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시골무사 이성계 - 운명을 바꾼 단 하루의 전쟁
서권 지음 / 다산책방 / 2012년 3월
평점 :
서권, [시골무사 이성계], 다산책방, 2012.
우리 곁을 떠난 작가의 유작을 대할 때마다 쓸쓸함과 애절함이 진하게 다가온다. 꺼져가는 불꽃을 사르며 창작에 몰입한 열정이 느껴지고, 다시는 작품을 기대할 수 없다는 아쉬움이 크게 남는다. [시골무사 이성계]는 누군가의 친구로, 누군가의 남편으로, 누군가의 아버지로 살다가 모두를 남겨두고 홀연히 떠난 어느 무명작가의 첫 출판소설이자, 마지막 유작이다. 자신의 미래를 미리 짐작이라도 했던 것일까? 평생의 한이라도 맺힌 것처럼 밤낮으로 집필에 몰두하여 원고노동자처럼 살았다는 소개 글을 보며, 인생은 짧아도 그가 남긴 예술은 영원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시골무장, 물정 모르는 변방의 늙다리, 화살 하나 들고 설치는 천둥벌거숭이... 중앙군과 관리들은 그를 그렇게 멸시했다. 여진족과 평생을 보낸 저놈도 별수 없는 야인 오랑캐야.(p.40)
진정 나라를 구하길 원하는 것인가, 아니면 나라가 뒤엎이길 바라는 것인가, 아니면 내가 죽기를 바라는 것인가.(p.10)
몇 달 동안 아무도 막지 못한 왜적을 요행히 물리치기라도 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중앙지원군이 거의 없이 어찌 싸움을 치르라는 것인지, 그는 도무지 납득이 가질 않았다. 지면 죽음으로 답해야 하고, 이기면 그것으로 그만인 싸움.(p.41)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고, 살아남은 자의 이야기이다. 역사는 보는 시각에 따라서 해석의 차이가 있고, 의미가 다르게 전달된다. 이성계는 고려의 부패를 몰아낸 영웅이기도 하지만, 또한 최영이라는 충신과 비교되어 배반자라는 낙인이 따라다닌다. 이성계는 당대의 천재였던 정도전을 품은 대인으로 묘사되지만, 또한 정도전의 손바닥에서 놀아난 말로 그려지기도 한다. 이성계는 개국과 함께 조선의 첫 번째 임금이 되는 영광을 누렸지만, 또한 아들 이방원의 난을 겪으며 혈육과 동지의 죽음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뒷방늙은이 신세였다. 이렇게 화려함과 어둠이 공존하는 이성계의 삶을, 작가는 변방에서 구르던 46세의 나이 든 시골무사에서 출발하여 생사의 갈림길에서 하루의 전쟁을 통해 인생의 변혁을 꿈꾸는 인물로, 또 다른 시각의 이성계를 만들어 내었다.
"우리는 개경을 부수고 고려를 차지할 것이다. 몽골의 속국 고려를 우리가 해방시킨다. 고려는 우리 땅이다. 여기에서 수십 만 남조군을 만들어 오만한 북조군을 칠 것이다. 남북조의 통일 그것이 우리가 고려에 온 목적이다."(p.93)
북원은 20년이 다 되도록 고려가 유일한 생존의 끈이었다. 고려군을 일으켜 연경을 친다면 반 토막 고토라도 회복할 수 있어 다행이겠다 싶었다. 고려군이 왜적을 이겨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왜적을 빨리 몰아내고 중앙군의 세력을 응집시켜 연경을 향해 말을 몰아야만 했다. 원의 재촉은 갈수록 강력해졌지만, 명나라 피 묻은 병장기는 서서히 압록강 건너를 노리고 있었다.(p.150-151)
역사는 1380년 고려에 침입한 왜적을 이성계가 물리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서권의 소설은 이러한 역사의 토대 위에 작가의 상상력을 총동원하여 장대한 팩션을 완성한다. 황산은 단순히 도적 떼와 토벌군의 대치가 아니라, 당시 동아시아의 국제정세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북조에게 밀려 더이상 갈 곳이 없는 이들은 고려의 땅에서 세력을 회복하고 돌아가 남북조의 통일을 이루기를 원한다. 한때, 대륙의 지배자였던 원은 고려를 이용해 조금이라도 옛 영광을 되찾기를 원한다. 그리고 새롭게 일어선 명은 고려에 대한 외교를 강화하여 원을 견제하고 대륙의 새로운 주인이 되기를 원한다. 황산은 전쟁과 함께 자국의 이권을 두고 치열한 외교전이 펼쳐지는 격전의 현장이다.
당신들이 왜적을 왜 자꾸 왜구라고만 낮추어 부르는지 그 이유를 내 입으로 설명하지. 침략자들이 다름아닌 왜국의 정규군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여태 대책을 강구하지 않은 자신들의 과오가 노출될까봐 그게 두려운 게지. 젊은 문무 관료들의 질타가 빗발칠 것이고 자신들의 담합이 위태로워지겠지. 권력의 안주에 깊은 맛이 들어서, 당신네들이 누린 기득권을 포기할 수가 없는 것이지."(p.55-56)
소설은 고려와 왜적의 대결만이 아니라, 등장인물 간의 명확한 갈등 구조를 통해서 이야기를 입체적으로 전개한다. 군대의 작전권을 두고 이성계와 변안열은 갈등하고, 외교권을 두고 명나라 사신과 원나라 파견관은 갈등한다. 그리고 신진 개혁을 대변하는 삼봉 정도전과 보수 권문을 옹호하는 포은 정몽주의 갈등도 적나라하게 묘사된다. 그리고 이러한 대립과 갈등은 어떠한 화해나 해결 없이 끝을 향해 달려간다. 세상은 이날 단 하루의 전쟁을 통해서 모든 것이 뒤바뀐다.
[시골무사 이성계]는 마치 말을 타고 활을 쏘며 들판을 누비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생생함이 느껴지는 소설이다. 또한, 전장의 긴박감과 박진감, 전쟁에 임하는 군인의 비장함을 엿볼 수 있는 진지한 소설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상의 변혁을 꿈꾸며 권력투쟁을 완성하지만, 결국에는 모든 것을 버리는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또다시 이런 작품을 만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