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파친코 1~2 세트 - 전2권
이민진 지음, 이미정 옮김 / 문학사상 / 2018년 3월
평점 :
품절


사전 정보 없이 이민진의 파친코를 읽기로 했을 때 제일 처음 든 생각은 제목이 이게 뭐람?”이었다파친코』 1권을 펼쳐들었을 때 등장한 부산 영도의 인물들을 보고 들었던 생각은 장애인 가족과 파친코랑 무슨 관련이지? ‘토지처럼 지어야 하는 거 아닌가? (제목을 잘못 지은 거 아냐?)”였다어찌 되었든 술술 넘어가는 책장하룻밤만에 800페이지를 육박하는 소설을 뚝딱하고 고개를 드니 새벽 다섯 시였다파친코』 최고의 장점은 잘 읽힌다는 것
 
소설의 흡입력은 쉬운 문장력에서 나온다감성 소설가나 에세이스트가 자랑하는 간질간질한 표현력이나 기억에 남을 만한 여구도 없이 문장은 단순하기 그지없다미국 공영방송 NPR과 뉴욕타임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 등 미국 대륙과 유럽 언론에서 큰 호평을 받았으며영국의 BBC는 ‘2017년에 꼭 읽어야 할 책 10’ 중 하나로 파친코를 소개했다고 한다는데책뚜껑을 열면 내용은 의외로 투박하다펄 벅의 대지처럼 몇 대에 걸친 가족의 인생을 그렸다는데 솔직히 2의 제인 오스틴이라는 작가에의 호평은 좀 부담스럽다
 
자이니치에 대한 간략한 지식이 있을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는 큰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할 것 같다그러나 자이니치의 삶을 전혀 모를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쉽고 절절하게 그들의 삶을 전달해버리는 빠르고 강력한 이야기가 되었을지도
 
자연스레 일본으로 넘어가게 되는 주인공의 상황 설명을 위해 장치된 앞부분의 촘촘한 인물 설정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불편함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인생을 망친 여자와 그를 구해 일본으로 데려가는 구원자 목사의 모습은 자연스럽지만 불편했다너무나 진부하게 열여섯 순자는 인생을 망친다그녀를 임신시킨 가정이 있는 남자는 돌아오지 않는다순자가 간호해 폐병에서 살린 남자가 그녀를 구원한다여자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남자로 인해 인생을 망치고남자로 인해 인생을 구원받는다아무리 그 시절이 그랬다고 해도 다시금 읽기에는 불편하다
 
순자를 구원한 남자는 실제로 그녀를 구원하고자 한다그는 기독교 목사다자연스레 이야기에는 기독교 세계관뿐 아니라 기독교 용어와 성경의 말씀성경의 인물 이름을 딴 주인공이 계속 등장한다기독교 문화가 너무나 익숙한 나에게는 설정과 용어가 편안했고작가가 설정한 세계관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으나기독교 문화를 잘 모르고 싫어하는 사람들은 읽기가 꽤 불편했을 것이다
 
순자의 두 남자인 한수와 이삭은 너무나 극과 극을 달리는 인물이다세상의 모든 것이 자기 손에 있다고 믿으며 재빠른 머리로 돈을 긁어모으고 힘과 재력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능력자 한수세상의 모든 것에 집착하지 않으며 모든 고통을 받아들이고 희생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무능력한 이삭둘 다 각자의 방식으로 순자를 사랑한다순자 역시 각자를 깊이 사랑한다현실에서 이삭을 좋아할 나는 솔직히 한수의 사랑도 크고 깊었다고 생각한다
한편 남편 있는 경희를 향한 사랑을 견디지 못해 의외의 방식으로 자신을 불태워버린 창호창호를 사랑하지만 그를 포기하려고 애를 쓰는 경희의 사랑 역시 또 다른 차원에서 완성되었다고 생각한다
 
완연히 다른 기질을 가지고 태어난 순자의 아들 노아와 모자수(모세) 처음부터 달리 살았고 다르게 살고자 했으나태생 자이니치라는 숙명은 파친코라는 공동의 무대로 둘을 데려간다. ‘그들처럼 살지 않고자한 노아는 실패한다아무리 그렇게 살지 않으려 했어도 노아는 자이니치였다일찍이 파친코 매장에서 돈을 벌기 시작한 쾌활한 모자수는 승승장구한다모자수는 자이니치의 현실을 순순히 받아들여 욕심을 냈다두 사람은 모두 파친코에 발을 담그고 일본인인 체자이니치인 채 살아간다
 
