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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하는 칼날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선희 옮김 / 바움 / 2008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히가시노 게이고, 이선희 역, [방황하는 칼날], 바움, 2008.
Higashino Keigo, [SAMAYOU YAIBA], 2004.
일본 미스터리에 빠져가는 과정에서 어김없이 등장하는 이름은 바로 '히가시노 게이고'이다. 물론 표본 추출이 잘못되었고 객관적이지 못하다는 시비를 걸어온다면, 할 말은 없지만... 개인적인 경험으로 내 주변의 대부분은 그를 통해서였다고 한다. 다작을 쏟아내서 쉽게 작품을 만날 수 있고 어느 정도의 재미를 보장하고 있어서, 나는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이름의 어감이 좋아서... 이런저런 다양한 이유로 일본 미스터리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익숙해졌다고 해야 하나, 한동안 그의 소설을 읽지 않았다. 가장 최근이 [신참자](재인, 2012.) 정도이니, 새로운 번역이 나와도 그냥 무관심하게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무슨 바람이 불었을까? [방황하는 칼날]은 영화의 개봉으로, 갑작스러운 관심으로 단숨에 읽었다.
과거에 일어난 몇몇 부조리한 사건들이 그의 뇌리에서 되살아났다. 범인이 항상 사형에 처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미성년자인 경우에는 이름도 공표되지 않고, 사형에 처해지는 일도 없다.
소년법은 피해자를 위한 것도, 범죄방지를 위한 것도 아니다. 청소년은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는 전제 하에서, 그들을 구제하기 위해 있는 것이다. 그것에는 피해자와 그 가족의 슬픔과 분노는 반영되지 않고, 현실을 무시한 이상적인 도덕만이 존재한다.(p.88)
사회파 미스터리의 매력은 사건과 수사의 과정보다 범죄의 원인에 초점을 맞추어 인간의 본성을 깊이 있게 다룰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상의 다양한 문제를 이야기 안으로 끌어들여 독자로 하여금 문제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식하게 하고 간접으로 경험하게 한다. [방황하는 칼날]은 일본의 '소년법'을 소재로 하여 청소년 범죄와 형벌의 수위에 관한 논란을 다루고 있다.
이미 아시리라고 생각하지만 아쓰야는 제가 죽였습니다. 구태여 말씀드리자면 동기는 물론 딸의 복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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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껍질을 뒤집어쓴 짐승들은 친절하게도 에마를 유린하는 모습을 비디오테이프에 담아두었더군요. 딸이 유린당하는 모습을 직접 본 아버지의 심정을 이해하실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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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쓰야는 미성년자입니다. 더구나 의도적으로 에마를 죽인 게 아니라고 주장한다면, 가령 변호사가 알코올이나 마약으로 인해 정상적인 판단력을 잃어버린 상태였다고 주장한다면 도저히 형벌이라고 할 수 없는 판결이 내려질 우려가 있습니다. 미성년자의 갱생을 우선해야 한다는, 피해자와 그 가족의 심정을 털끝만큼도 생각하지 않는 상황이 펼쳐지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훤합니다.(p.172-173)
사랑하는 딸 아이가 납치되어 마약에 취해 성폭행을 당하고 시신으로 발견된다면, 이것을 보고 가만히 앉아 경찰의 수사만을 믿고 기다리는 아버지는 얼마나 될까?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누군가에 의해 범인에 관한 정보를 얻게 된다면... 나가미네는 몇 년 전에 아내를 잃고 딸과 함께 평범한 생활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들과 불꽃놀이를 보러 간다던 딸은 밤이 늦도록 귀가하지 않는다. 휴대전화는 꺼져있고, 친구들에게 연락해 보아도 행방을 알 수 없다. 실종신고를 하고 이틀이 지난 후에 딸은 반라의 시신으로 발견된다. 장례를 치르고 절망으로 지내고 있을 때에 한 통의 전화는 범인에 관해 알려준다. 그들은 아직 성인이 아닌 미성년자로, 여자를 납치해 마약을 투여하고 성폭행을 하며 그 장면을 고스란히 비디오 촬영하여 신고하지 못하도록 협박한다. 아버지는 그들을 하나씩 추적하는데...
