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가 되는 글쓰기 - 쓰기는 배움의 도구다
윌리엄 진서 지음, 서대경 옮김 / 유유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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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공부가 되는 글쓰기』, 너무나 정직한 제목이다. 심지어 부제는 ‘쓰기는 배움의 도구다’다. 정직하다는 것은 한편으로 사람을 혹하게 하는 거짓이 없다는 의미다. 슬프게도 이 못생긴 제목 때문에 나는 이 책을 오랫동안 읽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책을 읽으면서 황당했다. ‘뭐니, 너무 좋은 책이잖아.’ 
 
저자인 윌리엄 진서는 이 책이 ‘범교과적 글쓰기(writing across the curriculum)’를 소재로 한다고 서문에서 밝힌다. 즉, 국어나 문학 수업, 혹은 작가를 목적으로 하는 글쓰기 기회뿐이 아니라, 어떤 목적으로 하는 학문이어도 글쓰기가 탁월한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거다. 왜냐, 모든 글쓰기는 생각의 부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해 글쓰기가 즐거운 활동임을, 글쓰기와 생각하기, 배움이 함께 맞물려가는 통합과정임을 알려주는 게 이 책의 처음과 끝이다. 그래서 그가 제시한 것은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탁월한 글쓰기 사례. 이를 읽어봄으로써 읽는 이는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라며 글을 써보게 된다. 
 
나는 그런 글들을 찾아 나서는 작업, 즉 다양한 학문 영역에서 생산된 명료하고 뛰어난 글쓰기 사례를 수집해 한 권의 책에 담는 작업이 가능한지 고민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글쓰기 주제로 생각해 보지 않은 자기 전공에 대해 글을 써야 하는 상황에 놓인 교사와 학생을 위한 안내서, 적어도 글쓰기와 배움의 과정에 뒤따르는 두려움을 상당 부분 해소해 줄 책. 이런 책은 또한 좋은 글을 쓰는 원리가 어떤 주제의 글에서든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사실을, 가령 화학 분야의 잘 쓰인 글은 미술사 분야의 잘 쓰인 글과 동일한 글쓰기 원리를 따른다는 사실을 증명해 줄 것이다. 
 
우리가 그간 생각했던 좋은 글쓰기와 실제 좋은 글쓰기는 다르다. 우리는 문학적 스테레오타입에 갇혀 그와 닮지 않은 내 글쓰기를 미워한다. 내 생각을 추론 과정에 따라 명료하게 풀어나갈 수 있다면 그 글쓰기는 좋은 글쓰기다. 아름다운 느낌을 주지 않아도 된다. 내가 이 학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내가 오랫동안 사유한 내용의 전후 관계를 신나게 쓴다면 그걸로 이 글은 좋은 글이 된다. 
 
화가 파울 클레는 일찍이 제자들에게 “예술이란 직관의 날개를 단 정확성”이라고 말한 바 있다. 나는 이 말이 좋은 글쓰기의 정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창작 과정 중 찾아오는 별난 생각들에 기꺼이 놀랄 준비가 되어 있는 클레의 열린 태도를 좋아한다. 너무나 정확하여 차가워 보일 수 있는 그의 그림은 창작자의 유머와 난센스, 변덕을 통해 비로소 생기를 얻는다. 클레의 그림에서는 언제나 그림의 물질성을 뛰어넘는 인간애가 느껴진다. 특히 그의 그림이 담고 있는 모든 난센스가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 순간, 나는 한 화가뿐 아니라 한 인간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낀다. 
 
책은 크게 1부와 2부로 나뉜다. 1부의 내용은 쓰기가 어떻게 배움의 도구가 되는지 그 필요성을 서술하고, 2부에는 범교과적 글쓰기의 실제, 구체적인 예시를  미술, 수학, 화학, 물리학 등 교과별로 충실하게 담았다. 

특히 7장 《미술과 미술가들》 챕터는 내게 절망과 격려를 함께 안겨주었다. 훌륭한 예시 글들을 읽다 보면 어쩜 이렇게 훌륭한 표현력을 담고 있는지 감탄하느라 책장을 넘기지 못했고, 내 아둔한 글줄이 기억나 부끄럽기 그지없었다. 미술 글쓰기는 시각적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쓰는 이가 얼마나 많은 것을 보여줄 수 있는지를 인지하고, 읽는 이가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도록 촉매 지식을 전달해야 한다. 지식과 도전의식을 얼마나 매력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 것인가. 중요한 건 저자 자신의 성품, 기쁨, 매력이다. 
 
