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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노동 ㅣ 이반 일리치 전집
이반 일리치 지음, 노승영 옮김 / 사월의책 / 2015년 12월
평점 :
일 년에 한 번 오는 2월 14일, 내게 그날은 사랑을 전하는 밸런타인데이가 아니라 쓰디쓴 공인인증서 갱신의 날이다. 내가 가장 ‘빡치는’ 그림자 노동이 그것, 발급받은 은행에서 갱신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거래하는 모든 은행마다 새롭게 인증서를 등록해야 한다. 매번 영문, 숫자, 특수기호를 조합해 더 까다롭게 바꾸라는 비밀번호 설정은 사람을 아주 미치게 한다. 한두 시간은 아무것도 아니다. 과장 좀 보태서 하루를 종일 인증서 바꾸는 데 사용해야 한다. 인격이 좀 수양된 줄 알았는데 이럴 때 보면 아직 멀었다. 분노로 가득 찬 미친 인간 하나가 눈이 시뻘건 채로 컴퓨터 모니터와 스마트폰을 노려보고 있다. 은행에서 신경 써야 할 보안 책임이 나란 인간에게 전이된다. 내가 추정하는 인증서 갱신 수당은 최하 5만 원이다.
새로 문 여는 음식점 카페 모두 점원 대신 키오스크다. 내 손으로 화면을 터치하고 카드를 긁는 일은 익숙하다. 리터당 백몇십 원 싼 ‘셀프 주유소’는 키오스크의 원조다. 사실 나처럼 낯가리는 인간은 이쪽이 더 편하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들이 절감한 인건비가 내 상품 구입비에 제대로 적용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솔직히 같은 품목의 옆집과 별 차이 없이 비싸다. 물론 옆 가게가 내게 가격보다 과한 서비스를 해주었다고 하면 할 말 없지만. 그것도 그들의 그림자 노동일 테니.
이반 일리치를 처음 만난 건 ‘교육사회학’ 갈등론적 접근 이론에서의 ‘탈학교론’이었다. ‘가장 급진적인 사상가’라거나 ‘지식의 저격수’라는 수식어를 지닌 학자라며 칭찬을 쏟아내시던 선생님의 제스처가 생생히다. 그는 사제 서품을 받은 가톨릭 신학자로서 12개 언어를 할 수 있었고 여러 학위가 있어 교수로도 일할 수 있었음에도 미국의 슬럼가에서 신부로 근무했다고 한다. 자기가 누릴 수 있는 달콤함을 포기한 이는 매력적이다. 『그림자 노동』(사월의 책, 2015)을 반갑게 맞이한 것은 무엇보다 저자 때문이었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그림자 경제’라는 새로운 현상에 대해 언급한다. 2장의 초반부에서 ‘그림자 가격’을, 본격적으로 그림자 노동을 다루는 5장에서 ‘그림자 노동’을 자세하게 설명한다. 그가 살았던 시기는 2차대전 이후 그 모든 것이 재건되어야만 했던 급진적 (새로운 산업화) 시기이며 한편 인류의 밑바닥이 얼마나 더러운지 실감할 수밖에 없었던 시기다. ‘화폐 거래 영역에 속하지 않으면서 산업화 이전 사회에서 찾아볼 수 없던 경제 형태’는 당시의 그에게 충격이었던 것이 틀림없다. ‘산업화 사회’의 문제는 보이지 않아서 대응할 수 없고, 보이지 않아서 더 잔인하다.
