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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베르나르 베르베르, 이세욱, 임호경 역,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 열린책들, 2011.
Bernard Werber, [NOUVELLE ENCYCLOPEDIE DU SAVOIR RELATIF ET ABSOLU], 2009.
몇 년 전, 아메데오 모딜리아니의 작품 전시회에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그가 그린 길쭉한(?) 형상의 여인 초상화를 매우 좋아해서 정말 큰 기대를 하고 찾았습니다. 작품 사이 사이에는 습작들도 함께 전시되었는데요. 역시 명작은 한 번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습작의 과정을 거친다는 것을 다시금 알게 되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열광적인 팬은 아니지만, 그가 쓴 어느 에세이의 서문에서 '소설가의 머릿속 서랍'이라는 표현이 떠오릅니다. "소설가는 소설을 쓸 때 머릿속에 많은 서랍이 필요합니다. 자잘한 에피소드, 사소한 지식, 작은 기억, 개인적인 세계관(같은 것)... 소설을 쓸 때면 그런 소재가 여기저기에서 도움이 됩니다."([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비채, 2012. p.6) 다른 창작물과 마찬가지로 소설도 여러 번의 시행착오와 꾸준한 준비가 있어야 하는군요. 역시 세상에는 쉬운 일이 없다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만약 소설가의 서랍이나 컴퓨터 폴더, 또는 비밀 노트 같은 것을 몰래 훔쳐볼 수 있다면 어떨까요? 조금은 발칙한 생각이지만, 매우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더구나 내가 좋아하는 작가라면...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은 마치 이러한 바람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소설의 재료가 듬뿍 담긴 소설가의 비밀 노트를 '상상력 사전'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드러내 보입니다.
186. 성장
옛날에 경제학자들은 성장하는 사회가 건전한 사회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성장률은 국가, 기업, 가계 등 모든 구조의 건강성을 재는 척도가 되었다. 그러나 고개를 숙인 채 늘 앞으로만 돌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팽창이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 우리를 압도하기 전에 그것을 중단시켜야 할 때가 왔다. 경제적 팽창주의에는 미래가 없을 것이다. 오래 지속될 수 있는 상태는 하나뿐이다. 힘의 균형이 바로 그것이다. 건전한 사회, 건전한 국가, 건전한 노동자란 주위 환경을 해치지도 않고 주위 환경에 해를 입지도 않는 사회나 국가나 노동자다. 우리는 더 이상 자연과 우주를 정복하려 하지 말고, 오히려 자연과 우주에 통합되어야 한다. 우리의 유일한 슬로건은 조화이다. 외부 세계와 내부 세계 사이의 조화로운 상호 침투가 필요하다.
인간 사회가 더 이상 자연 현상 앞에서 우월감이나 열등감을 갖지 않게 되는 날, 인류는 우주와의 항상성을 유지하게 될 것이다. 그때 인류는 평형 상태를 맞게 될 것이고, 다시는 미래에 자신을 던지지 않게 될 것이며, 멀리 있는 목표에 매달리지도 않을 것이다. 인류는 아주 소박하게 현재 속에서 살게 될 것이다.(p.332)
236. 왜와 어떻게
장애물이 앞에 나타났을 때, 사람이 보이는 최초의 반응은 대개 <왜 이런 문제가 생긴 거지? 이것은 누구의 잘못이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는 잘못을 범한 사람을 찾고 다시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그에게 부과해야 할 벌이 무엇인지를 찾는다.
똑같은 상황에서 <왜 일이 제대로 되지 않았을까?>라고 자문하는 사람들과 <어떻게 하면 일이 제대로 되게 할 수 있을까?>라고 자문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큰 차이가 생길 것이다. 현재 인간 세계는 <왜>라고 묻는 사람들이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언젠가는 <어떻게>라고 묻는 사람들이 다스리는 날이 반드시 오게 될 것이다.(p.406)
307. 함께 있기
수피즘 철학에 따르면, 벗들이나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앉아 있는 것은 행복을 얻는 방법 중에서도 으뜸가는 것에 속한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 행위도 하지 않고 그저 함께 앉아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 서로를 바라보아도 되고 바라보지 않아도 된다. 같이 있으면 기분 좋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 자체가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다. 더 이상 마음을 쓰거나 떠벌릴 필요도 없다. 그저 말없이 함께 있음을 즐기기만 하면 된다.(p.510)
꾸준한 작품 활동으로, 어쩌면 프랑스보다도 국내에서 더 많은 인기를 누리는 작가는 이미 열네 살 때부터 소설을 위한 혼자만의 비밀스러운 기록을 해왔다고 합니다. 30년 이상 써온 그의 노트에는 스스로 떠올린 영감, 상상을 촉발하는 이야기, 발상과 관점을 뒤집어 놓은 사건, 인간과 세계에 관한 자신의 독특한 해석... 등 다양한 내용이 차곡차곡 쌓여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추려 총 383개의 색인으로 편집하였습니다.
개인적으로 '상상력 사전'이라는 제목이 매우 마음에 듭니다. 책을 읽으며 풍부한 지식과 다양한 사고를 접할 수 있어서 실제로 상상의 폭이 넓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리스 신화가 잘 정리되어 있고, 감성적인 시가 있으며, 인간의 심리 분석과 사회학적인 이론, 물리학의 법칙, 철학적 사고, 역사, 음식, 문화, 상징... 그리고 가십에 이르기까지 여러 방면에서 세계관을 자극합니다. 그의 소설을 읽으신 분들은 소설의 모티브나 소재로 사용된 내용을 발견할 수도 있을듯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