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도 슈사쿠 단편 선집
엔도 슈사쿠 지음, 이평춘 옮김 / 어문학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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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도 슈사쿠, 이평춘 역, [엔도 슈사쿠 단편 선집], 어문학사, 2015.

Endo Shusaku, [KAGEBOSHI], 1968.

전설(?)의 작가를 만났다. 로마 가톨릭 신앙의 소설을 써서 일반 문학을 평정한 엔도 슈사쿠(1923~1996)는 미우라 아야코(1922~1999)와 함께 어렸을 때부터 끊임없이 들어온 이름이다. 일본 대중문화개방(1998~)이 이루어지지 않은 시절에 이미 그의 글과 어록을 인용하고 있었는데, 저작권하고 상관없이 번역했던 것인지 의문이다. 대표작으로 여기는 [침묵](홍성사, 2003.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 앤드류 가필드, 리암 니슨 주연의 영화 <사일런스> 2017. 원작)과 [깊은 강](민음사, 2007.)(두 권의 책은 1996년 작가가 별세하면서 도쿄 후추시에 있는 가톨릭 묘지에 안장할 때 유언대로 함께 관에 넣었다고...)을 가지고 있으면서, 도서관에서 빌린 단편 선집을 먼저 읽은 것은 (행운, 운명이라기보다) 어떤 인도하심이 있었다는 생각이다.

그림자

잡종견

6일간의 여행

노방초

나른한 봄날의 황혼

분장하는 남자

흙먼지

만약

[엔도 슈사쿠 단편 선집]은 8개의 단편으로 자전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유년 시절부터 성장 과정, 어머니와 스페인 선교사 신부의 영향, 죽음의 문턱을 오가는 투병 생활, 가톨릭 작가로서의 삶, 결혼 생활과 가족에 관해서... 자기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의 작품은 다신교 사회인 일본에서 일신교인 기독교 사상을 내세워 인간의 죄와 악의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룬다고 하는데, 여기에서는 그런 글이 탄생하게 된 배경... 가톨릭 신앙으로의 귀의, 반항과 방황의 삶, 죽음과의 사투, 죄악과의 투쟁 그리고 인간의 나약함과 신의 은총에 관해서 독백하고 있다.

나로서는 당신이 (나로서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지금까지보다 더욱 깊은 믿음으로, 더 큰 사랑을 위해 신학교를 버리고 한 여자를 선택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아니 지금이야말로 당신이 옛날보다도 강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그런 어린애 같은 유치한 공상은 깨지고 말았습니다.(p.56)

첫 번째와 마지막 단편 '그림자'와 '만약'은 연관성이 있다. 그의 인생에서 충격적인 배반 사건, 성직자의 환속, 신을 위해 일생 헌신하겠다고 서원한 신부와 수녀가 별 볼 일 없는 여자에게, 병약한 남자에게 빠져 교회에서 떠나는 것을 목격한다. 특히 스페인에서 온 선교사 신부는 30년 이상 신앙의 가르침으로 믿음의 토대를 이루는 데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인물이다. 분노와 처참함을 불러일으키는 감정, 그러면서 왜? 라는 의문은 평생의 화두가 되어 그의 작품에서 계속 등장한다. 신앙을 저버린 나약한 인간에 관해서, 더 나아가 배교의 수준으로 확장, 소설 [침묵]에서는 고통받는 이웃을 향한 신의 침묵에 절규하는 페레이라 신부와 로드리고 신부의 모습으로 투영된다.