일리치는 노동의 첫 모양새를 ‘자급자족 노동‧토박이 노동’이라 부른다. 이후 ‘임금 노동’이 등장했으며, 세 번째로 ‘그림자 노동’이 나타났다고 말한다. 총 다섯 장으로 이루어진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책 제목과 동명인 마지막 챕터이리라. 삶이 거대화되고 산업화되고 의무화될수록 많은 것들이 획일화된다. 선택의 여지가 사라진다. 이전에는 없었던 토박이말-모어, 일하는 남자-집안일하는 여자의 이분법이 등장한다. 자연히 유급노동과 무급노동의 개념도 등장한다. 기업이 이익을 극대화하려면 무급노동의 범위가 넓어져야 한다. 자연히 고객의 무급노동이 중요해진다. 이 개념이 가정 내로 적용된다. 여자의 가사노동이 그것이다. “임금노동을 하려면 발탁되어야 하지만 그림자 노동은 배정받는다.”(P.178)
전업주부 아내에게 “집에서 노는 데 뭐가 힘들어?”라고 짜증 내는 남편의 이야기는 낯설지 않다. “집에서 노는 나는 왜 이렇게 바쁘지?”라고 자책하는 전업주부 이야기 역시 그렇다. 경제적 능력이 없어 이혼하지 못한다는 전업주부들 사연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돈을 받지 못하는 일은 가치 없는 일인가? 유럽 어디에서는 애 셋을 낳은 여자에게 연금도 준다는데. ‘아이 때문에’ 일을 떠넘기는 동료 때문에 부글부글 끓는 직장인 이야기가 바로 내 얘기다. 근데 그녀들이 정말 이기적이기만 한 걸까? 왜 그들의 overwork은 인정받지 못하는가. 혹은 왜 그렇게 overwork 해야 하는 걸까.
그림자 노동의 성격을 파악하려면 두 가지 점에서 혼동을 피해야 한다. 첫째, 그림자 노동은 자급자족 활동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림자 노동은 사회적 자급자족이 아니라 공식 경제에 기여한다. 둘째, 그림자 노동은 저임금 노동이 아니라는 점이다. 무급의 그림자 노동은 임금 노동의 전제 조건이다. (중략) 나는 그림자 노동을 노예제나 임금 노동만이 아니라 강제 노동과도 다른 특이한 형태의 예속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P.177)
그림자 노동은 일종의 ‘서비스’다. 더 친절하게. 더 다감하게, 더 기분 좋게. 감정 노동뿐 아니라 육체노동으로도 이 서비스는 증가한다. 여기에 ‘자발적인’이 붙는다는 게 기가 막히는 포인트다. 이렇게 자발적으로 노동하게 만드는 것은 ‘그림자 노동 신비화’의 전략이다.
첫째, 여성과 남성의 생물학적 분류로, 여성이 하는 일을 노동이 하는 일로 규정하는 것. 둘째, 그림자 노동을 사회적 재생산과 뒤섞어버리는 것. 셋째, 화폐시장 바깥에서 이뤄지는 온갖 행동에까지 그림자 가격을 매기는 것. 넷째, 여성주의자들의 관점 실수로, 보수의 유무 면에만 집중하는 것. (무익한 노동을 강요받고 있음을 간과하는 것) 다섯째, 산업적 존재 양식의 절반을 여성 노동으로 만들어버린 것.
일리치는 이 그림자 노동의 신비화가 “경제적 통제를 위해 발명된 성을 가지고 여성 본연의 인격을 영원히 더럽히려는 시도”이며, “그림자 노동이야말로 근대의 가사 노동으로 대표되는 사회 현상을 가장 잘 가리키는 용어”(P.201)라고 주장한다. 일리치는 남성으로서 여성의 가사를 최초로 경제적 가시화한 최초의 인물이 아닐까. 그건 가부장(家父長)이 아닌 신부(神父)의 몸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걸까.
『그림자 노동』은 1981년에 출간되었다. 2018년의 오늘날, 더 이상 가사(家事)가 ‘그림자 노동’을 대표하지 않는다. 남녀노소 어디에나 그림자 노동이 강요되는 시대다. 물론 아직도 가사노동의 가치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지만. 그림자 노동은 나날이 거대한 괴물이 되어간다. 키오스크 조작법을 공들여 알려주는 점원이 언제 ‘키오스크 때문에’ 일자리를 잃을지 모른다. 일리치의 시대보다 더욱 잔인하다. 대가를 준다는 것은 가치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림자 노동이 늘어난다는 것은 가치를 덜어낸다는 것이다. 기계에게 금액을 지불하고 인간에게 줄 금액은 절감한다. 정녕 사피엔스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전에 대안을 찾을 수 있을까? 못내 우울하다.