자신에게 죄를 심판할 권리가 없다는 것을 그도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법원의 일이다. 그런데 법원은 범죄자를 제대로 심판하는가? 아니다. 법원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신문과 텔레비전을 통해 재판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어떤 사건에 어떤 판결이 내려졌는지 그도 조금은 알고 있다. 그것을 보면 법원은 범죄자에게 정당한 심판을 내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오히려 법원은 범죄자를 구해준다. 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갱생할 기회를 주고, 증오하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범죄자를 숨겨준다.
그것을 형벌이라고 할 수 있을까? 더구나 그 기간은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짧다. 한 사람의 인생을 빼앗았음에도 불구하고 범죄자는 인생을 빼앗기지 않는다. 더구나 아쓰야와 마찬가지로 가이지도 미성년자이리라. 에마를 죽음에 이르게 한 일이 의도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면, 어쩌면 교도소에도 가지 않을지 모른다.(p.128-129)
소설은 단순히 억울하게 죽은 딸의 원한을 갚기 위해 살인도 서슴지 않는 아버지의 어긋난 부정(父情)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미성년자의 범죄와 처벌에 관한 논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것과 비슷한 내용으로 야쿠마루 가쿠의 [천사의 나이프](황금가지, 2009.)가 있는데, 피해자의 처지에서 가해자를 엄벌해야 한다는 주장과 가해자의 처지에서 아직 어리기 때문에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의 첨예한 대립을 매우 잘 묘사하고 있다. 이 소설도 비슷한 맥락으로 내용을 전개하고 있는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피해자의 시선이 강조되어 독자로 하여금 객관적인 판단을 내리기보다는 감정적인 판단을 내리도록 하고 있다. 아무튼, 딸을 죽인 범인을 추적하는 아버지와 피해자에서 새로운 가해자로 뒤바뀐 아버지를 뒤쫓는 경찰은 흔들리는 논리에서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간다.
다카아키는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체스는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처음에는 모든 말을 다 가지고 있지. 그대로 있으면 평온하게 지낼 수 있지만 게임인 이상 그런 건 허용되지 않아. 어떻게든 움직여서, 자기의 진지에서 나가지 않으면 안 되지. 그리고 많이 움직일수록 상대 말을 쓰러뜨릴 수도 있지만 그만큼 자기도 말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어. 그런 면이 사람의 인생과 똑같지 않니? 또 상대의 말을 빼앗았다고 해서 지가 것으로 만들 수도 없지."(p.217)
"경찰이라는 건 무엇일까? 경찰은 과연 정의의 편일까? 아니야, 경찰은 단지 법을 어긴 사람을 잡고 있을 뿐이야. 경찰이 지키려고 하는 건 시민이 아니라 법이란 말이지. 경찰은 법이 상처 입는 것을 막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뛰어다니고 있어. 그런데 그 법이란 게 절대적으로 옳을까? 절대적으로 옳다면 왜 끊임없이 개정되고 있을까? 법은 결코 완벽하지 않네. 그 완벽하지 않은 법을 지키기 위해 왜 경찰은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걸까? 그 법을 지키기 위해 선량한 사람들의 마음을 마구 짓밟아도 되는 걸까?"(p.534)
복수의 길을 걷는 아버지는 사냥 총을 가지고 다니는데, 제목은 왜 '방황하는 칼날'인가? 책을 다 읽기 전에는 (아버지에게 감정이 이입되어) 총을 잃어버리고 칼로 복수를 이루는 것으로 예상했다. 흔들리는 감정으로 방황하는 이를 아버지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책을 읽은 주변인들에게 물었을 때에, 흔들리는 것은 일본의 사법체계라는 답변부터 사무라이 정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의견을 들을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책을 읽는 내내 아버지의 복수가 성공하기를 바랐는데, 이것은 요즘에 우리의 사법질서가 바람 부는 들판의 갈대처럼 이리저리 흔들리고 공정하지 못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특유의 빠른 가독성 하지만 예측 가능한 아쉬운 전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