미술에 관한 글쓰기는 적어도 다음 두 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한다. 첫째, 독자가 그 글을 통해 ‘보는 법’을 배울 수 있어야 한다. 그림, 건축, 조각, 사진은 물론이고 우리가 일상 풍경에서 마주치는 온갖 시각적 요소들을 어떻게 보고 이해해야 하는지를 제시해야 하는 것이다. 둘째,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시각적 이해는 대단히 다양한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이런 측면에서 시각적 이해는 기본적으로 언어적 이해와 다르지 않다. 론 레인저와 그의 충직한 동반자 톤토가 사막 위에 나 있는 말발굽 자국을 보고 무법자들이 방금 이 길을 지나갔으며, 흰 털이 섞인 붉은 말 위에 기막히게 아름다운 금발 아가씨를 인질로 태웠고, 이 무법자들의 두목이 탄 말은 최근 편자를 갈았다고 결론 내릴 때 우리는 얼마간의 어지럽혀진 모래흙을 보고 그토록 많은 정보를 읽어 내는 그들의 능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론 레인저와 톤토가 피카소의 「게르니카」 앞에 선다면 과연 그 그림에서 어떤 걸 읽어 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림을 읽는 것은 또 다른 기술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활기 넘치는 문체, 사진처럼 명료한 이미지(가장자리가 솜털처럼 번져 있는 사출물, 크리스털처럼 투명한 화석)와 함께 내가 좋아하는 이 글의 특성은 바로 자신감이다. 이는 사진 작업의 창조적인 과정과 기술적인 과정을 모두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오랜 세월 지식을 쌓아 온 저자만이 보일 수 있는 당당함이다. 자기 견해를 토로하는 데 거침이 없고 단호하다. 여행 가이드 역할을 맡은 작가가 수줍음을 타서는 안 될 노릇이다. 우리는 카리스마 있는 가이드를 원한다. 훌륭한 음악 글쓰기가 좀 더 잘 들을 수 있도록 독자를 돕듯이, 훌륭한 미술 글쓰기는 좀 더 잘 볼 수 있도록 독자를 돕는다. 미술 글쓰기가 다루는 영역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만큼이나 넓다. 우리는 종종 눈앞에 직접 보여 주어야 무엇이 올바른지 이해한다. 
 
시각예술에 대한 글을 쓰고자 한다면 이런 언어 외적인 요소의 중요성을 기억하라. 미술 작품에는 거의 언제나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어떤 것이 있다. 예를 들어 기억과 상상력은 시각 정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글을 소개하는 이유는 단순히 작가가 탁월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 책이 전제하고 있는 한 가지 사실, 즉 과학과 인문학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 주는 글이기 때문이다. 미술 관련 글이지만 뛰어난 과학 글쓰기라 할 만하다. 명료하고, 생생하고, 유려하고, 우리가 경험에 비추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구체적인 사례들에 기초한 글이다 

각자 자신이 지극히도 사랑하는 무언가가 있다. 사랑하는 것 없는 인간은 없다, 하나쯤은 있다. 고양이 한 마리만 키워도 내 새끼가 제일 이쁜 법, 온 동네 SNS에 사진과 글로 도배를 한다. 사랑하면 자랑하고 싶다. 글쓰기는 내가 제일 사랑하는 학문을 여기저기 예쁘게 알려주는 일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학문을 공부하다 보면 쓰게 된다. 생각을 논리적으로 정리하는 과정에서 사랑은 깊어진다. 이를 명료하게 쓰다 보면 더 잘 알게 된다. 사랑하면 쓰게 된다. That's all. 이게 다다. 

뭐라도, 뭔가 하나라도 써야겠다, 더 사랑하기 위해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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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1 - 1부 1권 ㅣ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마로니에북스) 1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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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한 달에 한 번 도서모임을 함께하는 진숙은 『토지』를 매년 한 번씩 읽는다고 한다. 보통 봄바람이 불어오면 시작해 가을바람이 불어오면 마친다고. 아이 셋을 기르면서도 틈틈이 읽는 독서의 기쁨은 쏠쏠한데, 『토지』는 그 가운데 ‘이야기’의 즐거움을 매년 준다고 했다. 어린시절 동네 놀이터 인연으로 TV 드라마 《토지》의 아역 탤런트와 같이 놀았다. 연예인은 어려도 후광이 달랐다. 너덧 번 정도 만났을 뿐인데 뽀얀 얼굴과 새카만 눈동자가 너무 예뻐서 나는 주눅이 들었다. 귀티나는 얼굴이 오래 잊히지 않았다. 내게 《토지》가 특별히 기억에 남았다면 그것 때문일 것이다. ‘어린 최서희’를 눈앞에서 보았던 경험. 
 
《토지》는 1987년 KBS에서, 2004년 SBS에서 TV드라마로 두 차례 방영되었다. (이재은은 87년작에선 어린 최서희로, 2004년에는 서희의 몸종 봉순으로 등장한다. 완전 토지배우!)굳이 열심히 찾아본 드라마는 아니지만 틈틈이 보았던 한복 입은 최수지와 김현주의 얼굴은 인상적이었고, 중간중간 누구와 누가 결혼했다 정도만 기억에 남았다. 언젠가는 읽어야지 읽어야지 했던 스무 권의 책, 재작년에 기회가 되어 Ebook으로 마로니에북스에서 『토지』 전집을 구매하고도 영 들춰보기가 쉽지 않았다. 
 