어떻게 야쿠자를 옹호할 수 있겠는가그들은 어느 곳에서나 조직적인 범죄자였고 나쁜 짓을 일삼았다하지만 순자는 많은 조선인들이 다른 일자리가 없어서 그들 밑에서 일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정부와 좋은 회사들은 조선인들을 고용하지 않았다교육받은 조선인도 마찬가지였다그런 사람들은 모두 일을 해야 했다동네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일을 하지 않은 사람들보다 훨씬 더 친절하고 더 존경스러운 사람들이었다. (P.124)
 
이야기 후반부 노아의 선택을 생각한다연약하나 꿈 많은 한 인간에게 자이니치라는 굴레가 얼마나 끔찍한 한계였을지를 실감한다일본인의 신분을 버리고 다시 자이니치로 돌아가느니 다른 선택을 할 정도로 이 신분은 굴레였다작가는 이야기의 말미에 가까워지면서 노골적으로 의중을 드러낸다. 3세대인 모자수의 독백을순자와 노아와의 대화를 통해, 4세대인 솔로몬과 피비의 대화를 통해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건 명백히 드러난다왜 자이니치는 이렇게 불합리하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미국에서는 강꼬꾸징이니 조센징이라는 게 없었어왜 내가 남한 사람 아니면 북한 사람이 돼야 하는 거야이건 말도 안 돼난 시애틀에서 태어났어우리 부모님은 조선이 분단되지 않았을 때 미국으로 갔고.” 피비가 그날 하루 동안 편협한 대우를 받았던 일들 가운데 하나를 소리 높여 이야기했다. “왜 일본은 아직도 조선인 거주자들의 국적을 구분하려고 드는 거야자기 나라에서 4대째 살고 있는 조선인들을 말이야넌 여기서 태어났어외국인이 아니라고이건 완전 미친 짓이야네 아버지도 여기서 태어났는데 왜 너희 두 사람은 아직도 남한 여권을 가지고 다니는 거야정말 이상해.” (P.315) 
 
고등학교를 중퇴한 모자수도 영문학을 사랑하고 공부에 매진하여 와세다 대학으로 진학한 노아도 할 수 있는 것 똑같았다미국 유학을 하고도 결국 파친코를 이어받을 수밖에 없었단 모자수의 아들 솔로몬도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파친코뿐이었다잠시 쓰기를 멈추고 검색해보니 자산 1조 2000억의 일본 파친코 황제는 한국인이라고 한다그의 이름은 한창우, ‘경제대국’ 일본의 24위를 차지하는 거부다자이니치 기업 ()마루한은 일본 파친코 대부분을 장악했다그의 이야기를 읽어보니 그 역시 일본에서 자이니치로서 성공할 수 있는 일이 파친코뿐이었다고 한다솔로몬의 말이 오버랩된다아버지는 폭력배가 아니에요. 나쁜 짓을 하지 않아요평범한 사업가죠세금을 모두 내고모든 일을 규칙대로 처리해요그런 사업을 불법적으로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버지는 한 치도 틀림없이 정확하게 일을 처리하고 도덕적인 분이에요파친코를 세 개 운영하고 있지만 그건… 아버지는 자기 것이 아닌 것은 아무것도 받지 않아요돈에도 크게 관심이 없어요많은 돈을 기부하고”(P.327) 
 
삶은 왜 이다지도 길고 질긴가, ‘외국인으로 분류되어 선거도 할 수 없고 공무원도 될 수 없는손발이 묶인 신분이 재일 한국인이다그들에게 삶은 꽃길이었던 적이 한 번도 없다그럼에도 살아야 한다먹고살아야 한다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밑바닥 허드렛일이거나 조직폭력배도박사업뿐이다. 그러니 방법이 없다굶거나 악착같이 돈을 벌거나이런파친코 업계 1위의 (주)마루한뿐만 아니라 업계 2위를 차지하는 ()다이남 역시 한국계 파친코다
 
동양풍을 그린 건지 뭔지 뭘 표현하고 싶은지 모를 희한한 표지와 잊을만하면 툭툭 튀어나오는 오타는 책의 품위를 마구 떨어트린다나는 외형과 마감에 무척 민감한 인간이어서 좀 힘들었다앞서 말했듯 도입부의 종교성 역시 누군가에게 쉽지 않다물론 이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800페이지를 극복한다면 피부로 와닿는 재일 한국인의 슬픔과 한숨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인간의 현실보다 더 강하고 극적인 것은 없다. 바람이 불면 풀이 눕는다. 세찬 바람이 불면 풀이 더 낮게 눕는다. 어떻게든 살아남는다. 그들은 바람처럼 강인하고 잡초처럼 우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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