아보고... 다시 앞을 내다보며... 한 걸음씩 전진하기를... 그리고 아주 힘들어 죽을 것 같으면, 도망쳐도 괜찮음을... 우리의 인생은 승패와 관련 없이 열정만으로 빛나고 있음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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