이제는 더 늦출 수 없다고 생각했다, 새 Ebook리더기를 샀기 때문. 조심스레 『토지』 1권을 펼쳐 그 안에 든 것들을 들여다본다. 물론 이 책을 읽는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재작년 작년 모두 『토지』 몰입의 가장 큰 어려움은 1권에서도 헷갈리는 수많은 인물들이었으므로. 그렇다고 『토지 인물사전』을 먼저 훑어보기도 뭐하다. 인물과 인물의 구체적 성격을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단 읽으면서 흐름에 묻어가 보기로 한다.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름다운 것들, 진실이 손에 잡힐 것만 같았고 그것들을 위해 좀 더 일을 했으면 싶었다. 고뇌스러운 희망이었다. 글을 쓰지 않는 내 삶의 터전은 아무 곳에도 없었다. 목숨이 있는 이상 나는 또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고, 보름 만에 퇴원한 그날부터 가슴에 붕대를 감은 채 『토지』의 원고를 썼던 것이다. 백 매를 쓰고 나서 악착스런 내 자신에 나는 무서움을 느꼈다. 어찌하여 빙벽(氷壁)에 걸린 자일처럼 내 삶은 이토록 팽팽해야만 하는가. 가중되는 망상(妄想)의 무게 때문에 내 등은 이토록 휘어들어야 하는가. 나는 주술(呪術)에 걸린 죄인인가. 내게서 삶과 문학은 밀착되어 떨어질 줄 모르는, 징그러운 쌍두아(雙頭兒)였더란 말인가. 달리 할 일도 있었으련만, 다른 길을 갈 수도 있었으련만……
 
진실이 머문 강물 저켠을 향해 한 치도 헤어나갈 수 없는 허수아비의 언어, 그럼에도 언어에 사로잡혀 빠져날 수 없는 것은 그것만이 강을 건널 가능성을 지닌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나는 전율(戰慄) 없이 그 말을 되풀이할 수가 없다. 
(박경리, 『토지』 자서(自序), 1973년) 
 
개인적으로 1권에서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박경리(朴景利, 1926~2008)의 서문이라고 생각한다. 『토지』 책의 실물한 권의 두께는 보통이 아니다. 이런 책을 스무 권이나 썼다니 피를 쏟고 뼈를 갈아넣었으리라는 것은 당연한 수순. 글쓰는 이는 천형(天刑)을 얻었다는 말도 이에 있겠다. 1973년, 1993년, 2002년, 박경리의 서문은 한 줄 한줄 핏빛으로 아름다웠다. 나는 이 책을 읽을 것이다. 
 
토지 1권은 경남 하동의 평사리 마을, 몇 대째 지주인 최참판댁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동학혁명은 실패로 끝나고 그 가운데 참판댁 역시 상처를 입는다. 어린 최서희를 중심으로 함께하는 어린이들, 그리고 어른들의 얽히고 설킨 관계성. 이것만 지루하지 않게 읽어도 1권의 독서는 성공이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용이와 월선의 사랑이다. 현실에서 연결되지 않았지만 마음은 떨어지지 않는, 이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으로 말해야 하는가. 이것을 손쉽게 이루어지지 않아(끝을 보지 않아) 끝나지 않는 집착이라고 말한다면 이 사랑이 너무나 싸구려가 아닌가. 싸구려라고 하기에 용이와 월선은 서로를 배려한다. 서로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제일이다. 이루지 못해도 끝내 눈에 밟히는 사람, 그게 이 사랑의 힘이고 역량인 것 같다. 
 
얼굴을 바싹 들이대며 용이는 속삭이듯이 말했다. 
“니는 내 목구멍에 걸린 까시다. 우찌 그리 못 살았노. 못 살고 와 돌아왔노.” 
하다가 용이는 울었다. 월선이는 비실비실 도망치려 했다. 매를 치켜든 아버지 앞에서 달아나려는 계집아이처럼. 울음을 죽이려고 이를 악무는 용이 이빨 사이에서 괴상한 소리가 났다. 그는 월선의 손목을 낚아챘다. 손목을 끌고 방으로 들어온 용이는 갓을 벗어던지고 등잔불을 불어 껐다. 그리고 나머지 한 손으로 여자의 나머지 한 손을 꼭 잡고 방바닥에 주질러 앉는다. 
“어느 시 어느 때 니 생각 안 한 날이 없었다. 모두 다 내 죄다. 와 니는 원망이 없노!” 
끌어안아 여자 얼굴에 얼굴을 비벼댄다. 남녀의 눈물이 한 줄기가 되어 흘러내리고, 또한 그들의 몸도 하나가 되어 높이 높이 떠올라가서 영원히 풀어헤칠 수 없는 처절한 사랑의 의식을 올리는 것이었다. 
 
‘우찌 그리 못 살고 왔노, 용이가 그러데요. 우찌 그리 못 살고 왔겄소. 어매, 불쌍한 우리 어매. 팔자 치리 하고 살라 카더마는 내 신세가 어매 한세상맨치로 우찌 그리 똑같겄소. 짝도 없고 임자도 없고 어매 자식 어매 안 닮고 뉘 닮았겄느냐고 했더마는…… 너무 보고 접아서 왔소. 용이 사는 울타리라도 한분 보았이믄 싶어서 왔소. 어매, 날 미친년아, 기든년아 하겄지요? 나도 모르겄소. 보고 접아서 미치고 기들겄십디다*. 나도 모르겄소.’ 
 
