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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망가 섬의 세사람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9
나가시마 유 지음, 이기웅 옮김 / 비채 / 2009년 11월
평점 :
절판
나가시마 유, 이기웅 역, [에로망가 섬의 세 사람], 비채, 2009.
Nagashima Yu, [EROMANGATOU NO SANNIN NAGASHIMA YU ISHOKU SAKUHIN SHUU], 2007.
새로운 작가를 만날 때마다 생기는 호기심과 기대감은 독서의 또 다른 즐거움 중의 하나이다. 특히, 나가시마 유는 독특한 집필 과정이 내 시선을 잡아끌었다. 출근 걱정 없이 매일 늦잠을 자고, 대낮에 패스트 푸드를 먹으며, 쓰고 싶은 글을 쓰는... 아마도 창작의 고통을 제외한다면, 책을 좋아하는 모든 현대인이 꿈꾸는 삶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작가는 우리 모두를 놀리기라도 하듯이 한발 더 나아가, 문명 세계를 뒤로하고 남쪽 섬으로 떠나 일탈을 꿈꾸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에로망가 섬의 세 사람
여신의 돌
알바트로스의 밤
새장, 앰플, 구토
청색 LED
[에로망가 섬의 세 사람]은 노란 바탕에 빨간 비키니로 무장(?)하고, 멜랑꼴리(?)한 제목으로 독자를 유혹하고 있다. 총 5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표지와 제목만으로도 소설의 유쾌함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아쉬운 한가지는 하나하나의 단편이 나름대로 충분한 의미를 지니고는 있으나, 전체적으로 주제의 연관성이나 구성의 통일성이 없어서 책을 읽는 동안 좀처럼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오쿠다 히데오의 단편을 좋아하는데... 행복을 주제로 이야기를 모아놓은 [오 해피데이]나 30대 여성의 이야기를 모아놓은 [걸]이나 40대 남성의 이야기를 모아놓은 [마돈나]처럼 연관성과 통일성을 가지고 이야기를 모으면 어땠을까 하는 바람이 있다.
그럼에도 나가시마 유의 단편은 여운을 남기는 힘이 있는 것 같다.
'에로망가 섬의 세 사람'은 '에로망가 섬에 가서 에로 망가(만화)를 보자!'라는 조금은 엉뚱한 기획으로 잡지사 직원과 스폰서가 함께 여행하는 이야기이다. 이들은 세 번의 비행기를 갈아타고 문명과 동떨어진 섬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먹을 것을 걱정하고, 여자 친구를 걱정하고, 벌레 물릴 것을 걱정하고,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걱정하는 등 좀처럼 문명의 때를 벗겨 내지 못한다. 이들은 섬에서 에로 망가를 봐야 하는 직업적 책임이 있었지만, 섬 아이들의 순수함 앞에서 한 보따리의 에로 망가를 좀처럼 꺼내 들지 못한다. 그리고 결국에는 "여기서 평생 살아볼까"라는 말을 한다.
'여신의 돌'은 폐허가 된 도시에서 한 건물에 남아 있는 소수 생존자의 이야기이다. 폐허의 이유가 지진 때문인지, 원폭 때문인지, 아니면 고지라의 습격 때문인지 분명하지는 않으나... 그 안에서 그들은 순간의 쾌락을 위해 속고 속이는 경쟁을 벌인다.
'알바트로스의 밤'은 골프 선수의 아들로 어릴 때부터 골프를 치며 자라난 남자와 야쿠자의 딸로 어릴 때부터 총을 쏘며 자라난 여자의 밀월을 이야기한다. '새장, 앰플, 구토'는 한통의 이메일을 통해서 HM이라는 이니셜의 여자를 찾기 위해 옛 기억을 하나씩 더듬어 가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청색 LED'는 '에로망가 섬의 세 사람'의 뒷이야기로 미스터리한 스폰서의 사연을 담고 있다.
책은 두껍지 않고 쉽게 쓰여서 빠르게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단편의 특성상 이야기의 확실한 결론이 없어서... 오히려 결론을 상상하고, 남겨진 여운을 느끼느라 시간이 더 걸렸던 것 같다. 문명의 혜택은 없지만, 그래서 더 많은 것을 누리는 섬사람들의 여유로움이 그립다. 나도 언젠가는 일본소설을 한 보따리 싸들고 에로망가 섬으로 날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