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ㅣ 애거서 크리스티 에디터스 초이스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남주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12월
평점 :
애거서 크리스티, 김남주 역,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황금가지, 2002. 2013.
Agatha Christie, [AND THEN THERE WERE NONE], 1939.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는 작품의 제목과 중심 모티브가 되는 동요(자장가)에서 심각한 인종차별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었다. 1939년 영국 초판 발행 당시의 원제는 [열 명의 흑인 소년](Ten Little Niggers)이었고, 1940년 미국에서 출판할 때부터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And Then There Were None) 또는 [열 명의 인디언 소년](Ten Little Indians)으로 제목을 바꾸었다. 영국과 일부 국가에서는 원제와 동요 가사를 오랫동안 유지하다가, 비판이 거세지면서 영국은 1985년 판본부터 공식적으로 제목을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로 변경했다. 현대에는 문제가 되는 단어를 수정하고, 동요를 '열 명의 꼬마 병정'(Ten Little Soldier Boys) 등으로 바꾸어 출간한다.
배경이 되는 섬의 이름도 영국 초판에는 '흑인 섬'(Nigger Island)이었다. 이후 미국판에서 '인디언 섬'(Indian Island)으로 바꾸었다가, 현대에는 미국 원주민에 대한 비하 논란마저 완전히 해소하기 위해 '병정 섬'(Soldier Island)으로 출간한다.
"병정 섬이라? '석탄더미 속의 병정'처럼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섬이군."(p.44)
당대 영국 사회에 만연했던 인종차별적 동요와 표현을 추리소설의 핵심 트릭이자 장치로 가져다 썼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아왔으나, 현재는 모든 차별적 요소를 정화한 수정본이라고 한다.
"깨어서 기도하라. 깨어서 기도하라. 심판의 날이 다가왔도다."
노인은 통로에서 플랫폼으로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드러누운 채 그는 블로어를 올려다보며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
"자네에게 하는 말일세, 젊은 친구. 심판의 날이 눈앞에 와 있다네."(p.24)
아주 유명한 작품이라... 영화와 드라마 그리고 수많은 오마주를 통해 이미 결말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등장인물의 성격과 사건의 암시에 주목했는데, 개개인의 서사와 세밀한 설계가 압권이다. 그렇게 백만장자가 구매해 호화로운 저택을 지었다는 등 갖가지 소문이 무성한 병정 섬에 초대(고용) 되어 모인 사람은 총 열 명이다.
01. 로렌스 워그레이브, '교수형 판사'라고 불리던 은퇴한 판사, 레이디 콘스탄트 컬밍턴의 편지를 받고 섬에 왔다.
02. 베라 클레이슨, 학교 교사, 휴가철에 오웬 부인의 임시 비서로 일하게 되었다.
03. 필립 롬바드, 육군 대위 출신, 누군가로부터 거액의 보수와 비밀스러운 임무를 전달받았다.
04. 에밀리 브렌트, 독실하고 완고한 65세 부인, 과거 휴가지에서 알게 된 사람의 초대로 여름휴가를 보내러 왔다.
05. 존 맥아더 장군, 참전용사, 옛 친구를 만나 그 시절 얘기를 나눌 수 있다고 해서 초대에 응했다.
06. 에드워드 암스트롱 박사, 저명한 의사, 오웬 부인의 신경과민 증세를 진료하기 위해 왔다.
07. 앤터니 매스턴(토니 매스턴), 멋있는 외모와 속도를 즐기는 드라이버, 지인의 전보를 통해 파티에 초대되었다.
08. 윌리엄 블로어(데이비스), 경찰 경감 출신의 사립탐정, 신분을 감추고 오웬 부인의 보석 때문에 참석자를 감시하라는 의뢰를 받았다.
09. 토머스 로저스, 저택의 집사 겸 관리인으로 고용되었다.
10. 에델 로저스, 저택의 요리사 겸 가정부로 남편과 함께 고용되었다.
그들 대부분은 오웬 부부(얼릭 노먼 오웬, 유어 낸시 오웬 - U. N. Owen = Unknown, 익명의 존재)로부터 편지나 의뢰를 받았고, 또 한 가지 공통점은 전부 살인사건하고 관련되어 기소된 적이 있었다. 앞에서는 하나같이 냉정한 모습으로 정당성을 주장하지만, 뒤에서는 순간순간 망령에 사로잡혀 그때의 기억을 지우고 싶어 한다.
열 꼬마 병정이 밥을 먹으러 나갔네.
하나가 사레들었네. 그리고 아홉이 남았네.
아홉 꼬마 병정이 밤이 늦도록 안 잤네.
하나가 늦잠을 잤네. 그리고 여덟이 남았네.
여덟 꼬마 병정이 데번에 여행 갔네.
하나가 거기 남았네. 그리고 일곱이 남았네.
일곱 꼬마 병정이 도끼로 장작 팼네.
하나가 두 동강 났네. 그리고 여섯이 남았네.
여섯 꼬마 병정이 벌통 갖고 놀았네.
하나가 벌에 쏘였네. 그리고 다섯이 남았네.
다섯 꼬마 병정이 법률 공부 했다네.
하나가 법원에 갔네. 그리고 네 명이 남았네.
네 꼬마 병정이 바다 항해 나갔네.
훈제 청어가 잡아먹었네. 그리고 세 명이 남았네.
세 꼬마 병정이 동물원 산책 했네.
큰 곰이 잡아갔네. 그리고 두 명이 남았네.
두 꼬마 병정이 볕을 쬐고 있었네.
하나가 홀랑 탔네. 그리고 하나가 남았네.
한 꼬마 병정이 외롭게 남았다네.
그가 가서 목을 맸네. 그리고 아무도 없었네.(p.39-40)
둥근 식탁 한가운데 놓인 회전 유리판 위에 도기로 된 꼬마 인형들이 놓여 있었다.
"병정 인형들이군."
...
"정말 재미있군요! 이건 자장가에 나오는 열 꼬마 병정 같아요..."(p.48)
첫날 저녁식사를 마치고 모인 자리에서, 그들의 죄악이 축음기를 통해 울려 퍼진다. 곧이어 동요 가사에 맞추어 한 명씩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그때마다 병정 인형도 하나씩 줄어든다. 폭풍우가 몰려오고, 고립된 섬에서 서서히 조여오는 죽음의 그림자는 심리적 압박으로 서로를 의심하게 한다. 누군가 교묘히 법망을 피해 달아난 범죄자를 심판하고 있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1939년 발표작인데, 열 명의 등장인물과 열 개의 살인사건을 연결해서 하나의 이야기를 완성하는 구조, 죽음 앞에서 드러나는 인간 내면의 어두운 본성과 죄의식에 관한 묘사는 현대 미스터리의 원형이라고 불릴 만큼 치밀하고 섬세하다. 사법정의가 실현되지 못한 상황에서 숨은 자경단의 활약이나, 사적 심판(또는 광기 어린 집착과 왜곡된 정의감)의 윤리성은 고민해야 하겠지만, 권선징악의 메시지는 확실하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은 인간 심리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