용이하고 살 수 없다면 애꾸눈이건 절름발이이건 월선에게는 상관이 없었을 것이다. 누구를 따라가든지 그는 제 집 없는 뜨내기의 신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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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이충호 만화 삼국지 1 - 난세에 태어나다 ㅣ 황석영.이충호 만화 삼국지 1
황석영 지음, 이충호 그림, 김태관 각색 / 문학동네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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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판 『만화 삼국지』가 나왔다고 한다, 그것도 문학동네에서. 황석영의 글과 이충호의 그림이라는 이야기를 듣기도 전에 애니북스도 아니고 ‘문학동네’ 타이틀을 달고 나왔다는 데 무작정 신뢰가 갔다. 만화 전문 임프린트도 있는데 문학 전문 출판사 이름으로 ‘만화책’을 냈다는 건 그만큼 개정판 퀄리티에 자신이 있다는 이야기다. 안 읽어볼 수가 없다.
 
새로이 『만화 삼국지』가 나왔다는 이야기가 들 때 요코야마 미쓰테루의 『전략 삼국지』가 떠오르는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다. 물론 일대일로 비교할 수는 없다. 이충호의 15 권짜리 전집과 요코야마 미쓰테루의 60권짜리 대작은 디테일의 차이가 없을 수 없기 때문에. 다만 한때 만화가를 꿈꾸었던 전공자로써, 중학생 눈높이를 나름 알고 있는 직업인으로써 몇 마디를 얹자면 이번 삼국지는 꽤 괜찮다.
 
무엇보다 컬러다, 그림이 시원시원하다. 그림에 강약이 있어 한눈에 쏙 들어온다. 황석영의 글은 만화로 연출할 때 재구성할 터라 잘 모르겠지만 이충호의 그림은 요즘 애들 취향에 꼭 맞다. 이미 소년 만화에서 안정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작가를 섭외해 친밀한 작화를 제공한다. 소년 만화에서 필수적으로 등장하는 인체 과장법이 부자연스럽지 않다. 미안하지만 미쓰테루의 그림은 부자연스러운 왜곡과 부적절한 인체 표현이 무척 많았던 기억이 있다. 게다가 잔인한 표현도 있었다는 걸 숨길 수 없겠다. (좋은 말로 하면 지나치게 디테일이 뛰어났다.) 배경 처리도 부자연스러운 데가 없다. 물론 컴퓨터 그래픽 페인팅 덕이겠지만 정확한 원근법이다. 필요할 때마다 중간중간 나오는 지도는 이해에 편리하다. 만화만의 장점이다. 그리고 15권이면 딱 알맞다. 너무 권수가 많지 않아서도 맘에 든다.
 
술술 넘어간 컬러풀한 만화 페이지도 만족스러웠지만 기대하지 않았던 권말 부록이 압권이었다. 연표와 인물 스토리로 정리한 삼국지 이야기. 역시 비주얼 차트는 중요하다. 레이아웃도 단정하고 가독성과 판독성도 뛰어나다. 좋은 말인지 나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부록은 학습교재 같아서 공부하기에 딱 맞다. 이 말은 만화를 먼저 본 후, 정본 삼국지를 글로 읽기 적절하다는 말이다.
 
아, 세상이 점점 좋아진다. 국민학생 때 누런 이문열 삼국지를 꾸역꾸역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지도며 인물관계며 머리에 남는 게 별로 없었다. 특히 지도. 인물은 자꾸 뒤섞였고. 근데 이 만화는 이미지로 먼저 뇌리에 도장 찍으니 짱짱맨이다. 요즘 애들은 얼마나 좋은가. 이런데도 책을 안 읽는단 말인가! 학생용이지만 정말 탐나는 만화 삼국지다. 그러니 얘들아 책좀 읽어라 책좀. 책 좀 읽어라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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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노동 ㅣ 이반 일리치 전집
이반 일리치 지음, 노승영 옮김 / 사월의책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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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에 한 번 오는 2월 14일, 내게 그날은 사랑을 전하는 밸런타인데이가 아니라 쓰디쓴 공인인증서 갱신의 날이다. 내가 가장 ‘빡치는’ 그림자 노동이 그것, 발급받은 은행에서 갱신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거래하는 모든 은행마다 새롭게 인증서를 등록해야 한다. 매번 영문, 숫자, 특수기호를 조합해 더 까다롭게 바꾸라는 비밀번호 설정은 사람을 아주 미치게 한다. 한두 시간은 아무것도 아니다. 과장 좀 보태서 하루를 종일 인증서 바꾸는 데 사용해야 한다. 인격이 좀 수양된 줄 알았는데 이럴 때 보면 아직 멀었다. 분노로 가득 찬 미친 인간 하나가 눈이 시뻘건 채로 컴퓨터 모니터와 스마트폰을 노려보고 있다. 은행에서 신경 써야 할 보안 책임이 나란 인간에게 전이된다. 내가 추정하는 인증서 갱신 수당은 최하 5만 원이다. 
 