발전이 입히는 피해를 모면하는 것이 새로운 ‘만족’을 얻는 것보다 더 절실하게 추구하는 특권이 되었다. 출퇴근 시간대를 피해 통근할 수 있는 사람은 알고 보면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사람이고, 가정 분만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알고 보면 엘리트 학교를 나온 사람이며, 아플 때 의사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알고 보면 이미 희귀하고 특별한 정보를 가진 사람이다. 또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는 사람은 알고 보면 부자이거나 행운아이며, 허름한 집이나마 직접 지을 수 있는 사람 역시 진짜 가난한 이가 아니다. 오늘의 하층민은 후견인을 자처하는 이들이 제공하는 역생산성 꾸러미와 도움을 어쩔 수 없이 소비해야 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반면, 특권층은 그런 것들을 마음대로 거부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P.22)
나는 인간을 호모 에코노미쿠스로 보는 사회에 대하여 호모 아르티펙스 수브시스텐스(자급자족적 삶의 기술을 갖춘 인간)의 전통을 복원한 사회를 맞세운다. (P.25)
산업 노동의 무미건조한 역사는 이런 식으로 경제학의 사각지대를 없애왔따.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한 번도 중성적인 적이 없었다. 그것은 애초부터 비르 라보란스와 페미나 도메스티카 즉 ‘일하는 남자’와 ‘집안일하는 여자’ 커플로 창조되었고, 이로부터 호모 인두스트리알리스가 탄생했다. 완전 고용이라는 목표를 향해 발전해 온 사회치고 그림자 노동이 고용 노동과 나란히 성장하지 않는 곳이 없다. 그림자 노동은 여성이 더 우세할 수밖에 없는 활동을 깎아내리고 남성에게 유리한 활동을 높여주는, 전례 없이 효과적인 장치가 되었다. (P.45)
그러니 성장과 완전 고용이라는 목표를 여전히 포기하지 않는다면, 훈련받은 사람들을 금전적 보상 없이 일하게끔 만드는 경영방식이 ‘발전’의 최종 형태로 펼쳐질 것이다. 호모 인두스트리알리스는 이제 청바지 차림으로 경제의 성적 통합을 추구하고 있다. (P.46)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직자 계급이 자기들의 서비스를 인간의 본성적 필요로 정의하고, 이 서비스 상품을 영생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 요소로 둔갑시켰다는 점이다. (P.106)
내가 주제로 택한 것은 산업 경제의 가려진 측면, 더 구체적으로는 노동의 그림자 측면이다. 나는 지금 저임금 노동이나 실업이 아니라 ‘무급 노동’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산업경제의 고유한 특징인 무급 노동이야말로 내가 말하려는 주제다. 과거 대다수 사회에서는 남녀 할 것 없이 무급 활동을 통해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고 개선해 왔다. 필요한 것이 생기면 그 대부분을 가족 스스로 만들곤 했다. 하지만 이러한 자급자족 활동은 지금 내가 다루려는 주제가 아니다. 내 관심은 이와는 전혀 다른 무급 노동에 있다. 산업사회가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보완물로 요구하는 무급 노동이 그것이다. 이러한 무급의 봉사는 자급자족에 기여하지 않는다. 임금 노동이 그렇듯이 오히려 자급자족을 파괴할 뿐이다. 나는 임금 노동의 이런 보완물을 ‘그림자 노동’이라 부른다. (P.176)
오늘날 여성이 불구의 처지가 된 것은 경제적인 면에서 보수를 받지 못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자급자족의 측면에서도 무익한 노동을 강요받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 (P.196)
우리 사회는 ‘돌봄’이라는 미명 하에 피해자 스스로 억압의 조력자가 되게끔 강요한다. 도와주고 구제하고 해방시켜야 마땅할 사람들에게 고작 감성적 연민을 품을 때 이 사회는 평범한 행복을 느낀다. (P.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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