이렇게 해서 당신과의 길고 긴 만남이 끝났습니다. 생각해 보면, 성애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병실로 찾아온 것이 첫 만남이었는데, 그동안 3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졸음이 왔던 당신의 이야기, 버려진 나의 개, 당신과 산길을 뛸 때의 고통, 기숙사에서의 사건, 어머니의 죽음, 그리고 가루이자와에서 버터를 내게 준 당신의 동상 걸린 손, 이러한 추억 하나하나가 내 인생의 강물 속에 소중히 가라앉아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남긴 흔적, 우리는 자신이 타인의 인생에 어떤 흔적을 남기며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마치 바람이 모래사장의 소나무 등을 휘게 하고 가지의 방향을 바꾸어 놓듯, 당신과 어머니는 다른 사람들은 물론. 나를 현재의 방향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당신은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습니다.(p.57-58)

'그림자'를 읽으면서 적잖이 놀랐다. 그동안 책을 읽으면서 다양한 삶을 보았고, 부분적으로 닮은 꼴이 있었지만, 내 삶의 전부를 고스란히 옮겨 놓은 것은 처음이다.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떠나 어머니와 둘이 살고, 기독교 신앙에 의존하고, 반듯하게 자라기를 강요받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반항의 세월, 건강의 문제... 그리고 나도 모르는 사이 나를 지배하는 믿음의 세계, 덫에 걸려 넘어지는 목회자를 수없이 보았고, 아버지와 연을 끊고 살면서 어쩌다 길에서 마주쳐도 못 본 척 지나치는 일 하나까지... 그리고 스페인 선교사 신부의 마지막 모습에서 나 역시 나약한 인간이고, 신의 은총을 간구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내가 소설만 쓰면 완벽히 일치하는 신비로운 경험이다.

지금도 내 소설에는 이따금 개나 새가 등장하는데, 그것은 단순한 장식이 아닙니다. 그때의 나에게는 다른 사람한테 털어놓을 수 없는 고독을 나눌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 바로 이 개였습니다. 지금도 슬픈 표정을 한, 눈물 고인 개의 눈을 보고 있으면 나는 왠지 그리스도의 눈이 생각납니다. 물론 그 그리스도는 모든 것에 자신감을 지니고 있던 이전의 당신과 같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짓밟히며 그 발 아래에서 묵묵히 인간을 바라보는 지친 후미에의 그리스도입니다.(p.23)

'잡종견'은,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개와 새는 나와 동행하는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어렸을 때 키우던 잡종 개는 고독한 그에게 유일하게 슬픔을 이야기할 수 있는 동반자였다.

"글쎄요. 어머니와 같은 생활 방식...... 부럽기는 하지만, 나로서는 도저히 따라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어째서?'

"한 사람을 행복하게 할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을 그만큼 상처 입히잖아요. 역시 나 같은 사람은 그것을 못 견뎌 할 거예요."(p.98-99)

'6일간의 여행'은 어머니의 흔적을 찾아 살던 집, 다니던 교회를 방문하는 이야기이다. 어머니는 누군가에게는 행복을,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상처를 주었다. 우리는 모두 타인의 인생에 흔적을 남기고, 영향을 주고 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말다툼이 또 시작된다. 아내에게 화를 내면서, 베이루트에서 그냥 비행기를 탔더라면 지금쯤 하네다에 도착했을 거라고 남편은 생각했다. 도쿄에 돌아가면, 또 여기저기 거래처에 인사하러 다니고, 연회에 참석하고, 일요일에는 접대 골프에 갈 것이다.

나무 한 그루에 표찰이 붙어 있는데, 여기는 유다가 목을 맨, 피의 밭이라고 쓰여 있다. 갑자기 어딘가의 라디오에서 재즈 음악이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p.133)

'노방초'는, 여행 중인 부부는 요르단에서 예루살렘으로 성지순례를 하는 중에 일상의 문제로 다툰다.

그는 퇴원한 후에도 한 달에 한 번은 의사에게 진찰을 받고 있다. 병원에 갈 때마다, 그는 다시 얻은 자유를 조심스레 되씹으면서 자신이 3년 동안 지냈던 4층을 살그머니 올라가 본다. 그러나 환자의 방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아직 입원해 있어야 하는 사람들에게 퇴원한 자신의 모습을 보여 상처를 입히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p.168)

'나른한 봄날의 황혼'과 '만약'은 투병으로 연결되어 있다. 폐결핵으로 3년간의 입원 생활은 본인의 괴로움은 물론이고 가정 경제의 어려움을 초래하기도 했었나 보다. 여성스러웠던 아내는 운전면허를 따고 그가 부탁한 무거운 책을 옮기며 강인한 아줌마가 되어 있었고, 목숨을 담보로 세 번째 수술을 가까스로 성공해서 병원에서 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순교자들이 있었고, 가족의 평범한 일상이 있다.