새로 문 여는 음식점 카페 모두 점원 대신 키오스크다. 내 손으로 화면을 터치하고 카드를 긁는 일은 익숙하다. 리터당 백몇십 원 싼 ‘셀프 주유소’는 키오스크의 원조다. 사실 나처럼 낯가리는 인간은 이쪽이 더 편하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들이 절감한 인건비가 내 상품 구입비에 제대로 적용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솔직히 같은 품목의 옆집과 별 차이 없이 비싸다. 물론 옆 가게가 내게 가격보다 과한 서비스를 해주었다고 하면 할 말 없지만. 그것도 그들의 그림자 노동일 테니. 
 
이반 일리치를 처음 만난 건 ‘교육사회학’ 갈등론적 접근 이론에서의 ‘탈학교론’이었다. ‘가장 급진적인 사상가’라거나 ‘지식의 저격수’라는 수식어를 지닌 학자라며 칭찬을 쏟아내시던 선생님의 제스처가 생생히다. 그는 사제 서품을 받은 가톨릭 신학자로서 12개 언어를 할 수 있었고 여러 학위가 있어 교수로도 일할 수 있었음에도 미국의 슬럼가에서 신부로 근무했다고 한다. 자기가 누릴 수 있는 달콤함을 포기한 이는 매력적이다. 『그림자 노동』(사월의 책, 2015)을 반갑게 맞이한 것은 무엇보다 저자 때문이었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그림자 경제’라는 새로운 현상에 대해 언급한다. 2장의 초반부에서 ‘그림자 가격’을, 본격적으로 그림자 노동을 다루는 5장에서 ‘그림자 노동’을 자세하게 설명한다. 그가 살았던 시기는 2차대전 이후 그 모든 것이 재건되어야만 했던 급진적 (새로운 산업화) 시기이며 한편 인류의 밑바닥이 얼마나 더러운지 실감할 수밖에 없었던 시기다. ‘화폐 거래 영역에 속하지 않으면서 산업화 이전 사회에서 찾아볼 수 없던 경제 형태’는 당시의 그에게 충격이었던 것이 틀림없다. ‘산업화 사회’의 문제는 보이지 않아서 대응할 수 없고, 보이지 않아서 더 잔인하다. 
 
일리치는 노동의 첫 모양새를 ‘자급자족 노동‧토박이 노동’이라 부른다. 이후 ‘임금 노동’이 등장했으며, 세 번째로 ‘그림자 노동’이 나타났다고 말한다. 총 다섯 장으로 이루어진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책 제목과 동명인 마지막 챕터이리라. 삶이 거대화되고 산업화되고 의무화될수록 많은 것들이 획일화된다. 선택의 여지가 사라진다. 이전에는 없었던 토박이말-모어, 일하는 남자-집안일하는 여자의 이분법이 등장한다. 자연히 유급노동과 무급노동의 개념도 등장한다. 기업이 이익을 극대화하려면 무급노동의 범위가 넓어져야 한다. 자연히 고객의 무급노동이 중요해진다. 이 개념이 가정 내로 적용된다. 여자의 가사노동이 그것이다. “임금노동을 하려면 발탁되어야 하지만 그림자 노동은 배정받는다.”(P.178) 
 
전업주부 아내에게 “집에서 노는 데 뭐가 힘들어?”라고 짜증 내는 남편의 이야기는 낯설지 않다. “집에서 노는 나는 왜 이렇게 바쁘지?”라고 자책하는 전업주부 이야기 역시 그렇다. 경제적 능력이 없어 이혼하지 못한다는 전업주부들 사연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돈을 받지 못하는 일은 가치 없는 일인가? 유럽 어디에서는 애 셋을 낳은 여자에게 연금도 준다는데. ‘아이 때문에’ 일을 떠넘기는 동료 때문에 부글부글 끓는 직장인 이야기가 바로 내 얘기다. 근데 그녀들이 정말 이기적이기만 한 걸까? 왜 그들의 overwork은 인정받지 못하는가. 혹은 왜 그렇게 overwork 해야 하는 걸까. 
 
그림자 노동의 성격을 파악하려면 두 가지 점에서 혼동을 피해야 한다. 첫째, 그림자 노동은 자급자족 활동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림자 노동은 사회적 자급자족이 아니라 공식 경제에 기여한다. 둘째, 그림자 노동은 저임금 노동이 아니라는 점이다. 무급의 그림자 노동은 임금 노동의 전제 조건이다. (중략) 나는 그림자 노동을 노예제나 임금 노동만이 아니라 강제 노동과도 다른 특이한 형태의 예속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P.177)
 
그림자 노동은 일종의 ‘서비스’다. 더 친절하게. 더 다감하게, 더 기분 좋게. 감정 노동뿐 아니라 육체노동으로도 이 서비스는 증가한다. 여기에 ‘자발적인’이 붙는다는 게 기가 막히는 포인트다. 이렇게 자발적으로 노동하게 만드는 것은 ‘그림자 노동 신비화’의 전략이다. 
 
