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6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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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토 가나에, 김선영 역, [경우], 비채, 2013. 

Minato Kanae, [KYOGU], 2011.

 

  어린 시절에 유리창 너머로 진열된 장난감이 무척이나 가지고 싶어서 만약 상점 주인의 아들로 태어났으면 어땠을까? 라는 상상을 해 본 적이 있습니다. 학창 시절에는 영어 단어를 외우는 것이 매우 귀찮아서 미국이나 영미권 국가에서 태어났으면 어땠을까? 라는 상상도 해 보았고요. 사회에 나와서는 부모님께서 좀 더 영향력이 있었더라면...? 일본소설을 읽으면서는 일어 환경에 더 많이 노출되었더라면...?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가끔은 끊임없는 욕망을 상상해 봅니다. 하지만 결론은 항상 상대적으로 기근이나 내전에 시달리는 아프리카의 어느 나라에서 태어나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는... 판단으로 자신을 위로하며 정신을 차립니다.

 

  사람을 대하다 보면, 종종 어떻게 저런 말(행동)을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와는 전혀 다른, 일반적인 상식이 통하지 않는 때가 있습니다. 도무지 대화가 되지 않아서 답답한 마음에 그 사람의 생활 환경을 의심해 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출생의 처지나 살아온 형편이 삶을 좌우하는 것일까요? 인생은 한 개인의 노력으로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여겨지지만, 사실 성숙한 인격을 갖추고 흔히 말하는 자수성가를 이루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모두 나름대로 처지나 형편이 있을 테니까요.

 

  경우(境遇)

  1) 사리나 도리

  2) 놓이게 된 형편이나 처지

 

  기막힌 사연으로 부모를 잃었거나 억울한 일을 당해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고아로 자라야 했다면? 다행히 빠른 입양으로 좋은 양부모를 만나 유복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면? 아니, 입양이 거부되어 성인이 될 때까지 시설에 위탁되어 있어야 했다면? 성격이나 인생의 방향이 전혀 다른 두 여자가 단지 출신이 고아라는 것으로 친구가 될 수 있었을까요?

 

  "우리가 둘도 없는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건, 처지가 같아서일까?"(p.44-45)

 

  이미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작가 미나토 가나에의 새로운 소설 [경우]입니다. 매번 그녀의 작품이 나올 때마다 제목을 눈여겨보는데요. 이전의 [고백](비채, 2009.)에서는 등장하는 인물의 고백으로 모든 서사가 진행되었다면, [왕복서간](비채, 2012.)에서는 주고받은 편지로 모든 전개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어쩌면 비슷한듯하면서도 다른 인생을 사는 두 여인의 삶과 경우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요코의 부모님이 누군지, 내 부모님이 누군지는 몰라. 그건 사실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어느 날 갑자기 땅에서 불쑥 솟아난 건 아니야. 누군가의 뱃속에 있다가 태어난 거지. 누군가와 이어져 있다는 사실은 분명해. 단지 그게 누군지 모를 뿐이지. 모른다고 해서 다음 세대로 이어지면 안 된다는 건 이상하잖아? 애초에 자기가 누구와 이어져 있는지 아는 것도 삼사 대가 고작이잖아. 요코는 요코의 아버지, 어머니와 이어져 있어. 나는 내 아버지, 어머니와 이어져 있고."(p.46-47)

 

  요코와 하루미는 출생의 비밀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도시에서 어린 시절 보육 시설에 맡겨졌습니다. 다행히 요코는 빠르게 입양되어 비교적 유복하게 자라났고, 지방의회 의원인 남편과 아들을 두고 모범적으로 살아갑니다. 하루미는 보육 시설에서 자라나 자신의 부모를 찾기 위해 기자라는 직업을 선택했고, 여전히 싱글로 살고 있습니다. 이 둘은 봉사활동을 하면서 만나게 되었는데, 다른 인생을 살면서도 서로의 출신이 비슷해서인지 깊은 유대를 형성하고 둘도 없는 친구가 됩니다. 고민을 들어주고, 진심으로 조언하는...

 

  도리에 어긋난 일이라도, 깨닫지 못하면 죄가 되지 않는 걸까?

  깨닫지 못하면 죄가 되지 않는 걸까?

  잊어버리면 죄가 되지 않는 걸까?

  죄가 되지 않으면 벌받을 일도, 속죄할 필요도 없이 태연한 얼굴로 행복하게 살아도 되는 걸까?(p.85-86)

 

  그러던 어느 날, 요코는 하루미의 엄마와 관련된 이야기를 <파란 하늘 리본>이라는 그림책으로 엮어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하루미는 요코의 재능을 칭찬하며 축하해 주는데요. 정치가의 아내로, 인기 작가로 바쁜 일정을 소화하는 요코에게 뜻밖의 사건이 일어납니다...

 

  소설의 시점은 [소녀](은행나무, 2010.)에서와 마찬가지로 두 주인공을 중심으로 번갈아가며 각자의 시선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코와 하루미의 심리묘사는 단연 일품인데요. 겉으로는 순탄하게 보여도 정치가의 아내로, 명문가의 며느리로 살아가는 고뇌와 자녀를 향한 간절함이 요코를 통해서 드러납니다. 자유를 만끽하는 화려한 싱글처럼 보이나 아직 제대로 된 가정을 이루지 못하고, 친부모를 찾기 위해 과거에 집착한 불안정함이 하루키를 통해서 드러납니다. 그리고 주변 인물 각자의 처지와 형편에 관한 치밀한 묘사가 매우 마음에 듭니다. 더구나 화해와 힐링의 메시지까지...

  이번 작품에서도 독특한 구성으로 완벽한 짜임새를 갖추는 작가의 글솜씨는 마치 작은 톱니바퀴 하나하나가 맞물려 시곗바늘을 정확히 움직이게 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대부분은 [고백]과 비교하여 이번에도 전작을 넘어서지 못했다고 평가를 하는데요. 개인적으로 그녀는 꾸준히 진화하고 있고, 이번에도 그녀만의 스타일로 제대로 된 작품을 썼다는 평가를 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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