"나는 내 작품에서 여자에 대해 쓰지 않아. 아니, 쓰지 않는 게 아니고, 쓸 수 없는 거야."

"쓸 수 있게 된다면, 소설가로서 제 몫을 하는 셈이지."

"그런데 어떨까? 지금까지 소설 가운데 묘사해온 여자는 정말 여자인 걸까? 남자의 눈으로 본, 남자가 상상한 여자가 아닐까?"(p.207-208)

'분장하는 남자'는, 작가에게 있어서 병약함과 3년의 입원은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나 보다. 경험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분장 도구를 구매해 노인으로 변장하고 거리에 나선다. 또 여자로 변장해 보기도 하고... 그가 얼마나 죽음과 가까이 있었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나른한 봄날의 황혼'과 더불어 애잔함이 느껴진다.

불쾌하게 느껴졌던 흙먼지가 그렇게 싫게 느껴지지 않게 된 것은 그 이후부터였다. 창틀이나 툇마루에 쌓인 잿빛 먼지를 입으로 불면서, 그는 이것이 조각난 토기를 사용하던 고대인들의 삶의 흔적이라고 걸레질을 멈추며 생각에 잠긴다. 더러는 인생이 끝난 뒤, 그 위에 눈에 보이지 않는 먼지가 계속 쌓이고 쌓여 흔적도 남기지 않고 모든 것을 지워간다는 사실에 감동마저 느낀다.(p.224)

'흙먼지'는, 도쿄를 벗어난 주택가에 흙먼지가 날린다. 바람에 날리는 흙먼지는 과거의 세월을 포함해서 모든 것을 뒤덮는다.

나의 이러한 생활 태도는 가능한 한 다른 사람의 인생에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는 마음에서다. A라는 사람이 B라는 사람의 인생을 스쳐 갔기에, B의 인생이 다른 방향으로 휘어버리는 일이 있다. 나 때문에 다른 사람 인생의 방향이 바뀌는 경우가 그것이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왠지 모르게 두려워진다. 그리스도교 신자인 나는 이전에 그것을 '죄'라고 생각하여, 다른 사람의 인생에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 했다. 혹시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의 인생에 흔적을 남겨야 한다면, 그것은 내 가족만으로 족하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는 오늘날까지 파국을 겪는 사소설 작가들을 흉내 내지 못하는지 모른다.(p.249-250)

하지만 이 '만약'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결혼하여 지금껏 사는 것이다. 우리 인생에서 이 우연을 빚어내고 있는 존재는 도대체 무엇일까. 우연은 정말로 단순한 우연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p.252)

'만약'은, 등에 지퍼 자국 같은 수술 흔적을 남긴 치료자들은, 내가 왜 결핵에 걸렸을까? 를 질문한다. 전차나 영화관에서 우연히 옆에 앉은 사람 중에 결핵 환자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답을 듣는데, 여기서 만약이라는 가정을 하게 된다. 만약... 그 사람 옆에 앉지 않았더라면, 결핵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수술을 결정하지 않았더라면, 아버지하고 관계가 좋았더라면... 인생의 모든 부분에서 선택의 갈림길이 있었다. 무수한 경우의 수를 단순히 우연으로 여길 수 있겠지만, 배후에는 어떤 절대자가 있는 게 아니냐는 생각을 한다. 결혼의 배경과 소설가의 삶을 드러낸다.

책을 다 읽은 후에는 사소한 문장 하나하나가 되살아나는 진기한 경험을 한다. 단편 '그림자'는 인생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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