첫째, 여성과 남성의 생물학적 분류로, 여성이 하는 일을 노동이 하는 일로 규정하는 것. 둘째, 그림자 노동을 사회적 재생산과 뒤섞어버리는 것. 셋째, 화폐시장 바깥에서 이뤄지는 온갖 행동에까지 그림자 가격을 매기는 것. 넷째, 여성주의자들의 관점 실수로, 보수의 유무 면에만 집중하는 것. (무익한 노동을 강요받고 있음을 간과하는 것) 다섯째, 산업적 존재 양식의 절반을 여성 노동으로 만들어버린 것.   
 
일리치는 이 그림자 노동의 신비화가 “경제적 통제를 위해 발명된 성을 가지고 여성 본연의 인격을 영원히 더럽히려는 시도”이며, “그림자 노동이야말로 근대의 가사 노동으로 대표되는 사회 현상을 가장 잘 가리키는 용어”(P.201)라고 주장한다. 일리치는 남성으로서 여성의 가사를 최초로 경제적 가시화한 최초의 인물이 아닐까. 그건 가부장(家父長)이 아닌 신부(神父)의 몸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걸까. 
 
 『그림자 노동』은 1981년에 출간되었다. 2018년의 오늘날, 더 이상 가사(家事)가 ‘그림자 노동’을 대표하지 않는다. 남녀노소 어디에나 그림자 노동이 강요되는 시대다. 물론 아직도 가사노동의 가치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지만. 그림자 노동은 나날이 거대한 괴물이 되어간다. 키오스크 조작법을 공들여 알려주는 점원이 언제 ‘키오스크 때문에’ 일자리를 잃을지 모른다. 일리치의 시대보다 더욱 잔인하다. 대가를 준다는 것은 가치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림자 노동이 늘어난다는 것은 가치를 덜어낸다는 것이다. 기계에게 금액을 지불하고 인간에게 줄 금액은 절감한다. 정녕 사피엔스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전에 대안을 찾을 수 있을까? 못내 우울하다.  

발전이 입히는 피해를 모면하는 것이 새로운 ‘만족’을 얻는 것보다 더 절실하게 추구하는 특권이 되었다. 출퇴근 시간대를 피해 통근할 수 있는 사람은 알고 보면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사람이고, 가정 분만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알고 보면 엘리트 학교를 나온 사람이며, 아플 때 의사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알고 보면 이미 희귀하고 특별한 정보를 가진 사람이다. 또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는 사람은 알고 보면 부자이거나 행운아이며, 허름한 집이나마 직접 지을 수 있는 사람 역시 진짜 가난한 이가 아니다. 오늘의 하층민은 후견인을 자처하는 이들이 제공하는 역생산성 꾸러미와 도움을 어쩔 수 없이 소비해야 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반면, 특권층은 그런 것들을 마음대로 거부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P.22)

나는 인간을 호모 에코노미쿠스로 보는 사회에 대하여 호모 아르티펙스 수브시스텐스(자급자족적 삶의 기술을 갖춘 인간)의 전통을 복원한 사회를 맞세운다. (P.25)

산업 노동의 무미건조한 역사는 이런 식으로 경제학의 사각지대를 없애왔따.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한 번도 중성적인 적이 없었다. 그것은 애초부터 비르 라보란스와 페미나 도메스티카 즉 ‘일하는 남자’와 ‘집안일하는 여자’ 커플로 창조되었고, 이로부터 호모 인두스트리알리스가 탄생했다. 완전 고용이라는 목표를 향해 발전해 온 사회치고 그림자 노동이 고용 노동과 나란히 성장하지 않는 곳이 없다. 그림자 노동은 여성이 더 우세할 수밖에 없는 활동을 깎아내리고 남성에게 유리한 활동을 높여주는, 전례 없이 효과적인 장치가 되었다. (P.45)

그러니 성장과 완전 고용이라는 목표를 여전히 포기하지 않는다면, 훈련받은 사람들을 금전적 보상 없이 일하게끔 만드는 경영방식이 ‘발전’의 최종 형태로 펼쳐질 것이다. 호모 인두스트리알리스는 이제 청바지 차림으로 경제의 성적 통합을 추구하고 있다. (P.46)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직자 계급이 자기들의 서비스를 인간의 본성적 필요로 정의하고, 이 서비스 상품을 영생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 요소로 둔갑시켰다는 점이다. (P.106)

내가 주제로 택한 것은 산업 경제의 가려진 측면, 더 구체적으로는 노동의 그림자 측면이다. 나는 지금 저임금 노동이나 실업이 아니라 ‘무급 노동’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산업경제의 고유한 특징인 무급 노동이야말로 내가 말하려는 주제다. 과거 대다수 사회에서는 남녀 할 것 없이 무급 활동을 통해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고 개선해 왔다. 필요한 것이 생기면 그 대부분을 가족 스스로 만들곤 했다. 하지만 이러한 자급자족 활동은 지금 내가 다루려는 주제가 아니다. 내 관심은 이와는 전혀 다른 무급 노동에 있다. 산업사회가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보완물로 요구하는 무급 노동이 그것이다. 이러한 무급의 봉사는 자급자족에 기여하지 않는다. 임금 노동이 그렇듯이 오히려 자급자족을 파괴할 뿐이다. 나는 임금 노동의 이런 보완물을 ‘그림자 노동’이라 부른다. (P.176)

