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고코로
누마타 마호카루 지음, 민경욱 옮김 / 서울문화사 / 201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누마타 마호카루, 민경욱 역, [유리고코로], 서울문화사, 2012. 

Numata Mahokaru, [YURIGOKORO], 2011.

2012 오오야부 하루히코 대상

 

  모두가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유명 사진 사이트에서 일반적으로 초보와 고수를 구분하는 재미있는 말이 있습니다. "초보는 카메라를 볼 때 행복하고, 고수는 사진을 볼 때 행복하다.", "초보는 무슨 카메라로 찍었는가를 보고, 고수는 어떻게 찍었는가를 본다.", "초보는 남들이 찍는 사진을 따라서 찍고, 고수는 자기만의 사진을 찍는다.", "초보는 좋은 사진을 보면 흉내 내려 하고, 고수는 한발 늦었다고 생각한다."... 세상에는 사진을 잘 찍는 사람이 많지만, 모두가 다 프로 사진가가 되지는 못합니다. 세상에는 노래를 잘하는 사람이 셀 수 없이 있지만, 모두가 다 김건모나 신승훈이 되지는 못합니다. 세상에는 글을 꽤 쓴다는 사람이 줄 서 있지만, 모두가 다 ???작가의 반열에는 오르지 못합니다. 남들이 따라 할 수 없는 개성, 누가 보아도 원작자를 짐작할 수 있는 독보적인 작품에 눈길이 더 가는 것 같습니다.

 

  [유리고코로]는 1948년에 태어나 56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로 등단하여, 일본 전역에서 '누마타 붐'을 일으키고 있는 누마타 마호카루의 소설입니다. 늦깎이 작가의 수많은 인생 경험과 승려, 회사 경영이라는 독특한 이력이 그녀의 창작 활동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 궁금하고 기대됩니다. 그런데 개성과 독보적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유리고코로]는 약간의 아쉬움이 남습니다.

 

  작품은 전체적으로 재미있고, 흥미로운 구성으로 전개됩니다. 애견 카페를 운영하며 평온하게 살던 료스케에게 어느 날 갑자기 잇따른 불행이 찾아옵니다. 할머니는 치매를 앓아 요양원으로 가고, 약혼자는 이유 없이 사라집니다. 더구나 아버지는 췌장암 말기 판정을 받아 치료를 거부하고, 하필이면 이러한 때에 어머니는 교통사고로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합니다.

 

  본 적이 없다... 그런데 본 기억이 있다. 그런 기묘하게 뒤틀린 감촉이, 세월에 바랜 가죽과 녹이 슨 금속 장식에서 얼룩처럼 차분하게 전해진다. 왠지 몸이 떨리는 것만 같다.(p.12)

 

  그것은 내가 네 살쯤 됐을 때니까 지금부터 20년도 더 된 옛날 일이다.

  폐렴인지 뭔지로 나는 장기간 입원한 적이 있는데, 마침내 퇴원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어머니가 다른 사람으로 바뀐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이 머리털을 보지 않았다면 분명 평생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p.15)

 

  유리고코로

  저처럼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죽이는 사람은 뇌 구조가 보통 사람과 다르겠죠.(p.21)

 

  료스케는 현실의 무게에 짓눌리며 본가에 왔다가 아버지의 서재에서 검은 머리털이 담긴 낡은 핸드백과 빽빽한 글자로 가득한 빛바랜 노트 네 권을 발견합니다. 핸드백 속에는 어머니의 이름이 적힌 검은 머리털이, 노트에는 살인을 고백하는 생생한 이야기가 쓰여 있습니다. 왜 어머니의 이름이? 그리고 살인의 고백은 누가? 도대체 어떤 진실이 숨어있는 것일까요?

 

  의사는 유리고코로가 없는 것은 매우 큰 문제라고, 또 이 아이만의 유리고코로를 찾아내면 좋을 텐데...(p.23)

 

  그곳에 인형도 드문드문 놓여 있었습니다... 눈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주위에 범람하는 색채도, 공격적인 소음도 거짓말처럼 잦아들었습니다. 그 아이가 유리고코로라는 것을 금방 이해했습니다.(p.24-25)

 

  어린 시절의 의사는 분명 '요리도코로(안식처)'라고 했으리라고 지금은 생각합니다. '감각적인 안식처' 또는 '인식의 안식처' 혹은 '마음의 안식처'라는 게 이 아이에게는 없다고... 웅얼웅얼 얘기했기 때문에 어린아이의 귀에는 잘 들리지 않았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참 이상하게도 잘못 들은 셈입니다.(p.48)

 

  노트 속에서 마음의 안식처가 없는 아이는 정기적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유리 진열장 안의 낡은 합성수지로 만든 인형을 통해 유리고코로(요리도코로, 안식처)를 발견하게 됩니다. 아이는 그 유리코 인형을 대상으로 가학적인 행위를 함으로 안식을 얻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반사회적 성격장애는... 초등학교 시절에 우연히 친구가 연못에 익사하는 단서를 제공하고, 공원에서 우발적인 압사 사고를 일으킵니다. 자라난 아이는 칼로 손목을 긋는 자해를 도우며, 거리에서 몸을 파는 것으로 절정을 맞이합니다.

 

  "시험 삼아 제가 그어볼까요, 어떤 느낌인가 보게."

  특별히 저항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는 미쓰코의 손목을 누르고 조금 전의 상처와 평행하게 또 하나의 붉은 선을 그었습니다... 테이블 위에 각자의 상처 입은 팔을 내놓고 우리는 서로 마주보았습니다. 두 팔목에서 몇 줄기 피가 가늘게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p.98-99)

 

  "저기요, 미쓰코 씨, 꼭 가요. 하코다테보다, 홋카이도보다 더 먼 곳, 어디 외국에 안 갈래요? 이름도 들은 적 없는 그런 마을로 언젠가 같이가요."

  미쓰코의 왼손에 비닐봉투를 씌우면서 얘기했습니다... 미쓰코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다 알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먼 곳의, 우리 가게..."

  "맞아요. 작지만 꽃향기 속에서 커피를 마셔요."

  한 번으로 끝내기 위해 깊고 길게 칼을 넣었습니다. 팔을 반쯤 자르는 것처럼.(p.107-108)

 

  작가는 유리고코로를 향한, 안식을 얻기 위한 욕망의 분출을 매우 아름답고 감정적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이코패스의 살인 본능이 충족되는 과정을 관능적인 미스터리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실의 료스케와 과거의 살인자가 교차로 진행되는 시점은 입체적인 구성으로 또 하나의 재미를 줍니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한 개성과 독보적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개인적으로 가해자의 잔혹함에는 기리노 나쓰오의 [잔학기]가 떠올랐고, 살인자의 독백은 미나토 가나에의 [고백]을 읽는 듯했으며, 현실에서 약혼자의 실종은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가 연상되었습니다. 그래서 독창성보다는 짜깁기의 느낌이 강했습니다. 노트 속 과거의 살인자는 모든 문제의 발단입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이 살인자를 통해서 모든 갈등이 해소되고 완전한 결말을 향하게 됩니다. 작품의 재미와는 별개로 살인과 가학이라는 끔찍하고도 파렴치한 행위를 미학적으로 왜곡하는 내용이 다분히 포함되어서 마음의 불편함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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