오늘날 여성이 불구의 처지가 된 것은 경제적인 면에서 보수를 받지 못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자급자족의 측면에서도 무익한 노동을 강요받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 (P.196)

우리 사회는 ‘돌봄’이라는 미명 하에 피해자 스스로 억압의 조력자가 되게끔 강요한다. 도와주고 구제하고 해방시켜야 마땅할 사람들에게 고작 감성적 연민을 품을 때 이 사회는 평범한 행복을 느낀다. (P.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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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파친코 1~2 세트 - 전2권
이민진 지음, 이미정 옮김 / 문학사상 / 2018년 3월
평점 :
품절


사전 정보 없이 이민진의 『파친코』를 읽기로 했을 때 제일 처음 든 생각은 “제목이 이게 뭐람?”이었다. 『파친코』 1권을 펼쳐들었을 때 등장한 부산 영도의 인물들을 보고 들었던 생각은 “장애인 가족과 파친코랑 무슨 관련이지? ‘토지’처럼 지어야 하는 거 아닌가? (제목을 잘못 지은 거 아냐?)”였다. 어찌 되었든 술술 넘어가는 책장, 하룻밤만에 800페이지를 육박하는 소설을 뚝딱하고 고개를 드니 새벽 다섯 시였다. 『파친코』 최고의 장점은 잘 읽힌다는 것. 
 
소설의 흡입력은 쉬운 문장력에서 나온다. 감성 소설가나 에세이스트가 자랑하는 간질간질한 표현력이나 기억에 남을 만한 여구도 없이 문장은 단순하기 그지없다. 미국 공영방송 NPR과 뉴욕타임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 등 미국 대륙과 유럽 언론에서 큰 호평을 받았으며, 영국의 BBC는 ‘2017년에 꼭 읽어야 할 책 10권’ 중 하나로 『파친코』를 소개했다고 한다는데, 책뚜껑을 열면 내용은 의외로 투박하다. 펄 벅의 『대지』처럼 몇 대에 걸친 가족의 인생을 그렸다는데 솔직히 ‘제2의 제인 오스틴’이라는 작가에의 호평은 좀 부담스럽다. 
 
자이니치에 대한 간략한 지식이 있을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는 큰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할 것 같다. 그러나 자이니치의 삶을 전혀 모를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쉽고 절절하게 그들의 삶을 전달해버리는 빠르고 강력한 이야기가 되었을지도. 
 
자연스레 일본으로 넘어가게 되는 주인공의 상황 설명을 위해 장치된 앞부분의 촘촘한 인물 설정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불편함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인생을 망친 여자’와 그를 구해 일본으로 데려가는 ‘구원자 목사’의 모습은 자연스럽지만 불편했다. 너무나 진부하게 열여섯 순자는 인생을 망친다. 그녀를 임신시킨 가정이 있는 남자는 돌아오지 않는다. 순자가 간호해 폐병에서 살린 남자가 그녀를 구원한다. 여자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남자로 인해 인생을 망치고, 남자로 인해 인생을 구원받는다. 아무리 그 시절이 그랬다고 해도 다시금 읽기에는 불편하다. 
 
순자를 ‘구원’한 남자는 실제로 그녀를 ‘구원’하고자 한다. 그는 기독교 목사다. 자연스레 이야기에는 기독교 세계관뿐 아니라 기독교 용어와 성경의 말씀, 성경의 인물 이름을 딴 주인공이 계속 등장한다. 기독교 문화가 너무나 익숙한 나에게는 설정과 용어가 편안했고, 작가가 설정한 세계관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으나, 기독교 문화를 잘 모르고 싫어하는 사람들은 읽기가 꽤 불편했을 것이다. 
 
순자의 두 남자인 한수와 이삭은 너무나 극과 극을 달리는 인물이다. 세상의 모든 것이 자기 손에 있다고 믿으며 재빠른 머리로 돈을 긁어모으고 힘과 재력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능력자 한수, 세상의 모든 것에 집착하지 않으며 모든 고통을 받아들이고 희생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무능력한 이삭. 둘 다 각자의 방식으로 순자를 사랑한다. 순자 역시 각자를 깊이 사랑한다. 현실에서 이삭을 좋아할 나는 솔직히 한수의 사랑도 크고 깊었다고 생각한다. 
한편 남편 있는 경희를 향한 사랑을 견디지 못해 의외의 방식으로 자신을 불태워버린 창호. 창호를 사랑하지만 그를 포기하려고 애를 쓰는 경희의 사랑 역시 또 다른 차원에서 완성되었다고 생각한다. 
 
완연히 다른 기질을 가지고 태어난 순자의 아들 노아와 모자수(모세)는 처음부터 달리 살았고 다르게 살고자 했으나, 태생 자이니치라는 숙명은 ‘파친코’라는 공동의 무대로 둘을 데려간다. ‘그들처럼 살지 않고자’한 노아는 실패한다. 아무리 그렇게 살지 않으려 했어도 노아는 자이니치였다. 일찍이 파친코 매장에서 돈을 벌기 시작한 쾌활한 모자수는 승승장구한다. 모자수는 자이니치의 현실을 순순히 받아들여 욕심을 냈다. 두 사람은 모두 파친코에 발을 담그고 일본인인 체, 자이니치인 채 살아간다. 
 
어떻게 야쿠자를 옹호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어느 곳에서나 조직적인 범죄자였고 나쁜 짓을 일삼았다. 하지만 순자는 많은 조선인들이 다른 일자리가 없어서 그들 밑에서 일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정부와 좋은 회사들은 조선인들을 고용하지 않았다. 교육받은 조선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사람들은 모두 일을 해야 했다. 동네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일을 하지 않은 사람들보다 훨씬 더 친절하고 더 존경스러운 사람들이었다. (P.124)
 
이야기 후반부 노아의 선택을 생각한다. 연약하나 꿈 많은 한 인간에게 자이니치라는 굴레가 얼마나 끔찍한 한계였을지를 실감한다. 일본인의 신분을 버리고 다시 자이니치로 돌아가느니 다른 선택을 할 정도로 이 신분은 굴레였다. 작가는 이야기의 말미에 가까워지면서 노골적으로 의중을 드러낸다. 3세대인 모자수의 독백을, 순자와 노아와의 대화를 통해, 4세대인 솔로몬과 피비의 대화를 통해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건 명백히 드러난다. 왜 자이니치는 이렇게 불합리하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미국에서는 강꼬꾸징이니 조센징이라는 게 없었어. 왜 내가 남한 사람 아니면 북한 사람이 돼야 하는 거야? 이건 말도 안 돼! 난 시애틀에서 태어났어. 우리 부모님은 조선이 분단되지 않았을 때 미국으로 갔고.” 피비가 그날 하루 동안 편협한 대우를 받았던 일들 가운데 하나를 소리 높여 이야기했다. “왜 일본은 아직도 조선인 거주자들의 국적을 구분하려고 드는 거야? 자기 나라에서 4대째 살고 있는 조선인들을 말이야. 넌 여기서 태어났어. 외국인이 아니라고! 이건 완전 미친 짓이야. 네 아버지도 여기서 태어났는데 왜 너희 두 사람은 아직도 남한 여권을 가지고 다니는 거야? 정말 이상해.” (P.315) 
 
고등학교를 중퇴한 모자수도 영문학을 사랑하고 공부에 매진하여 와세다 대학으로 진학한 노아도 할 수 있는 것 똑같았다. 아, 미국 유학을 하고도 결국 파친코를 이어받을 수밖에 없었단 모자수의 아들 솔로몬도.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파친코뿐이었다. 잠시 쓰기를 멈추고 검색해보니 자산 1조 2000억의 일본 파친코 황제는 한국인이라고 한다. 그의 이름은 한창우, ‘경제대국’ 일본의 24위를 차지하는 거부다. 자이니치 기업 (주)마루한은 일본 파친코 대부분을 장악했다. 그의 이야기를 읽어보니 그 역시 일본에서 자이니치로서 성공할 수 있는 일이 파친코뿐이었다고 한다. 솔로몬의 말이 오버랩된다. “아버지는 폭력배가 아니에요. 나쁜 짓을 하지 않아요. 평범한 사업가죠. 세금을 모두 내고, 모든 일을 규칙대로 처리해요. 그런 사업을 불법적으로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버지는 한 치도 틀림없이 정확하게 일을 처리하고 도덕적인 분이에요. 파친코를 세 개 운영하고 있지만 그건… 아버지는 자기 것이 아닌 것은 아무것도 받지 않아요. 돈에도 크게 관심이 없어요. 많은 돈을 기부하고…”(P.327) 
 
삶은 왜 이다지도 길고 질긴가, ‘외국인’으로 분류되어 선거도 할 수 없고 공무원도 될 수 없는, 손발이 묶인 신분이 재일 한국인이다. 그들에게 삶은 꽃길이었던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럼에도 살아야 한다, 먹고살아야 한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밑바닥 허드렛일이거나 조직폭력배, 도박사업뿐이다. 그러니 방법이 없다. 굶거나 악착같이 돈을 벌거나. 이런, 파친코 업계 1위의 (주)마루한뿐만 아니라 업계 2위를 차지하는 (주)다이남 역시 한국계 파친코다. 
 
동양풍을 그린 건지 뭔지 뭘 표현하고 싶은지 모를 희한한 표지와 잊을만하면 툭툭 튀어나오는 오타는 책의 품위를 마구 떨어트린다. 나는 외형과 마감에 무척 민감한 인간이어서 좀 힘들었다. 앞서 말했듯 도입부의 종교성 역시 누군가에게 쉽지 않다. 물론 이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800페이지를 극복한다면 피부로 와닿는 재일 한국인의 슬픔과 한숨을 읽어낼 수 있을 것. 인간의 현실보다 더 강하고 극적인 것은 없다. 바람이 불면 풀이 눕는다. 세찬 바람이 불면 풀이 더 낮게 눕는다. 어떻게든 살아남는다. 그들은 바람처럼 강인하고 잡초처럼 우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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